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174
여름은 파란을 안고(6)
일일 강사가 끝난 뒤, 우리는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왕립 아카데미라 그런지 식사의 질이 상당히 좋다. 오면서 듣기로는 여기도 듀나레프에서 식재료를 납품한다던가.
“오빠! 나 친구들하고 놀다 집으로 갈거니까 둘이서 알아서 있다 가!”
“······.”
“······.”
동생이 사라진 현재. 우리 둘은 아카데미 내부의 카페에서 어색하게 커피를 깨짝거렸다.
「코린 씨도 아닌데 제가 누구하고 사귀어요?」
강의실에서의 한 마디가 계속해서 떠오른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내가 또 한 눈치 하지 않는가? 아리샤가 나에 대해 심상치 않은 호의를 밝혔다는 건 간단히 눈치챘다.
“저··· 아리샤?”
“옙! 흣! 예엡──쿨럭쿨럭!”
콜록거리며 커피를 뿜어내는 아리샤. 아까 전부터 내 눈치를 살살 살피는 것이 본인도 무심코 꺼낸 말에 당황한 모양이다.
“후··· 그때 그거 말······.”
“예?! 뭐가요? 뭘요? 제가요?!”
“······.”
얼버무리듯 꽥 소리를 지르는 아리샤. 말을 걸다가도 아까 전 말을 꺼내면 바로 이런 반응이다.
“훈련이나 할까?”
일단, 이 어색한 분위기부터 어떻게 해봐야겠어.
* * * *
마리에가 통째로 빌린 왕도 6성 호텔 듀나레프 호텔 체인.
이곳에는 코린 가디언즈 관계자들 대부분이 숙박 예정 중이다.
왕도에 집에 있는 나를 제외한 아리샤, 마리에, 화란··· 그리고 도론이나 루든 같은 정식 멤버뿐 아니라 아덴 검각의 단원들이나 워스카이 용병단까지.
여기에 듀나레프 공작가나 아덴 본가, 이를 수행할 수행원들까지 생각하면 도합이 600명을 훌쩍 넘는다.
그만한 인원을 수용하는 왕도 유일의 6성 호텔은 대단한 규모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후우··· 텅 비었네.”
나와 아리샤는 호텔의 개조된 운동시설에 들어왔다. 코린 가디언즈의 단체행사를 위해 마탑에서 잡아온 노예들로 보강한 시설이다.
“곧 채워질 예정이라고 해요.”
왕실 무도회는 사흘 뒤다. 참가하는 면면도 적잖은 명성을 가진데다 바쁘기 그지없는 사람들. 호텔이 손님들로 채워지는 건 내일부터니까.
“가볍게 시작하자고.”
나도 내일부턴 여기서 묵을 예정이기에 아리샤와 대련이나 하자고 청했다.
“자, 잘 부탁할게요.”
“그래.”
-휙!
첫 타는 찌르기의 흉사. 내 창술에서 흉사는 최단거리를 꿰뚫는 최속창이 아니다.
오히려 창의 찌르기 중에선 느린 편이지. 하지만······.
“흡···!”
몇 번이고 받아내 보았던 아리샤조차도 대응이 반보 늦는 어지러운 현란함. 꾸불거리는 뱀의 일격은 직선이 아니기에 막기 난해하다.
-캉!
하지만 아리샤도 이제 달인의 영역에 들어선 검사다. 검제가 인정한 천재. 타고난 검귀의 길을 걷는 그녀는 난해한 흉사의 일격을 파훼, 곧장 반격했다.
창을 쳐내고 내리치는 일격. 이에 맞서는 란창의 묘리.
적의 일격을 비스듬이 빗겨내고 창대에 스핀을 줘 순식간에 상대 무기의 상단을 잡아낸다.
자석처럼 얽힌 무기들에 힘을 줘 아래로 쳐내면 자연스레 바닥에 처박히고 선수 공격권은 내게로 넘어온다.
적의 공격을 방어─란─, 제압─나─하는 다음에 이어지는 찌르기─찰─.
란나찰.
가슴팍을 찔러오는 연습용 창에 대응하는 아리샤. 검을 되돌리기엔 늦었다. 그럼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
아리샤는 허리를 젖혀 휙! 하고 창을 피했다.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몸놀림. 하지만 유려한 몸놀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반동마저 반격으로 돌린다.
