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51)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52화
24장 도덕정치의 종말
“그래, 우리의 M.O.G(Murderer Of Gordon)¹총리께서 오셨군. 생각보다는 일찍 오셨구려?”
부름을 받고 버킹엄으로 온 글래드스턴이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싸늘하기 짝이 없는 빅토리아 여왕의 목소리였다.
사실 여왕과 총리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비밀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글래드스턴이 투표권을 확대해야 한다고 했을 때는 그의 주장을 들은 여왕이 격노했다는 표현이 나왔을 정도로 반대 의사를 강하게 표시했던 여왕이었지만, 디즈레일리가 글래드스턴이 주장했던 것보다 더 급진적으로 투표권을 확대했을 당시에는 별다른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여왕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미 마음을 굳히신 것 같군요.”
총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여왕의 곁에는 프림로즈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미 모든 이야기는 마무리가 된 후인 것 같았다.
프림로즈는 여왕 옆에 서 있는 자신을 총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비록 여왕의 제안과 자유당 내 제국주의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행동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선택은 자신의 정치적 은사인 글래드스턴의 등에 칼을 꼽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명예로운 대영제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로즈베리 가문의 백작을 계승한 그에게 수치심으로 다가왔다.
로즈베리 백작은 자신이 정치계에 투신했던 때를 회상했다.
당시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던 본인을 자신의 당으로 입당시키기 위해 양대 거물인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이 보냈던 러브콜을 회상하자니 죄책감이 더욱 커지는 것 같았다.
비록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맞았던 이는 제국주의적 행보를 펼치는 것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던 디즈레일리였지만, 고귀한 인품과 신념,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 나가는 글래드스턴의 모습에 매료되었던 프림로즈는 자유당에 입당하는 것을 선택했었다.
지금까지도 아일랜드 자치권 확대 법안으로 대표되는 글래드스턴의 정책 기조에 발을 맞춰왔던 그였지만, 그런 프림로즈에게도 이번에 러시아가 내민 제안은 너무나도 감미로운 속삭임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번 제안은 영국에게도 부담되는 재정 지출을 발생시키는 그레이트 게임을 종식 시키는 것과 동시에 짭짤한 부수입까지도 얻는 것이 가능한 기회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소외된 프랑스가 러시아에 항의를 할 수도 있지만, 그 문제는 영국인인 그가 고려할 바가 아니었다.
‘개인의 명예만을 쫓을 수는 없는 법. 대영제국을 더욱더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나의 선택을 배신자라 비난하더라도 기꺼이 그 모욕을 감내하겠다. 그들의 도덕심보다는 내 배은망덕함이 우리의 조국을 더욱더 위대하게 만들 테니까. 그리고 나를 비난하는 자들이 부강해진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할 수 있다.’
프림로즈가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있는 동안, 여왕은 냉랭한 눈으로 앞에 서 자신의 신하라 자칭하는 이를 바라보며, 범죄자에게 선고문을 읽어내려가는 판사와 같은 어투로 선언했다.
“이미 총리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도록 하지요. 글래드스턴 총리, 나는 그대가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원합니다. 당신의 후임자로는 여기 있는 로즈베리 백작이 적당하다는 것이 나와 그대가 속해 있는 자유당 의원들의 의견입니다.”
“폐하와 제 동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마땅히 물러나야겠지요. 다만, 현재 저희 자유당과 연립 중인 아일랜드 민족당도 같은 의견인지 여쭤보고 싶군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다행히 아일랜드 민족당도 여왕 폐하의 말씀에 동의한다는 의견을 밝혀왔습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저 또한 총리님이 지금까지 추진해 오신 웨일스어를 사용하는 교회 설립과 같은 아일랜드와 관련된 법안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똑같은 입장을 유지할 겁니다.”
“……그런가? 러시아에 대한 우리 동료들의 신뢰도가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군.”
“작년 보수당이 집권하고 있을 당시부터 러시아가 꾸준히 보여준 모습이라면 이번 제안도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 저희들의 판단입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실무진들이 보내오는 보고도 러시아가 표면적으로 나타내는 모습과 동일했으니까요. 심지어 현지 러시아 총독인 보리소비치 남작이 황태자가 너무 영국에게 유화적이라고 불평을 한다는 첩보가 있을 정도이었으니까요, 총리님.”
실제로는 지난 시절 니콜라이 황태자와 보리소비치 남작 간 이루어졌던 대화의 결과물이었지만, 그 내막까지 중앙아시아에 파견 나가 있는 영국의 요원들이 파악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이런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각지에서 들어오는 첩보와 보고서에 비추어 봤을 때, 작년부터 러시아가 내민 손을 당장 맞잡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더라도 손가락 정도는 맞닿아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당장 심심치 않게 벌어지던 불분명한 국경선 근처에서의 산발적인 충돌이 러시아가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한 시기 이후로는 일어나지 않은 데다가 러시아의 사주를 받은 마적 떼로 위장한 유목민들이 공격해오는 사례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리…… 총리라…… 아직은 나를 총리라 불러주는군.”
노회한 총리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프림로즈는 그의 눈을 피하며 애써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글래드스턴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 같았다.
마치 지금 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정당화하는 듯이.
