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177
퍼즐 조각(3)
회장이 술렁거린다.
왕이 직접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면책권이라니.
왕이 직접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한 건 빈말이 아니다. 왕실의 비보라 해도 다비드 왕은 기꺼이 내줬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한 건 면책권이다.
어떤 죄를 짓더라도 그것을 면해달라는 건 마치 범죄를 예고하는 것처럼 불길하겠지.
사실 진짜 범죄 예고가 맞긴 해. 근데 그게 반역죄일 거라곤 상상도 못할 걸.
“면책권이라··· 로크 남작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군.”
다비드 왕은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호쾌하게 윤허했다.
“좋다, 코린 로크 남작. 그대에게 왕실이 보증하는 면책권을 하사하겠다. 어떤 죄를 짓더라도 단 한 번. 그 면책권을 쓰면 무엇이든 용서하겠다.”
이미 했던 말을 번복할 순 없다. 왕의 발언은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워야 하는 법이다.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건, 국왕은 자신이 했던 말을 담을 수 없었다.
뭐, 이건 장인어른이 손해 볼 일도 아니니까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십쇼.
“그럼 다음. 마리에 듀나레프 영애. 그대에게는 왕실의 보고에 있는 대마법사의 지팡이를──”
코린 가디언즈에서 대표 네임드들이 공적에 따라 상을 받고 무도회가 재개되었다. 슬슬 저녁, 무도회장에 보충되는 요리들 덕에 식사를 따로 할 필요는 없겠지만.
“코린 경.”
한창 무르익은 연회 속에서 그녀가 지팡이를 짚으며 나를 찾아왔다.
“엘리사벳 왕녀 전하.”
“후후, 아카데미 후배인데 좀 더 친근하게 대하는 게 어때?”
“왕궁에서는 예법을 지켜야죠.”
“정말 평민 출신이 맞는 거야?”
“따로 알아보셨을 텐데요.”
내 말에 미르 왕녀는 요사한 눈웃음을 짓더니 용건을 말했다.
“아바마마가 저녁 만찬을 함께하고 싶다네.”
“그래요?”
전 회차에서 ‘미르암 왕녀님을 주십쇼!’ 이랬을 때도 이 패턴이었다. 뭐, 그때보단 좀 덜 험악한 분위기겠지.
미르 왕녀를 따라 무도회장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무리의 시종과 시녀들이 우리를 안내했다.
비교적 개방되어 있는 연회장과 달리 깊은 곳으로 갈수록 왕궁의 경비체계는 삼엄해진다.
기사와 병사들이 순회를 하고 마법사들이 펼쳐둔 결계가 침입자를 저지하는 구조.
대마법사 트리를 타거나 암살자 트리를 타지 않는 이상 우회가 불가했던 기억이 나네.
‘다들 바쁘군.’
무도회 탓에 사람이 몰린 덕인지 왕궁은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다만,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려는 건지 다그치는 목소리도 최저한이고 뛰는 이도 없다.
귀족들이 돌아다니고 왕족이 기거하는 곳인만큼, 기품이나 격식을 신경 쓰는 것이다.
덕분에 바깥과의 분위기가 판이하다. 이곳만큼은 딴 세상인 것처럼.
‘적응하기도 전에 이곳을 나가야 했지만.’
이곳에서 잠깐 생활했었던 때를 떠올리고 있는데, 미르 왕녀가 말을 걸어왔다.
“재밌는 포상을 요구했네.”
“면책권 말입니까?”
“그래, 그건 마치 앞으로 면책권을 쓸만한 일을 벌이겠다는 선언 같았어.”
“틀린 말은 아니군요.”
할 거다. 반역.
“무슨 짓을 벌일지 들어볼 수 있겠어?”
“미리 스포일러 당하면 재미없잖습니까. 서프라이즈를 기대하세요.”
미르암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동시에 모든 시종시녀들이 함께 움직임을 멈춘다.
“난 경이 그걸 이용해서 뭘 벌일지가 궁금해. 아주, 관심이 있어.”
“저한테 관심이 많으시군요.”
나는 주변을 살폈다. 시종, 시녀들··· 익숙한 얼굴들이다. 전원 그녀가 포섭한 그녀의 사람들.
