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93)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93화
게르 외무장관의 말을 들은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아니, 이제 와서? 그것도 올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돼서야 내게 접촉한다니.
여태껏 바뀌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외세에 접촉하려는 행동조차 하지 않던 것이 바로 조선의 상층부였다.
그리고 그렇게 현재 상태에 안주하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는 나 또한 이전까지의 전략을 바꿔 다른 방향을 취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뭐, 그래도 고종이 늦게나마 상황파악을 한 모양이라 다행이군.’
현실적인 한계로 당장 실현되지 않는 일들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운 나에게 모처럼 온 선물처럼 여겨졌다.
지금처럼 늦게 접촉을 시도한 이유가 여태까지 자신의 신하들과 어떤 식으로 러시아에 조건을 제안하는 게 좋겠냐는 논의를 하느라 그런 게 아니겠냐고 나 스스로 고종을 두둔해 주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막상 부푼 기대를 안고 살펴본 편지의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별 내용이 없었다.
[노서아의 차르께 인사를 올립니다. 평온하신지요. 혹시 이전에 저희 조선 땅의 근처를 지나실 때 제가 부디 시간이 되신다면 잠시 들러주십사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저에게는 그때가 엊그제 같건만 벌써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이런 문안 인사나 나에 대한 낯뜨거운 아부가 대부분인 말 그대로 속 빈 강정인 편지였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문단과 문단 사이에 숨겨진 메시지는 없는지 두 번 세 번 읽어보았지만, 정말로 별 내용이 없는 인사가 목적인 편지인 듯했다.
내가 아닌 외교 분야의 전문가인 게르 외무장관이라면 무언가 이 편지 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읽어내지 않았을까?
“외무장관, 외무부에서 판단하기에 이 편지에 표면적으로 적혀 있는 것과는 다른 내용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나요?”
하지만 게르는 내 질문을 받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람됩니다만, 저희 외무부에서도 그 편지를 몇 번이고 해석해 보았지만, 말 그대로 순수한 인사가 목적인 듯합니다. 아무래도 조선의 왕은 전하의 생각보다 더 대범한 모양인 것 같군요.”
와우.
그러니까, 지금껏 몇 개월이 되는 시간 동안 별다른 논의도 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이대로면 조금 위험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건가? 그 결과가 내게 보낸 이 안부 인사고?
만약 그렇다면 게르 외무장관이 말한 대로 고종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간을 가진 사람인 것이 확실했다.
일본과 청나라가 어떻게 박살이 나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음에도 조선은 다르다고 믿는 게 분명했으니까.
아니야. 혹시라도 처음부터 내게 제안을 하기에 부담스러워 이런 방법을 택한 것은 아닐까? 그래도 고종 정도면 자기 자리에 대한 위험만큼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릴 텐데.
비록 일본과 청나라가 반쯤 죽어 나간 관계로 그 둘로부터의 압박이나 수탈은 겪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그만큼 민씨 일가가 민중들을 쥐어 짜낼 것이 분명했다.
그로 인한 동학농민운동이 아니더라도 농민봉기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는 나로서는, 고종이 자신의 군대를 그만큼 신뢰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물론 들고일어날 그들 또한 왕을 폐위시키자는 목적이 아닌, 왕의 눈을 가리고 감언이설을 일삼는 궁의 간신배들을 몰아내자는 명목일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 고종과 민씨 일가는 서로를 운명공동체라 여기고 있을 테니까.
‘설마 진짜로 동시다발적인 반란을 중앙군으로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외무장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품속에서 다른 전문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이건 조선의 왕이 쓴 전문이 아닌 베베르 공사가 직접 작성한 전문입니다. 특이하게도 평시 보고와는 다르게 암호문을 이용해 보냈더군요. 해석이 완료된 상태이니 읽어보시면 됩니다.”
역시 진짜로 이런 안부 인사만 보냈을 리가 없지. 다른 나라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본론이 담긴 내용은 베베르 공사에게 대필을 시켜서 보낸 거였구만.
의문이 풀렸다는 표정을 짓는 나를 보고 게르 외무장관이 재차 쓴웃음을 지었지만, 나는 별로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일일이 감정을 드러내는 나를 보고 미숙하다고 여기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숙련된 외교관에게 자신의 표정을 숨기는 것은 기본 소양이었으니까.
그러나 베베르 공사가 보낸 전문을 읽어내려가는 내 표정은 점차 일그러져 갔다.
아, 이래서 게르가 또 쓴웃음을 지은 거였구나.
아무래도 고종께서는 나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거하게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전문에 쓰여 있는 대로 행동했을 리가 없을 테니. 정말로 고종은 게르의 말대로 극동 지방에서 가장 대범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극동으로부터의 보고, 조선왕은 전하와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에 매우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 다만, 그가 생각하는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관계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임. 최근 들어 연해주 지방에서 조선계 러시아인들을 이용해 함경도에 거주 중인 이들을 취업시켜 준다는 명목으로 데려가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자 이를 그다지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음.]여기까지는 납득되는 내용이었다.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 내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도 막던 조선 정부로서는 ‘다른 도’도 아닌 외국으로의 인구 유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 또한 고종이 이를 자제해 달라는 의사를 표명할 경우 일정 수준에서 그와 타협을 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베베르의 보고는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다만 이에 대한 조선 왕의 반응은 제가 예상한 것과는 달랐음. 그는 우리가 노동력을 가져가는 것에 불만을 가진 것이 아닌 자신에게 별다른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서 조선인들을 데려가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 그와의 면담에서 추측하기로는 횡단 철도 공사 현장에서 일하면서 받는 봉급이나 조선인 정착촌에서 나온 수확물을 비롯한 재화의 일부를 본인에게 상납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임.]“외무장관.”
