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110
약혼식(5)
루니아는 28년 평생 검 외길만을 걸어왔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유일한 후계자로서 모두의 기대를 받아왔고, 그녀도 거기에 충분히 호응해왔다.
어느 날, 집안이 떠들썩했다.
「저보고··· 사생아를 키우라는 건가요?」
「어쩔 수 없지 않소. 어찌 됐건 아덴의 혈육인 것을.」
사생아.
이제 겨우 열 살이었던 루니아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네 동생이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아이.
낡고 거친 보자기에 둘러싸여 있는 그 아이는 모두에게서 거부당하고 밀어내져 결국 루니아의 손에 안겼다.
-빠야!
그럼에도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제 손안에 가득 찬 갓난아기를 보고, 무심코 사랑스러워서 무심코 양친에게 아이를 자랑하듯 내밀어봤다.
「보세요, 아버님, 어머님. 지금 제 볼을 만졌어요.」
「···············.」
오랜 침묵. 껄끄러운 시선. 뒤늦게 깨달았다.
당주의 외도로 생긴 사생아. 난산으로 제 어미를 죽이고 태어났으며 차기 후계자 구도를 어지럽힐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
아. 이 아이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구나.
낳은 어미는 난산으로 죽어 어미를 잡아먹은 년이라 손가락질당하고,
씨를 뿌린 아비는 나 몰라라 제 외도의 증거를 부정한다.
유일한 피해자인 어미는 모든 것에 실망하고 침묵했다.
하인들조차 이유식을 먹지 못해 우는 아이를 두고 더러운 핏줄이라며 외면하는 것이다.
이 아이를 아끼는 건 나뿐이라고······ 이해했다.
「맘마··· 어부바!」
「언냐 나 키 커써! 바바 이제 백센티 너머!」
「언니야! 전 언니야처럼 멋진 기사가 될 거예요!」
「어, 언니··· 저 내일 아카데미로 가요.」
그 아이의 모든 걸 지켜봤다.
그나마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제 정당한 몫도 챙기지 못하는 심약한 아이.
「루, 루니아 아덴 제1검각주께······ 아덴류 무관 신생 사범으로서 친선대련을 요청합니다.」
아카데미에 보내고서 반년도 채 안 되는 기간. 아이는 변했다.
코린 로크.
정체되고 묻혀가던 아이를 변화시킨 존재.
재능과 노력을 가진 뛰어난 기사. 단번에 알아봤다.
이 남자가 동생을 변화시켰고, 동생은 그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예나 지금이나 제 것 못 챙기는 둔함은 여전하군.’
17년을 업어 키웠다. 아리샤가 어떤 성격인지는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저 소년을 낚아채면··· 이 둔한 것도 정신을 차릴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심심치는 않을 것이다.
「자네, 나와 결혼하지 않겠나?」
마침 귀찮은 정략결혼 압박도 있겠다, 한 번 질러봤는데, 아이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저러고도 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는 모습은 더더욱 가관이었지.
뭐, 어차피 거짓 약혼이다. 잠잠해지면 자연스럽게 파기될 것이고, 코린 로크는 자유롭게 되겠지.
피차 원하는 것을 위한 계약. 겸사겸사 동생을 자극할 겸 벌인 짓이건만······.
「이 굳은살 하나하나가 루니아 씨의 이력이고, 노력의 증거이며 삶의 태도예요. 이걸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뭐라 하는 녀석이 있으면 그 얼간이가 편협한 겁니다. 이건 당신만이 가진 어여쁜 매력이니까.」
접하면 접할수록 이 사내는 제 심경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타고난 호인.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걷는 자.
그 신념과 사내다움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이 약혼을 가짜가 아닌 진짜로 나아가고 싶을 정도로.
허나, 이는 비겁한 행위다.
이 약혼은 거짓이어야만 한다.
검호라 불리는 동부 최강기사는 언제나 자신에게 당당했기에.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어, 언니······.」
제 데이트에 쫄래쫄래 따라온 여동생을 내려다보며 아이의 눈가에 깃든 투지를 읽는다.
「훗······.」
겨우 승부처에 나설 정도는 되었나.
역시 이대로 빼앗고 기정사실로 만드는 건 아깝다.
좀 더 당당하게 빼앗는 것이 묘미가 될 것이다.
「좋아하느냐.」
「네, 녯? 누, 누굴요? 누가요?」
「혓바닥은 언제나 고르게 놀려라. 네 나이도 이제 방년이지 않느냐.」
「죄, 죄송합니다······.」
「흥.」
루니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리샤를 향해 혼잣말하듯 운을 띄웠다.
「이번 약혼의 핵심은 정략결혼을 피하는 것이지. 일종의 시간벌이다. 요컨대 그 시간벌이만 되면 딱히 약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어, 언니?」
「그래. 그렇군. 약혼식장에 누군가가 나타나 정혼자를 끌고 도망친다면··· 실연의 충격으로 당분간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겠지.」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승부는 당당해야 한다.
정정당당한 승부의 승리야말로 가장 감미로운 미주가 될 터이니.
