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36)
“다만…”
나는 책상에 기대어 선 자세로 종무원장을 바라보았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사라진 뒤 170년이라는 세월 동안 러시아 정교회를 총괄한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라기엔 너무나도 왜소해보였다.
‘이런 사람에게 계속해서 휘둘렸었단 말인가.’
나는 속으로 원래 역사에서의 니콜라이를 떠올렸다. 저자의 왜곡된 민족주의와 권위의식에 매몰되어 결국 1905년 그날 잘못된 선택을 내렸던 황제를 생각하자니 안타까웠다.
어린 시절부터 받은 교육이 그런 내용인 데다가 주변에 있는 인물도 비슷한 이들밖에 없었으니 기본적인 사태파악도 하기 전에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차르의 자비를 바라던 이들에게 총탄으로 대답한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종무원장이 극동에 가서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정교회인들을 이끌기에는 현실적인 무리가 있을 것 같아 그대의 어깨 위에 있는 짐을 덜어주고자 내가 종무원장이 극동에 가 있는 동안 종무원장 업무를 도맡아 할 사람을 미리 준비해 놨으니 그에 대한 걱정은 안 하셔도 좋을 듯싶습니다.”
“대리인이라면 누구를 생각하시는지요.”
“그건 이 자리에서 밝힐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다만 종무원장만큼 신실하고 성실한 분이라는 것만은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근심은 거두시죠.”
“…알겠습니다, 전하.”
종무원장은 내가 당신은 알 필요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자 별다른 반항 없이 수긍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또 그대가 최근 가깝게 지낸 이들과 관련된 흥미로운 것들도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제가 요즘 불면증에 시달리느라 이야기를 듣지 못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잠자리에서 듣기 좋은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좀 알려준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종무원장의 입에서 나올 보수파 귀족들의 약점이나 치부들은 잠자리에 누운 어린이들이 들을 정도로 꿈과 희망에 가득 찬 내용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또는 지나치게 추잡해 자라나는 나라의 새싹들이 듣기에는 별로 좋지 않을 내용일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이미 다 큰 성인인 만큼 충분히 동심에 별다른 타격 없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국정을 돌보시느라 피곤하실 전하가 불면증에 시달리시면 안 되지요. 제가 아는 선에서 성심성의껏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종무원장은 이제 자신이 택할 길은 최대한 나에게 협력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듯 매우 협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진작 이렇게 나오셨으면 좀 좋아. 서로간에 얼굴 붉힐 일이나 피곤한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물론 권력이라는 존재가 혈육 간에도 칼과 총을 겨누게 만들 정도로 달콤한 것을 아는 만큼 나 또한 언제든지 권력을 다루는 것이 아닌 권력에 휘둘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갖는 것이 중요했다.
이렇게 협력적으로 나오는 사람에 대한 보상 또한 필요하지만 지금 당장 당근을 내미는 것은 좋지 않았다.
종무원장이 최대한 자신의 추락한 위치를 느끼고 그 처지를 타개할 동앗줄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때에 보상을 제시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은 그에게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건 종무원장께서 당연히 해주셔야 하는 일이지만 고맙군요. 덕분에 앞으로의 잠자리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책상에 기대고 있던 자세에서 벗어나 집무실 책상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계속해서 서있느라 힘들기도 했고 지금부터는 그와 눈높이를 맞춘 상태에서 얘기하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종무원장이 극동으로 떠날 날은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일주일 정도 후라고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칙령도 나와야 하고 그대도 최근 저택에서 자주 만나는 ‘사교모임’의 구성원들에게 알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교모임’의 장이 불가피한 사유로 멀리 출장을 가게 되어 앞으로는 모임이 열리기 힘들겠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극동으로 가기 전 보수파 귀족들에게 내 경고 메시지를 전하라는 소리였다. 내가 직접 그들에게 당신들의 약점을 지니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로 인해 중앙 권력에서 너무나도 손쉽게 물러난 그들의 리더가 말하는 것이 효과가 훨씬 더 클 것이 분명했으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그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이 그들에게 알려지는 일이 없도록 종무원장이 알아서 잘 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제 신뢰를 또다시 저버리는 일은 생기지 않겠죠?”
“물론입니다, 전하. 다시는 전하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오늘 만남은 이 정도로 마무리 지어도 되겠군요. 다음번에 만날 장소는 아마 기차역이 될 것 같은데 부디 그때까지 내가 한 말들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예.”
종무원장은 이내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인사한 뒤 집무실 문으로 다가가던 중 멈칫하더니 몸을 내 쪽으로 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뭐, 마지막으로 할 얘기가 있는 건가?