마탑이 무너진 이후 세력이 꺾인 미르암 왕녀지만, 왕궁 내에서는 견고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하는 말이 새어나갈 걱정은 없겠지.
시종과 시녀들로 둘러싸인 밀실 안에서, 그녀는 내 넥타이를 붙잡고 제쪽으로 당겼다.
“내 제안은 여전히 유효해. 경.”
「나를 마음대로 다뤄도 괜찮아.」
아찔할 정도로 달짝지근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독사과임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고혹적인 시선.
야릇한 유혹과 몸가짐, 목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는 불꽃과 같은 여자. 하지만······.
「깼어? 그냥. 잠든 얼굴을 구경하고 있었어.」
표독스러운 시선 너머의, 아침 햇살을 머금은 싱그러운 여인을 기억한다. 내게만 보여주던 무방비한 모습을.
“글쎄.”
왈칵, 그녀의 허리춤을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간 곁에 있던 시녀가 반응했지만, 미르가 눈짓으로 제지했다.
곧, 붉디붉은 시선들이 서로를 향해 얽혀들어갔다.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지금은 거절해두죠.”
“그 뜻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봐요. 언젠가 내가 새로운 제안을 들고 올 테니까.”
“흐음······.”
미르 왕녀는 내 저의를 탐색하듯 내 얼굴을 훑었다.
“뭐, 좋아. 하지만 너무 늦지 않는 게 좋을거야.”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왕궁의 내부. 왕족들이 식사를 하는 홀의 입구에 섰다.
“왕실예법에 대해 알려줘?”
“괜찮습니다. 다 배웠거든요.”
“누가 왕실예법을 알려줬을까? 에스텔이야?”
‘당신.’
내부의 식당은 퍽 익숙했다. 전 회차와 달라진 게 없었으니까.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아래, 깨끗한 흰 식탁보가 씌워져 있는 기다란 식탁. 온갖 산해진미가 진열된 그곳에 세 사람이 있다.
다비드 왕, 아셰르 왕비. 그리고 에스텔 제1왕녀··· 다비드 왕이 내게 앉기를 권했다.
“자리에 앉게, 로크 남작. 미르암 왕녀도 .”
이미 회장에서 한 번 인사를 했기에, 나는 추가로 인사하지 않고 그의 말에 따랐다.
내가 앉은 자리는 에스텔의 건너편. 그녀가 나를 보며 스리슬쩍 손짓한다.
‘안녕~’
무도회 전, 대기실에서 우울했던 모습과 달리 그녀는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모양이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왕전하.”
“그래, 듣기로는 듀나레프 공작가의 봉신귀족이라지.”
“조금 연이 있었지요.”
“공작가의 영애를 구한 게 조금은 아니지.”
역시 국왕. 마리에의 흡혈귀 각성사건에 대해 모를 리가 없나.
“듀나레프는 왕가의 오랜 동맹이며 왕국의 젖줄을 지탱하는 중요한 가문이다. 그들을 도운 것은 왕국을 도운 것과 진배없지.”
“성은이 망극합니다, 전하.”
상찬에 가볍게 묵례로 답한다. 다비드 왕은 피식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너무 어렵게 대하지 말라, 코린 경. 그대는 내 딸아이를 구한 은인이자 간악한 마탑을 토벌한 영웅이기도 하지. 한 아이의 아비로서도, 왕국의 국왕으로서도 그대에게 큰 빚을 졌음이야.”
“과찬이십니다.”
“허허, 편하게 대하래두. 자네가 강철군도에 잠입해 벌인 무용담은 지금도 인상적이었네. 에스텔이 어찌나 호들갑이던지.”
왕녀들이 그러하듯 다비드 왕도 직설적이며 시원시원한 성격이다. 전 회차에서도 임신한 미르암과 찾아온 내게 구김 없이 대했었지.
「미르가 남자 하나는 잘 물어왔군.」
사실 덮쳐진 거긴 한데, 그래도 웬 평민놈이 왕녀를 임신시켰는데도 별말 없이 넘어갔었다.
그는 오히려 내 손을 붙잡으며 부탁했다.
「내 딸을 잘 부탁하네, 경. 저 아이의 따뜻한 집이 되어주게. 불쌍한 아이야.」
그는 진심으로 미르를 걱정했고, 내게 그녀를 맡겼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아, 사람을 불러놓고 너무 내 이야기만 했군. 식사부터 하게.”