나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전하.”
“해석 과정에서 베베르가 본래 쓴 것과는 다르게 단어나 문장이 다르게 기록되거나 아니면 다른 의미로 변질되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
충격적이긴 했다.
조선의 현 상층부가 부패했다고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을 뿐, 백성의 어버이라고 자부하는 왕이 그 백성을 직접 인신매매하는 것에 뛰어들어 그 콩고물을 챙기겠다는 의지를 보일 줄은 몰랐으니까.
‘나도 그렇게 착하기만 한 입장은 아니지만, 이건 좀…… 내가 원인을 제공했다고는 하지만 한 나라의 군주라는 사람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이는 니콜라이와 의식이 섞이며 남들 위에 군림하는 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고민하던 내 평상시 신념에 비추어 봤을 때,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차라리 고종이 나에게 화를 내거나 자신의 신민들을 빼돌리지 말라고 당당하게 나왔다면 오히려 그를 다시 보게 되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보자니 내가 알던 고종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전하. 죄송하지만 아직 남은 내용이 있습니다.”
“아, 그렇지요. 흐, 흥미롭군요. 조선 쪽에서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내가 충격에 빠져 있는 것을 보자 게르 외무장관은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는 식으로 나를 재촉했다.
이것보다도 더 대단한 내용이 적혀 있다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전문을 한 페이지 넘긴 뒤 남은 내용을 읽어나갔다.
[또한 조선의 군주는 그를 통한 내탕금 및 군자금 마련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도 관심을 보이는 모양이었음. 저에게 군사 고문단이나 무기를 구매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백두산 정계비와 간도라는 지방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표시했음. 아무래도 청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우리를 등에 업고 만주지방으로의 진출을 노리는 것으로 보임. 다만, 이는 조선 상층부 전원의 의사가 아닌 지금으로는 조선 왕의 독단적인 생각으로 보이는 것이 본 공사의 의견임.]게르가 암시한 대로 이 뒤에 적혀 있는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원 역사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자주독립국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뒤 고종은 실제로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에 걸맞은 제국주의적 행보를 보였었다.
의화단 사건 당시 대한제국군을 파병하려던 움직임을 보이거나 다 쓰러져 가는 청나라의 빈틈을 노려 간도를 비롯한 만주지방으로의 진출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말이다.
미국에 막대한 돈을 대가로 미국군을 용병으로 사용하려다 미국 의회에서 부결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고종은 사실 영토에 대한 욕심이 많은 군주였다.
그에게 불행이라면 대한제국이 그가 가진 야심을 실현할 만큼의 능력을 보유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주변 환경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역사책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근대화 개혁조차 하지 않은 상황에서 외부로의 진출을 꾀할 정도로 고종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놀랍군요.”
베베르 공사의 전문을 다 읽은 내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바로 놀라움의 표시였다.
내가 허탈하다는 듯 짧게 감상을 표시하자 게르 외무장관도 내가 나타낸 감정에 동감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우리 러시아가 그동안 너무 얌전하게 지냈던 모양입니다. 이런 식으로 무시당할 줄은 몰랐는데.”
사실 고종이 나타낸 만주 지역으로의 진출 야욕은 우리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열강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지금 만주에 얽혀 있는 이권 중 대부분이 우리 러시아 손에 들어오고 있다고는 하나, 다른 나라들 또한 여전히 한 발 걸쳐 있는 상태였으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선 이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좀 가라앉혀야 앞으로 어떻게 그를 대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겠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들이 올려져 있는 진열장으로 다가가 스미노프 보드카를 꺼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역시 보드카지.
“장관도 한잔하겠습니까?”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요즘 제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서 지금 전하가 주시는 잔을 받는다면 아마 문밖을 나서자마자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요.”
정 그렇다면 나 혼자 마시지 뭐.
황실을 위해 납품되는 보드카를 한잔 들이켜고 나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놀라움과 고종으로부터 우습게 여겨진 것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자, 어떤 식으로 그를 응징할지 보이는 듯했다.
“우선.”
처음에는 고종의 친서를 무시하고 건방진 그에게 가벼운 응징을 가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는 기각되었다.
당장은 통쾌할지 몰라도 조선에 개입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가만있지 않을 테고 고종의 행동으로 인한 책임을 조선의 신민들도 짊어지게 될 테니까.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당장은 고종이 원하는 대로 판을 깔아주는 척하는 것이었다.
“조선 왕으로부터 이런 전문이 왔으니 우리도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어야겠지요. 야심만만한 그에게 당근을 내밀어야겠습니다. 다만 그가 우리가 내민 당근이 사실 함정이라는 걸 깨닫지 못할 그런 제안을 하는 게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