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86)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86화
1893년 11월경 런던 인근 모처 가뜩이나 해가 얼굴을 비추지 않는 영국이었지만, 겨울이 되자 짧아진 일조시간과 함께 하루 내내 어두운 하늘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래라면 해 대신 밤하늘을 비춰줄 달과 별도 구름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 날.
자신들을 지켜보는 하늘의 존재도 보이지 않지만, 이날 이 장소에 모인 이들은 누군가가 본인들을 감시라도 하는 양 바쁘지만, 조용히 소리를 죽이려 애쓰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빨리, 빨리!”
“조합장님, 이 서류는 어떻게 할까요!”
“챙기기 힘들 것 같은 서류는 전부 불태워버려! 명단이나 각 공장별 조합원 숫자가 기록된 문서도 저놈들 손에 들어가면 안 되는 물건이니 함께 처리하도록 하고.”
해가 짧아진 만큼 밤이 길어진 시기.
이 지역에 설치된 몇 안 되는 가스등에 밝혀진 불이 꺼져가는 새벽인 지금, 각자의 집이 아닌 사무실에 모여 바삐 움직이는 이들은 다름 아닌 노동조합원들이었다.
“분명 그날 시위대 안에 놈들이 심어놓은 스파이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상황이 돌변할 리가 없어요.”
“이미 지난 일인데 여기서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아, 거기 있는 서류는 챙겨야 할 물건이니 이리 주게.”
이 지역에 유일하게 설립된 노동조합의 간부진들이 낮도 아닌 새벽에 이리 바쁘게 움직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이렇게 시내 한복판에 당당하게 사무실을 내고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해서 내주던 식의 운영을 할 수 있게 해주었던 법적 허가가 어제부로 취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동당 놈들이건 보수당 놈들이건 둘 다 똑같습니다.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고요. 그저 선거 기간에만 우리에게 한 표를 달라며 굽신거릴 뿐 투표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닫고 공장주들의 편만 드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만 합니까?”
“우리도 보수당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어느 정도 예상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그 참사를 일으킨 노동당을 다시 뽑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나마 지난 시절 선거법 개혁으로 투표권을 확대해 준 보수당이었기에 약간의 희망을 가졌건만…….”
귀족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닌 솔즈베리 후작이 총리에 취임한 시점에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바쁘게 짐을 챙기는 조합장의 입맛은 씁쓸했다.
얼마 전 러-영 협상이 타결된 이후 사회 곳곳에 숨어든 러시아 망명객들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거리 검문이 강화되고, 국경을 드나드는 배에 대한 탐문이 심해질 때만 하더라도 그들이 이 정도로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거리에서의 불심검문 강화 이후 조합 소속 노동자들에 대한 감시 강화는 양반이었지. 사소한 범법 행위를 저지른 조합원들을 체포해 며칠씩이나 구치소에 잡아놓는 것을 보고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지난 시절 버킹엄궁 앞에서의 행진-이들은 그날의 시위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날’이라 부르고 있었다-이후로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개선과 고용 및 노동 환경에 대한 감시 강화를 약속한 보수당은 초기에는 자신들이 말한 사실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노동자들이 꿈과 희망에 부푼 것도 잠시, 언제부턴가 사회 혼란과 외세로부터의 개입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시작된 탄압은 그가 조합장으로 있는 노동조합의 설립 허가를 취소함으로써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우리 조합 배후에 외국의 지령을 받은 공작원이 있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취소 사유란 말인가. 여왕 폐하의 충실한 신민인 우리들에게 이런 누명을 씌우다니.’
비록 정부가 취하는 행동에 반대되는 의사를 몇 번 표명하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대영제국의 일원이자 여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몇몇 조합에서는 귀족들이 국회를 장악하고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이상에는 별로 달라지는 게 없으니 중대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으나, 그들은 그런 극단적인 주장과는 선을 긋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왕의 충실한 신민을 자부하는 만큼 설립 취소에 대한 항의 표시로 평화적인 시위를 계획한 그들이 행진을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사전에 짜놓은 대로 이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경찰 저지선과 맞닥뜨리자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저지선을 앞에 두고 별다른 충돌 없이 자신들의 구호만을 외치던 시위대였으나, 얼굴을 천으로 가린 몇몇 사내들이 어디선가 등장해 자극적인 선동 문구-‘권력의 개인 경찰들을 박살 내자!’, ‘형제들의 피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요구한다!’-를 외쳐대자 흥분한 시위대가 저지선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경찰들 또한 자신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그들을 향해 곤봉과 기마 돌진으로 화답했고 다행히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날 시위를 주관한 책임자인 조합장과 조합 간부들에게 체포령이 발령된 것이 바로 어제였다.
“스, 스미스 씨. 저의가 도울 것은 업습니카?”
서류 정리 및 경찰의 체포령을 피해 망명을 떠나기 위한 짐을 꾸리는 일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 조합장인 스미스의 귀에 어딘가 어색하고 어눌한 영어가 들려왔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바쁘게 움직이는 조합원들 사이로 주변의 눈치를 보며 서 있는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노동조합 허가 취소의 이유 중 하나가 된 이들이었기에 그들 일행에 쏟아지는 주변의 눈초리가 그다지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스미스는 그러한 태도야말로 자신들을 탄압하는 저들이 바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노동자들의 공통된 연대 앞에서의 국가와 민족은 우선순위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그가 가진 신념이었으니까.
