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63)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64화
카를 베베르.
조선에 상주하는 러시아 영사의 이름이자 고종과 각별한 관계였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임기가 끝나고 다른 이가 영사로 부임할 거라는 연락을 받은 고종이 베베르의 유임을 요청하는 의사를 밝혔을 정도니 둘의 관계가 평범한 외교관과 다른 나라의 군주 사이라고 할 수는 없지.’
러시아 제국의 외무성이 카를 베베르가 러시아가 아닌 조선에 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여길 정도였으니까.
그런 사람의 손을 빌려 내 책상 위에 올라온 전문은 다름 아닌 고종의 친서였다.
지난번 일본에서의 사건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나에게 한번 조선에 들러달라는 의사를 밝혔을 때부터 고종이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행동할 줄은 몰랐는데. 조선의 정보력이 이 정도로 뛰어났단 말인가?’
홍콩 조약이 체결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에 나에게 접촉했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웠다.
아니, 어쩌면 조선의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난 것이 아닌 베베르가 귀띔해줬을 수도 있지만, 이런 행동력은 본받을 만하다고 느껴졌다.
친서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미안하지만, 지금 한창 농촌 개혁과 관련된 일을 하느라 바쁠 비테를 부르기로 했다.
지금 러시아에서 그만큼 극동지방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시베리아 횡단 철도 사업을 진행하면서 러시아 제국 제1의 극동 전문가가 된 비테는 이번 일을 논의하기에 최적의 인사였다.
‘그건 그렇고 고종이 대단하긴 한 것 같네. 자신의 권력과 이씨 왕가의 위치를 보전하기 위한 길이 어느 쪽인지 천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고종에 대한 짧은 상념을 마친 나는 시종에게 재무장관을 불러오란 명령을 내렸다.
* * *
“이것이 베베르 영사가 보냈다는 전문입니까, 전하? 이런 외교와 관련된 일이라면 저보다는 외무장관과 상의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만…….”
오랜만에 만난 비테는 얼굴에 서린 피곤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눈만은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구상한 정책이 곧 시행된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러시아 제국이 어떻게 변해갈지에 대한 기대감 덕분이겠지.
다만 이번 조선과 관련된 일은 그의 역작인 농촌 개혁 작업을 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가져가는 존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평상시라면 이에 대한 생각을 먼저 얘기했을 비테가 자신이 아닌 외무장관과 논의하는 게 낫지 않냐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물론 재무장관이 바쁘다는 것은 알지만, 이런 문제를 논의할 이로는 그대가 최고이지 않습니까? 이번에 시행될 미르 해체작업을 비롯한 개혁안이 시행된 이후에는 며칠 간의 휴가를 검토할 테니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군요.”
믿을 건 당신뿐이라는 뉘앙스로 비행기를 띄워주면서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할 말을 해주자 비테는 내가 내밀었던 전문을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정말이십니까?”
“뭐가 말입니까.”
“방금 말씀하신 내용 말입니다. 검토하시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지만, 나는 비테가 어떤 것을 확답받고 싶어 하는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 차르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요. 긍정적으로 검. 토.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비테는 내 확답을 듣자 안심한 듯 빠른 속도로 전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평상시의 그라면 내 말의 미묘한 단어를 잡아냈겠지만, 피곤함과 외교문서를 읽는다는 일을 동시에 하는 탓에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비테는 문서를 다 검토했는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도 행정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지금까지의 업무로 단련되었는지 10장 분량의 외교 전문을 읽는데 걸린 시간은 단 5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전문을 다 읽은 비테는 내 질문을 듣자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욕심과 이성 사이에서 잠깐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대단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만, 그만큼 현재 전하께서 취하시는 전략과 상반되는 내용이기도 하군요.”
온갖 미사여구가 들어가 있는 고종의 친서 내용을 간략하게 나타내자면, ‘러시아 코인을 타고 싶은데 주변에 있는 이들로 인해 타기가 어려우니 약간의 도움이 내려주셨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청일전쟁으로 인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원세개의 병력이 철수했다는 것은 우리가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있어 호재로 작용하는 요소입니다.”
청나라가 북방에 전개한 우리 병력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원세개의 군대를 이용한 탓에 현재 조선에 주둔 중인 외국 군대는 공사관들을 경호하기 위한 소수의 병력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친서에 담긴 요청을 그대로 따르기에는 영국이 걸리는군요.”
이번 홍콩 조약과 지난 교토 조약 개정안으로 영국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된 것은 사실이었다. 함께 사이좋게 돈을 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양국은 상호 불가침 조약도 맺지 않은, 비유하자면 그저께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던 두 명이 만만한 놈을 같이 털어먹으면서 ‘이놈 생각보다 마음이 통할지도?’라는 생각을 품은 상태나 다름없었다.
적보다는 가깝지만, 동맹보다는 먼 사이.
