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134
얽힌 운명(4)
“아무튼, 나처럼 치명적인──”
아까부터.
소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몽롱함과 그 와중에 뚜렷한 시선이 가운 사이로 드러난 복근으로 집중됐다.
거듭 말하자면, 이 소녀들. 남자라는 생물에 대한 면역이 없다.
안 그래도 성적 지식이 없다시피 한 백지 같은 소녀들이 사랑만은 자각했다.
한쪽이 애써 거절하기는 해도, 다른 한쪽의 열렬한 대시에 본인도 점차 따라가는 추세.
그런 와중에 최근 자연스럽게 한 침대를 쓰면서 생긴 육체적 거리감. 예상치 못한 럭키 해프닝.
한창때의 소녀에게는 자극이 좀 심했다는 거다. 그 결과······.
“화, 화야?”
“벗어.”
“예?”
“벗으라고.”
본인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폭주로 이어지고 말았다.
“화, 화란 양?”
깔아뭉갠 소년을 내려다보자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체온은 올라가고 아랫배까지 욱신거렸다.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 왜 자신이 코린의 가운을 묶은 띠를 붙잡고 있는지. 왜 거친 숨이 목구멍에서 쏟아지는지.
-콱!
“어어? 야, 잠깐?!”
확! 벗겨버린 가운. 노출된 상체. 탄탄한 잔근육들을 지점토에 지장을 찍듯 손바닥을 대어 본다.
따뜻하다. 막 목욕을 끝내 상기된 피부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손바닥을 데운다.
“따뜻해······.”
“바, 방금 씻었으니까?”
소년의 말은 무시하고 굴곡진 복근을 조물딱 거리는 화란.
마치 계획개발된 도시의 블록블록. 손톱이 길을 따라 달리면 그 끝에 얕고 탄탄한 둔덕이 있다.
-꿀꺽!
‘화, 화! 화! 나도! 나도! 나도!’
쭈우우욱 손가락이 저점에서부터 고점까지 올라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친 숨소리와 꼴까닥 침을 삼키며──
“이거······.”
그 중심. 명치라고 불릴만한 곳. 화는 그것을 목격하고 손가락을 멈췄다.
“어? 흉터?”
코린의 중심부. 커다란 흉터. 그 흉터가 무엇으로 인해 생겼는지, 그녀는 알고 있다.
“이거··· 그때?”
“아아, 이거···?”
타테스 발타자르. 그의 광창에 꿰뚫렸던 중심부. 그것을 목격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그녀를 얼얼하게 하고 있다.
“안 나았네.”
“빛의 창은 다른 무기와는 격이 틀리니까. 곧··· 낫긴 할 거야. 감쪽같이.”
화는 소년이 상처 입은 모습을 안다. 넝마조각처럼 너덜거리고 선혈이 주르륵 흘러도, 결국에는 다시 회복하는.
“그래도··· 달라.”
꿰뚫린 상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말한다.
광창에 꿰뚫린 상처만이 아니다. 그때의 너덜거렸던 팔을, 찢겨 나간 피부를,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던 이마를.
차례차례 만질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린다. 아프다. 그 모든 게 제 탓인 것 같아서.
“아프지 말라고··· 했잖아.”
상처가 난 몸의 중심에 볼을 맞댄다. 다른 살점과는 닿은 촉감이 전혀 다른다.
이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다른 촉감이야말로 제가 지키지 못한 소년의 상처였다.
“아프지 마.”
이 촉감을 기억하려는 듯 볼을 비빈다. 이 소년의 끈질긴 생명력을 알기에, 더욱이 자신을 사리지 않는 것이 슬펐다.
“다치지 마.”
차라리 내가 다쳤으면. 하지만 이 몸뚱어리는 상처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네가 다치면··· 아파.”
“심장이 욱신거려······.”
솔직한 심정을 토해낸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이 소년은 제 몸을 사리지 않을 테니까.
덥석, 볼에 맞댄 제 머리를 쓰다듬는 큼직한 손이 있었다.
