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53)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54화
26장 몰려오는 먹구름
“미안하게 됐습니다, 총리.”
이토의 집무실로 온 영국의 전권 대사인 휴 프레이저는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그가 요청한 추가 차관 요청과 국채 매입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니, 단지 그것만이었다면 오히려 행복했을 것이다.
차관과 국채 모두 빚이라 할 수 있는 언젠가는 갚아야 하는 물건이었으니까.
차라리 이번 기회에 재정 건전성을 끌어올려야겠다는 정신승리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휴 프레이저가 자신이 데려온 통역을 통해 추가적으로 덧붙여 말한 내용을 전해 듣자 이토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결과 글래드스턴 총리 후임으로 취임한 프림로즈 총리와 대영제국의 여왕이신 빅토리아 폐하의 의견에 따라 귀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 체결된 교토조약에 명시되어 있는 사항들에 대한 정당한 이행과 그 과정에서의 부정행위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을 알리고자 합니다.”
마치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와중에 뜬금없이 길을 지나가던 사람에게서 ‘유감입니다만, 귀하의 어머니께서 방금 사망하셨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라는 얘기와 함께 사망증명서를 받아 들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프레이저가 말하는 내용이 일본이라는 나라는 열강 반열에 진입할 수 없게 되었다는 선고와 다름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토는 일본의 총리로서 나라에 대한 사망선고를 듣는 셈이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일본 측이나 러시아 측에서의 부정행위가 발생할 경우, 저희가 중재하는 협의회에서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며 이를 방지하기 위한 영국 측 감시 인원은 대사관과 야마테에 위치한 영국군 주둔지에서 파견할 것입니다. 또한…… 총리, 총리!”
간단히 말해서 러시아가 일본에서 돈을 가져가는 과정에 자신들도 한몫 끼게 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던 프레이저는 이토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마치 지금 벌어지는 일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는 양 멍하니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두 번이나 부른 후에야 이토의 눈에 초점이 잡히는 것을 확인한 프레이저는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다시 통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귀찮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총리,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얘기했던 내용을 이해했는지 묻고 싶군요.”
“예, 예?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겁니까?”
이토의 대답을 듣자 프레이저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물론 자신이 얘기하는 것이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충격적이고 믿기 힘든 내용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도 사람이었기에 이토가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일거리가 늘어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토조약 이행 과정을 감시하는 역할을 우리 대영제국이 맡게 되었다는 내용 말입니다.”
“아, 그거라면 듣고 있었습니다, 대사. 다만…….”
이토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제는 현실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었다.
방금 프레이저가 말한 내용대로라면 대일본제국이 앞으로 제국이라는 호칭을 유지하기 힘들어질 거라는 걱정은 사소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기껏 메이지 유신을 통해 막부를 몰아내고 세운 새로운 정부가 자신들을 더욱더 살기 힘들게 만들었다는 민중들의 분노가 자신들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민중의 손에 매달린 총리로 기록될 수도 있다는 현실이 이토를 조여왔다.
“다만, 대사가 말한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랬습니다, 미안하군요. 그런데 우리 일본은 이번 교토조약의 갱신과 관련해 러시아나 귀국으로부터 사전에 협의하자는 연락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토가 말한 대로 일본은 이번 일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분명히 교토조약의 당사자 중 하나였음에도 말이다.
물론 힘이 지배하는 19세기였기에 약소국의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시대였다.
그래도 일본의 의사 없이 결정된 불평등 조약의 갱신이라는 사실을 부각한다면 조만간 있을지도 모를 민중들의 분노를 자신들이 아닌 영국과 러시아로 돌릴 수 있다는 이토의 계산된 발언이었다.
“그에 관련해서는 러시아에서는 이미 귀국에 의사를 표명하라는 요구를 몇 차례나 했지만, 일본이 별다른 반대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저희가 말입니까?”
