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157
고대의 잔해(1)
에스텔은 어디에서든 귀한 대접을 받았다.
타고나기를 높디높은 신분, 떠받들어지기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이런 대접은 감옥에서조차 그러했다.
가령 비단 융단과 푹신한 침대로, 서적까지 구비된 호화로운 감옥 안에서 반찬투정을 한다던가.
“저기. 스테이크를 가져올 거면 당연히 레드 와인으로 가져와야 하는 거 아니야? 티본에 화이트가 가당키는 해?”
“······거 주는대로 드시죠.”
“레드으으와아아이이이인···! 남부 포도농원에서 만든 35년산 듀나 와이이이인!”
“으··· 알았어요. 물어보고 올 테니까요.”
“그리고 가져오는 동안 고기 식었으니까 다시 해와. 아, 가니쉬는 먹을 거니까 가져갈 필요는 없어.”
“아쫌!”
에스텔을 감시하는 하층 마법사는 이 까다로운 죄수를 관리하다보니 신경이 갉아 먹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다. 마탑주가 직접 명령한 성녀 감시는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해달라는 것이었으니.
그걸 제외하더라도 그 자신도 어느 정도의 신앙심은 있다. 신성의 대리인이라는 성녀를 함부로 대했다가 천벌을 받는 건 내심 두려운 것이다.
물론 성녀를 납치한 무리에 속했다는 시점에서 그 신앙은 심히 하자가 있지만.
어쨌든 성녀라는 신분은 이렇게 납치된 와중에도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
마법사가 사라진 것을 본 에스텔은 기다렸다는 듯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았다.
“주여──”
그녀가 원하는 건 근력의 강화.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초인적인 힘. 분명 제 몸에서는 성력이 흘러나오고 있다.
“좋았어.”
기도를 마친 그녀는 쇠창살을 있는 힘껏 당겼다.
-끄으응! 끙끙! 아오, 손바닥 아파!
결국 포기해 버리는 에스텔. 그녀의 성력은, 기도는 여전히 발휘되지 않는다.
‘대체 뭐가 원인이지? 성배··· 그것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상하다. 어째서 성배가 자신의 기도를 무력화한다는 것인가?
“하아··· 이럴 땐 왕자님이 공주를 구출하는 건데.”
결국 그녀가 바랄 수 있는 건 주에 대한 기도와 바람이 아닌 이 국면을 파헤쳐줄 영웅적인 왕자님뿐이란 거다.
물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왕국이, 교단이 군대를 동원했을 터.
아무리 마탑이 대단한 대비를 했어도 결국은 패배할 게 분명하다.
‘문제는 내 피를 매일 뽑아가서 뭘 하고 있냐는 거야.’
에스텔이 죄수 신분임에도 이토록 호화로운 관리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그녀를 건강한 상태로, 스트레스도 최대한 줄이며 신선한 피를 뽑아가는 것.
그렇게 뽑아간 피로 에이드린과 성배를 가진 둔 스카이스라는 자가 무언가를 벌이고 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몰라 답답할 지경이나 성력을 발휘할 수 없는 에스텔은 한낱 가녀린 여인일 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넘쳐나는 시간에 대한 고찰과 습관처럼 행해지는 기도다.
“주여, 저를 이 환난에서 구하시고, 죄 없는 어린 양들을 불쌍히 여기사······.”
기도를 하면서 성녀는, 왕녀 에스텔은 의문을 품는다.
신이 있다면, 자신이 정말로 신과 연결된 존재라면··· 어째서 이 상황을 그저 지켜만 보시는가?
그런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불경하다면 불경한 의문을 품고 말았다.
* * * *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하수도의 낮밤은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다.
생체시계에 의존해 부스스한 눈을 뜨니 품에 따뜻한 무언가가 안겨 있다.
-휘이이이이······
솜이불에 몸이 푹 꺼진 것처럼 길게 늘어지는 숨소리를 흘리는 화란.
스윽스윽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니 더욱이 내 가슴팍에 몸을 파고든다.
“좀 더 자게 놔둘까?”
다른 사람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고.
“오빠?”
그때, 품에서 스르륵 고개를 드는 소녀. 푸른 눈동자의 소녀가 파묻혔던 눈가를 빼꼼 들어올려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내가 깨웠나?”
“화는 아직 자고 있어요.”
“인격 따라 자고 일어나는 시간도 달라?”
“기본적으로 육체를 따라가지만요. 그래도 육체가 잠들어 있을 땐, 깬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오호.”
