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112
에린 다누아(2) 삽화有
“이쪽이란다.”
에린과 메르카바 시내에 나왔다. 그녀는 들뜬 소녀처럼 시가지를 순회한다.
가장 관심을 가지는 건 의외로 최신의 문학서적.
어지간한 고서들은 전부 읽어봤다는 모양이다.
“요즘 극단에선 이런 주제로 연기를 펼치는구나. 나 때에는 이런 과격한 주제는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했는데.”
“나 때는, 이 언제부터인데요?”
“탐색전 하지 말아줄래?”
“실수입니다.”
뾰로통한 표정을 한 그녀는 나이에 대해 민감하다. 뭐, 에서도 정확한 나이 설정은 안 나왔지만, 이 사람이 최소 천 살 이상이라는 건 안단 말이지.
“의외네요. 연극을 보러 가자고 하고.”
“클라라가 대부분은 가져다주지만, 이런 건 아무래도 어려웠으니까.”
조제핀 클라라. 아카데미의 수석교수. 공간이동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그녀가 아니었다면 심심해서 미쳐버렸을 거라고 미소 짓는 에린.
본래라면 사바세계에 나오지 못하고 왕성에서 유폐되었을 그녀가 이렇게 나올 수 있었던 건 마탑의 마법사들이 에리우 카사르라는 봉인구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4막 마탑 준동 사건. 철산의 왕 사태를 일으킨 배신자 페르막 다만과 손잡은 흑마법사, 적마법사들이 일으킨 테러 사건.
에리우 카사르라는 껍데기가 부서지면서 에린 다누아는 세계수호를 위해 직접 몸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
곤란하다.
정사대로라면 에린 다누아는 시나리오 전개 과정 중에 사망한다. 플레이어에게 세계수호에 대한 유지를 남기고.
처음에는 그냥 거물 네임드 NPC 정도로 여겼다.
마리에 듀나레프 때와는 다르다.
비천야차 화란 때와도 다르다.
이 사람은, 이 NPC는 구해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적에 맞서야 한다. 무엇보다 그녀가 죽음으로서 남기는 히든피스 다난의 보물창고가 개방된다.
그 일련의 과정은 플레이어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내심 포기했는데······.
“자, 다음은 저길 놀러가자꾸나.”
내 손을 붙잡은 손이 따뜻하고,
귓가에 흘러오는 목소리가 간지럽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전경에서 그녀는 내게 미소 지었다.
만개한 미소를 앞에 두고도 나는 솔직하게 웃어주거나 어울려줄 수 없었다.
초조했다.
이제 곧 3학년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북부 노스 킹덤의 수호신 서리거인과의 일전, 대규모 몬스터 웨이브. 아카데미 붕괴.
최종막의 전초전이 연이어 일어난단 말이다.
따라서 이번 방학은 플레이어와 그 파티원들이 힘을 축적할 몇 안 되는 기회.
슬슬 따라가기도 벅찼다. 지난번 둔 스카이스의 늑대인간 테러사건, 둠노릭스가 수호하는 마족 마을의 토벌 사건······.
그 모든 에피소드에서 죽을 뻔했다. 시후가 가져온 엘릭서가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터.
내게는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힘은 ‘육합창’.
이렇게 태평하게 시간을 낭비할 때가······.
────!!
팡! 하고 내 앞에서 터지는 박수소리. 눈 앞을 가리는 손바닥이 사라지자 에린 다누아가 슬쩍 웃고 있다.
“코린 학생, 모티베이션이라고 아니?”
“어··· 동기요?”
“응. 그거. 중요하단다. 무언가를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는 건.”
내가 강해져야 하는 이유.
막연하지만··· 일단 생존이다. 이것보다 더한 게 있을까 싶지만.
“생존. 그리고 박시후를 돕기 위해. 사람들이 덜 죽게 하고 싶어서. 훌륭한 동기고 네 진심은 분명 아름다운 거겠지. 하지만 강렬한 동기 속에서 목표를 쫓는 사람들은 쉽게 자신을 내버리기 마련이란다.”