“그쪽에서 덧붙이기를 아마 귀국과 자신들이 사용하는 달력이 다르기에 발생한 일로 의심된다는 말을 하긴 했습니다만…….”
하지만 이런 최후의 발악을 예상했다는 듯이 이어지는 프레이저 대사의 말은 이토의 어이를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기껏해야 댄다는 핑계가 서로 간에 사용하는 달력이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이라는 것으로 발생하는 날짜 오차 때문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책임소재를 일본에 떠넘기는 러시아의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는, 이렇게 전하라는 얘기를 처음 들은 프레이저 대사의 폭소를 터뜨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자리에서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물론 이러한 핑계가 대등한 국가 간의 협정이었다면 통할 리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까지 국제사회에서 청나라가 받는 평가보다 더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 나라였고, 영국과 러시아는 열강 중에서도 세계 패권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나라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토의 얼굴에 점점 절망감이 서리는 것을 발견한 프레이저 대사는 미안하다는 어투로 덧붙였다.
“다만 추가적인 차관 제공은 어렵지만, 지금까지 제공되었던 차관들에 대한 상환 조건은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이 프림로즈 총리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또 당장 기한이 돌아온 차관들에 대해 상환하기 어렵다면 3달간의 여유 기간을 제공하겠다는 것이 저희 측 입장입니다.”
“그것참, 고맙군요.”
영국으로서도 일본이 당장 경제적 공황에 빠진다면 지금까지 투자한 금액을 회수할 수 없었기에 ‘팔은 부러뜨리는 데 동참하더라도 다리는 남겨주겠다’는 의사표명이었다.
이토도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기에 이런 자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태도로 비꼬고 싶었지만, 약소국의 설움으로 그런 충동을 마음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우선 통보는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이 이후로 제가 말하는 내용은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닌 제 개인적인 입장이라는 걸 밝히고 싶군요.”
프레이저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말을 오랫동안 하는 도중에 젖은 자신의 수염을 닦은 뒤, 눈앞에 있는 시대의 희생양에게 조언하기 시작했다.
“우리 영국이 귀국에 대한 태도를 바꾼 이유 중의 하나는 지금까지 일본이 보여준 모습에서 이런 투자를 계속하는 것에 투입 대비 산출이 제대로 나오겠냐는 의구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본이 단기간에 이 정도로 성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러시아 측에서 내민 화해의 손길을 뿌리치면서까지 귀국의 편을 들어줄 이유가 확실하냐면…… 글쎄요. 아마 저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친구들 중에도 그렇다고 말할 이가 적을 겁니다. 내기를 해도 좋아요.”
“그래서 대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뭡니까.”
“다시 말해 귀국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면 얼마든지 대영제국은 다른 태도를 보여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능한 사냥개는 사냥철이 시작되기도 전에 버려지지만 유능한 사냥개는 사냥철이 지나간 후로도 혈통을 유지시키기 위해 집에 모셔둘 테니까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면 총리. 새로 개정된 교토조약을 맺을 협정장에서 봅시다.”
말을 끝마친 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집무실 밖으로 사라지는 동안 이토는 프레이저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외교적인 수사에 걸맞지 않은 모욕적인 언사였지만, 변변한 항의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총리대신 각하, 이 일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은 자리에 있던 통역 겸 보좌관이 하는 말을 들은 이토는 실소가 나왔다.
회의? 대책이라니? 이 일에 대해 도대체 어떤 대책을 내놓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는 아직 일본제국의 총리대신이었으며 자신의 책무를 다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 회의를 소집해야지…….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정해야 하니까…….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한다면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나올지도 모르지…….”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총리였지만, 최근 들어 연이어 닥쳐온 악재로 인해 점점 더 기력을 잃어가는 이토를 보좌관은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보좌관이 내각회의 소집을 알리기 위해 집무실을 나가려 문을 연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말은 기운은 없었지만, 각오를 다진 목소리였다.