“고맙다.”
제게 기대는 소녀를 품어주듯, 소년은 고마움을 담아 꽉 끌어안는다.
“그리고 미안해.”
“왜······.”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또 다칠 거라고, 야속하게 말하는 소년에 항거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목덜미를 쓰다듬는 소년의 손길에 금방 잦아들었다.
“사랑하는 게 너무 많아서. 지켜주고 싶은 거야.”
이미 늦은 밤. 따뜻하고 포근한 품 안에서 꺼져가는 눈꺼풀.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그녀만의 작은 둥지에서.
새근새근 잠이 든다.
* * * *
“헛···.”
화는 눈을 떴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비치는 햇살은 아침이 왔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일상은 화란에게 익숙해진 일이다.
소년이 어깨를 살포시 흔들고, 부스스한 눈을 뜨고 일어나 함께 세면대로 향하고.
이빨을 닦고, 비누칠을 하고, 제 방으로 돌아가 다시 샤워를 한다.
옷을 갈아입고 절그럭절그럭 나오다 보면 아침 먹자며 계단을 함께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기호에 따라 생선이 나오고 가라앉은 표정으로 생선을 응시하다 보면 소년이 다가와 생선가시를 발라준다.
제게 생선가시쯤이야 그냥 씹어 삼키면 되는 것이지만, 언젠가부터 이 행위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화와 란. 이 소녀들의 일상이란 결국 코린과 함께 시작하고 다시 코린과 함께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아침의 시작은, 지극히 일상적인.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인데······.
“······.”
화는 자신의 코앞에서 시커멓게 시야를 가리는 것이, 따뜻한 무언가가 누군가의 품 안임을 자각했다.
어젯밤 이후로 그대로 자버리고 말았다. 잠들고 말았다.
“············.”
비천야차. 생강시. 금강불괴.
흔들리지 않는 무적의 방어력. 상처 입지 않는 육체.
그 부동의 육신이 흔들린다. 미동이지만 흔들리고 있다. 확실하게 흔들리고 있다.
특히 눈동자가.
“으음······.”
드물게도 먼저 일어나지 않은 소년이 화의 뒷머리를 꾹 누른다. 필연적으로 가슴에 얼굴을 파묻게 되는 화.
저항할 수 없다.
이 품 안에서 벗어나기가, 머리를 누르는 팔에 거칠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생각해보면 늘 이렇다.
힘으로 압도할 수 있는데, 제힘은 이 소년보다 훨씬 강할 텐데.
밥 먹으러 가자며 손을 붙잡을 때면, 머리를 헝클며 쓰다듬을 때면···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뭉클하고, 따뜻하고, 편안하다. 이 소년의 품이, 이 딱딱한 근육들이 뭐라고 그런 생각이 드는가.
그 안락한 품에서 소년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려 본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모두를 배척했다. 가까이 두려 하지 않았다.
「밥 먹을래? 생선 사줄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소년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다. 아니, 제 울타리 안에 자신을 집어넣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거야.」
손을 멋대로 맞잡고.
「너는 아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어. 그때까진 내가 도와줄게.」
도와주겠다며 거리를 좁혀오고.
「······고마워. 믿음에 보답해줘서. 역시 넌··· 착한 아이야.」
언제나 칭찬과 배려로 잠식해온다.
「같이 찾아보자.」
고독한 오솔길. 태연하게 나란히 걸으면서.
손을 붙잡고, 저가 세운 성벽을 허물어뜨리며 기어코 제집과 연결한다.
언젠가부터 안락함에 취해버렸다.
자매가 시끄럽게 떠들면서 함께하는 미래를 꿈꿀 때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 함께 있는 자신을 떠올린다.
「또 그런다. 너도 오빠 좋아하면서.」
아니.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어쩔 수 없잖아.
란이 좋아한다고 붙어 있으면, 나도 같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우리는 한 몸을 공유하니까.
애써 부정하면서 자신이 무심코 소년의 품에 얼굴을 비비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고 숨을 집어삼켰다.