“······.”
“힘을 원한다고 했지? 그게 네게서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탐욕이지.”
“안 그런 사람도 있나요?”
“그것이 내 ‘창’을 이어받는 거라면 달라지지.”
육합창.
에린 다누아의 비의.
흉사(凶蛇), 횡소호풍(橫掃虎風), 란나찰(攔拿扎), 회천(廻天), 괴산(壞山), 수라(修羅)────마지막. 영역 무간(無間).
최강의 창술사 타테스 발타자르가 사용하는 최종비의. 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나와 타테스의 이야기는 알고 있지?”
“······네.”
그녀는 제자에게 배신당했다. 최악의 형태로.
육합창을 전수하고 무간을 계승시키며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려 했다.
하지만 타테스 발타자르의 목적이 ‘낙원도래’임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계승의 마지막 단계를 거부했다.
분명 그것은··· 그녀 인생의 최대최악의 실패였을 것이다.
“망설이고 고민했단다. 나는 너무 많은 실패를 겪었고, 언제나 옳은 결정을 내린 게 아니니까.”
에린 다누아라는, 이 세계 최중요 NPC의 비극적인 결말. 과거를 다룬 텍스트. 그녀의 진심.
을 플레이한 유저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가 플레이어에게만 허락한 진심은······.
“박시후 그 아이는 믿을 수 없지만. 코린 로크, 너만큼은 달라. 내 수많은 실패 중에 너만큼은 그리되지 않으리라 믿어. 그러니까──”
“코린 로크! 그대는 나 에린 다누아를 스승으로 모시겠는가!”
“어, 어어···.”
갑작스런 말에 얼을 타고 말았지만, 나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이것은 에린 다누아 캐릭터 시나리오 이벤트.
온갖 조건과 선 카르마를 쌓고서야 들어설 수 있는 플레이어만의 이벤트다.
“네, 네!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받들었다. 나 그림자 왕국의 여왕이자 정의의 다난, 에린 다누아. 코린 로크에게 육합(六合)의 도(道)를 전수할 것을 전한다.”
“가, 감사합니다!”
됐다! 이걸로 육합창 스킬을 습득할 수 있다면··· 나도 왕의 수하를 상대할 만한 무력을 갖출 것이다.
“외삼합(外三合), 내삼합(內三合)을 개합(開合)할 것이며 이로써 너의 심(心)과 의(意)를 일으키고 인도하리니. 코린 로크.”
“그대는 정의, 정의, 오직 정의를 쫓을지어다.”
“맹세··· 합니다.”
무릎을 꿇은 내게 준엄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에린 다누아. 그녀는 보석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더니······.
“이리 와보렴.”
한순간에 분위기를 바꾸고 양팔을 벌렸다.
“어, 예?”
갑작스런 분위기 전환에 당황하는 찰나 꼬옥 나를 제품에 파묻히는 에린. 조금··· 놀랐다.
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이며, 따뜻한 품 안이, 간지러운 목소리가 흐른다.
“넘어져도 괜찮아. 다시 일어서면 돼.”
“실패해도 괜찮아. 다음에 성공하면 돼.”
“울어도 괜찮아. 더 크게 웃으면 돼.”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고, 신념을, 왕도를 걸으렴. 그리하면 너는······.”
“영웅이란다.”
그 품 안은 너무나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차서··· 강한 힘도 아닌데, 벗어날 수 없다. 그녀는 지긋이 나를 응시하더니 내 이마를 쓸어 담아······.
“네게 여신의 축복을 깃들어줄게.”
친애의 증거로 이마에 입 맞춘다.
분명 나는··· 그때의 온기를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 * * *
“즐거웠단다.”
“300년 동안 봐온 것이니 질리지는 않았어요?”