“흠······.”
정교하진 않지만 빠르고 야성적이다.
“좀 더 속도를 높이자고.”
우리들의 대련은 더욱 지독하게, 강도는 더더욱 높고 거칠어졌다.
“후···!”
숨을 삼킨 아리샤가 검으로 내 창을 튕겨낸다. 동시에 녀석이 호흡을 내쉬지 않는게 보인다.
-캉!
창을 잡은 내 손을 노리는 검끝. 나와의 중거리전에서 이길 수 없다 보고 최근접전을 위해 달려든다.
-카앙! 카캉!
작년이었다면 난 아리샤를 압도했을 것이다.
나와 그녀의 전력(戰力)의 차이는 그만큼 벌어져 있었고, 내게는 이 세계 인외마경 천외천의 강자들과 싸운 경험이 있다.
하지만 루니아 아덴의 검 깨기를 경험하고 클라우 솔라스를 얻기 위한 여정에서 검귀를 쓰러뜨린 아리샤는 작년과도, 게임에서와도 비교조차 안 된다.
“늦어요.”
-꽝!
밀어치는 검격이 창대를 통해 내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전달한다. 튕겨나가는 몸··· 이 충격력은 응축된 오러를 맨몸으로 맞이한 것 같다.
“후우우우······.”
거리가 벌어진 틈을 타 아리샤를 응시한다. 멍한 시선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귀신이 있다. 아리샤 특유의 광기. 검에 홀리는 마성.
‘나 정도가 아니면 대련하다 죽겠는데.’
그것도 아닌가. 아리샤를 저 정도로 자극하려면 최소한의 실력자는 되야할 것이다.
어쨌든 지금 아리샤는 어떤 무아의 상태에 접어들었다. 네임드 보스 검귀와의 일전. 그것이 그녀를 한차원 더 높은 경지로 일구었으니.
‘멈추는 게 낫나? 아니, 그것도 풍류 없는 짓이군.’
한 명의 전사로서 열이 오르기 시작한 몸뚱이를 얼음으로 식힐 순 없는 노릇이다.
고조된 열기를, 열화를 일거에 터뜨린다.
-까아아앙!!
소리 없는 아우성과 함께 달아오른 열기가 단박에 날아갔다.
“후우······.”
“하아······.”
거친 숨을 내쉬며 무기를 내려놓는 나와 아리샤. 요즘 들어 우리들의 대련은 이런 형태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좀 더··· 가는 건 좀 그렇겠죠?”
“그 이상부터는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니까.”
“으··· 그건 좀 그렇죠.”
연습용으로 비살상처리를 한 무기였기 때문에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야, 팔 베였다.”
“엇? 으아악?!”
내 창날에 오른팔이 베인 아리샤가 화들짝 놀라며 폴짝 뛰었다. 나 또한 어깨죽지가 쭉 베였지만······.
“으, 코린 씨는 어차피 금방 재생하죠?”
“엘릭서 있잖아. 그거 마셔.”
“힝······.”
챙겨두었던 엘릭서를 건네고 붕대를 챙겨온다. 이렇게 되면 며칠간은 대련이 힘들겠지.
“으음······.”
붕대를 감아주고 나니 아리샤가 앓는 소리를 한다. 땀에 절은 그녀의 머리칼과 단내가 나는 숨결이 내게 닿았다.
생각해보면··· 이 녀석하고는 이렇게 거리를 좁혀도 별달리 의식하지 않았는데······.
“코린 씨, 땀냄새 나요.”
“······사돈 남말하고 있네.”
“아······.”
아리샤는 붕대를 감던 와중 벌떡 일어났다.
“씨, 씻고 올게요!”
“뭐?”
호다닥 달리는 샤워실을 향해 달리는 아리샤. 그··· 괜찮냐? 살이 베인 상태에서 씻으면······.
-앗 따가···!
여자 샤워실에서 들리는 비명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 * * *
아리샤는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붕대를 다시 감아야 했다.
“으으······.”
“그러게 다친 채로 씻으래?”
“그래도요······.”
칭얼거리는 아리샤가 울상을 짓는다. 자주 느끼는 거지만, 얘가 좀 생각 없이 저지르고 볼 때가 많단 말이지.