부담 갖지 말라는 듯 저부터 식기를 드는 다비드 왕. 그때, 에스텔이 큼직한 칠면조 다리를 잘라 내 접시에 얹어줬다.
“많이 먹어, 동생~”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흐뭇하게 쳐다보는 에스텔. 그 시선을 아셰르 왕비가 캐치했다.
“어머, 에스텔. 코린 경에게 보내는 시선이 심상치 않구나.”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놀리는 왕비의 말에도 능글맞게 대답하는 에스텔. 그녀는 나에 대한 커다란 호의를 숨기지 않았다.
“아, 코린 동생은 앞으로 제 동생이니까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도 아들처럼 대해주세요~”
“어머어머.”
“호오?”
아셰르 왕비는 입술을 가리며 놀랐고, 다비드 국왕은··· 어째 마르드 공작과 반대되는 시선이군.
“너무 코린 경을 난처하게 하지마, 에스텔. 높으신 분이 편하게 대한들 아랫사람이 편할 리가 없잖아?”
미르 왕녀는 그런 분위기에 가벼운 태클을 걸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난 괜찮아. 그치, 동생?”
“크흠··· 거 성녀님 자제합시다.”
“에이~ 누나의 첫키스도 가져가 놓고 그러기야?”
아니, 이 여자가? 그걸 여기서 말하면 어떡해?
“어머어머···!”
“흐음··· 그렇단 말이지?”
국왕과 왕비의 시선이 전보다 더 강렬해졌다.
칠면조 다리살을 씹고 있는데, 무슨 맛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다. 미르 왕녀도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고!
“흐음······.”
아아, 저 표정, 시선··· 알 것 같다. ‘그래서 날 거절했던 거야?’라는 표정. ······오해십니다.
“그러고 보니 내 딸과 살을 섞었다지?”
“크흠···!”
그것까지 말했냐? 에스텔 이 누나야, 부모님한테는 좀 숨겨!
“전하, 그것이······.”
“며칠 내내 그러했다 들었는데······.”
나는 홱! 하고 에스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라도 좀 말해보라고.
에스텔은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첨언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코린 동생이 동사할 것 같아서 좀 뎁혀준 거예요.”
“어찌됐든 과년한 처녀의 맨살을 본 것이 아니냐. 어떤가, 코린 경. 부족한 딸내미지만, 데리고 살겠는가?”
“어머, 아직 거기까진 아니에요. 뭐, 시간문제지만.”
시간문제요? 뭐가요? 에스텔 누나?
“왕국의 내로라하는 영식들에 관심없더니 과연, 영웅에게는 거리낌이 없구나. 이 또한 연이라면 연이겠지.”
전 회차에서도 느낀 건데. 이 아저씨는 제 딸내미들을 시집 못 보내서 안달인 것 같아.
하긴 에스텔이나 미르암이나 결혼은 커녕 약혼자 한 명 없으니 애가 타겠지. 일단 차차기 후계자도 없었으니.
그래서 미르가 임신했을 때, 그리 좋아라 했나.
“아바마마.”
그때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미르 왕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코린 경이 면책권을 요구하긴 했으나, 그뿐이라면 왕실의 체면이 서질 않겠죠. 어떤가요? 아바마마께서 따로 포상을 내리시는 건?”
“흐음?”
다비드 왕은 내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미르 왕녀가 신경 쓰였는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면책권 말고도 포상이라··· 경은 능히 그만한 공적을 세웠지.”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물을 게 있네. 면책권은 어디에 쓰려고 요구했는가?”
“······송구합니다.”
나는 왕의 질문을 에둘러서 거절했다. 그는 조금 난감한 듯 했다.
“걱정스럽군. 왕국의 영웅이 면책을 요할 정도의 죄라··· 이거 경이 무슨 죄를 저지를지 상상이 안가.”
반역입니다, 장인어른.
제가 쫌··· 살짝 반역을 저지를 예정이거든요.
“한 가지 물음세. 그건 무엇을 향한 죄인가.”
용도를 캐묻는 걸 포기하고 방향을 묻는 왕. 이 정도는 대답해줄 수 있다.
“제 스승께선 제게 무엇보다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퍼즐 조각들은 모았다. 그 완성은 오직 한 가지를 위해 맞춰지리라.