“전하, 제가 지금까지 많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만, 이번 한 번만 더 무례를 저지르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내 허락을 들은 종무원장은 심호흡을 하더니 무언가 결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이반 뇌제와 표트르 대제 둘 중 어느 길을 가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둘 다 러시아를 부강하게 만든 군주인 것이 분명했지만 받는 평가가 극명하게 다른 인물이기도 했다.
당대 백성들이 두렵다는 단어인 ‘그로즈니’를 붙여 부를 정도로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던 이반과 지금의 러시아를 만들었다는 평을 듣고 대제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의 인물이지만 그 이면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짓기 위해 수많은 농노들을 강제로 노동시켜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평가를 받게 만든 표트르.
둘 다 본받을 점도 닮지 말아야 할 점도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내 대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종무원장. 또 여느 사람들이라면 대답하기 어려워할지도 모르는 질문이겠습니다만 저의 대답은…”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니콜라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어한다는 것이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소?”
내 말투가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모르지만, 이 각오는 언제부턴가 내 마음속에 새겨진 문장이었다.
제2의 누군가로 불리는 것이 아닌 그저 니콜라이라는 내가 현재 머무르고 있는 몸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이 소망이 내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력이기도 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니콜라이 2세라는 호칭은 바꿀 수 없겠지만.’
속으로 작은 불평을 삼키며 나는 종무원장을 바라보았다.
내 대답을 들은 종무원장은 무언가 느낀 것이 있는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을 지금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셨습니까. 그런 것이었습니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 고개를 든 종무원장의 얼굴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밝아 보였다. 아니, 가진 권력을 다 잃고 추운 극동지방으로 쫓겨나는 사람의 얼굴이 왜 저런 거지?
나는 의문을 가졌지만, 얼굴은 근엄하게 유지한 상태로 고개를 든 종무원장의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을 마주 보았다.
“전하께서 가지고 계신 뜻, 부족한 저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앞으로 저로 인해 전하의 심기가 어지럽혀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전하라는 인물의 비록 어린 시절이었다고는 하나 교육을 맡아 행했던 것을 영원히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위엄찬 군주의 태도를 유지한 채로 그에게 대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 또한 비록 방향은 달랐다고는 하나 종무원장이 그동안 보여준 헌신과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 아니겠소?”
“맞습니다, 전하. 비록 저는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늦었지만 저와 같은 불행한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의 저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채 종무원장은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이내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앞으로 종무원장은 중앙 권력이라는 무대에서 내려가게 된 배우에 불과했으니까.
‘극동이라는 무대 뒤로 퇴장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해줄 일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잘 수행하겠지.’
만만하게 봤던 회담이었지만, 막상 끝나고 나니 순방의 피로와 더불어 당장이라도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을 만큼의 피곤함이 밀려왔다.
‘오늘은 이만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어.’
내일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업무를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
야심한 밤 종무원장의 긴급하게 모이라는 연락을 받은 귀족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분명 크림반도로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당당하기 그지없던 사람이었지만, 돌아온 뒤에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몰골이었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후로 이틀 동안 황태자와의 만남만을 희망하며 자신들에게 일이 어떻게 진행됐다는 말도 없었으면서 갑작스러운 모임 공지라니?
자존심이 상한 몇몇 이들은 참석을 거부할까라는 생각도 가졌지만, 아직까지는 보수파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종무원장의 권위를 생각하자 어느샌가 외출 채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을 앞에 두고 종무원장이 처음으로 한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조…종무원장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 멀리 떨어진 촌구석이나 다름없는 극동 지방으로 떠나신다니요?”
“맞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대체 폐하와 전하께 무슨 말씀을 들으신 겁니까?”
당황한 그들이 종무원장에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아우성쳤지만 포베도노스체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
“이 모든 게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과 오만의 대가이네. 부디 그대들은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게나. 그리고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서도 반대 의견을 표하기 이전 두 번, 세 번 거듭 생각을 해보기를 바라네. 이건 내 마지막 충고야. 나는 비록 늦었기에 이런 대가를 치루게 되었지만, 자네들은 전하가 만들어나가실 새로운 러시아에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길 바랄 뿐이네.”
귀족들로서는 아닌 밤에 홍두깨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종무원장급의 인물을 이렇게 만들 정도라면 자신들에게 닥칠 일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들 중 종무원장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계몽성 장관인 델랴료프는 특히 다른 사람의 일로만 생각 할 수 없었다.
“저에게도 말씀해주시지 못할 정도의 내용입니까?”
귀족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틈을 타 종무원장에게 귓속말로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이들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의문은 단 하나였다.
‘종무원장이 저 정도로 순순히 몰락할 정도라면 자신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저도 돌아가야겠군요.”
한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리에 모여있던 귀족들이 사라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들로서도 자신의 살길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적막함이 내려앉은 응접실에 홀로 남은 포베도노스체프만이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며 자리에 남아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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