「코린 씨도 아닌데 제가 누구하고 사귀어요?」
강의실에서 했던 말도 그런 버릇의 일환이었겠지. 그리고 이로 유추할 수 있는 건······.
“저··· 코린 씨가 호텔 앞에서 화란 양하고 하는 걸 봤어요······.”
나지막하게 입을 여는 아리샤. 최근에 힘이 없어 보였던 건 그것 때문이었나.
“화란 양하고 사귀시나요?”
“아니, 아직······.”
“마리에 선배는요?”
“아직······.”
“그럼··· 상관없겠네요?”
내 손을 붙잡는 아리샤에게서 거친 욕망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발언을 했다.
“사실 별로 상관 안 하지만.”
그게 무슨 소리··· 그러나 내가 딴생각을 하는 건 오래가지 못했다.
“음···?!”
돌연 내 어깨를 붙잡고 눈높이를 맞추는 아리샤.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정직하게 나만을 향하는 눈빛은 난감하면서도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고, 상기된 채 뽀얀 김이 피어오르는 피부에선 기분 좋은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맞췄다.
포개지는 입술과 입술의 촉감. 거칠고 부르튼 나와 달리 아리샤의 입술은 폭신폭신했다.
예상치 못한 급발진··· 조금도 고민 따위 하지 않는 행동에 당황할 틈도 없이 뭉클하게 겹쳐있던 입술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무언가.
“?!!”
기습적으로 들어왔던 침입자가 치열을 훑으며 위협했다. 세상 그 어떤 창보다도 부드러운 창이 아랫 혀를 간지럽히다 굳건한 성문이 불만이었는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강압적이면서 부드러운 속삭임. 간드러진 목소리에 함락당해 개방된 곳을 향해 감격적인 유린이 시작된다.
곳곳을 헤매며 얽히고설키는 움직임은 어설프고 단조로웠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달콤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 끝이 정말로 아쉬울 정도로, 서로에게 황홀한 시간이었음을 우리는 무언으로 알아챘다.
“하아······.”
가파른 숨을 내쉬며 열꽃 핀 뺨을 감추지 않고 가느다란 시선을 보내는 아리샤.
“저, 좋아해요.”
“어, 어어?”
“코린 씨가 저를 위해서 언니하고 싸웠을 때부터, 드루이드의 비경에서 같이 달구경 할 때부터··· 쭈욱, 쭈욱······.”
“좋아해요.”
아리샤는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함박웃음을 짓는다. 순수하고, 순진한 미소. 직설적인 감정의 충돌.
“아리샤, 나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아리샤의 입술이 내게 포개어졌다.
아랫입술을 집요하게 빨아들이더니 윗입술도 차례로 맛보는 그녀. 치열을 벌리게 하고, 침소리가 끈적거릴 정도로 맞물린다.
어미 새에게 먹이를 구걸하는 아기 새처럼 숨넘어갈듯 집요한 움직임. 타액이 섞이는 소리만으로 온몸이 자극됐다.
화나 란의 풋풋하고 단아한 입맞춤과는 전혀 다른, 맹수에게 잡아먹힐 듯한 긴 입맞춤. 찐득하고 기나긴 시간이 지나 얽혔던 침들이 은실처럼 늘어졌다.
“코린 씨.”
귓가를 간지럽게 속삭이는 아리샤의 목소리. 불그스름한 뺨이 숨 막힐 듯 요염했다.
“헤헤······.”
감정을 말로도, 행동으로도 모조리 쏟아붓고서야 아리샤의 질주가 멈췄다.
“으, 으아······.”
모든 것을 끝내고서야 이마까지 치솟은 열기에 폭발해버리는 아리샤.
“아으···, 아으으으···!”
격렬한 행동과 녹아버릴 듯한 시선은 어디로 가고 주저앉아 제 행동을 후회하는 것이다.
“······그럴 거면 뭐하러 했냐.”
“으으··· 저, 저도 알거든요?”
“······.”
“······대답은요?
“그··· 미안하다. 지금은, 내가 누구하고 사귈 수가 없어.”
“으··· 알아요. 발타자르하고 싸우느니 마느니 하는 그런 일부터 해결해야 하는 거죠?”
“······그래.”
란이 고백해주고, 마리에가, 화까지 내게 사랑을 속삭였어도 누구 한 명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겐 해야할 일이 있고, 그 과정에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 못한다. 만약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땐 겉잡을 수 없겠지.