“정의. 정의. 정의. 너는 오직 정의를 쫒으라.”
예나 지금이나 해피엔딩을 위한 내 방법은 한결같다.
·········
······
···
왕족을 대함에도 비교적 편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났다. 시녀들이 식탁 위를 치우고 차를 가져왔고.
다비드 왕은 찻잔을 내려놓고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면책권 외에도 한 가지 더 줘야겠다는 건 동의하네. 그대는 그럴 자격이 있어.”
“성은이 망극합니다.”
“무엇을 줄까. 고민해봤지만, 자네에겐 많은 것이 충족되어 있더군. 듀나레프 공작가. 그들이 자네를 아낌없이 후원하지 않나.”
“······.”
“마리에 영애. 그 아이가 자네에게 베푸는 호의가 심상치 않음을 내 알고 있네. 듀나레프의 금력이라면 왕실의 보물도, 작위도 필요없겠지.”
“망극한 말씀입니다.”
“부정하진 않는군?”
“······.”
“하여, 그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결정했다.”
뭘까? 말하는 걸 보면 보물이나 작위 같은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대가 면책권을 주장했음이 평이한 일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하여, 과인은 정의를 쫒는 고결한 기사에게 약속하노라.”
다비드 왕은 인자한 음성으로 나에 대한 신뢰를 비쳤다.
“언제든 바라는 것을 말하라. 면책권과 마찬가지로 1회에 한하여. 과인은 그대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
“······!”
사실상의 중복포상. 그것도 엄청난 약속이었다.
플레이어는 단 한번밖에 이루지 못하는 소원. 그것을 또다시 약속받다니? 믿기지 못할 왕의 선언에 나는 오히려 망설였다.
“전하.”
“거부치 말라. 나는 그대를 안다. 그대의 행적을 안다. 그대의 숭고함, 고결함을 들었으며 성녀가 이를 보증하고 내가 직접 그대와 마주하고 확인했다.”
“그대는 선한 영웅이다. 듀나레프가 후원하고 아덴이 지원하며 메르카바 아카데미가 보증한다. 그대의 길에 정의와 선이 있음을 과인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륙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일렁이고 있다. 메르카바에서 배신자가 나왔고, 마탑이 이해를 넘는 망극한 짓을 벌였다. 필시 이게 끝은 아닐 터.”
다비드 왕의 시선이 순간 미르 왕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제 아버지에게조차 뱀처럼 사이한 미소로 의중을 숨겼고.
“겨울이 오고 있지. 혹독한 계절이 될 것이야. 왕국은 이에 대비해야겠지.”
「내 딸을 잘 부탁하네, 경. 저 아이의 따뜻한 집이 되어주게. 불쌍한 아이야.」
그는 누구보다도 미르암을 걱정하면서도, 그녀의 광기를, 분노와 증오를 견제하는 사람이었다.
* * * *
“설마 그런 약속을 할 줄은 몰랐는데.”
저녁 만찬이 끝난 뒤, 미르암은 제 궁으로 돌아왔다.
국왕이 자신을 견제하고 있음은 안다. 그는 제 분노와 증오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걸 불안해하고 있었고, 자신이 어울리는 세력들을 주시했다.
마탑과 구교. 이 세계의 기득권이면서도 뒷일을 보지 않는 비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두 집단을 보며 직감한 모양이다.
덕분에 코린 로크의 호감을 쌓기 위해 꺼낸 말이 면책권에 준하는 또 다른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후후······.”
아바마마. 아버지. 그런다고 제가 멈출 것 같나요? 이건 당신 책임도 있어요. 어머니를 묻은 순간부터, 내 복수를 만류할 자격이 없어졌을 텐데.
미르암을 아는 이들은 그녀를 독사 같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 평가는 반만 맞았다. 그녀가 치명적인 맹독을 품은 뱀인 건 맞지만, 꽁무니에 불이 붙었다는 건 보지 못한다.
제 몸에는 불이 붙어있다. 운명의 끝자락에서 더러운 개새끼들과 함께 불탈 화염이.
설사 그것이 자신조차 불태운다 할지라도.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10년 전부터 오직 그것만이 제 숙원이었다.
“누구도 날 멈출 순 없어. 누구도.”
“그래, 그렇겠지.”
“······.”