즉, 육체의 제어권을 화가 가지고 있어도, 화가 잠들면 란이 제어권을 차지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럼 슬슬 일어날까? 다른 사람들이 잘 찾아오는지도 지켜봐야 하고.”
“그······.”
평소 싹싹하게 굴며 집안일을 거들던 란이 드물게도 주저한다.
“왜 그래?”
내 물음에 란은 대답하지 않고 양팔로 허리를 감싸더니 내 가슴팍에 코를 부비적거리는 것이다.
“란아?”
“그냥··· 조금만 이렇게 있을래요.”
나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냥 란의 허리를 토닥여줬다.
“오빠 품은 따뜻하고 기분 좋아요.”
“클라우 솔라스 덕에 양기가 흘러나오니까······.”
“아니요, 그게 없었더라도. 분명 좋았을 거예요. 확신해요.”
“그러냐.”
란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마리에보다도 적극적으로 어필했지.
-꾸욱
란의 허리를 꽉 잡아 끌어안자 품 안에서 란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오, 오빠?”
“고맙다. 나 같은 놈을 좋아해줘서.”
“······오빠가 어때서요.”
“그냥. 그냥 다 고마워.”
그렇게 한동안 란을 끌어안고 있었다.
·········
······
···
하수도 관리실을 떠나 주변 정찰을 하고 왔다. 겸사겸사 하수도 곳곳에 룬도 새겼고.
무려 1만을 넘어선 내 마력량 덕인지 하루 만에 룬을 새기는 작업은 이전처럼 고되지 않았다.
오히려 넘치는 마력 덕에 욕심을 부려 최대한 크게, 정밀하게 룬을 새기느라 40문자밖에 새기지 못했지만.
“오빠, 오셨어요?”
정찰과 룬 공장 작업을 하고 오니 란이 말린 쇠고기와 코린 포테이토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 코린 포테이토.”
“오빠가 개발한 거였죠? 평가가 좋던데요?”
코린 포테이토는 내가 1학년 가정실습 수업 때, 개발한 전투식량이다. 감자를 꾹꾹 눌러 종이처럼 얇게 만든 걸로 모티브는 2차 세계대전의 전투식량 개발사다.
“이거 개발했다고 왕국군으로부터 표창도 받고 상금도 받았어.”
“와~ 대단해요.”
손뼉을 치며 호응해주는 란. 그녀는 나무 국자를 이용해 코린 포테이토를 야전용 냄비에 굽고 있다.
“메쉬드 포테이토?”
“네. 그리고 이건 통조림으로 만든 스튜예요.”
보글보글 끓으며 식욕을 돋구는 냄새를 풍기는 스튜. 게릴라전에서 냄새가 나는 음식을 하는 건 금기시되지만, 관리실 바깥은 하수도로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하니 괜찮겠지.
“누릴 수 있을 때, 누려볼까.”
란이 만든 쇠고기 스튜와 메쉬드 포테이토는 전투식량으로 제조한 물건이라기엔 꽤나 먹음직했다.
맛있다! 라고 감탄할 정도는 아니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이만하면 훌륭한 식사다.
“맛있네. 이렇게 만들기 쉽지 않았을 텐데.”
객관적으로 봐도 란의 요리 실력은 상당한 편이다. 내 주변에서는 마리에 다음. 아리샤는 뭐, 먹는 거 담당이고.
“오빠, 저 요즘 요리를 배우고 있어요. 꽃꽂이나 시부모님을 모시는 방법도요.”
“어?”
요리야 그렇다 쳐도 꽃꽂이나 시부모 모시는 건 대체 왜······.”
“그걸 왜──”
“짠!”
질문을 위해 입을 벌린 순간, 스푼으로 조리 중이던 메쉬드 포테이토를 내 입에 밀어 넣는 란.
화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특유의 요망한 눈빛. 배시시 웃으며 올려다보는 시선이 깜찍하다.
“이 세상에서 단 한 분만을 위한 신부수업이에요.”
심장이 부담스럽다.
이쯤 되면 사실상 고백이다.
란은 이런 식으로 내게 어프로치를 할 때가 많았다.
장난스러운 듯하면서도, 시선만은 매우 진심인··· 흔들리지 않고 확신에 찬 눈동자가 제 의지를 전달한다.
그런 열망에 찬 사랑 고백을 듣자면 무심코 손이 가버리는 것이다.
“란아──”
절절한 시선의 소녀에게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퍽! 하고 거칠게 손을 후려치며 뒷걸음질 치는 란.
“이, 이익···!”
한가득 단풍색으로 물든 볼 테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는 동공과 ‘만져질 뻔한’ 머리를 손으로 감싸 보호한다.
