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173
여름은 파란을 안고(5)
-두근
심장이 쿵쾅거린다.
맞닿은 손을 만지작거릴 때면 화악, 열기가 번졌다.
흘러오는 꽃내음도, 그늘진 동굴에서의 시원한 바람도, 매엠매엠 우는 매미 소리도.
무엇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온 신경이 눈앞의 남자에게만 쏟아진다.
그저 그것만으로 날아오를 듯이 기분이 좋아진다. 빨라지는 맥박으로 힘이 빠질 것 같으면서도, 흐릿하고 산만한 백일몽에 빠져들면서도.
그냥 이 순간이 좋다.
안심이 되고 평온해진다.
그런 꿈만 같은 시간에도 끝은 있었다.
“후~ 오늘 잘 놀았네. 저녁은 관광지 식당이라 좀 아쉽긴 했지만.”
마차를 타고 도착한 호텔 앞. 까묵해진 거리에 내린다.
“즐거우셨습니까? 레이디.”
씨익 웃으면서 화의 손을 붙잡는 코린. 화는 수줍은 듯 옹알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즐거웠어. 정말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넌?”
“응?”
“너는··· 즐거웠어?”
그 말이 그의 무엇을 건드렸는지, 코린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간다. 누군가를 신경 쓰지 않는 강시 소녀가, 이렇게 상대방의 의중을 묻게된 것이 마냥 기쁜듯.
“응. 즐거웠어.”
“그래?”
“종종 이렇게 같이 노는 것도 좋겠네. 다음에는 아리샤나 마리에 선배하고도 같이 갈까.”
「오빠라면 그럴 줄 알았어.」
그의 말에 란은 한숨을 쉬며 투덜거린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화는 실망한 기색이 없다.
그가 이 데이트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게 아닌, 기껏해야 같이 놀자 정도로 생각했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두 사람은 무언가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무감각함을 공유하기에.
그러니까 지금부터 자각을 해버린 소녀가 하는 말은 한없이 순도 100%의 진심이다.
“나. 널 보면 피부가 뜨거워.”
“네 품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네가 날 만지면 가슴이 쿵쾅거려.”
“옆에 다가가고 싶은데··· 닿는 건 못하겠어.”
“네가 다른 여자들하고 같이 있으면··· 화가 나.”
솔직한, 한치의 거짓없는 말을 잇는다. 스스로도 생각해왔던 이상을 숨김없이 쏟아냈다.
그렇게 얻은 결론.
“나··· 너 좋아하나 봐.”
나는 사랑을 하고 있노라고, 소녀는 꾸밈없이 고백한다. 다음 행동은 지극히 돌발적이고, 충동적이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까치발을 들어 키 차이를 좁힌다.
“어?”
그대로 입을 맞췄다. 끌어안은 코린의 몸이 돌처럼 굳어져 버리고,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짧지만 기나긴 입맞춤이 끝나고, 발바닥이 지면에 닿은 뒤.
“······미안.”
촉촉해진 입술로 그를 올려다보며 짤막하게 사과하는 화. 그리고······.
“싫었어?”
“아, 아니, 전혀······.”
휘둥그레해진 눈으로 뻣뻣하게 서 있는 코린. 다른 누구도 아닌 화에게서 이런 기습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반면 화는 제 충동적인 행동에 쑥스러워하면서도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난··· 좋았던 거 같아.”
느슨하게 입술을 당기고, 눈꼬리를 휘었다. 무뚝뚝한 표정에서는 극적인 미소였다.
“자, 잠깐, 화···!”
“응. 지금은 란이에요.”
순식간의 시프트 체인지. 푸르른 벽안의 소녀는 폭발하는 부끄러움 속에서 제 뒤로 숨어버린 자매를 떠올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많이 용기낸 거예요. 뭐, 화다운 직설적인 고백이었지만요.”
“······그러냐.”
자매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가 된 그는 이 상황이 놀라운 모양이다.
란은 화처럼 절절한 고백을 이어나갈까 했지만, 오늘은 화의 날. 그러니까 자신은 마지막 수수료만 챙기자.
“오빠, 잠깐 허리 좀 숙여보세요.”
“어? 그, 그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던 화와 달리 란은 코린에게 스스로 허리를 숙이게 하며 제 눈높이와 맞췄다.
그녀처럼 기습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똑같은 기억을 선사하는 건 싫다. 한 몸을 공유하더라도 이 부분은 확실히 분리되야 하기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귓볼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우린 자매니까. 화와 했으면, 란하고도 해줘야 된다구요.”
“어?”
앙 벌린 입술로 귓볼을 살짝 깨문다. 아픔 따윈 조금도 없었지만, 대담한 행동에 화들짝 놀란 코린이 허리를 올리려는 순간.
“공평하게 사랑해주셔야 해요?”
코린의 목을 두 손으로 끌어안은 란이 앙큼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곤 천천히, 확실하게 스스로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자매의 키스로 촉촉해진 입술을 포개었다.
짧지만,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한 입맞춤이 끝나고.
