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20)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시간은 매우 따뜻했다. 서로 간 추억과 기억을 되짚어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 앞에 있는 그가 단순한 역사 속 배경 인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처한 상황이 독특한 만큼 나도 모르게 현실을 게임처럼 혹은 현실감 없이 받아들일 때가 있었는데 그런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나는 이들을 반드시 지켜낼 것이다. 반드시.
아버지와의 면담은 시종일관 훈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이번에도 열차를 타고 크림반도로 가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느냐?”
“이번에는 비테가 했던 말을 꼭 지키셔야 합니다. 속도도 좋지만 1시간 빨리 가시려다가 10년은 먼저 가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가슴 속에 새겨 놓으셔야 합니다, 아버지. 연세를 생각하시면 아버지가 빠른 속도에 집착하시는 모습은 인민들이 받아들이기에 조금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내가 너희들에게 회초리를 들지 않고 키운 게 잘못이었던 것 같구나. 오늘이야말로 올바른 훈육이 뭔지 너에게 알려주도록 하마. 여기 가만히 앉아있거라. 곧 돌아올 테니.”
…훈훈한 분위기였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빙자한 추억 나누기를 마친 후 매일같이 몰려오던 서류의 파도에 휩쓸리던 나에게 그 날이 찾아왔다.
“전하, 미사에 참석하실 시간입니다. 준비가 끝나시는 대로 말씀해주십시오.”
“알겠네, 곧 가도록 하지.”
지금까지 식전기도와 같은 간략한 예배만을 접했던 나에게 정식 미사는 미지의 존재였다. 오늘까지는 바쁜 일을 핑계로 주일에도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약속도 약속이거니와 차츰 나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보수파에게 내가 종교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참석해야 했다.
‘21세기에서는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는데 팔자에도 없는 독실한 신자 흉내를 내게 생겼군.’
종교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흥미를 가져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지루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시절 러시아 정교회의 미사 시간은 길기로 악명이 높은데 말이지. 그 시간이면 서류 한 뭉텅이는 물론이고 그 보고서를 올린 관료를 불러서 보완할 점까지 얘기할 수 있을 텐데.’
속으로 약간의 불만은 있었지만 많은 일을 거치면서 단련된 나의 연기실력은 독실한 신자 그 자체를 연기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또 러시아 황실이 참석하는 미사를 직접 본다는 점에서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소련 시대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훼손되기 이전의 정교회 성당들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번 미사는 성 이사악 성당에서 진행된다고 했지.’
아직까지 아버지가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건설을 시작한 그리스도 부활 성당이 완공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아쉽지만, 피의 구원 사원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성 이사악 성당 또한 성당의 돔을 100kg가 넘는 금으로 도금한 만큼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화려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무려 14,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를 자랑하는 성당이었지만 안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아무래도 황실 일가가 참석하는 미사인 만큼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을 엄격하게 통제해서인 듯했다.
성당에 들어가자 이미 나를 제외한 황실 일가들은 모두 도착한 이후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번 주일이 지나고 나면 크림반도로 휴가를 빙자한 요양을 떠나실 예정이었으므로 이번 미사는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함께 지내는 행사이기도 했다.
“오, 황태자 전하께서도 도착하셨군요. 그럼 모든 분들이 도착하신 것 같으니 미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도 지정된 자리에 서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렇다. 러시아 정교회 뿐만 아니라 정교회의 미사는 가톨릭처럼 신도들이 의자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도와 사제 모두 서서 진행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미사를 주관하는 주교의 인삿말을 시작으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영광스러운 러시아 제국의 지배자이시자 정당한 군주이신 알렉산드르 3세 폐하를 비롯한 로마노프 황가의 일원분들이 참석해주신 만큼 성 사도 야고보 성찬예배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까지 돌아가기는 글렀구만.’
나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번거로운 예식을 자랑하는 정교회 미사에 질렸지만 옆에 서있는 고작 14살밖에 되지 않은 동생 미하일도 엄숙한 표정으로 있는데 내가 지루하다는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는 7시간이 지난 후 내 다리는 살아있는 신체의 일부가 아닌 하나의 나무토막과도 같은 뻣뻣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이면 PT를 받은 이후의 다리처럼 고통을 호소함으로서 몸의 주인인 나에게 항의할 듯싶었다.
‘다음 미사부터는 이전에 입은 머리부상으로 인해 장시간 서 있는게 힘들다는 핑계라도 대야겠군.’
길디긴 미사가 종료된 후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돌아간 이후에도 나는 성당에 남아있었다. 종무원장과의 고백성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라면 성찬 예배에 참석하기 이전에 고백성사를 받았어야 하지만 황태자라는 나의 직위와 종무원장의 나와의 대화를 원하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게다가 이 성사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되는 이유도 존재했고.
욱신거리는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나에게 종무원장이 다가오면서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참석하신 미사라 그런지 다리가 뻐근하신 모양이군요.”
