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124
마탑의 마법사들(2) 삽화有
“만로지는······.”
마탑 아홉 개 마도학파 중 흑(黑)의 수장인 엘더 모르슈탄은 이틀 전을 마지막으로 돌아오지 않는 제자에 재차 소식을 물었다.
“죄송합니다, 엘더 모르슈탄······. 만로지 사제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
“아, 아마··· 도박장을 전전하고 있는 게 아닐지요. 도박장에서 술에 취해 몇 날 밤을 지새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요.”
만로지는 모르슈탄의 제자 중 한 명이다. 총 8층으로 이루어진 마탑에서 4층 마법사면 제법 실력 있는 제자.
그런 그가 뒷골목 도박장에서 변을 치렀을 리는 없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락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만로지 그가··· 황금의 마도사 에이드린일 가능성.
자유자재로 얼굴을 바꾸는 그라면 이번 마법병단이 움직일 때, 일행 중 한 명을 가둬두고 합류했을 가능성 말이다.
소문만 무성한 마탑의 탑주. 로드 에이드린. 그는 빛의 신위이자 찬탈의 아르드리 타테스 발타자르에게 직접 지시를 받는다.
이번 흡혈귀 포획작전도 그가 아르드리가 명한 것으로 ‘뱀파이어 로드’ 계획을 들었을 뿐, 엘더 모르슈탄이나 엘더 아드말렉도 상세한 계획은 모른다.
만약 자신의 제자 만로지가 실은 에이드린이 위장한 것이라면 행동에 나선 것일 수도 있다.
“렐린을 보내. 만로지의 행방을 찾아.”
“알겠습니다, 엘더 모르슈탄.”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모르슈탄은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대도서관의 자료에 집중했다.
아직 때가 아니다. 이번 지령은 크다.
흡혈귀 마리에 듀나레프의 소체 확보··· 그리고 이사장 에리우 카사르 살해.
이만한 대사건을 일으키는 건 마탑 입장에서도 부담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확실할 때를 노려야 한다.
“와아, 렌. 딥따 크다아.”
“호들갑 떨지 좀 마. 도서관에선 조용히 하랬잖아.”
“힝··· 렌은 맨날 나한테 뭐라구만 하구.”
과제 준비를 위해 도서관을 방문한 1학년 남매가 흑마법사 모르슈탄의 눈에 띄었다.
“······수인들.”
마탑을 후원하는 왕녀가 치를 떠는 족속들. 거기에··· 워낙 튼튼하고 질긴 생명력을 가져 실험에 이만한 마족들이 없었다.
“너.”
“네, 엘더 모르슈탄.”
“저 꼬맹이들에 대해 알아봐.”
모르슈탄은 음산한 표정으로 남매들을 응시했다. 그 꺼림칙한 시선은 아주 오랫동안 남매를 꿰뚫었다.
* * * *
체단실. 아리샤와 단련 중이었다.
“선배님, 저 1학년 로제입니다.”
“어, 로제 후배님. 어쩐 일이야?”
“실은 무기 설계하는 과정에서 난해한 부분이 생겨서······.”
지난 헌팅 그라운드 실습에서 나는 400명의 신입생들에게 마석을 뿌렸다.
전부가 3급 이상의 중상등급 마석들. 이것들을 나눠주면서 신입생들에게 무기를 설계하는데, 난해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방문하라 했었지.
“코린 씨, 무슨 일이에요?”
“어, 후배가 찾아와서. 잠깐, 쉬고 있어.”
“네엡~”
땀을 주륵주륵 흘리던 아리샤는 비치되어 있던 수건으로 제 땀을 닦으며 생수를 마시기 시작했다.
“제가··· 방해가 됐을까요?”
“어? 아냐. 부담 갖지 마. 어떤 부분이 어려운데?”
“실은 여기에 이음새와 날로 이어지는 부분의 마력회로가······.”
에서 무기 제작만 수천, 수만 번 해본 나다. 어떤 재료를 썼을 때, 어떻게 조합해야 최적의 효율을 발휘하는지는 꿰고 있다.
나는 성심껏 후배에게 조언했고, 후배도 전부 알아들은 건 아니지만, 열심히 메모하며 내 조언을 흡수했다.
“이만하면 되겠다. 퍼거스보단··· 홀그렌 그 양반한테 가봐. 대검류는 그 사람이 더 잘 만드니까.”
“아, 감사합니다!”
“완성되면 들고 와. 상태 봐줄 테니까.”
“넷! 정말 감사합니다!”
떠나가는 로제 후배님. 그런 후배를 보면서 아리샤는 풀었던 머리를 정돈하며 말했다.
“오늘만 세 명째네요. 귀찮지 않으세요?”
“파릇파릇한 후배들 몇 마디 조언해 주는 걸로 살아남으면 이득이지 뭐.”