“그리고 관련 부서에 톈진 조약, 일조수호조규 등 지금까지 우리가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맺은 조약들과 관련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도 파악하라고 전하게. 모든 조약 항목마다 어떤 허점은 없는지 샅샅이 조사하라고 해. 이제 우리로서는 준비가 덜 됐지만 이런 방법밖에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보좌관이 대답과 함께 사라지자 이토는 자신의 몸을 의자에 기대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마테라스께서 우리를 버리시는 것인가.”
종교라는 존재에 대해 냉소적인 그였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어째서 사람들이 종교에 매달리는지 알 것 같았다.
의지할 것이 없는 인간이란 그처럼 고독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약하게 신만을 찾으며 울부짖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추하다고 손가락질당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몸부림을 치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만약 망한다 하더라도.’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이토의 눈빛이 음울하게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천천히 질식하는 것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는 것보다 화려하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 * *
영광스러운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아카시 모토지로¹는 최근 들어 자신이 선택한 길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을 위해 싸우는 첨병이라 할 수 있는 군인이었건만, 요즘 정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정복을 입고 전차를 타거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주변에서 보내져 오는 시선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언젠가는 그가 전차에 타려 하자, 운전사가 정복에 있는 장식과 단추가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온다는 이유로 탑승을 거부한 적도 있었을 지경이었다.
이는 비단 모토지로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화족인 그가 이 정도의 수모를 겪고 있는 와중에 그의 동기들이라고 해서 다른 상황일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의 동기 중 하나는 술에 취한 일반인이 자신의 멱살을 잡고 ‘쓸모도 없는 네놈들이 무기를 산답시고 사용하는 돈 때문에 자신들이 살기 힘들어진다’는 시비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털어놨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억울한 심정이었다. 사실 그들이 소속된 육군은 해군에 비해서는 투자를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섬나라라는 특성상 육군보다 해군에 투자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뒷배가 되어주던 영국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망할 해군 놈들 같으니라고. 우리 육군의 등 뒤에 숨어서 돈은 돈 대로 다 처먹고 욕은 우리가 먹도록 하는 비겁한 놈들.’
분명 그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 차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자신들의 국기처럼 욱일승천해야 할 일본과 본인의 미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아니, 언제부터라고 표현하기도 그렇지. 이 모든 건 작년 5월부터 꼬이기 시작했으니까.’
모토지로가 품고 있는 생각은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일본의 지식인들이라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너그러운 러시아의 황태자가 합작회사를 만드는 것 정도로 넘어가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 합작회사야말로 일본이 하늘이 아닌 심해로 가라앉도록 만들고 있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말 미치겠군.’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모토지로가 보기에 지금 시점에서 러시아와 일대일로 붙는다는 선택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발사하는 것보다 더 무모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는 선택지는 단 하나에 불과했다.
그나마 대등하게 겨뤄볼 수 있다는 판단이 드는 청나라나, 만만한 조선을 통해 지금의 불경기를 극복하는 방법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이런 생각을 가진 젊은 청년 장교들이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레 모임을 형성하게 되었고 모토지로 또한 그 모임에 소속된 이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이 모였을 때마다 불만을 토로하는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현재의 내각은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이런 비상시국이야말로 우리가 전면에 나서야 하는 시기가 아니겠는가? 나약한 정치가 대신 군인들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라…….’
물론 현재 내각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 조슈 번 출신의 인사들이었고 육군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같은 조슈 번이었기에 이러한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나지는 않고 있었지만, 모토지로가 보기에는 시간문제에 불과해 보였다.
“님의 시대는 천 대에 팔천 대에…….”
불황으로 인해 지나다니는 이 없이 쓸쓸한 거리에 모토지로가 읊조리는 기미가요만이 허공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작가의 말
아카시 모토지로¹ : 러일 전쟁 당시 전설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던 일본의 군인입니다.
단신으로 러시아 제국에 잠입한 그의 공작활동이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