“너, 너··· 방금······.”
뭘 하려고 했어? 라며 조금 과한 반응을 보이는 화.
“화, 화냐?”
“······.”
말없이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화. 무뚝뚝한 표정이 디폴트인 화지만, 가끔 이렇게 감정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마, 만지지 마!”
“어?”
내가 얼탄 반응을 보이니 화는 더욱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재차 말하는 것이다.
“나··· 만지지 마.”
“아니, 왜······.”
그, 우리가 그래도 스킨십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오빠동생 사이 아니니?
“네가 만지면··· 기분 나빠.”
“그 정도야?”
이 오빠는 그런 말을 들으면 상처받아요.
“미안하게 됐다.”
“아니, 그 정도는······.”
화란이 뭔가 말하려던 그때였다.
“컹···!”
거칠게 문을 박차고 커다란 개 인간이 관리실에 들이닥쳤다.
“컹컹! 크르릉컹!”
여느 때처럼 사나운 하울링을 거침없이 뿜어내는 덕구. 덕구가 왔다는 건 마리에도 왔다는 거다.
“으~ 덕구야! 아빠 냄새 잘 찾았어? 난 코가 막혀서 모르겠던데, 으응?”
강철 군도에 들어서고 사흘째. 마리에도 세이브 포인트에 합류했다.
* * * *
마리에가 합류하고서 사흘째의 오후. 마탑 지하 하수도의 관리실에는 에린 스승님과 조제핀 여사도 도착했다.
“저는 이곳에서 언제든지 공간도약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조제핀 여사는 탈출담당이다. 전투원으로서의 그녀도 굉장한 실력자지만, 이곳 마탑에 한정해서는 무력한 편이다.
전에 언급했듯이 마탑은 마녀혁명을 겪으며 공간의 마녀에게 엉망진창으로 당해버린 전력이 있다.
과거의 악몽 탓에 강철 군도 전체에 방해결계를 설치했을 뿐 아니라, 마탑 내부에는 편집증적일 정도로 빽빽하게 틀어막았다.
그 덕에 공간마법진을 통해 층수를 오가던 마탑 마법사들은 기계장치로 돌아가는 최초의 엘리베이터를 개발했다는 웃지 못할 개발사까지 있었지.
어쨌든 이 마탑 내부에서 조제핀은 해협 너머에 있는 마커를 향한 공간도약 말고는 공간마법을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전투 마법사로서의 역할은 마리에에게 맡기는 게 낫겠지.
“화란 학생도 여기에 남으세요. 당신과 저는 이곳을 지킵니다.”
“······응.”
당초 예정된 일이었기에 화는 별말 없이 관리실에 남았다. 그러나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다.
걱정해주는 거겠지. 화가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
별로 세게 만진 것도 아닌데,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질 못하는 화. 오늘 아침부터 화의 상태가 요상하다.
“······.”
또 그런 화를 어쩐지 뚫어져라 응시하는 마리에.
“코린. 출발하자.”
어쩐지 차가운 시선으로 재촉하는 마리에. 우리는 서둘러서 마탑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
마탑은, 소위 엘리트 주의자들의 안락한 낙원 같은 곳이다.
마법작물의 재배와 실험을 위해 조성한 금지된 숲을 제외하면 강철 군도 전체가 차갑고 혹독한 자연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물론 마법사들도 식량이나 자재의 수입 등을 위해 외부인을 들이긴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항구에 작은 마을을 형성하며 마탑 근처에는 들어가지도 못하지.
이 엘리트 주의자들이 얼마나 폐쇄적이냐면, 마탑 내부의 잡일조차도 마법사들··· 즉, 하층의 마법사들이나 사역마, 사령들이 해낸다는 거다.
대학으로 치면 대학원생이 교수들의 수발과 식사까지 준비하는 거지. 오죽하면 마탑 20년 차 출신 마법사가 도망치듯 대륙으로 들어와 마탑식당이란 걸 차릴까.
이래저래 지구나 이 세계나 배움을 찾는 사람들이 헛된 것에 시간을 쏟고 있는 셈이다.
“음··· 조금 크구나. 좀 더 작은 걸 구했어야 했나?”
“스승님이 원체 아담하니까 어쩔 수 없죠. 정 불편하시면 제 것하고 바꿀까요?”
“으음··· 아니란다. 제자님은 키가 훤칠하니 제일 큰 로브를 써도 작아 보이는구나.”
마법사들만 득시글거리는 마탑에 잠입하기 위해 필요한 건 마탑 로브다.
