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te the Communist Party! RAW novel - Chapter (99)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99화
민족주의자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내 머리에 떠오른 문장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에서는 수많은 사상들이 태어나고 잊혀갔으며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곤 했지만, 그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을 2가지 꼽으라면 누구나 민족주의와 파시즘을 선택할 것이다.
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인 민족주의와 2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인 파시즘.
그나마 민족주의는 식민지 억압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안겨준 사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광기와 일본제국의 폭주가 멈춘 뒤 자정의 물결에 휩쓸린 파시즘과는 달리 21세기까지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사상이었다.
‘유고 내전, 코소보 사태, 르완다 학살 등등……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이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여기게 된 경우가 한두 개가 아니지.’
러시아 제국 내에 불어오는 민족주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민족주의자들은 두 가지 분파로 나뉘어 있었다.
-영국과의 대결에서 유약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황태자는 과연 어느 나라의 군주인가? 혹시 자신의 몸에 흐르는 그들의 피에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황태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로마노프 황가는 순수한 슬라브인들의 혈통이 흐르는 가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는 다른 민족의 피가 섞인 로마노프 황가는 슬라브인들의 국가인 러시아 제국을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태도의 극렬 민족주의자였고.
-보아라 황태자 전하께서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낸 눈부신 성과들을. 심지어 믿을만한 정보원에 의하면 전하께서는 지난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진 소요를 하느님의 속삭임을 들으시어 미리 예측하셨다고 한다. 게다가 실패 없이 성공만을 일구어낸 전하가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면 그 누가 초인이란 말인가? 슬라브 민족의 영도자이시자 러시아 제국의 지배자인 황태자 전하 만세!
다른 하나는 과거 내가 보여준 행보가 사실은 신의 인도였으며 나의 영도를 받는 슬라브 민족이야말로 신의 총애를 받는 선택받은 자들이라 말하고 다니는 자들이었다.
이 중 극렬민족주의자들은 상대하기 쉬웠다. 황실 모독죄 및 반역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동의를 표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적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지도층에도 슬라브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피가 섞인 이들이 많다는 역정보를 흘리자 조직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한 줌 남짓 남은 조직마저도 오흐라나 및 경찰들에게 박살이 난 그들은 인민주의자들처럼 지하로 숨어들었고 별로 신경을 쓸 필요조차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제는 내 목숨을 노린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진짜 문제가 되는 이들은 후자였다.
내가 행하는 통치의 정당성마저 부정하는 앞의 극렬민족주의자들에 비하면 한결 낫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하고 다니는 행동을 보면 궁극적으로는 내가 추구하는 러시아 제국의 앞날에 방해가 되는 자들이었다.
-남부 지방에서 또다시 포그롬 발생이 발생할 뻔했다는 보고입니다. 다행히 별다른 불만 사항이 없는 농민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사태가 확대되는 건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와 이콘, 전하를 모욕했다는 소문이라고 하더군요. 주동자들은 슬라브 민족의 순수성을 해치는 이들은 모조리 러시아를 떠나거나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합니다.
당장 오늘 아침 내무장관이 나에게 말한 대로 그들 또한 국론을 분열시키고 내부를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사건으로 농민들이 그동안 해왔듯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분노와 불만을 터뜨릴 정도로 생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한데 뭐하러 농기구를 들고 이웃을 공격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 시간에 자신들의 오두막에서 아내의 옆에 누워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면 모를까.
하지만 매번 이런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생활에 만족감을 느껴 별다른 폭동을 일으킬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말은 언제라도 생활이 불안정해진다면 다시금 손에 농기구를 들고 이웃을 찾아갈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이놈들은 표면적으로는 내게 충성하며 다양한 계층에 발을 뻗어놓았다는 점에서 더 질이 나쁘지. 차라리 대놓고 황실에 이를 드러낸다면 모를까, 러시아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열정적인 애국자로 인식되는 이들을 명목 없이 탄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특히 최근 들어 민족주의 진영에서 떠오르는 스타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알렉산드르 베조브라조프.
원 역사에서 러시아의 극동 정책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니콜라이 2세의 총애를 받은 사람.
하급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내가 극동에서 거둔 성과에 힘입어 원 역사보다 더 빠르게 이름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일 신문을 통해 우리 또한 영국처럼 동인도 회사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 일본, 청나라, 조선, 만주 지방에서의 권익을 확보하고 이를 위협하는 세력은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최근 들어서 귀족뿐만 아니라 황실 내의 인원들에게도 접촉할 만큼 거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요즘은 극동으로 간 관계로 조용한 것 같지만, 이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김이 빠지는 구멍이 없는 압력솥이나 다름없는 민족주의의 광기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이런 광풍을 걱정한 내가 과거 국가주의를 통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인 데다 외부로의 진출보다 내실을 다지는 게 우선이라는 연설 등을 했기에 이 정도라 생각됐다.
그런 행동마저도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국론은 당장 갈망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발칸반도를 슬라브의 품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을 게 분명했으니까.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식자층에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중 하나를 지지하는 여론이 반반에 가까웠지만, 아직도 러시아 제국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문맹층에서는 민족주의에 친숙함을 느끼는 이들이 더 많았다.