한 번 회귀했었지만, 내가 실패한다고 해서 또다시 회귀한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사랑해. 말하는 게 늦어서··· 미안해. 사랑해. 정말 사랑해, 코린.」
사별은 생각한 것보다 마음 아프다. 연인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그건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냥··· 묵혀두고 감내할 뿐.
나와 달리 그녀들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없을 것이다.
“괜찮아요. 예상은··· 했어요.”
“미안해.”
“그래도요, 코린 씨.”
“응?”
대뜸 내게 다가오는 아리샤. 그녀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또 입술이 얽히는가 긴장했지만, 의외로 그녀는 배시시 미소 지을 뿐이다.
“저··· 코린 씨만 좋아한다면 다른 여자애들하고 사귀어도 괜찮다구요?”
“어?”
“언니 동생들이 늘어나는 거 같아서 그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응··· 아이까지 백인가족··· 와~ 집 넓게 지어야겠다.”
“자, 잠깐만··· 뭐? 백인가족?”
“제가 열셋 낳을 거니까 다들 그 정도만 해도 100명은 금방 되겠죠?”
예전부터 그랬는데··· 아리샤의 결혼관은 뭔가 많이 이상해······.
* * * *
“오빠, 아리샤 언니하고 뭔 일 있었어?”
“어? 응? 어?! 아냐!”
이상하게 눈치가 빠른 시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빠. 괜찮을까? 미래의 오빤 살아있을 수 있을까?”
“···············.”
진심으로 날 걱정하는 여동생. 후··· 나도 슬슬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오빠, 조심해. 그러다 30대도 안 돼서 뼈 삭아.”
“크, 크흠··· 네가 모르는가 본데 그 부분은 사실 문제가 안 되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잖아, 멍충아!”
시아가 던진 베개를 피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난 좀 맞아야 되긴 해.
“하아··· 네 명이라······.”
대체 언제 이렇게 늘었지? 사람이 너무 착하게 살면 이렇게 여복이 느나?
누구하고 맺어져도 문제다. 한 사람과 맺어지면 그 뒤의 관계는?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나면 지구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 플레이어를 개입시킨 이가 있을 테니, 클리어 이후에는 지구로 회귀시키는 방법도 있겠지.
그때가 되면 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 * * *
마탑 토벌과 성녀 구출 성공을 기리는 공로회 겸 무도회가 시작하기 전, 제1공로상을 받게 될 우리는 먼저 왕궁의 대기실에 머물렀다.
마리에야 공작 영애니 개인실을 받았지만, 의외로 나도 귀족 취급이라 따로 개인실과 시녀까지 배당받았다.
“이만하면 괜찮을까요?”
“아, 고마워요.”
“말씀 놓으십시오, 로크 남작님.”
내 머리를 셋팅해준 왕궁 시녀는 극존칭으로 나를 호칭했다.
로크 남작. 단승 작위이지만, 마리에로부터 듀나레프 공작가의 봉신귀족으로 임명받은 게 벌써 몇 달 전이다.
마리에가 꼭 주고 싶다며 반쯤 억지로 쥐여준 것이지만, 그 덕분에 왕궁에서도 공식적인 귀족 취급이지.
가족들이 어찌나 놀라하던지. 근데 아직 1급 치안판사라는 것도 말 안 했는데······.
“에휴···.”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이제 방학이 끝나고 일어질 시나리오의 메인 줄기는 귀족 작위··· 특히 치안 판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여자에 빌붙어 꿀을 빠는 모양새라 좀 그렇지만.
-똑똑!
한창 셋팅을 완료하고 전하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수여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로크 남작님. 에스텔 하닷사 엘 라스 왕녀 전하께서 하차하셨습니다.
시녀로 추정되는 여성의 목소리. 느닷없는 에스텔의 방문에 시녀 누님에게 문을 열라 말했다.
곧 문이 열렸고, 문밖에서 정말로 에스텔 왕녀가 들어온다.
“코린 동생······.”
꼭 비 맞은 것처럼 처량한 표정의 에스텔이··· 금방이라도 울먹거릴 것처럼 나를 응시했다.
“나··· 어떡하지?
그래, 이제 당신도 아는구나.
마탑의 성녀 납치 때부터 이어져온 파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