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96)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96화
처음에는 자신들이 살던 나라에서 거두어가는 세금에 대한 욕이었다.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라며 별별 명목으로 가져가던 특별세를 합치면 원래 내야 하는 세금보다 더 많을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정신 나간 놈들 같으니라고. 저수지를 만들고 저번 여름에 유실된 도로를 복구하겠다면서 세금을 거둬놓고는 3년이 넘도록 부지 선정도 안 하던 걸 내가 똑똑히 기억한다네.”
“새로운 무기를 산다고 가져가는 세금은 또 어떻고? 그 세금으로 군인들 봉급이라도 제때 줬으면 지난 임오년에 그 난리가 났겠는가?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놈이 너무 많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말이야.”
조선에서도 촌구석이라 불리는 함경도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귀에도 임오군란이 왜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유가 들려왔다.
몇 달간 받지 못한 봉급.
자신만 바라보는 자식과 아내의 눈망울.
오랜 기다림 끝에 준다는 봉급은 겨우 한 달 분량.
그마저도 모래나 겨, 썩은 쌀이 섞여 있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
사실 조선의 민중이나 군인들이 왕실과 나라에 바치는 충성의 강도는 어마어마했다.
왕정 국가일 뿐만 아니라 500년이라는 세월이 가지고 있는 위엄과 정통성은 함부로 훼손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월급 외의 수입이 없을 군인들이 몇 달간 별다른 행동이나 실력행사 없이 국가의 봉급 지급을 기다렸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유교라는 정치사상이 가져다주는 정치적 안정성도 상당했다.
지난 세월 동안 단 2차례의 반정, 그것도 역성혁명이 아닌 폭군의 전횡을 몰아낸다는 명목의 쿠데타였다.
지난 시절 탐관오리를 몰아내자는 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전개 과정 또한 놀랍다고 할 수 있었다.
과도한 세금과 노역에 견딜 수 없는 농민들이 마을에 있는 훈장이나 유지들에게 찾아가 간절하게 부탁을 한 뒤, 지역 내 명사들이 주축이 되어 탐관오리 등을 몰아내고 사태가 마무리가 된 후, 중앙 정부로부터 ‘뜻은 알겠으나 나라의 법도를 어겼다는 점도 명확하니 사건의 주동자들은 목숨으로 이를 갚으라’는 명령을 내려도 기꺼이 따르는 사례들이 존재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한양의 외척 놈들은 매일매일 비단옷을 바꿔 입는 데다가 한 번이라도 입은 옷은 다시는 안 입는다면서? 그놈들의 재산 중 일부만 제대로 된 곳에 사용했다면 지난날 내 누이가 얼어 죽는 일은 없었을 거다. 망할 놈들. 하늘도 무심하시지.”
“심지어 그 자식들은 음식도 씹은 다음 삼키지 않고 뱉는다더라. 삼키면 배가 차서 음식의 맛을 즐길 수 없다나 뭐라나. 한양의 양반놈들이 그 짓거리를 하는 동안 지방에서는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형국이니. 나라에 망조가 든 게 틀림이 없다.”
세금과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은 어느새 양반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지도층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자극적인 내용의 소문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아무개 대감님 댁은 하다못해 집에서 기르는 개도 고기를 먹는다더라.
어떤 민씨 집안 사람은 사대문에서 자기 집까지 가는 동안 남의 땅을 한 번도 밟지 않는다던데?
국모께서 금강산 봉우리마다 비단과 쌀 한 가마니를 바치셨다고 하더라.
몇몇 소문은 사실무근이었고 과장되어 있었지만, 과장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문도 엄연히 존재했다.
누군가가 굶어 죽어가는 동안 누군가는 산해진미를 즐기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소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어울리지 않게 밝아 보였다. 이제는 남의 얘기였으니까.
자신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는 조선에서 벗어나 춥고 척박하며 정착촌을 벗어나면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곳으로 왔지만, 적어도 배는 곯지 않고 있으니까.
“도대체 나라님은 뭘 하고 계시는 건지 참. 주변의 간신배들이 아무리 눈과 귀를 가린다고 해도 너무 무관심하신 거 아닌가? 나라님도 듣는 귀가 있으시면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누가 들으면 어쩌긴 뭘 어째. 여기가 아직도 조선땅인 줄 아나? 어디 한 번 잡아가라지. 조선도 아닌 곳에 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그치들이 뭘 어쩌겠나?”
이윽고 험담이 고종에까지 이르자, 아직 자신이 연해주에 있다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편함이나 두려움이 느껴졌으나, 이곳에 온 지 오래된 이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라님이 하신 게 도대체 뭔가? 내 한평생 살아오면서 나라님에 대해 불평불만 한 번 한 적 없지만, 오늘은 내 할 말은 해야겠네. 외척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만 믿고 저리 날뛰는데 명색이 임금이라는 분이 그거 하나 멈추지 못한단 말인가? 그놈들이 가져다주는 거에 눈이 멀어 민초들의 애원을 무시하고 있는 거라면 그거야말로 무능력의 극치이자 혼군 아닌가.”