“흐음······.”
“왜?”
“그냥요.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라.”
“단련이 자꾸 중단되는 거 같아서? 미안하다. 이 시간대에는 이곳에 있을 거라고 말해버렸거든.”
“······그거죠. 네, 뭐, 그거죠.”
왜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거지?
“맞다, 코린 씨. 저희 「사랑과 전쟁」 교양수업이요. 다음 주 과제 준비는 됐어요?”
“하~ 그거 말이지.”
사랑과 전쟁은 1학기 교양수업으로 신청한 수업 중 하나다.
매주 2학점 2시간짜리 수업으로 연극과 관련한 수업이라기에 대충 연극 구경하다가 감상문 쓰고 끝나는 꿀 수업일 줄 알았는데······.
“참 시키는 것도 많아. 연극 보러 다녀오래, 연극 감상문도 써오고 토론도 하고··· 최종과제는 아예 조별로 연극까지 해야 하는 거였지?”
“조, 좋지 않나요? 직접 체험해보는 것도 많구, 생각해볼 것도 많은데······.”
“하는 김에 단련은 여기까지 하고 카페서 과제나 같이 할까?”
“그, 그럴까요? 그럼 커피는 제가 살게요!”
우리는 곧바로 근처 카페로 향했다.
교내의 카페는 학생들이 사용할 것을 전제로 해서 디저트와 빵이 매일같이 구워지고 공부를 위해 이용하는 이들이 많아 항상 북적거린다.
대학 다닐 때는 운동만 해서 카페 공부족들이 이해가 안 갔는데, 막상 아카데미 생활 6년 차이다 보니 이젠 그들이 이해가 간다.
집에서는 유혹이 많거든. 이거하다 TV보고 저거하다 컴퓨터 하고··· 인생의 낭비라는 SNS도 침대 위에서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보내면 격언 그대로가 되어 버린다.
반면 카페나 독서방 같은 곳은 일단 유혹이 적다. 의자는 푹신하지 않아도, 딴짓을 못 하니 자연스럽게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다.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지만.
“결국 말이야. 이건 운명적 로맨스를 가장한 불륜이라는 거지.”
“하지만 여주는 불운한 가정이었는걸요. 남편도 여자에게 막대했고요.”
“개인 가정사의 문제지. 좋은 남편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불륜이 정당화될 순 없어.”
“으··· 그야 그렇지마안······.”
“서로의 서사는 로맨틱했고, 상황도 그럴 법한 상황이긴 했어. 하지만 결국 포장지의 문제야.”
나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고, 아리샤는 감성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불륜 연극을 어지간히도 인상 깊게 본 모양이다.
“마, 만약에요! 코린 씨라면 불륜을 안 했을 거 같아요?!”
“어? 얌마, 그런 얘기가 왜 나와?”
“주, 주인공들한테도 감정을 이입해봐야죠. 그, 그래요. 예를 들면 코린 씨하구 언니하구 부부 관계라고 쳐요.”
“루니아 씨가 왜 나와?”
“약혼까지 하려고 했잖아요!”
“그거 가짜라고 내가 전에 말했잖어.”
“가정법이니까요!”
아리샤는 진지한 눈으로 빵과 커피를 들고 각각 나와 루니아라며 가리켰다.
“형부가 언니하고 가정사도 네? 그, 리스 기간··· 권태기? 그런 거라고 쳐요.”
“혀, 형부?”
“그런 상황에서 제가! 형부를 유혹하면요?”
“······유혹하게?”
“네! ···············아, 아니, 가정법이라는 거죠.”
너무 당당하게 네, 라고 외쳐서 당황했잖아. 가정법이지? 가정법이지?
“젊고 예쁘고 경험 없지만, 형부를 사랑하는 처제가 있다고 치고······.”
아리샤는 슬쩍 내 옆에 앉더니 슥 하고 나를 올려다봤다.
“형부··· 저, 형부가 좋아요.”
눈망울 진 푸른 시선이 나를 올려다본다. 고혹적이고··· 어딘가 요염한 시선. 살짝 상기된 붉은 열꽃이 심장을 자극했다.
“이, 이렇게 말하면 어쩔 건데요?”
“평범하게 거절하지··· 않을까?”
“제, 제가 그렇게 매력 없어요?!”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냐······.”
진퇴양난이다. 불륜을 하자니 도덕적인 문제가 되고, 안 하자니 여자애보고 너 매력 없다고 말하는 격이다.
여기선 사회적 관계를 위해서라도 거짓을 택해야 하나······.
“잠깐.”
“코린 씨?”
“정황을 바꿔보자. 너하고 나하고 결혼했고, 루니아 씨가 유혹하는 걸로. 무, 물론 루니아 씨가 매부를 유혹할 거라곤 생각되지 않지만······.”