“이, 이 약혼! 반대얏···!”
이번 한 번 정도는 양보해줄 수 있다. 마음을 자각하고 승부에 나선 동생에게서 빼앗을 날의 고대하면서.
“아, 아리샤? 너, 너너 지금 뭐 하는?”
“따, 따라오세요!”
“어어? 어어어?”
텁! 잡힌 손에 이끌리는 코린 로크. 얼마나 어안이 벙벙해졌는지, 저항할 틈도 없이 끌려간다.
“뭐, 뭣들 하는 건가요! 당장 쫓으세요!”
가문의 검사들에게 지시하는 소피아. 하지만 곧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콰앙!
낙하하는 그림자의 정체. 남부 특산의 대형 여객수 흐레스벨그.
“코린, 아리샤···!”
남부의 농업제국의 적장녀. 물빛머리가 특징적인 소녀와 지온대성당의 견습수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뻗는다.
“엑? 엑?? 엑???”
영문도 모른 채 흐레스벨그에 탑승하는 코린. 그리고 아리샤.
“가자···!”
세차게 날개를 펴며 치솟는 여객수. 약혼자가 가문의 이복동생에게 납거된다는 초유의 사태에 소피아와 하객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는 건 루니아 뿐이다.
“흐하하하하···!”
“루, 루니아?”
“이런 어머님. 소녀, 충격이 크군요.”
“아, 아니, 그런데 왜 웃고······.”
“하아~ 충격으로 당분간 남자들을 만나고 싶지 않군요.”
“네? 잠깐, 아니. 루니아?”
호쾌한 걸음걸이로 식장에서 사라지는 루니아를 보며 하객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이렇게 동부의 검술명가 아덴에서 있었던 소소한 약혼식은 파토로 끝이 났다.
············
·········
······
“저기, 지금 이거 뭔 상황이에요?”
어안이 벙벙한 코린 로크. 그런 그에게 아리샤가 품속에서 편지지 하나를 꺼냈다.
“그··· 코린 씨. 언니가 이거 전해주랬어요.”
“······이건.”
「나중에 정식으로 데리러 오겠다. 나의 피앙세.」
“오우······.”
“뭐, 뭐라고 적혀 있어요?”
“······너는 몰라도 돼.”
* * * *
밤을 내달린다.
사방팔방이 망자의 군대로 가득 차고 괴성이 도시를 메운다.
본디 망자들은 생자들을 질투하고 증오하는 법. 그들 눈에 띈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산 고기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대로에서, 골목에서, 지붕에서··· 심지어 하늘에서까지.
은빛의 신형(身形)이 밤하늘을 수놓고, 이를 쫓는 묵빛의 구더기들이 덧칠한다.
-콱!
“이런···!”
구름을 타고 몸을 숨겨 순식간에 급강하를 하는 박쥐 언데드 어비스 쉬리커. 그 거대한 날개가 은빛의 신형을 덮친다.
-콰아아악···!
추락하는 신형. 충격으로 인한 가속과 중력이 더해져 대지라는 이름의 흉기가 가녀린 몸을 난타한다.
“크으···!”
사흘째의 밤. 언데드가 군단을 이루어 도열을 짜고, 집단행동을 하며 단 한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몰려드는 기이한 광경.
1만의 언데드들이 기어코 한 명의 창술사를 포위했다.
“하아~ 저 녀석만 진작 발견했어도.”
자신을 덮친 거대 비행야수 언데드 어비스 쉬리커.
창공을 나는 자유로운 존재인 만큼, 발견과 추적이 쉽지 않아 항상 마지막에 처치하던 언데드다.
저 자유로운 루트 때문에 이번 공략은 많이 어그러졌다. 서둘러서 불사왕을 쓰러뜨려야 하는데······.
“어쩔 수 없나.”
은빛 신형··· 에린 다누아는 창을 붙잡고 마력을 불러일으켰다.
창대에 새겨진 룬 문자가 불어넣어진 마력에 빛을 발하며 형태로 새겨진다. 동시에······.
-콰아!
-콰아아앙···!
-??!!!
당혹으로 일그러지는 망자들. 사방팔방에서 솟구치기 시작한 폭풍과 불꽃이 그들을 덮쳤다.
“300년 동안 놀기만 한 건 아니란다.”
무한한 반복을 계속하는 에린에게 유일한 특권이 있다면 망자들은 활동할 수 없는 낮에도 버젓이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300년에 걸쳐 온 도시에 새겨진 룬 문자는 이럴 때를 위한 비상수단이다.
단번에 수천의 언데드들이 떼몰살을 당한다. 대마법사도 이뤄내기 어려운 위업. 불타는 시체들을 뒤로 하고 에린은 불길을 피해 하늘로 날아든 박쥐를 향한다.
“나한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 네 짧은 생의 끝이란다.”
솟구치는 은창. 올곧게 치솟은 은창이 단숨에 어비스 쉬리커를 관통한다.
괴산오의.
그 필살의 마창은 나즈레아 하늘의 제왕을 일격에 격추했다.