“내 생각이지만, 임금님은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으신 게 아닐까? 세금을 충실히 내고 노역도 성실히 이행하면 뭐하나, 높으신 분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을. 그러다가 한 번이라도 세금이 밀리면 바로 치도곤을 당하니 나 원…….”
시작은 어려웠지만, 누군가 포문을 열자 마치 둑이 무너져내리듯 고종에 대한 성토가 쏟아져 나왔다.
그나마 일말의 존경심이 남은 것인지 아니면 여태껏 살아온 방식이 아직 몸에 배어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서운함에 대한 성토가 주된 내용이었다.
“지금의 조선 임금은 왕이라는 자리에 올라 있을 자격이 없다. 차라리 우리를 받아준 노서아의 차르야말로 진정한 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분위기가 과열되어가는 와중에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가 한순간에 침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조선인으로서 살아온 세월이 더 긴 만큼 아직은 외국이라 느껴지는 나라의 왕과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나라의 왕을 비교하는 행위가 어색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침묵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분위기는 묘해져 갔다. 사람들의 눈동자에 서린 감정이 망설임과 어색함에서 방금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으니까.
이는 단순히 이 정착촌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장작을 패는 와중에, 겨울이지만 밭을 관리하는 와중에, 얼어붙은 강에서 시린 손을 불어가며 빨래를 하는 와중에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차마 러시아가 조선을 침공해 지배해야 한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의 조국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 * *
1894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바야흐로 러시아에 있어 앞으로의 나날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해가 될 것이라 예상됐다.
작년부터 차츰 시작된 개혁작업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는 해가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기근의 그림자가 남아 있던 작년과는 달리 아직 곡물 시장에서 미국과의 가격경쟁에서 승리할 만큼 수확량을 늘리지는 못했지만,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기근이 남기고 간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게다가 미국과의 곡물 시장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다.
현재의 식량 생산량으로 자급자족을 하기에는 충분한 데다가 수출 품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곡물의 비중을 낮추는 게 목표였으니까.
‘어차피 지금과 같은 짧은 기간 동안의 과잉 공급으로 인한 곡물 시장의 가격 하락 현상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데다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곡물 생산량을 늘려 미국과 가격경쟁을 하려는 것보다는 차라리 낮은 곡물 가격을 통한 도시 노동자들의 생계유지 및 생활 환경 개선을 노리는 게 더 낫다.’
게다가 비슈넷그라스키가 주도하던 금본위제로의 화폐개혁 또한 드디어 완료가 된 시점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수십 년에 걸쳐 역대 차르와 재무장관들이 편집증적으로 금을 모아온 성과가 내 대의 완성된 것이다.
이는 드디어 러시아가 국제 경제 질서에 편입될 기본 조건 중 하나를 완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금을 기반으로 한 화폐 질서가 수립됨으로써 외국 자본들이 러시아에 투자를 할 때 지급 보증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외에도 미르 개혁을 비롯한 농업 개혁도 속도를 내고 있었다.
이전에도 언급된 바 있는 장로들을 비롯한 수구파들의 반발이 아직도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지만, 작년의 성과를 기억하는 농부들을 중심으로 한 개혁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직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이들 또한 올해의 수확량을 본다면 이내 자신들이 지금껏 해온 방식이 낡은 것이라는 점을 깨달으리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과야말로 가장 확실한 설득 수단이었으니까.
사실 이런 관점은 나 혼자만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개혁작업의 중심에 서 있는 관료집단은 물론이고 자본가, 노동자, 농민, 중소귀족들과 같은 러시아 각계계층의 사람들 또한 1894년이라는 새로운 한 해가 이전까지의 해와는 다르게 진행될 거라 느끼는 모양이었다.
모처럼 화려하게 진행된 신년 행사 당시 내가 신민들의 앞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섰을 때 그들의 눈에서 희망과 설렘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누구보다도 기대에 차 있어야 할 나는 그들과 달리 우울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1894년.
내가 현재 있는 이 몸의 주인인 니콜라이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한 연도이기 때문이었다.
본래라면 어제 있었던 신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크림반도에서 올라올 예정이셨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오지 못한 아버지의 빈자리가 크게만 다가왔다.
이 시대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맞이할 가족의 죽음 앞에서 태연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사람이 내게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아버지라면 더더욱.
비록 그가 인민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여러 수구 정책을 펼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아버지였으니까.
직접 오지 못하는 대신 보내온 편지의 내용 또한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편지는 전체적으로 아버지의 유머가 섞여 있어 가벼운 분위기였지만, 자신의 몸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 계신 건지 이전과는 다르게 진중한 내용도 담겨 있었다.
특히 어머니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나에 대한 염려가 크니 한시라도 빨리 그 걱정을 덜어드리는 게 좋지 않겠냐는 문장은 아프게 다가왔다.
말로는 어머니가 걱정한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아버지도 이에 대해 우려하고 계실 게 뻔했으니까.
아무래도 올해의 첫 일정은 아버지와의 만남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뿐만 아니라 니콜라이에게도 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은 필요할 게 분명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