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69)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70화
범인이 누군지는 짐작이 갔지만, 물증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접은 지 오래였다.
혐성질에 도가 튼 그들이 자신들의 꼬리가 잡힐 정도의 증거를 남겨놓았을 리 없었으니까.
아마 지금부터 조사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나오는 거라곤 인도에 사는 이슬람 신자의 명의로 된 유령회사나 순진하게 이슬람 형제를 돕는다는 것에 심취한 아무것도 모르는 말단밖에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 가족인데 너무하는군.’
가장 오래 즉위하고 있는 여왕인 빅토리아의 핏줄은 유럽 내에 있는 거의 모든 왕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로마노프 황가도 거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빅토리아 여왕이 러시아와 동토를 다스리는 자들을 싫어한다 해도.
비정한 할머니에 대해 가볍게 불평하며 나는 현재 상황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말이 중앙아시아지 사실상 그곳은 수많은 부족이 저마다의 풍습과 전통을 지켜가며 살아가는 인종과 종교의 용광로나 다름없는 지역이었다.
유목민, 반농반목, 정주민으로도 나눌 수 있었으며 소수의 시아파와 다수의 수니파로도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런 큰 분류가 아닌 부족이라는 소분류로 들어가면 설명하는 데 만 몇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괜히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해 분열 정책을 가장 먼저 실시한 게 아니지.’
다양하지만 구분되는 특성을 가진 이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집단별로 뭉치게 만들기도, 그 집단이 서로 충돌하게끔 만들기도 쉽다는 얘기였으니까.
다행히도 지난 시절 시행한 목화 재배를 통한 친러시아 성향을 지닌 부족들을 육성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모양이었다.
우리가 권장하는 대로 목화를 재배한 부족들이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배급 면에서도 이득을 보는 것을 본 다른 부족들에서도 총독부의 통제를 따르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에 비우호적이던 부족이 목화밭을 경작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모욕하다가 충돌을 하는 등의 사건도 발생했지만, 재판권을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압수한 뒤로 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이상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이런 식의 차별대우가 나중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한다면 나도 영국을 욕할 처지가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로 뭉친 저들의 저항을 맞닥뜨려야 했을 거다. 분열 정책을 통해 서로를 같은 지역에서 러시아에 핍박받으며 살아가는 동족이 아닌 경쟁자, 압제자를 향해 꼬리를 흔드는 개로 여기게끔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어.’
시간이 지나면 국가주의 연설에 영향을 받은 이들로 세대가 교체되며 자연스럽게 갈등이 어느 정도는 잦아들 거라는 기대도 있었기에 나는 애써 불편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비정한 말이었지만, 나에게 있어 도덕은 필수조건이 아니었으니까.
중앙아시아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동안 집무실에 들어온 분게는 내가 우울한 상념을 멈출 수 있게 해주었다.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전하. 상황은 어느 정도 전해 들었지만, 얼마나 심각한 겁니까?”
“지금은 조직적인 공격이나 반란으로 칭할 만큼의 움직임은 아니지만, 조만간 그렇게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직 중앙아시아 외의 지역에서 거주 중인 이슬람 교인들이 저들에게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고 있으나 상황이 더 심각해지고 장기화한다면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모르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중앙아시아뿐만 아니라 제국의 핵심 지역 내부에서 일어날 봉기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 할지 모릅니다.”
중앙아시아가 아닌 러시아 제국의 영토 내에서 살아가는 이슬람 교인들은 현재 자디디즘¹이라 일컬어지는 이슬람 개혁 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중앙아시아의 교인들에게는 이단으로 보였고 자디디즘 운동가들에게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보수적인 이들로 여겨졌다.
다행히도 서로 간에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덕분에 이와 관련해 러시아 내부에서 호응 운동이 일어나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번 사태가 길게 지속한다면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생각보다는 더 심각하군요. 그래서 전하께서는 어떤 방식을 취하실 생각이십니까?”
분게는 내 설명을 듣더니 이번 일이 개혁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러시아 제국이 자칫하면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돌부리라는 것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농촌 개혁을 하는 와중에 발생한 위기를 극복하느냐 아니면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지느냐에 따라 미르 해체 이후로도 예정된 개혁들이 줄줄이 좌초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이 자리에 분게를 부른 이유도 이와 관련이 되어 있었다.
“내가 직접 중앙아시아로 갈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장관 회의 의장인 당신을 부른 것도 그것 때문이고요.”
“전하!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게다가 전하께서 그동안 추진해 오신 개혁 정책이 막 걸음마를 뗀 상태에서의 출정이라니요.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겠지만, 만약에라도 전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동안 해온 일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겁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분게는 내 폭탄선언을 듣자 기겁하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는 전제정치의 약점과도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추진력 있는 군주가 즉위하고 있을 때는 빠른 속도로 별다른 반대 없이 개혁을 추진할 수 있지만, 그 군주가 사라진다면 뒤따라오는 후폭풍이 어마어마할 테니 말이다.
괜히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명군들이 죽은 후 나라가 급격하게 흔들린 사례가 많은 게 아닐 테니까.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지금은 작은 불씨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치한다면 들불을 삼킬 화마로 변하게 마련이지요. 알렉산드르 총독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기회에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통제력을 확고하게 할 기회입니다. 다시는 그 어떤 나라도 우리 영토에 이런 장난질을 하지 못하게끔 만들어야 할 테니까요. 이건 그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내가 한 말을 듣자 분게는 어느 정도 짐작 가는 것이 있는 듯했다.