미리 대륙에서 구해온 것도 있어서 우리는 마탑의 로브를 구해 마탑의 마법사로 위장하고 있었다.
내 로브에는 4층 마법사임을 상징하는 배지가 달려 있었는데, 이 정도면 그럭저럭 제 몫은 하는 마법사지만 마탑에서는 식사 담당이었단다.
참 비효율적인 집단이라고 할까, 폐쇄적인 집단이라고 할까.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4층까지는 왔지만······.”
“코린, 덕구가 성녀님 냄새는 훨씬 위에 있대.”
마리에의 그림자 속에서 덕구가 에스텔의 냄새를 쫓는 중이다. 성녀님이니 적어도 하층에 두진 않았겠지.
“별다른 제지 없이 올라갈 수 있는 건 4층까지에요. 5층부터는 ‘조교수’급 마법사들의 자격증이 있어야 하죠. 꽤나 최첨단이에요. 손가락 지문을 이용한 생체인식이거든요.”
마탑 내부에서 유통되는 일종의 마법적인 출입증이다. 5~6층부터는 조교수급, 6층부턴 교수급··· 그리고 7층부터는 학파의 수장들이나 들어갈 수 있다.
“스승님, 무얼 걱정하십니까? 우리에겐 협력해줄 고위 마도사가 있잖아요.”
“으음?”
내 말을 증명한 건 다름 아닌 마리에다. 그녀의 한 마디에 그림자 속에서 꾸물꾸물 기어오르는 한 인형(人形).
피부는 쭈글쭈글해졌으며, 염분으로 짓물러진 손가락은 달달 떨렸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보던 노구는 마리에와 우리를 보더니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안녕, 춘식아.”
“히익···! 듀나레프 영애! 아, 아니 주인님···!”
두려움에 바짝 엎드려 절하는 춘식이. 누가 감히 예상할 수 있을까?
이 추레한 노인이 한때 마탑을 호령하던 일곱 마도사 중 한 명. 적파의 엘더 아드말렉이란 걸.
물론 이제는 마리에의 일개 사역마 구울에 불과했지만.
“춘식아, 내가 말했지. 올라가게 얼른 생체인식해.”
“하, 하지만···!”
“싫으면 손목 잘라서 대면 돼.”
“아,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춘식이를 대하는 마리에의 태도는 살벌하기 그지없다.
자신을 납치해가 실험체로 쓰려던 놈이니 자비는 필요 없겠지만, 가끔 마리에를 보면 무서우리만치 싸늘할 때가 있다.
덕분에 5층에서 6층으로 가는 것도 프리패스로 통과했다.
“춘식이 너는 다시 들어가 있어.”
“아, 옙! 예엡!
은밀한 움직임에 방해되는 춘식이를 다시 그림자 속에 집어넣고 7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찾는다.
7층부터가 본격적인 엘더급 마도사의 영역.
기억상으로 에스텔은 8층의 특별동에 있었다. 무려 마탑주 에이드린이 실험을 위해 실험용 마물을 가둬두는 장소였지.
아마 이 시기라면 마탑주뿐 아니라 둔 스카이스도 있을 터. 녀석들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어이, 거기 너희들!”
시선을 슬쩍 돌리니 황금색의 뱃지에 일곱 개의 보석이 달려있는 마법사다.
즉, 7층 마도사. 그것도 교수급인 황금학파의 프로페서.
‘코린, 어쩌지? 물까?’
‘잠깐, 기다려봐요. 여기서부터 소란을 피우면 피곤해져요.’
어쩌지? 죽일까? 대부분의 고위 마도사들은 전선에 나가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벌써 걸릴 줄은 몰랐다.
“너희들은···?”
점차 다가온 마법사. 로브에 숨겨둔 창을 꺼내려던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프로페서 아이락님!”
대뜸 스승님이 상대방의 이름을 호명하며 다가섰다.
“엇? 너, 너는?”
스승님이 거리낌 없이 다가서자 오히려 주춤하는 프로페서 아이락.
“5층의 상위 포스트 그래드인 에일리아라고 해요. 엘더 블레인 스승님이 6-8동 실험실에서 BF1207FF3801 마도구를 꺼내오라고 하셨거든요.”
“어어··· 그래?”
“죄송한데, 6-8동이 어딘지 좀 알 수 있을까요?”
“어··· 저쪽으로 가다 복도에서 왼쪽으로 세 블록 더 가면 있다.”
“와~ 감사합니다!”
스승님은 능숙하게 프로페서급 마법사를 구워삶았다. 아니, 구워삶았다기보다는 매료한 느낌인데.