“후~ 잠시 쉴까.”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체력을 회복하고 불사왕을 친다.
망자들이 들러붙으면 귀찮아지므로 골목으로 모습을 숨긴 에린 앞에 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즐거워 보이는군.》
“그래 보여?”
사신의 말에 부정하지 않는 에린. 왜일까?
그 이유를 사신은 모르지 않는다.
5개월 전, 이곳 나즈레아에 나타난 한 소년. 반복되는 사흘을 당당히 멈추겠노라고 선언하고 사신에게서 보물을 받아간 이가 있었다.
코린 로크.
원본 ‘에린 다누아’의 제자.
300년 전, 월식 이후로 복제되어 남게 된 그녀를 구하겠다 선언한 남자.
사신은 300년 전부터 계속되어왔던 일상을 지금도 지켜봤다.
그날 이후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일을 해결하고 난 뒤의 에린이 항상 같은 장소에서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야! 코린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들뜬 에린의 목소리는 다소 주책스러울 정도다.
《이미 몇 번이나 들었다만······.》
진저리가 난다는 듯 늘어지는 사신의 목소리.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 소년에 대한 것이 나오면 개의치 않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오랜 친우지만··· 솔직히 주책맞다고 생각한다.
“이번엔 제가 당신을 구하고 싶어요, 라고.”
오랜 친우는 알까? 제자의 이야기를 할 때면 발갛게 물든 것도 모른 채 함박웃음을 짓는다는 걸.
300년 동안 그늘진 어둠 속에서 살아오던 그녀가 달의 여신처럼 광채를 빛낸다는 걸.
“아아~ 코린, 보고 싶다.”
천년을 넘게 알고 지냈건만, 이 영락한 신들의 마지막 여왕은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바보 같은 함박웃음을 짓는 것이다.
《곧 보게 될 것이다. 이제 만료일이 다가오니.》
“······그렇지.”
그렇게나 보고 싶어 하며 노래를 불렀던 주제에 또 이 이야기가 나오면 금방 풀이 죽는다.
반년 안에 나즈레아 120만의 영혼을 정화한다. 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위업. 그런 것에 제 영혼을 걸며 사신과 계약했으니까.
“사신··· 혹시.”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안 된다. 한 번 이뤄진 계약은 취소도, 수정도 할 수 없다.》
몇 번이나 계약의 주체를 자신으로 바꿀 수 없다는 끈질긴 시도. 알면서도 이 여자는 사신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아직··· 어린아이야. 윤회의 업을 박탈하는 건··· 너무나 잔혹해.”
《그 기만자가 선택한 일이다, 여왕. 너는 영웅을 북돋아 주는 자. 가르치고, 단련시키고 지혜를, 비책을 선사하는 자. 그 이상의 역할을 하려 하지 마라. 고이델의 창칼이 그대에게 향하지 않은 이유를 잊지 마라.》
“그 아이가··· 영웅의 길을 걷게 된다는 거야?”
《하고 자시고 이미 영웅이니. 세계에는 영웅이 준비되어 있다.》
“······그렇구나. 또다시 세계는, 위기를 맞이한다는 건가.”
영웅의 등장. 이는 즉, 위기가 찾아온다는 걸 의미한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신과 에린은 징조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가혹하구나······.”
숱한 영웅들을 가르치고 내보냈다. 그녀는 영웅들의 스승. 지혜와 마법과 비술을 가르치는 그림자 왕국의 여왕.
그런 존재이기에 사신도 에린 다누아를 복제하여 나즈레아에 남긴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세계의 수호자를 가르치는 여왕의 역할을 이해하기에.
“사신··· 나즈레아가 정화되어 내가 이곳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돼?”
··················
대답은 길지 않았다. 그 명료한 대답에 에린은 슬픈 표정을 짓는다.
“조금··· 아쉽네.”
《이 또한 인과이다.》
“알아. 나도···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야.”
얼마나 지났을까? 에린은 숨을 돌리던 민가의 침대 위에서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로 풀었다.
“그럼··· 가볼까?”
밤이 끝나간다. 이제 남은 건 불사왕 게롤그를 처치하고 마지막 밤을 끝내는 것.
그가 있는 주택가로 향하는 에린.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간 흑마법사의 주거지에는······.
“늦었네요? 저녁은 드셨어요?”
코린 로크.
특유의 야성을 온존한 어린 영웅이 에린을 반기고 있었다.
“어?”
“뭐야? 반길 줄 알았더니?”
도리질 치는 머리.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멍한 시선에 주택가의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게롤그는 제가 처리해뒀습니다.”
“어어? 어어어?”
당황한 그녀와 달리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는 코린 로크.
그 자연스러운 행동에 가슴이 쿵쾅거리며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내가 말했죠. 이번엔 구한다고.”
소년의 미소를 보며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폭주하는 심장.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이 살결에 닿을 때마다 찌릿찌릿하게 전기가 오르는 것 같다.
알고 있는데. 온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구하러 왔어요, 에린.”
어째서 전율이 등을 타고 오르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