어어.
화악! 하고 달아오르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햇빛에 오랫동안 노출된 것처럼 새빨갛다.
「사랑하는 게 너무 많아서. 지켜주고 싶은 거야.」
사랑.
사랑 사랑.
그 단어가 쳇바퀴처럼 맴돈다. 빙글빙글 도는 눈동자와 화끈거리는 얼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콩닥콩닥, 시끄러운 심장소리. 혹시 코린이 아픈 건가 싶어 귓가를 가슴에 대보면··· 이상하게 소리는 멈추지 않는데, 귓가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닌 것 같다.
그 소리의, 감정의 정체를 깨닫는 건 몇 분이나 제 귀를 의심하는 과정에서 도출한 가설.
가슴에 귀를 떼고, 살포시 손을 심장에 얹어.
-콩닥!
확! 하고 깜짝 놀라 소년을 밀어낸다. 깊게 잠들었는지, 소년은 깨지 않았고 소녀만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어?”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코린을 내려다보며··· 놀라 뗀 다시금 제 가슴에 대는 것이다.
“아······.”
당황스러운 감정이 눈가에 묻어나고, 바들바들 떨리는 몸은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주체할 수 없다.
“으응··· 뭐야, 먼저 깼냐?”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언제나처럼 평범한 소년의 목소리건만, 화는 귓가에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어? 어?”
뭔가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자 화란은 뒷걸음질 치며 원흉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뭐야? 왜 그래?”
졸린 눈으로 일어난 소년이 다가오자 가속되는 뒷걸음.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평소와 달리 배려 없이 다가선 소년이 이마에 제 이마를 댄다.
“응? 감기 걸린 것도 아닌데.”
“아···, 어. 엇.”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며 소리를 내지 못하는 화. 생전 처음으로 자각하는 미지의 감정 앞에선 금강불괴도 사정없이 흔들렸다.
·········
······
···
“밥도 먹었겠다. 슬슬 가봐야겠지. 그나마 수업이 없는 게 다행이다만.”
“······응.”
안 그래도 얌전하지만, 아침 들어 유난히 얌전하고 소극적인 화란을 보며 코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아까부터 얼굴이 빨간데······.”
또 스스럼없이 뺨에 손을 대려는 소년의 손길을, 마치 폭탄이라도 본 것처럼 호다닥 피하는 화란.
“어···.”
소녀의 복잡미묘한 감정이 담긴 행동을 이 벽창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해할 뿐이다.
“왜 그래?”
“아니, 그··· 아니야.”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의아해하는 코린의 목소리마저 귓가에 쿵쿵 울린다.
“어디 아파?”
“거, 건들지 마!”
코린의 손길을 거칠게 거부하는 화란. 소년은 억울하겠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다.
아까부터 쿵쾅거리는 제 가슴의 위화감이 위험경고를 해오는 통에 이 이상 심장박동수를 높일 순 없는 것이다.
이미 고장이 난 심장에 망치를 때려 박는 들 무엇이 달라지겠냐마는.
“어디 아프면 바로바로 말해. 혼자서 끙끙대면 병 된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소녀의 순정을, 감정의 정체를, 연심을··· 이 심장 한구석에 뭉쳐진 묵직한 덩어리를 어떻게 소년에게 말한단 말인가.
「아프지 마.」
「네가 아프면··· 아파.」
「심장이··· 욱신거려.」
무심코 떠올린 과거를 회상하며 화란의 얼굴은 더더욱 봐주기 훈훈한 꼴을 하고 있었다.
자각 없이 내뱉은 말. 그저 솔직한 심정을 한 치의 거짓 없이 토로한 아이 같은 말을.
지금까지 태연하게 한 침대에 잠들고, 탄탄한 품에 얼굴을 비비고, 퍽 하면 손을 맞잡거나 무릎에 드러눕고.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러고 싶어서.
그게 편해서.
남녀관계의 무언가로 치부하자면 갈 데까지 가버린 관계. 그쪽의 제반지식이 전무한 소녀조차도 떠올리자면 머리에 피가 몰려오는 것이다.
