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32)
알렉산드르 3세가 머무르고 있는 크림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리바디아는 러시아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모습과는 다른 어떤 의미로는 3월이라는 시간에 어울리는 기후를 보여주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직 한낮일 때도 쌀쌀한 바람과 기온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리바디아는 밤에는 영하 1도 정도로 기온이 낮아지는 것을 제외하면 낮이 되면 기온이 10도까지 올라갈 정도의 포근한 날씨를 보여주고 있었다.
러시아를 지배하는 로마노프 황가의 휴양지이기도 한 이 마을은 그들의 손님을 모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알렉산드르 2세가 1861년 황후에게 선물하기 위한 볼쇼이 궁전을 지은 후 봄과 가을마다 황실의 일원들을 맞이하던 이곳은 지난 보르키 열차사고 당시 알렉산드르 3세 일가가 사고 이전에 머무르던 장소이기도 했다.
황실의 휴양지라는 점을 제외하면 평범하게 평화로워 보이는 이 장소에 한 사내가 발을 내딛었다. 그는 마치 수도사처럼 차려입고 있었는데 어찌 보면 마치 몇몇 국가에서는 불행의 징조로 받아들여지는 까마귀로 보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포베도노스체프.
현재 러시아 제국 신민들의 생활 전반적인 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교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종무원장이었으며 사회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보수파의 우두머리였다.
1945년 2월 4일 세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초강대국들의 지도자들이 모였던 얄타 회담이 열리던 당시. 그들이 머물던 리바디아 궁전에 도착한 종무원장은 마음을 다잡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황태자 전하께서도 모스크바에 도착하셨겠군.’
그가 노구를 이끌고 이곳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의 권위를 빌려 자신들이 일구어 놓은 텃밭을 뒤엎으려 하는 천방지축 망나니를 제어하기 위함이었다.그것도 다름 아닌 그 아들에게 권한을 넘겨준 아버지를 설득함으로서 말이다.
‘전하께서 자리를 비운 지금 우리가 빠르게 움직인다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실 것이다.’
그동안은 황태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니콜라이가 모스크바와 툴라를 순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내린 과감한 결단이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의 도박은 매우 승률이 높은 상태였다.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주의자들에 의해 팔과 다리가 날아간 채로 죽어가던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알렉산드르 3세에게 그의 아들이 자신이 해놓은 정책들을 무작정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의심받을 정도로 바꿔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좋게 보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최근 전하가 임시법규를 폐기하려고 한다는 얘기까지 들려올 정도이니 이 사실을 폐하께 알려야만 한다.’
알렉산드르 3세가 만든 임시법규는 이름에 걸맞게 3년이라는 기한을 가진 말 그대로의 ‘임시법규’였지만 아직도 3년마다 갱신되며 러시아 제국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부분적인 계엄령 상태로 살아가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의 차르가 아버지 대에 만들어진 개혁적인 법률안인 로리스-멜리코프 법안을 폐기하고 다시금 반동정치로 돌아가기 위해 만든 임시법규의 초안을 만든 이는 다름 아닌 포베도노스체프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서서히 지워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황태자에게 순순히 머리 숙여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어린 시절 교육을 담당한 이로서의 자존심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황태자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굳은 신념의 발로였다.
‘법을 통해 수립된 질서, 사회구조가 변하지 않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과 신민들 간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 국가의 유일한 목적이다. 이를 저해하는 모든 요소들은 없어져야만 해. 그리고 이 목적을 가장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종교다.’
그의 신념에 따르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움직임은 그 자체로 죄악이었다. 심지어 그 움직임이 산업혁명이나 도시의 성장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자신만의 믿음을 가진 자가 그의 진정한 군주를 만나기 위한 발걸음을 옮겼다.
“오, 종무원장. 이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했겠소. 어쩐 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여기 리바디아까지 온 거요?”
오랜만에 만나는 알렉산드르 3세는 겉보기에는 이전과 별로 다른 게 없어 보였지만, 목소리나 안색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의 몸을 갉아 먹는 지병이 악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허허, 2선으로 물러나 이곳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는 내가 불편한 일이 있었겠소. 그저 황후와 그동안 못 보냈던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오.”
“그것 참 잘된 일이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폐하께서 휴가를 떠나실 때 자리를 내려놓고 한 명의 학자로 되돌아갈 걸 그랬습니다.”
“초반에는 이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생을 좀 했다오. 10년 동안 해왔던 습관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요새는 서류에 서명하는 법도 잊어버릴 정도라 오히려 걱정이오.”
알렉산드르 3세는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아들의 교육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던 신하와의 만남이 매우 기쁜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포베도노스체프는 슬슬 본론을 꺼낼 시간이라 생각했다.
차르가 보여주는 우호적인 분위기로 봐서는 자신의 움직임이 황태자의 것보다 빠르다고 생각되었으니까.
“폐하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더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다만, 제가 지금부터 드릴 말씀으로 인해 폐하의 신경과 마음을 헤치게 될까 걱정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다름이 아니라 최근 황태자 전하가 보여주시는 모습에 대해 걱정스러운 의견을 가진 귀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만드셨던 법률에 대한 수정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던 정책 기조에 대해서도 지나칠 정도로 급격한 방향 전환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
종무원장은 얼굴이 굳은 차르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난날 보여준 모습이 분명 황태자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은 맞으나 지금과 같이 폐하가 건재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차르의 자리에 오른 듯이 행동하고 있다는 내용과 이런 말을 입에 담기에는 조심스럽지만 아무래도 인민주의자들의 이론에 깊은 감명을 받으신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오자 차르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만 갔다.