“게다가 저희 당을 지지하는 노동자 계층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아들들이 총을 들고 피를 흘리며 침략할 필요도 없이 얻을 수 있는 돈을 왜 거부하느냐는 의견이 주였으니까요. 게다가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재정으로 노동개혁도 좀 더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미 82살이라는 나이의 글래드스턴은 어느샌가 자신의 나이에 맞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방금 자신의 집무실에서 이고르비치와 대화를 할 때만 하더라도 그가 가진 신념을 통해 누구도 82살의 노인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마치 파도가 할퀴고 간 대지처럼 순식간에 나이를 먹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라 여겼던 프림로즈마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자, 글래드스턴은 정치적 행보를 이어나갈 수 있는 의지와 열정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제자라고 할 수 있던 케번디시²를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암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장에 귀를 기울였던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하나가 글래드스턴이었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앞에서는 철저히 이해타산을 따지는 정치가인 것을 확인하자 이제는 자신이 살아오던 시대의 막이 내려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디즈레일리가 부러워질 줄이야.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은퇴할 걸 그랬군.’
노회한 정치가, 아니, 노인은 이제 자신의 뒤를 이어 총리로 취임할 프림로즈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평민인 자신과는 달리 프림로즈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적자였으며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본인과 다르게 그는 적극적인 제국주의자였으니까.
글래드스턴은 자신의 눈을 피하는, 그러나 그 눈빛에는 자신만만한 야망을 내고 있는 젊은이가 앞으로 혼란스러워질 세계에서 영국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능력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신이시여, 영국을 굽어살펴 주소서.’
그러나 품고 있는 생각이 어떻든 간에, 그는 이제 무대에서 내려갈 차례가 된 배우였다.
한평생을 대영제국에 헌신한 정치가는, 국가가 내린 은퇴명령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치볼드, 아니, 로즈베리 백작님. 당신이라면 능히 대영제국을 더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왕 폐하 부디 만수무강하소서.(Long Live The Queen)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나이다.”
글래드스턴은 자신의 후임자에게 마지막 덕담을 남기고 몸을 돌려 천천히 응접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평생을 헌신한 신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여왕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림로즈는 자기도 모르게 글래드스턴의 이름을 외칠 뻔했지만, 이어지는 여왕의 말에 자신이 방금 취임한 총리라는 자리에 맞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사안이 사안인 만큼 취임식은 나중에 하도록 합시다, 총리. 이제 러시아 대사보고 들어오라 전하게.”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이 사라진 문이 다시금 열리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이고르비치가 나타나자 프림로즈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물론 글래드스턴의 실각과 관련된 세부적인 내용이 버킹엄과 웨스트민스터 밖으로 새어나가는 일은 없겠지만, 앞으로 그가 귀족사회에서 짊어져야 할 은사를 배신한 제자라는 손가락질의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왕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요, 대사. 이런 식으로 얼굴을 마주 보게 된 것이 작년 이후 처음인 것 같구려. 그때는 솔즈베리 후작과 함께 만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습니다, 폐하. 그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다니요. 역시 대영제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릴 수 있는 배경에는 현명하신 여왕 폐하의 영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부는 그쯤 하면 되었소. 그건 그렇고 자네의 군주는 사적인 편지로 위장한 공적 문서를 보내는 걸 즐기는 모양이더군. 저번에도 그러하더니 이번에도 내 외손녀의 안부를 묻는 편지에 이런 제안을 써놓다니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조금 불쾌하군.”
빅토리아는 자신의 외손녀인 엘리자베트의 이름이 적힌 편지봉투를 들어 올렸다.
분명 겉보기에는 수신자와 발신자가 여왕과 대공비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평범한 손녀가 자신의 외할머니에게 보내는 안부편지로 보였다.
하지만 속에 적혀 있는 내용은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다만, 영국과 러시아 간의 사이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여왕은 대사의 능글스러운 말을 듣자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빅토리아 여왕이 자신이 느끼기에 불쾌하다는 개인적인 감정만으로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이런 식의 번거로운 방법을 걸쳐서 계속 소통하느냐 아니면 공식적인 외교 루트를 따라 이야기를 하느냐가 결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줬으면 좋겠군. 그대의 군주에게도 내가 이런 의사를 표명했다는 것을 전하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사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내심 미소 지었다.
여왕이 방금 한 말은 이번 조약을 계기로 영국과 러시아 간 동맹까진 아니더라도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니까.
‘전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이고르비치는 내심 그의 주군이 말한 내용이 그대로까진 아니더라도 큰 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영국과 러시아의 불편한 관계가 작년부터 황태자가 안배한 순서에 따라 일대 전환국면을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숙련된 외교관답게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유쾌한 어조로 자신의 앞에 있는 젊은 총리와 늙은 여왕을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자, 그러면 신성한 조약을 어기고 있는 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응징할지 토의할 수 있겠습니까?”
#작가의 말
M.O.G(Murderer Of Gordon)¹ : 글래드스턴의 별명이던 GOM(Grand Old Man)을 비꼬는 호칭입니다.
이집트에서 찰스 조지 고든이 마흐디군에게 사로잡혔을 당시 군사적 개입을 꺼리는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고든이 처형당하자 그의 반대파들이 글래드스턴이 고든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며 붙인 멸칭입니다.
케번디시² : 아일랜드 최고 서기로 임명된 후 아일랜드 극렬 민족주의자에 의해 살해된 인물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글래드스턴과 의견을 같이하던 아일랜드 문제에 있어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던 인물이었으며, 사실 그를 살해한 민족주의자도 케번디시를 살해하는 것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