올해로 65세가 되는 종무원장이지만 그는 멀쩡해 보였다. 20대 후반에 불과한 내가 그보다 체력적인 면에서 떨어진다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했으므로 나는 짐짓 괜찮은 척했다.
“아무래도 작년 봄 겪은 일 이후로 건강이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다만 건강을 회복해 나가고 있는 상태이니 곧 괜찮아질 겁니다.”
“그것 참 다행입니다, 전하. 그렇다면 앞으로 매주 미사에 참석하신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될런지요?”
“…”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종무원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나에게 말했다.
“본래라면 성찬 예배 이전에 전하께서 고백성사를 하셔야 했던 것이 맞지만 오늘은 특별하게 지금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곳 이콘 앞으로 와주시겠습니까?”
가톨릭의 고해성사와는 다르게 정교회의 고백성사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물론 지금 이 성당 내에는 나와 종무원장를 제외하면 사람이 이미 다 나가고 없었지만.
내가 이콘 앞으로 다가와 종무원장과 나란히 서 있자 그는 고백성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준비 기도가 끝나자 종무원장은 나에게 죄의 고백을 권고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고백을 들으시러 이 자리에 보이지 않게 계십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씀하십시오. 당신은 제가 아닌 이 자리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주님과의 만남이라 할 수 있는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미뤄왔습니다.”
“어떤 일이었기에 주님과의 만남인 미사마저 미뤄야 했습니까?”
“이 땅에 주님이 말씀하신 자비와 영광을 널리 퍼트리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종무원장은 내가 대답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려는 시도는 마땅히 칭찬해야 하나 그 수단과 방법에 있어서는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행한 바가 그리스도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비상시국에는 비상조치를, 저 또한 양 떼를 이끌어야 하는 목자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몇몇 수단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겠지만 저는 그럼에도 당당하게 말하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식들을 지키기 위한 일들이었노라고.”
나의 말이 끝나자 성당 안에는 촛불이 타오르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가 내려앉았다. 나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마저 귓가에 크게 울리던 순간 종무원장이 무겁게 닫힌 입을 열었다.
“이 비천한 몸이 당신의 고백을 들었습니다만, 부당하고 죄 많은 나로서는 그대의 죄를 사해드릴 권능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나와의 언쟁을 이어나가기보다는 다음 만남에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다.
나 또한 그가 사죄경을 읊자 경건한 자세를 유지한 채 무릎을 꿇고 고백성사의 마지막을 기다렸다.
그가 내 머리 위에 올린 영대 위로 십자 성호를 그으며 서로 간의 입장을 확인하는 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다음부터는 죄를 짓지 말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가십시오, 전하.”
“오늘 있었던 의식과 관련된 대화는 나중에 다시 나눌 기회가 있을겁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직까지는 그와 본격적으로 충돌할 시간이 아니었기에 나는 이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가 내가 가진 사상에 대해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전제군주정인 러시아 제국의 특성상 나의 앞길을 적극적으로 막을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내가 그에 대한 적의를 아직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그의 마음속에서의 나의 이미지는 조금 엇나가고 있는 제자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했다.
언제든지 스승인 자신이 훈계하고 가르침을 내려주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올 순진한 소년,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순진하지도 소년이지도 않다는 것이었지만. 이런 그의 판단은 나중에 자신의 목을 조를 부메랑이 될 것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다음 미사도 참석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전하.”
미소지으며 나에게 말하는 종무원장을 보자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오늘은 정말이지 영성이 충만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서로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달랐다.
한 명은 자신의 계획이 제대로 들어갔다는 뜻의 미소였고 다른 한 명은 상대방이 이정도로 자신을 믿고 따른다고 착각함으로 인해 나오는 미소였다.
어느새 밤이 깊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다음 주일에 어떻게 하면 미사를 참석하지 않을지 최소한 도중에 어떤 방식으로 빠져나올지 고민했다.
‘다음 미사 때는 도중에 머리에 입었던 부상 때문에 어지럽다는 핑계를 대야겠어. 그리고 주치의에게 오래 서 있는 등의 무리를 하면 안된다는 진단을 내리라고 해야겠군.’
내일 아버지와 어머니를 환송하는 행사가 열리는 만큼 빨리 잠자리에 드는 게 나았지만 나는 잠들기 전 준비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영국의 여왕인 빅토리아가 자신의 외손녀들을 각별하게 여기는 건 유명하지.’
러시아 황실을 개인적으로 싫어했던 빅토리아 여왕이었지만 로마노프로 시집을 간 외손녀들과 이후에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만큼 그녀의 혈육에 대한 애정은 깊었다.
‘비록 입헌군주제에 이전보다 군주의 힘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여왕’이라는 위치 하나만으로도 가지는 영향력이 막대하지.’
나는 이미 러시아 황실의 일원이 된 엘리자베타 대공비를 통해 빅토리아 여왕에게 전해질 편지의 내용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편지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의 현재 생각과 그들의 이해관계가 합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본이 취할 행동에 대한 대응책이기도 하고.’
최소한 영국 의회의 옵션 테이블 위에 일본 외에 러시아라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각인시킬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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