알렉산드르 3세의 표정이 나빠져 갈수록 종무원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무래도 이 일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쉽게 마무리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해서 아무래도 폐하께서 전하가 현재 보이는 행보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과거 전하의 가르침을 맡았던 저만의 의견이 아니라 폐하와 의견을 같이했던 모든 귀족들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알렉산드르 3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차르는 그의 가장 충직한 신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이전까지의 세월을 되돌아보는 회한, 실망감, 분노 그리고 후회, 종무원장은 이런 감정의 발로가 자신이 너무나도 가볍고 빠르게 황태자에게 권력을 내어줬음을 자책함으로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포베도노스체프 신성종무원장.”
“예, 폐하.”
“그대와 나의 인연도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폐하.”
“그대도 알다시피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 교수로 재직하던 그대와 우리 로마노프 황가의 인연은 나뿐만이 아니라 내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그리고 자네가 신성종무원장이라는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 데에는 내 신임과 믿음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내 장남인 니콜라이 그 아이의 교육도 자네에게 일임할 정도였으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그런데 도대체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건가?”
기대와는 다른 말이 차르의 입에서 나오자 종무원장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어느샌가 한 장의 전문이 들려있었다.
“자네가 정말로 내 아들 니콜라이에게 고백성사를 주관해서 시행하였는가?”
알렉산드르 3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포베도노스체프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것을 느꼈다.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군. 사실 내 아들로부터 이 전문이 왔을 때도 나는 그대를 신뢰했네.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성직자격이 없는 이가 신성한 종교와 관련된 일을 행한다는 것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감히…감히! 내 아들이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 그런 짓을 해?”
“폐하, 그게 대체 무슨…”
“내 아들이 저 극동에서 입은 부상을 입은 채 예배에 참석했을 당시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7시간이 넘도록 서 있었건만. 자네는 그에 대한 보답을 이런 식으로 했단 말인가!”
알렉산드르 3세가 소리치며 자신에게 내던진 종이의 내용을 확인한 종무원장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해서 저는 머리에 입은 부상과 그로 인한 몸의 피로, 7시간 동안의 예배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다름 아닌 고백성사를 사제도 아닌 그를 통해 하느님에게 올리고 말았습니다. 저에게도 분명한 책임소재가 존재하는 일입니다만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고백합니다. 부디 이 못난 아들에게 마땅한 처벌을 내려주십시오.’
‘이건…이건 말도 안 된다!’
그곳에 적혀있는 내용을 확인한 포베도노스체프는 발작하듯 소리쳤다.
“폐하! 이게 아닙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입으로 말해보게. 정말로 내 아들에게 그대가 고백성사를 진행하지 않았는가?”
종무원장은 변명하려 했지만, 말이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비록 거짓이 섞여 있기는 해도 그가 황태자에게 자격도 없는 상태로 성사를 진행했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대답을 못하는 그를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은 어느새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이를 만난 모습이 아닌 인민주의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던 모습이었다. 마치 판결문을 읽어나가듯 단호한 어조로 황제는 말을 이었다.
“사실 그대가 오늘 이 자리에 왔을 때까지도 나는 자네를 믿고 있었네. 최소한 이 전문에 대한 해명은 하리라고 생각했지. 만약 그랬다면 나는 이 일을 묻어두려고 했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내 아들을 모함하고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한 행동은 너무나도 실망스럽군.”
“폐하…”
“듣기 싫네. 마음 같아서는 자네를 내가 직접 처벌하고 싶지만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내 아들이 자네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는 것이 더 낫겠지. 지금 당장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서 정당한 러시아 제국의 후계자가 내릴 형벌을 기다리도록.”
이 말과 함께 알렉산드르 3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굳어있는 종무원장을 뒤로한 채 응접실에서 나가버렸다.
사실 다른 나라였다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중세시대가 아닌 19세기 후반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러시아였다. 아직도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는 유사 중세국가라는 멸칭으로 불릴 정도인 곳, 그것이 이 사태를 결정짓는 전부였다.
게다가 평상시부터 종교에 대한 엄격한 자세를 유지했던 그가 이런 월권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을 정교회 사제단에서 알게 된다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사항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빠르게 전하를 만나야만 한다.’
아직은 이 문제를 아는 사람이 그와 황태자를 제외하면 알렉산드르 3세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기에 그는 허겁지겁 궁전을 나섰다.
이 모습을 알렉산드르 3세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사실 황태자로부터 온 전문은 2장이었다. 한 장은 방금 그가 종무원장에게 내던졌지만 다른 한 장에는 조금 다른 내용이 적혀있었다.
‘부디 할아버지와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께서 가지고 계셨던 이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버지.’
지난날 니콜라이에게서 형의 모습을 보았던 알렉산드르 3세는 이곳 리바디아 궁전으로 오면서 한가지 다짐을 했다. 비록 자신이 형도 아버지도 지켜내지 못했지만, 아들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주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점점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끼는 자신이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이었다.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건강에 자신이 있었던 알렉산드르 3세였지만 최근에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종종 떠올릴 정도였다. 그래서 더 과장되게 종무원장을 몰아붙였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찌 보면 내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일 수도 있겠구나, 아들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앞으로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알렉산드르 3세는 멀어져가는 종무원장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등을 돌렸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술이 필요할 듯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