“오늘은 저희 두 사람 꿈을 꿔주세요~”
피부가 달아오른 채, 킥킥 웃는 란. 그 미소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코린을 두고 만족스러운 듯 자리를 떠나는 란.
폴짝폴짝 기분좋게 걸어가는 란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어······.”
검은머리 소녀의 나비같은 걸음걸이를 멍하니 바라보는 코린.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넋이 나간 채, 한참을 서 있던 그는 머잖아 자신이 당한 것을 깨달았다.
“어어? 어어어?!”
이미 로비를 지난 소녀를 쫓지도 못하며 홧홧 거리는 얼굴을 감싸안는 것이다.
“시, 심장에 해로워, 얘들아······.”
마리에와 란 그리고 화까지··· 풀린 다리를 붙잡지 못하고 자빠지는 코린.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누군가. 호텔의 12층 복도 창문 아래서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을, 코린은 눈치채지 못했다.
* * * *
“맞자, 오빠. 우리 아카데미 오기로 했으니까 알아둬.”
어느 주말 오후의 날이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 시아 로크여. 말을 하기에 앞서 맥락과 허가를 구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사랑하는 내 오빠 코린 로크여. 말을 개떡같이 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이년이?”
한대 쥐어박아 줄까 했는데, 최상위 기사인 내가 일반인인 여동생을 쥐어박았다간 뒷감당이 안 되어 주먹을 회수했다.
풋! 하고 나를 비웃는 동생년.
“맞고 싶은 거야? 한대 ‘쳐’맞고 싶은 거야?”
“뭐래, 어차피 때리지도 못하면서.”
나 맞으면 훅 가는데, 라며 그럴 수 있냐고 도발하는 시아.
“후··· 빌어먹을 것, 옐로 카드야.”
“대신 저는 오빠가 아빠한테 매타작 맞고 쫓겨날 뻔한 걸 막아줬으니 걍 봐주지?”
“망할···! 이번만 봐주도록 하지!”
심심한 여름날 오후의 남매 콩트는 별다른 의미 없이 그리 끝나는가 싶더니······.
“맞다, 오빠. 그 수녀님하고 무슨 일 있었어?”
“어!? 응? 그건 왜 물어!”
“반응 디게 수상하다.”
“아무 일 없었엄마! 뭘 지레짐작하고 있어!”
“아, 그래?”
느글느글한 표정을 짓는 시아. 끄응··· 녀석의 말에 며칠 전 있었던 화와의 데이트가 떠올랐다.
아직도··· 포개졌던 입술의 촉감이 생생하다.
「나··· 너 좋아하나 봐.」
「공평하게 사랑해주셔야 해요?」
“후우···.”
자매는 자매인가보다.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일 텐데, 남자 마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하다니······.
“진짜 뭔 일 있었나 봐. 어뜨케어뜨케!”
“시끄러워··· 그보다 아카데미는 뭔 일인데?”
“오빠 디게 유명해졌더라. 친구들이 보고 싶대.”
“여자친구들이?”
“······.”
나를 보는 여동생의 시선이 마치 쓰레기를 보는 눈이다. 새삼스럽지 않긴 한데, 왜 또 지랄일까?
“오빠는 여자를 그렇게 사귀고도 또 추가하고 싶어?”
“뭐, 뭔 소리야?”
“당장 그 날만 세 명이나 되던데.”
“으음···! 아직 그런 사이 아니다.”
그래, 마리에와 란. 그리고 화까지··· 후, 세 명이 좀 많긴 해.
“아,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지. 그 수녀님 이중인격이라면서. 아, 그 귀여운 강아지 같은 애도 포함인가?”
“으응?”
그게 무슨 소리니, 사랑하는 동생아.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니?
“아무튼, 울 아카데미 교수님도 그 직업소개? 이런 느낌으로다가 한 번 와주래. 짤막하게 일일강사 어떻냐던데.”
“초등 아카데미냐? 직업 소개한다고 학부모 불러오는 것도 아니고.”
“우린 평범한 일상을 살잖아. 가디언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다고.”
“흠··· 인정. 가서 가오 좀 잡아주면 된다 이거지?”
나 혼자 가는 건 좀 아쉽다.
같이 갈 사람을 구해보니 그날 일정이 비는 건 아리샤 정도다.
“아, 저, 저요? 괘, 괜찮아요! 일정이 안 겹치네요! 아하하······.”
어쩐지 어색하게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아리샤. 어쨌든 이렇게 아리샤와 함께 왕립 아카데미 방문이 결정되었다.
* * * *
이 세계관에서 가디언이란 동경과 존경을 받는 직업이다.
일단 일반인을 초월하는 초인들인만큼, 동네 노가다를 해도 먹고는 사는데다, 중견 가디언은 은퇴를 해도 어디 도시의 경비단장쯤은 한다.
2급 이상의 상급 가디언들은? 대부분이 전국민 최다 구독수를 자랑하는 가디언지에서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본다.
코린 로크와 아리샤 아덴.
나와 이 녀석의 이름은 요 1년간 희대의 유망주로 오르내렸다.