그도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살아온 인물로서 방금 말한 장난질을 한 나라가 어느 곳인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전하께서는 이번 일에 대해 영국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하긴 너무 갑작스럽기는 했습니다. 지금껏 별다른 문제가 발생한 것도 아닌 데다가 중앙아시아 지역의 경제력도 발전하는 상태에서 이런 식의 움직임이라면…… 아무래도 전하의 짐작이 맞는 것 같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비테나 비슈넷그라스키가 아닌 당신을 부른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장관 회의 의장으로서 분게, 그대가 개혁 작업을 총괄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다시금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모시고 오는 방안도 생각해 봤지만, 장기간의 이동이 병세에 미칠 영향과 개혁 작업에 대한 아버지의 이해도 부족을 고려하면 이게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동안 중앙정치에서 멀어져 계시던 아버지에게 많은 짐을 짊어지게끔 할 수 없었으니까.
“다행히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별다른 소요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하는 만큼 위험성도 그다지 높지 않을 겁니다. 대동할 병력은 근위 연대 2개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원 역사에서 1898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졌던 안디잔 반란의 규모가 현지에서 주둔하던 1개 연대가 진압할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을 고려하면 근위 연대 2개는 과잉전력이라 할 수 있었지만, 나는 최대한 신중히 처리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개혁 작업 중인 재정에 최대한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투입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이었으니까.
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의 우즈베크, 키르기스스탄, 타지크, 투르크멘 지역에서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하니 불씨가 다른 지역으로 번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전하께서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다만 출정하시기 전 장관 회의에서 이와 관련된 사항을 논의하는 건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하의 신변에 만전을 기해야 할 테니까요.”
내가 알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분게는 한시라도 빨리 장관 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돌아보며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전하. 영국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는데 그에 대한 제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한 의문이었다. 러시아가 다른 나라가 때리는 데로 맞고만 있는 나약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에 대한 응징은 필요했다.
하지만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공식적인 대응을 하는 데는 부담이 존재한다는 점을 분게는 걱정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대응을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것도 저들의 방식대로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 *
“이런 젠장! 망할 보수당 놈들 같으니라고!”
웨스트민스터에서 돌아온 프림로즈는 거칠게 자리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방금까지 국회에서 페더스톤에서 벌어진 참사와 관련해 일방적으로 말로 두들겨 맞은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총리! 대답하십시오! 여왕 폐하의 신민인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데다가 발포까지 해 무려 14명이나 되는 희생자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겁니까? 이런 식의 강경 진압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상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던 자유당 내각에서 벌어진 이번 참사를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빌어먹을 놈들.”
분명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때 만해도 별다른 문제 없이 해결되리라 여겼던 페더스톤 광산 파업이었지만, 사태는 그의 예상과 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경찰력이 증원된 데다가 협상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페더스톤 지역의 노동조합은 날이 갈수록 폭력성을 보여주었고 결국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처음에는 물리적으로 해산시키려 했지만, 거친 환경에서 평생을 살아온 광부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궁지에 몰린 현장 지휘관이 발포 명령을 내려 무려 14명이나 되는 사망자와 십여 명의 부상자가 나온 페더스톤 참사가 벌어진 게 지난 4월이었다.
정권 탈환을 노리던 보수당은 이때다 싶었는지 연일 신문과 국회를 통해 프림로즈 내각을 공격했고, 자유당의 전통적인 지지층인 노동자들도 이에 경악하며 시위에 나서는 등 영국 내부의 사정은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내부의 문제는 이내 본토 외부에서 이루어지던 공작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프림로즈가 자신만만하게 추진하던 중앙아시아 작전에 대한 지원도 지난달부터 끊긴 상태였다.
작전에 사용될 자원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발안자인 프림로즈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레 관심에서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사망자는 14명이 아닌 13명이었다. 국무장관의 변명! 그의 손에 물든 피를 기억하라!’ 헤드라인 한번 요란하군.”
게다가 참사가 벌어진 직후 열린 청문회에서 아스퀴스 국무장관이 한 실언은 매일같이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일랜드 지방 관련 법안이 상원에서 부결되자 아일랜드 민족당은 이에 대한 책임이 프림로즈 내각과 자유당에 있다며 그에 대해 지지를 철회했다.
그로 인해 기껏 잠잠해져 가던 아일랜드의 민족주의 운동은 다시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여왕도 점차 프림로즈에게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으며 자유당 내에서도 그에 대한 불신임 투표가 진행될 예정이라는 소식마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페더스톤에서 발생한 파업은 진정된 상태였지만, 그가 느끼기에 이것은 끝이 아닌 시작으로 여겨졌다.
예전보다 폭력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노동조합이 늘어나고 있다는 첩보가 연일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염병할 러시아놈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뒤에는 러시아에서 망명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들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국경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검문을 통해 밀입국자들을 잡아내려 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신출귀몰함은 영국 경찰의 혀를 내두르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물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굳건한 상태의 영국에 이런 파업이 몇 번 더 일어난다고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테지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대영제국은, 왕의 목을 자른 경험이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으니까.
#작가의 말
자디디즘¹ :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 내에서 일어났던 이슬람 현대주의 운동입니다. 대표적인 운동가 중 하나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는 교육개혁을 통해 이슬람도 현대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종교교리에 의존하는 교육이 아니라 현대화된 과목을 배워야 한다고 말이죠. 물론 이외에도 자디디즘 내에 여러 계파가 존재하긴 했습니다.
원 역사에서 일어난 페더스톤 학살의 사망자는 2명입니다. 단 그때도 이와 관련된 청문회에서 당시 국무장관이던 아스퀴스는 작중 묘사된 것처럼 상대 의원의 질의에 사망자는 3명이 아니라 2명이었다는 대답을 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원 역사의 안디잔 봉기는 2,000명 정도의 규모였으며 당일 날 바로 진압되었습니다.
러시아군의 피해는 22명 사망 16명 부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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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