“하, 할 걸요?”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아무튼, 코린 씨하고 저하고 결혼··· 했다는 거죠?”
손가락을 베베 꼬며 쑥스러워하는 아리샤.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렇··· 지?”
“애, 애는 얼마나 낳았는데요?”
“애? 어··· 평범하게 한둘 낳지 않았을까?”
“부족해요! 무조건 열둘 보다는 많아아죠!”
“······가능해?”
세쌍둥이로 4년을 내리 낳아도 부족한데?
“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아이는 무조건 많으면 좋다구요.”
나는 그 말에 스윽 아리샤의 배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솔직히 말해서 쌍둥이만 낳아도 위험할 것 같은 늘씬한 체형인데······.
“어쨌든 니가 내 마누라야. 그런 상황에서 루니아 씨가 나를 유혹한다고 쳐. 너는 괜찮겠냐?”
“으음···············.”
“고민할 문제가 아니지 않니?!”
“어··· 하, 하지만 언니는 코린 씨를 사랑하는 거죠?”
“응? 불륜··· 까지 저지르려고 했으면 그렇지 않을까?”
“사랑하는데··· 맺어지지 못한다는 건 불행한 일이잖아요······.”
그게 그렇게 되나? 너 역지사지를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야? 조금 더 이기적으로,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라고······.
“으음···! 코린 씨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괜찮을 거 같아요!”
“슬슬 너의 결혼관이 무서워진다 야······.”
“애초에 그걸 부정하면··· 제 태생도 부정하는 거니까요.”
“어···.”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나? 괜한 지뢰를 밟은 것 같아 미안해진다.
“아리샤, 네 출생은··· 너한테 잘못이 없어.”
“······알아요. 그러니까 코린 씨.”
아리샤는 쑥스러워하며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둥그렇게 긁어댔다. 마치 내게 맡기겠다는 듯이.
“코린 씨는 사생아라도 차별 없이 사랑해주세요.”
그··· 내가 불륜을 저지를 거라는 전제하에 말하는 거지?
그 말을 꺼내기에는 아리샤의 표정이 심각해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다들 사이좋게 지내면 좋죠! 대가족도 꾸리고 집도 엄청 크게 짓고요!”
어씨 뭐야. 그럼 아리샤하고 결혼하면 다른 여자들도 데리고 살아도 된다는 건가?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잘못됐다고 말할 수가 없다. 잘못 말했다간 탈룰라 각이다······.
“히히, 나쁘지 않네요. 열셋씩만 낳아도 최소 스물여섯 명!”
아리샤의 조금 어긋난 가족관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지적할 수 없었다.
* * * *
렐린은 이번에 방문한 마법사 중 흑마도학파의 3층 제자였다.
“하 씨··· 만로지 이 대머리. 어딜 쏘다니는 거야.”
혼자 다니는 지금만큼은 한창 선배인 사제를 씹어대는 렐린. 어딜 가나 말단이란 좋지 않은 대우를 받는 법이다.
“그 대머리? 글쎄? 돈을 엄청 따가긴 했지.”
“사기 치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긴 했는데.”
평소 만로지의 패턴대로 그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도박을 했던 모양이다.
“하아······.”
그런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정보가 혼잡하게 얽혀있다.
누구는 술에 진탕이 되어 나갔다고 하고, 누구는 딴 돈으로 창부들을 옆구리에 끼고 나갔다고 한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마법에 관해서는 빠삭할지 몰라도 정보 조사 같은 건 쑥맥인 법이다. 책상머리에게 무얼 바랄까?
“망할 대머리. 망할 모르슈탄. 내가 마탑에 들어간 건 이딴 뒤치닥거리나 하려고 들어온 게 아닌데······.”
마탑의 수습기간은 생각보다 길고 난해하다.
늙은 장로들에게서 마법지식 하나 배우는데도 한세월이고, 수습이라는 명목 하에 오랜 세월을 잡일로 낭비한다.
아카데미처럼 스승과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도제 관계에 가까워 함부로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이번 일만 끝나봐라. 바로 적파로 이적한다. 적파에선 그 늙은이 비위만 맞추면 되니까······.”
렐린은 말단 마법사지만 제법 반반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마법의 프라이드니 고매한 정신이니 뭐니 하는 늙은이들도 로브자락 벗어서 허벅지 좀 보여주면 정신을 못 차리더라.
두루뭉술한 정보만을 얻은 채, 궁시렁거리던 렐린은 근처의 괜찮은 술집을 찾아 들어섰다.
만로지가 도박을 위해 들어간 술집보다는 보다 세련되고 분위기 좋은 바다. 마법사쯤 되는 인텔리한 이들은 이런 곳을 이용해야지, 추잡한 대머리··· 라며 다시 한번 선배를 씹어대는 렐린.