“혼자서 보는 것과 둘이서 보는 건 많이 다르더구나.”
내가 이 도시에 도착하고 열흘 하고도 이틀. 그리고 리셋된 반복의 시간으로는 사흘째의 낮.
우리는 데이트를 했다.
연극을 감상하고, 책을 읽고, 서커스를 구경했다.
평범한 시간. 하지만 그녀나 나에게나 특별한 의미를 가졌음은 부정할 수 없다.
“즐거웠으면 좋네요. 끝내주는 식당에 가지 못한 건 아쉽지만.”
“꼭 좋은 식당을 가야만 의미 있는 건 아니란다. 미래의 제자님과는 무엇을 먹어도 즐거웠는걸.”
낡은 흙바닥 위에서 보자기를 깔고, 보존식량 따위를 먹으면서도 즐거웠다.
“이제 곧 밤이구나.”
밤이 찾아온다.
마지막 사흘째의 밤. 불사왕 게롤그를 쓰러뜨리고······.
“오늘 밤. 이 영원한 밤을 끝내고 나즈레아를 정화할 거예요.”
“······그래. 네 이론대로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이론이 아니다. 실전으로 검증된 것이다. 나와 박시후가 고안하고, 실증한··· 나즈레아의 완전한 정화.
이건 반드시 성공한다. 별다른 방해만 없다면.
“시작하기 전에 물어볼 것이 많지만··· 한 가지만 물을게.”
“뭐든 물어보세요.”
“그동안 많이 힘들었니?”
이 사람은··· 신기한 사람이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통찰력으로 읽어내고 가장 필요한 말을 해준다.
배려해주고, 안아주고, 다독여준다. 그런 사람이다.
“고생했죠. 예, 넘어져도 봤고, 실패도 여럿 했고, 울기도 몇 번 울었죠.”
그러나 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는 성공했다. 다음에도 웃을 것이다.
“제가 말했죠. 돌려드리는 거라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벽에 선 그녀의 등 뒤를 짚고 언젠가의 그녀처럼 말없이 응시한다.
“아······.”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래, 이건 그녀는 알지 못하는 감정이다.
이건 다른 시간 선의 나와 스승님의 추억이니까.
“그래.”
시선이 교차하고 침착해진 에린은 선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다.
“미래의 못난 내가 원망스럽구나.”
“못날 리가요.”
나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는다. 전 회차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이 하얀 사람은··· 언제나 나의 지지자였으며 지탱해주던 스승이었다.
“제가 당신에게 받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걸요.”
그녀를 품에 안았다. 무례하고 당황할 거라고 알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되니까.
“제, 제자님?!”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버둥거리는 에린. 하지만 내가 멋쩍지 않도록 힘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놔주고 아주 조금만, 거리를 벌렸다.
“크, 크흠······.”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볼을 긁적였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단호하게 물었다.
“에린.”
“어, 어어? 응. 왜 그러니?”
“키스해도 돼요?”
“으으응?!”
언젠가 반드시 돌려주고 싶었다. 친애하는 그녀에게.
“어, 어째서?”
우물쭈물하는 에린. 그래, 나는 분명··· 그녀를 스승님과 대입하고 있었다.
지금의 에린은 스승님과는 조금 다른 인물. 그럴 터이지만······.
“제가 하고 싶어서요.”
“으읏···!”
뒷걸음질 치는 에린. 하지만 이미 벽 끝이다. 더 물러날 곳은 없었다.
“어··· 저 혹시 제자니임······.”
“말씀하세요.”
“우, 우리··· 그렇고 그런 관계였던 거니? 그··· 굉장히 깊은 관계?”
“단언컨데 부모님을 제외하고 당신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생명을 바쳐 나를 지켜준 어른이자 내 삶의 스승. 이세계로 와버린 내게 있어 가장 특별한 사람.
“그, 그렇구나··· 미래의 난 대체 무슨 짓을··· 천 살 연하라고······.”