이곳은 자신의 왕궁. 가장 은밀한 침실··· 그곳에 먼저 들어온 이가 있다.
“레이디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시다니요. 신사의 매너가 부족하네요.”
“이해해라, 왕녀. 다른 곳은 돌아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았거든.”
그 모든 방비를 피해 숨어든 이가 잘도 말한다. 미르암은 제 방에 놓인 와인을 대접하려 했지만, 이미 그가 병째로 들이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광명의 다난. 타테스 발타자르님.”
타테스 발타자르. 찬탈을 노리는 이 세계의 반역자. 그가 미르암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냐.”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분위기였다.
전체적으로 느긋하다. 어쩔 땐 그냥 길거리에 널린 아저씨 같은.
하지만 미르암은 그를 알고 있다. 그가 품은 대망을, 광기에 가까운 그의 정의를.
무엇보다 신들의 왕을 자처할만한 천외천의 힘을.
“최근 손해가 막심하시던데요? 조금 실망스러울 정도로요. 이래서야 제가 당신을 지원하는 의미가 있을까요?”
그녀는 어찌보면 불손할, 단신으로 왕궁을 멸할 수 있는 존재에게 거리낌없이 말했다.
그와 그녀는 주인과 수하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동맹에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 동맹의 행보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페르막을 이용한 원초의 룬 회수는 실패했고, 생강시의 각성을 통한 여론 조성도 실패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마탑을 너무 어이없이 소모해버린 것이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마탑이 궤멸한 건 그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이었을 텐데.
“너무 그러지 마라. 항상 있던 일이야.”
“······?”
익숙하다는 태도. 미르암은 의문을 숨기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세계는 나를 너무 미워하거든. 반역자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그는 한탄하면서도 세상 느긋한 표정으로 병을 들이켰다.
“뭐, 좋아요. 적어도 제 숙원이 이루어질 때까진 나자빠지지 않았으면 하네요.”
미르암은 타테스가 신세계를 만들건 말건 하등 관심없다. 그녀의 숙원만 이루면 상관이 없으니.
그는 그 숙원을 이룰만한 힘을 가졌으며, 세력을 가졌고, ‘운명’을 바꿀 숙명을 가졌으니··· 그 뒤의 일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성공하건 실패하건.
“어쨌든 자, 계약대로다.”
그가 미르암에게 무언가를 던졌고, 그녀의 드레스에서 튀어나온 ‘뱀’이 그것을 물었다.
“······.”
뱀이 제 아가리로 잡아챈 그것은 이 세계의 더없이 위대한 보물. 운명의 대관석 리아 팔.
이런 보물을 마치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던지다니. 상대의 굵직한 신경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아름다운 보석에 빠져든다.
“운명을 읽어라. 확정되지 않은 네 운명을.”
5년 전, 그가 자신에게 내건 거래. 그중에는 1년에 한 번. 미르암의 운명을 읽을 수 있는 리아 팔의 대여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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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운명을 읽어내었다.
“허억···!”
숨을 토해내며 몸을 지탱하던 지팡이를 놓치는 미르암. 욱신거리는 다리는 그녀를 지탱하지 못하고 고꾸라뜨렸다.
왕궁의 누구보다도 품위와 격식을 따지는 그녀가, 추레하게 무너져내리고서도 한참을 일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탈진된 육신 때문도, 운명을 읽어낸 충격 때문도 아니었다.
“후후, 후후후훗···! 아하하하하하하하!!”
광소였다.
환희였고, 희열이었다.
“호오~”
그 반응을, 변화를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타테스. 그로서도 이 반응은 처음이었기에.
“운명이 바뀌었군?”
“네. 그렇지요. 흐흐, 그 빌어먹을 운명이 바뀌었답니다. 죽어 나자빠진 실패자가 아닌, 누구보다도 기쁘게 웃는 내가 있었답니다.”
바뀌었다.
그녀의 운명이.
미르암이라는 불꽃이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작년에 있었던 작은 변화. 그것이 올해에 들어서야 결실을 내놓은 것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개새끼가, 그녀의 성공을 증명하고 있었고 그 옆에 운명의 기사님이 있었다.
‘코린 로크. 역시 당신이었어. 당신이 바꾼 거야.’
나의 영웅
나의 왕자님.
나의 운명.
그가 나의 숙원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