“혼자 왔어요?”
“어?”
그때, 자연스럽게 옆에 앉는 누군가. 렐린은 그가 누구인지 안다.
“너는······.”
아카데미에서 붙여준 안내인. 기사 나부랭이의 이름은 잘 몰라도 얼굴을 보면 기억이 난다.
“코린 로크입니다. 미스 렐린.”
“······미성년자가 술집엔 왜?”
“아는 삼촌이 하는 곳이거든요.”
그는 섣불리 앉지 않고 그녀 옆에서 기대며 렐린에게 시선을 보냈다.
“술 한 잔 사도 될까요?”
“됐어.”
“폴 삼촌, 여기 마티니 두 잔.”
싫다고 거부해도 기어코 술을 사고 자리에 앉는 코린. 자연스럽게 렐린의 시선도 코린에게 향했다.
“작업멘트 날리기엔 너무 어리지 않니?”
“아 쫌~ 마법사잖아요. 이성적으로 사고하세요.”
“······이성적으로 뭘?”
“꽃이 있는데 벌이 꼬이는 건 당연하죠.”
“꽃? 벌? 흐하핫···!”
“이런 게 작업멘트죠.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렐린은 이 영계의 수작질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탑에서 늙은이들의 비위나 맞추던 그녀다.
생체실험에 쓸 고아 계집 하나 공수받는 것도 수십 장의 레포트를 제출해야 하는 말단. 꿀 떨어지는 시선과 목소리로 저를 유혹하는 영계가 싫을 리가.
‘뭐, 그 늙은이 졸린보다는 훨씬 낫네.’
적파로 이적하면서 교수급 마도사의 비서 자리를 꿰차기 위해 유혹하던 늙은 마법사를 떠올린 렐린.
그녀는 곧 이 잠깐의 일탈을 즐기기로 했다.
“아, 술 왔네요.”
바텐더에게서 술잔을 받아 렐린에게 건네는 코린.
“의외네요. 마탑의 마법사들도 술을 마셔요?”
“편견이야. 오히려 우리들이야말로 진탕으로 술을 마시는 편이지.”
“인텔리하고 엘리트라는 편견이 있는데요.”
“그건 편견 아니야.”
“흐흐, 실험 같은 건 어때요? 마탑은 연구 쪽으로 유명하잖아요. 뿔 달린 토끼 같은 거 만들고 그러지 않아요?”
“뭐~ 토끼가 실험동물로 삼기에 좋긴 하지. 그러다 보니 와전된 거야.”
“최근에 한 거 뭐 있어요? 이야기 좀 해주세요. 내 친구가 곧 마탑에 들어갈 생각이라는데, 걱정이 많거든요.”
············
·········
······
“코린 씨, 선수네요.”
“······뭔 소리야?”
잠시 화장실을 핑계로 빠져나온 와중, 아리샤가 새침한 비난의 시선을 보낸다.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예요?”
“뭘?”
“여자 꼬시는 거요!”
아~ 오해긴 한데.
사실 꼬시려고 접근한 건 맞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자를 꼬시는 데 선수라는 건 오해의 여지가 있다.
“아니, 원래 술 사는 거 싫어하는 사람 있냐?”
“······없겠죠?”
공짜 싫어하는 사람 없잖아. 내심 거부해도 사주면 좋아한다고.
“원래 사람들은 대화의 주체가 자신이 되는 걸 좋아해.”
“······그래서 코린 씨 이야기는 전혀 안 한 거예요?”
“그렇지. 상대방 말만 잘 들어줘도 반은 먹고 가는 거지.”
와, 당신 대단해~ 당신은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야~ 이런 식으로 대화의 주체가 되어주면 상대방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걸 여자 꼬시는데 너무 잘 적용하는 거 같은데······.”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은 거나 마저 하고 오세요.”
“그래,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금방 끝내고 올게.”
묘한 시선에 등이 따가웠지만, 렐린을 마저 꼬시러 가야 한다. 여자 꼬시는 건 처음이지만 꽤 잘 돼가고 있는 거 같아.
“렐린, 기다렸······.”
“와~ 자기, 립스틱 색조 좀 봐. 엄청 예쁘다. 어디 제품이야?”
돌아온 렐린의 자리. 그 옆에 웬 늘씬한 미녀가 있었다.
반짝이는 핑크빛 머리카락, 에메랄드 같은 녹안. 싱글거리는 미소는 어두운 바에서도 화사한 존재감을 비친다.
“에스텔라야. 이름이 뭐야?”
“레, 렐린······.”
에스텔 하닷사 엘 라스. 이 나라의 제1왕녀이자 신교의 성녀.
“언니가 술 한 잔 사도 될까?”
누나가 왜 여기 있어?
(에스텔 하닷사 엘 라스 일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