이 뭉클하고 콩닥거리는 심장을 자각해버린 이상, 소녀에게는 끔찍하게 스스럼없던 모든 행동이 비수가 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너 정말 괜찮냐?”
다시금 훅하고 들어오는 코린. 숨소리에 간질거리는 귓가가, 멎어버린 심장은 삶을 자각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소녀에겐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
“오앗?!”
“오앗?”
의식의 추방이라고 해야 할지, 강제 시프트 체인지라고 해야 할지.
“엇, 오, 오빠?”
“왜 갑자기 란이?”
“으, 으흠···! 화가 많이 피곤한가 봐요.”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몸의 동거인은 그럭저럭 대응할 수 있는 사회성이란 게 있는 모양이다.
“아니, 푹 자놓고 뭔··· 뭐, 본인이 그렇다면야.”
“헤헤, 화가 지금 많이 혼란스러울 때거든요. 솔직하지 못하다니까요.”
“???”
그런 제 자매의 뻘짓을 아침부터 내내 봐온 란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오빠에게 달라붙는 것이다.
“그보다 오빠. 모처럼 시내에 왔는데, 우리 데이트하면 안 돼요?”
‘안 돼! 하지 마!’
강제로 란과 교체해놓고 그것을 지켜보던 화는 태연한 란의 행동에 항의의 목소리를 내었다.
데이트라니? 대체 제 동거인은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그런 요사스러운 단어까지 사용하며 붙어 다니면 제아무리 금강불괴라도 심각한 상처를 입고 말 거다.
“나도 그러면 좋겠다만, 오늘은 나름 일정이 있거든.”
“아~ 가디언즈 관련으로 업무가 있다고 하셨죠?”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화.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밀려온 감정의 파도를 지금은 진정시킬 때다. 그녀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그거지만. 그 전에 아리샤 간호도 좀 해야지.”
“아아~”
아리샤.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 이름의 주인이 ‘여성’이라는 것에 화는 저도 모르게 반응했다.
“어?”
덥썩, 소년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움을 가득 담은 눈망울이 코린을 올려다 본다.
“가, 같이 가.”
사랑을 자각한 소녀는, 아직 질투심까지는 자각하지 못했다.
아직까지는.
* * * *
불공평하다.
아리샤는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른 제 신세에 대해 그런 한탄을 내뱉지도 못하며 속으로 삼켰다.
“으으······.”
여기저기 멍든 상처는 일주일이 다 돼가는데도 붓기가 빠지지 않는다.
엘릭서를 마시기엔 아깝고, 크게 부러진 것도 아니라서 적당히 제 방에서 요양 중이지만.
“그래두···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직접 두들겨 맞은 건 화란인데, 그 밑에 깔려 있던 자신만 곤죽이 됐다.
코린을 보면 더 심하다. 명치 부분을 커다란 창에 꿰뚫렸는데도, 하루 지나니 멀쩡하게 돌아다닌다.
절대방어니 재생력이니 하는 것들의 불합리함에 소녀는 일주일째 거동이 불편한 제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다.
그래도 좀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아직도 아파?”
“아야야. 거기. 거기요오··· 계란으로 살살살 돌려주세요.”
“어우, 야. 아직도 붓기가 있네. 그런데 초콜릿 먹을래? 슬슬 죽 안 먹어도 되잖아.”
코린이 수시로 찾아와 자신을 돌봐준다는 걸까?
“먹여주면 먹을래요.”
“니가 애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초콜릿 봉지를 찢는 코린.
“아~ 해봐.”
“아아앙~”
먹음직스러운 초콜릿 바를 입안으로 삼키려던 그때였다.
-텁! 와그작!
중간에 낀 불청객. 옆에서부터 초콜릿 바를 통째로 삼켜버린 수녀복 소녀.
“······.”
“······.”
“······.”
코린과 아리샤의 멍한 시선이 집중되는 곳. 화는 입안 가득 삼킨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왜? 뭐?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