나야 뭐, 5급에서 1급으로 승급한데다, 성녀 에스텔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가디언즈의 단장.
아리샤는 본디 명성 높은 검술명가 아덴의 차기 당주후보인데다, 1학년을 졸업하기도 전에 1급으로 승급한 실력자니까.
우리 둘 모두 사실상 준특급 승급은 따논 당상이니 왕국에서 가장 유명해진 가디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기사님들을 소개시키려고 해요. 시아 학생의 친오빠로······.”
강의실 앞. 교수가 우리들의 방문을 알리는 안내가 시작된다. 나와 아리샤는 문밖에서 그것을 듣고 있었고.
“후우··· 코린 씨, 괜찮을까요?”
“뭐, 별일 있겠어? 그냥 자기소개하고 질문 좀 들어주면서 흥을 돋구면 되는거야.”
“흥은 어떻게 돋구는 건데요?!”
“잘.”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라니깐.
“그럼 소개드립니다. 1급 기사 코린 로크, 아리샤 아덴 가디언들이십니다.”
약속받았던 타이밍. 문을 열자 곧장 우레와 같은 반응이 터져나왔다.
“와아아아···!”
“진짜 코린 로크다! 시아가 구라 친 게 아니었어!”
“아리샤 아덴이야! 아덴가 5검각주!”
후후.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왕립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나는 동경하던 기사. 즉, 스타 또는 아이돌.
전 회차에선 서비스 정신이 부족했지만, 지금이라면 좀 다르지. 저 학생들의 열망을 보아라.
내 비장의 썰들을 풀 때가 온 건가?
············
·········
······
우리와 비슷한 나이지만, 아무래도 가디언과 평범한 아카데미 학생들의 온도 차는 꽤 컸다.
그들은 우리들을 완전히 영웅이자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지. 집채만한 혈견과 시선이 마주친 건.”
“강철처럼 날카로운 발톱. 핏빛처럼 새빨간 털. 붉은 눈은 지옥에 떨어진 죄수의 핏기를 뭉친 것처럼 불길했다.”
“녀석은 으르렁 거리며 위협했지. 눈앞에 보이는 작디작은 먹이를 집어삼킬 기세였어. 퇴로는 없었고, 놈과의 거리까지만 비어있었지.”
전진뿐이었다.
-꼴깍!
“온몸의 피부가 곤두세워졌고, 감각 기관은 하나하나 살아있는 것처럼 반응했어. 그 순간, 놈이 달렸다!”
“헉···!”
“어뜩해?”
“놈은 마치 커다란 바윗덩어리처럼 커다랬지. 하지만 난 겁먹지 않았어. 맞서 달리던 허파로 찌든 피냄새가 스며들고, 휘몰아치는 바람은 돌풍처럼 시야를 흐릿하게 했지만··· 정신은 말짱했고, 창을 쥔 팔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 그것이, 승패를 결정했다.”
·········
······
“후아아아··· 쩐다.”
“저거 다 진짜겠지?”
“그럼 진짜겠지. 철산의 왕도 저 형이 잡았다잖아.”
“정확히는 아리샤 누나지만.”
“마탑 사건은 또 어떻고?”
생후 3분 김덕구와의 사투를 청음한 학생들의 반응은 좋았다.
그들로서는 활자로만 읽던 기사의 활약을 당사자로부터 실시간으로 들은 것이니.
뭐, 살짝 양념 좀 치긴 했지만, 내 무용담은 다 사실이니.
슬슬 마무리하던 그때, 뒷자리에서 세 번째 줄. 시아 옆의 한 여학생이 번쩍 손을 들었다. 시아 친구 제나였지 아마.
“코린 기사님, 사귀는 사람 있나요!”
아~ 이런 질문 올 것 같았다. 전 회차에서도 이런 질문은 어디에서든 들었지.
그때는 미르 양이 있었으니 대충 둘러댔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여자친구 모집중임다! 제나 양은 어때? 생각 있어?”
“오오오···!”
“사겨라! 사겨라!”
흠~ 좋은 반응이군. 질풍노도의 사춘기 청소년들은 이래야지.
“앗······.”
묘한 탄식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리샤가 움찔거리고 있다. 어째 내 눈치를 보는 게 수상했다.
“왜 그래?”
“어? 아, 아뇨. 그··· 안 사귀시나?”
“무슨 소리야?”
중간에 말이 끊겨서 못 알아들었다. 얘가 아까부터 왜 이리 얼을 타지?
난 학생들이 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보다 너도 사귀느니 어쩌니 하는 질문 올 테니까 미리 말 생각해놔. 뭐, 분명 사귀자는 녀석도 나오긴 하겠다.”
“어···.”
내 당부에 아리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것이다.
“코린 씨도 아닌데 제가 누구하고 사귀어요?”
강의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볕. 배시시 미소 짓는 아리샤의 얼굴이 눈부시게 빛났다.
내가···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기까진 3초의 정적이 필요했고.
“······어?”
“······아.”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입을 가리는 아리샤. 그녀의 얼굴에 분홍 꽃이 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