국가주의라는 사상을 이해하는 데 들어가는 노력보다 ‘같은 민족=같은 편’을 따라서 도와주고 다른 민족은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족주의가 더 쉽게 느껴졌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게다가 지금껏 농민들이 가진 기본 사상에도 민족주의가 더 부합하기도 하니까.’
외부로의 침입을 경계하고 자신이 속한 울타리 안에 있는 공동체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농민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부터 내려오는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농촌이라는 공동체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보수적인 공동체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베조브라조프를 어떻게든 내 통제하에 집어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사상의 현재로써 가장 큰 스피커인 그를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면 그에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도 통제할 수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베조브라조프 자신과 종무원장이었다.
* * *
5월이 되어가자 연해주 지방의 조선인 정착촌도 한층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이주한 뒤 처음으로 짓는 농사에 들뜬 사람들도, 이번이 두 번째 농사인 사람들도 지금이 중요한 때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향에 비하면 척박한 데다 쌀농사도 짓기 힘든 땅이었지만, 자신의 땅에서 이전까지 부담하던 세금보다 적은 양만 바치면 된다는 사실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순간이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는.
두두두두두
“이, 이게 무슨 소리여?”
“말발굽 소리 아닌가?”
처음에는 보호세를 요구하는 마적단인 줄 알았다.
청나라와의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들에게 마적 떼는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청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 지대의 치안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그중에서도 애신각라 황실의 정신적 고향인 만주 지역은 무법지대나 다름없게 변해갔다.
만주인 외의 다른 민족은 들어갈 수 없도록 한 봉금 정책으로 공백이나 다름없던 만주에 마적 떼가 돌아다니는 일은 놀랄 게 아니었으니까.
러시아 특유의 넓은 영토로 인한 치안 공백은 이 정착촌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 정착촌도 오는 데 한 세월이 걸릴 군대에 의존하기보다는 적당량의 상납금을 지불하고 안전을 보장받는 길을 택했다.
“아니, 얼마 전에 보호세를 바쳤는데 또?”
하지만 보통 자신들과 같은 황인종인 마적 떼와는 달리, 오늘 그들의 마을에 찾아온 이들은 백인이었다.
러시아로 넘어온 후 백인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백 명이 넘는 숫자의 말을 탄 이들의 기세에 눌린 조선인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두려움에 떨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래. 아이고…….”
“저, 저놈들 상판대기 좀 봐. 아주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거 같은데.”
정착촌에 온 백인들 또한 마을을 포위한 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에서는 그다지 우호적인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대치 아닌 대치가 이어지던 와중에 용기를 낸 촌장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던 노인이 어설픈 러시아어로 그들에게 목적이 무엇이냐 묻자,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너희들이 지금 차지하고 있는 이 땅은 네놈들 같은 황인종을 위해 준비된 땅이 아닌 우리 슬라브 민족을 위해 쓰일 땅이다. 앞으로 2시간의 시간을 줄 테니 챙길 만한 것들을 챙긴 다음 이곳을 떠나라. 우리의 경고를 듣지 않을 시 발생하는 일은 모두 너희의 책임이다.]“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요! 떠나라니! 우리는 엄연히 연해주 총독의 허가를 받고 여기서 살고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게다가 이제 파종한 씨앗에서 싹이 움트고 있는데 이곳을 떠난다면 농사는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이런 식의 애원이 이어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답이 아닌 겨누어진 총구였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 눈물을 머금고 정착촌을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을에서 나오자 기병대가 마을에 불을 지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갑시다. 가서 최재형 선생에게 오늘 일어난 일을 말하면 무슨 방도가 생기겠지요.”
이런 식으로 사느니 차라리 조선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올 법도 했지만, 그들 중 아무도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돌아가 봐야 그들을 기다리는 건 곤장뿐이라는 것도 한몫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정착촌을 공격하는 의문의 집단이라니. 도대체 어떤 놈들이!”
이렇게 불타 버린 정착촌이 늘어가자 연해주 지방을 총괄하고 있는 종무원장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감히 차르의 신민을 자처하는 이들을 공격하다니.
처음에 종무원장은 외부의 공격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그가 정착촌에 대한 관리 권한을 위임한 최재형의 이야기는 달랐다.
“저희 사람들이 말하기를 통상적인 마적 떼가 아닌 러시아인들이었다고 합니다. 근데 이상한 것은 평상시 근처에서 보던 이들이 아닌 난생처음 보던 사람들이었다고 하는데 다른 곳에서 온 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허어, 그들이 우리의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온 착각은 아닌가?”
“저도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으로 온 사람들마다 똑같이 하는 얘기인 만큼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흐으음…….”
종무원장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청나라의 국경을 넘어서 온 마적 떼라면 차라리 모조리 쓸어버리겠지만, 조선인들이 차츰 늘어가는 데 불만을 품은 러시아인들이라면 이야기가 복잡해질 게 분명했다.
“종무원장님. 부디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계시는 고민이 무엇인지는 저도 알겠으나, 차르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라면 모두 러시아인이라고 말입니다. 부디 정든 고향을 떠나 차르의 품 안에 안기길 자청한 저희를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런 그의 고민을 덜어준 것은 최재형의 호소였다.
“자네 말이 맞네. 다만, 당장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니 우선 내가 직접 그들이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겠어. 자네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조선인들을 잘 다독여 주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