드물게 기어가는 목소리라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곧 굳건해진 시선의 그녀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괴애앵장히 이례적인 일이란다? 이, 이런 건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이 없어.”
“그 정도예요?”
“다, 당연하지.”
발타자르에게 배신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각별한 제자관계였을 텐데, 이 도시의 에린은 아직 발타자르를 만나기 전이니까 뭐 그럴듯하다.
나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에린의 이마를 쓸어올리며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저한테 정말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녀가 항상 내게 선물해준 친애의 증거. 긴장한 듯 눈을 질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바라건데, 이번에는 제가 당신 앞에 서기를.”
────
“······으읏?!”
지나치게 목소리가 커서 당황한 게 눈에 띌 정도였다.
“왜 그래요?”
질끈 감았던 눈을 뜨는 에린. 뺨이 살짝 붉어진 건 석양이 비쳐서인가?
“오, 오늘은 여기까지. 자극이 너무··· 강하구나.”
무슨 소릴 하시는 거지?
다만 알 수 있는 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서 떨리는 입술을 숨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디 아파요?”
열이라도 있나 싶어서 이마에 손을 대는데, 탁! 하고 내 손을 쳐내는 에린.
“오, 오늘은 여기까지라니까?!”
“예?”
너무 격한 반응에 오히려 이쪽이 얼을 탈 정도다. 뭘 여기까지라는 건지······.
“너, 넌 제자고, 난 스승이야!”
뭐지, 이 오래된 멜로 드라마에서 나올 것 같은 대사는. 그보다······.
“전 에린을 스승으로 생각 안 하는데.
“흣···?!”
지금의 에린은 스승님이 아니다. 스승님의 먼 과거. 그야 같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구분은 해둬야겠지.
“아, 아아··· 난 도대체 제자와 어디까지 금단의 영역을······.”
바들바들 떨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흘리는 에린.
“아, 아무튼 제자님. 이 정화가 끝나면 어차피 난······.”
그녀의 말이 채 끝나려는 순간, 어둠을 가르는 섬광이······.
-콰아아아앙!
우리가 있던 자리를 덮쳤다.
············
·········
······
“그, 히, 하, 호, 하, 히, 호호······.”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게롤그는 미소 지었다.
부푼 살덩이는 온데간데없이 게롤그의 몸통에는 고깃덩어리 한 점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내부에는 아직 적출하지 못한 영혼심장이 남아있다. 즉, 리치화 자체에는 성공한 것이다.
하늘을 응시한다.
그가 슈퍼 블러드 문을 이용해 도시 전체에 새긴 대마법. 그것을 오염시킨 원초의 룬 『 n 』 .
룬이란 본디 문자 그 자체로 의미를 밝히며 마법으로 화하는 것. 그렇다면 여기에 또 다른 룬이 새겨지면 어떻게 될까?
『낙원은 계속된다.』
라는 뜻을 가진 룬 문자의 앞뒤에 또 다른 룬을 새겨 의미를 변질시킨다면?
하기에 따라서는 이미 새겨진 룬의 힘 그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응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원초에 이었다. 나 게롤그가 달의 마력을 온전히 지배할 것이다.”
앞뒤에 그가 새긴 룬. 위대한 대마법사인 그이기에 하늘에 새겨진 룬의 앞뒤에 또다른 룬을 새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 이 도시를 감싸는 룬의 마법은 뜻을 잃고 『망자들의 낙원이 계속되리라』로 변질되어 도시의 마성은 몇 배고 증폭된다.
즉, 나즈레아 120만 언데드들이 더욱 강력한 힘을 얻고, 진화하여 망자들을 지배하는 불사왕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이다.
“죽여주마, 마녀. 이번에야말로 그 육체를 허물고, 시신을 능욕하여 영혼까지 범해주마!”
불사왕의 폭소가 도시를 잠식한다.
망자들이 노래하고, 생자들이 절규하는 사흘째의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