“아, 체프니스키 씨. 괜찮습니다. 그보다 상황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군요. 다른 묵을 곳은 찾으셔야 할 텐데 쉽지 않으실 겁니다.”
“컥정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타. 저희들 때문에…….”
“여러분이 아니었더라도 저들은 무슨 핑계를 대서든 우리를 탄압했을 겁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자신의 앞에서 죄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러시아인들을 바라보는 스미스는, 이런 이들이 자신의 조합을 배후조종했다고 말하는 경찰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순박한 사람들이 어떻게 조합원들을 선동하고 폭력적인 시위를 하도록 유도했다는 말인가? 지난 시위만 하더라도 시위대를 선동한 것은 이들이 아닌 경찰에서 심어놓은 스파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러시아인들을 의심하는 것은 전 세계에 있는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경계하는 그들이 퍼뜨린 독을 집어삼키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서로를 의심하고 배척할수록 웃는 것은 저들일 게 분명하니 말이다.
상념에 잠긴 스미스의 귓가로 다시금 어색한 영어가 들려왔다.
“앞으로는 어떻케 하쉴 생각이십니까?”
“우선…….”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던 스미스였지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망명을 하는 데 필요한 물건과 저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서류들을 정리하던 조합원들이 자신들의 일을 끝마쳤으니까.
“조합장님!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것 같은데 이만 몸을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놈들이 아무리 엉덩이가 무겁다고는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요. 이건 미국으로 망명하실 때 필요한 것들을 모은 가방입니다.”
스미스를 비롯한 조합 간부들이 체포령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나라는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우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데다가 세계의 공장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곳인 만큼 노동자의 숫자도 어마어마했으니까.
비록 독립을 하겠다고 반란을 일으킨 자들의 후예가 살아가는 나라였지만, 이제 와서 그 당시의 케케묵은 원한을 꺼내 들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후였다.
어찌 보면 부당한 압제에 맞서 일어난 그들의 반란-저들은 독립 혁명이라 부르지만-이야말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말해주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노동 환경 개선이라는 스탠스에 있던 스미스가 이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 자체로 그들의 사상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아직은 이들 자신도 이러한 점을 실감하진 못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내 비록 저들의 마수를 피해 머나먼 땅 미국으로 몸을 피하지만,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대들과 다시 만나 얼싸안을 그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이제 그만 몸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를 비롯한 간부진을 잡지 못한 저들이 여러분을 가만 놔둘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뜨거운 포옹과 함께 언젠가 다시 만날 그 날을 다짐하는 그들이었지만, 고난이 지나간 후 다시금 해후할 날은 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쾅!
잠겨 있던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림과 동시에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눈 이들이 쏟아져 들어왔으니까.
“다들 꼼짝 마! 여왕 폐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사회 혼란과 전복을 노리는 반역자 놈들! 도주할 경우 즉시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이 내려왔다. 모두 머리에 손 올리고 벽을 향해 서도록!”
이런 상황을 대비해 거리를 감시하는 인원을 두었건만, 아무래도 저들에게 포섭을 당했든지 아니면 경고를 하기도 전에 그들부터 잡힌 모양이었다.
‘아니, 아니야. 이놈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리가 없어. 그렇다는 말은 정보가 어디선가 새어나갔다는 말인데.’
사방에서 총구가 겨누어진 상태에서 그들이 말한 대로 행동하는 스미스의 머릿속이 바삐 돌아갔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배신자가 있다? 아니야, 그렇다면 지난 시위에서 앞장서서 선동하던 스파이들이 그날 이전부터 조합 안에 잠입해 있던 건가? 그렇다기엔 아무도 그들이 누군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는데. 설마?’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저들이 장담한 대로 몸에 바람구멍이 몇 개 생길 판국이었기에 눈동자만을 굴려 주변 상황을 파악하던 스미스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하던 러시아인들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스미스에게 말을 걸고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설마 그들이? 도대체 어째서? 아니 어떻게?’
“이 새끼, 눈동자 굴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퍽!
스미스의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지시에 따르다 말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을 경찰들이 두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뒤통수에 가해진 충격에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스미스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것은 단 하나의 의문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아침이 되자, 새벽의 폭풍이 지나간 후 쑥대밭이 된 노동조합의 사무실이었지만, 새벽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동시다발적인 체포 작전으로 인해 지키는 경찰 한 명 없는 이곳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젠장, 조합장님마저 잡혀갔으니 우리는 이제 어쩌면 좋지?”
용케도 경찰들의 눈을 피했거나 운 좋게 체포목록에 들어가지 않은 조합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도 이곳에 모여봤자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때, 망연자실한 그들 앞으로 누군가 엉망이 된 책상 위로 뛰어오르자 그 인물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지 여러분.”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조합원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영어 발음은 투박했지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는 자연스러웠다.
“지난 새벽 우리는 불의의 일격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절망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짓밟으려 드는 저들이 바라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일어나야 합니다.”
그가 하는 연설은 절망에 빠진 조합원들이 다시금 자리를 털고 일어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고, 스미스 조합장이 자신에게 본인이 없는 동안 조합을 이끌어달라며 부탁했다고 말하는 사내의 말을 듣자 조합원들은 다시금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직 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당신 이름이 뭡니까?”
연설이 끝나갈 무렵 누군가 던진 질문을 듣자 사내가 대답한 이름은 스미스가 알고 있던 이름과는 달랐다.
“가폰, 가폰이라고 합니다, 동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