“크, 크흠···! 거기 너··· 에일리아라고 했나? 나중에 끝나면··· 나, 나와 커피라도 한잔할까?”
“응? 그럴까요?”
“그, 그래. 나중에 내 사무실로 찾아와.”
해냈다는 듯이 폴짝폴짝 뛰어오는 스승님. 우리는 아일락의 시선에 따라 6-3 실험실 쪽으로 가는 척을 했다.
“어떻게 한 거예요?”
“마탑의 주요 마법사들은 다 알고 있단다. 에리우 카사르의 모습으로 몇 번 마탑에 방문했었으니까.”
“아~”
그렇다면 프로페서급 마도사인 아일락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그럼 잠깐 이 주변을 서성이다가 올라가죠.”
“코린··· 저 사람, 아직도 우릴 보고 있어.”
아일락의 시선이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실험실로 가는 길로 꺾으며 시선에서 벗어난다.
복도에는 인기척이 느껴져서 또 붙들리지 않으려면 어디라도 들어가야겠지.
우리가 들어간 곳은 복도에서 꺾어 가장 가까운 실험실이다. 마법사 놈들 실험실 아니랄까 봐 입구서부터 칙칙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스승님, 방금 그건 뭐였어요?”
“응? 아, 실험번호라면 그냥 대충 지어낸 거란다. 마탑은 이런 식으로 번호를 매겨 기록하거든.”
“아니, 아일락이란 놈, 스승님한테 홀딱 넘어갔던데요.”
“으응? 코린도 참. 남사스럽게 그게 무슨 말이니.”
찰싹 내 어깨를 때리는 스승님. 아니, 그거 방금 진짜였다니까? 아일락의 시선이 범상치 않았단 말이지.
“음~ 예전부터 사람들은 날 보면 친절하게 대해주더구나. 다들 내심 친절한 마음씨를 가진 거 아니겠니?”
“아~ 알 거 같네요.”
“응? 뭐가?”
“스승님은 아름다우시니까요. 원래 사람이 아름다운 것에 약한 법이죠.”
“어머나···.”
“······코린?”
“마리에 선배도 내심 느끼지 않아요? 예쁜 사람한테는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은 게 사람 심정이라니까요.”
“헛···!”
잠시 복도의 인기척이 사라지기까지 심심하기도 하니 실험실을 살폈다.
-컹! 컹컹!
마리에의 로브자락에서 들리는 덕구의 소리.
“덕구야?”
“무슨 일이에요?”
“덕구가 뭔가··· 겁먹은 거 같아.”
“덕구가요?”
“이 실험실에 뭔가 있나?”
이 시기에 마탑에 온 건 처음인데, 일단 주변을 향해 눈을 돌렸다.
마탑의 실험실이란 건 복불복이다. 어디는 평범하게 생활가구를 제작하는 소재 실험을 하는가 하면 어딘가에서는 인외마경의 생체실험을 하는 곳도 있으니.
덕구가 경계할 정도로 싸한 실험이라면 뭐가 있을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혹시 모르니까··· 확인하고 가죠.”
계획이 잘 풀린다 해도 마탑과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최대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
“······.”
실험실은··· 아니, 이쯤 되면 실험동이라고 표현해도 이상치 않다.
마탑은 총 아홉 개 층으로 이뤄져 있지만, 그 높이가 일반 건물들보다 훨씬 높다.
한국의 거대 랜드마크 백화점을 아홉 개 층으로 나누었다고 보면 생각하기 편할 것이다.
녹색의 야광빛의 칙칙한 조명. 바닥은 기름 찌꺼기가 눌어붙은 것처럼 미끄럽다.
“스승님, 이런 곳··· 와본 적 있어요?”
“아니, 아카데미의 이사장에게 실험동은 보여주지 않으니까. 마녀혁명 때도 다 때려 부수기 바빠서 온 적은 없구나.”
“코린··· 덕구가 건너편 쪽으로 가보래.”
우리와 달리 덕구는 뭔가를 감지한 모양이다.
이 공간에는 피비린내와 기름 냄새와 썩은 살점이 섞인 듯한 악취가 고약했다. 이런 곳에서 용케 냄새로 무언가를 감지하는구나 싶었는데······.
“아.”
걸음이 멎고, 심장이 자연스레 박동을 줄여간다.
“코린······.”
무언가가 우리를 보고 있다.
거대한 무언가가······.
“설마······.”
육성으로 터져 나온 스승님의 경악. 우리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오른쪽으로 향했고······.
“──────”
거대한 눈동자와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