이런 상태에서 섣부르게 움직인다면 러시아에 대해 입고 있던 경계심이라는 갑옷을 벗고 있는 영국이 다시금 중무장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었다.
“게다가 친서의 내용에 따르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내부사정도 꽤 나 복잡한 모양인 것 같습니다.”
고종이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친서에는 여러 갈래로 갈라지려 하는 조정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청일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민영휘를 위시한 친청파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차츰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궤멸됐으며 굴욕적인 홍콩 조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각자 새로운 뒷배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 뒷배가 되어줄 사람들은 별생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였지만, 현시점에서 조선에 큰 관심을 보이는 열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는 있겠지만, 청나라나 일본에 비하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투자가치가 떨어졌으니까.
이는 나쁘게만 작용하는 일은 아니었다. 청나라나 일본이 열강들에 수탈당하는 사이 조선은 그 사이에 숨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게다가 조선이 원래 역사처럼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일은 없도록 할 예정이다. 친러 성향을 지닌 중립지대로서의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유지 시키는 게 가장 베스트이긴 한데.’
지난 조약에서도 우리는 조차지를 요구하는 등의 영토확대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러시아 하면 영토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위험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완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서에 따르면 폐하께서, 폐하라고 적혀 있군요. 실수인지 아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전하가 군사 고문단을 비롯한 아직도 천명을 잃어버린 청나라를 추종하는 이들의 닫힌 눈을 열게 해줄 도움을 주신다면 청나라가 아닌 러시아를 상국으로 여기겠다는 내용이 있는 건 흥미롭군요.”
그의 말대로 고종이 전한 친서에 담긴 내용은 만약 조선에 새어나간다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서양 오랑캐를 상국으로 섬기겠다니. 당장 최익현을 위시한 위정척사파들이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유는 정확히 알기 힘들었지만, 고종은 나름대로 필사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번 기회야말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일본이나 청나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동아줄이라 여기는 건지 이 정도로 노골적인 단어를 사용할 줄은 몰랐다.
물론 비테와 같은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보기에는 ‘상국’이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모르겠지만, 고종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나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베베르가 생각보다 고종을 더 잘 구워삶은 모양이군.’
“베베르 경이 저희의 예상보다 조선의 군주와 가까운 사이인 것 같습니다.”
비테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모양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이 정도의 러브콜을 보낼 정도라면 고종 스스로의 판단만으로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보다는 옆에서 부추기는 이가 있다는 게 더 말이 됐으니까.
“정리하자면 분명 조선의 왕이 보낸 친서는 매우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부담된다고 여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혼자 조선반도를 먹어치우는 것을 다른 나라들이 보고만 있지 않을 테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베베르 영사가 조선 군주와 매우 친밀한 모양이니 당장 행동을 취하는 것보다 조금 더 상황을 관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의 반발 외에도 현재 전하께서 준비하신 개혁안을 추진하는 것만으로도 한동안 바빠질 테니까요.”
비테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보였다.
조선이라는 물고기가 자진해서 그물로 들어오려 하는 만큼, 지금 당장 낚아 올리지 말고 그것보다는 낚싯대 수리와 같은 다른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말이었다.
한반도를 영향권 아래로 넣는다면 흔히 러시아의 염원이라 여겨지는 부동항을 확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도 나올 테지만, 사실 러시아 제국에게 부동항은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얻으려 노력할 존재가 아니었다.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으려 한다는 이미지는 그레이트 게임이 이루어지던 당시 러시아가 남하하는 모습을 본 영국이 러시아의 목적을 추론하는 와중에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비테가 그다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데는 이런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가정했을 시 다른 나라로부터 별다른 반발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마 영국이나 프랑스는 남만주 철도 사업에 자신들도 껴달라고 할 가능성이 큽니다. 독일의 경우에는 극동보다는 최근 바그다드 철도 부설권을 수주하는 데 관심이 집중된 만큼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외팔이 황제의 특성상 불만을 표시할 수도 있겠지만, 독일이 극동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전하, 설마 바로 받아들이실 생각이신 겁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고종의 요청을 받아들일지 묻자 비테는 순간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황태자가 굵직굵직한 일들이 산적해 있는 와중에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까지 부리려는 게 아닌가 싶겠지.
“물론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소한 영국과는 미리 얘기를 해야겠지요. 다만 이번 기회에 조선에서의 우리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확대하는 것은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별다른 반발 없이 말입니다.”
비테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다른 나라들의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재무장관에게 나는 답을 알려주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살고 있는 우리 국적을 취득한 조선인들을 이용하도록 합시다. 우리 정부 차원에서의 진출은 어려울지 몰라도 민간인들의 진출마저도 뭐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작가의 말
러시아 제국이 가장 집착했던 건 부동항보다는 콘스탄티노플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대가로 콘스탄티노플 일대를 약속받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공산혁명으로 그저 꿈으로 끝나고 맙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