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194
미르암 엘리사벳 엘 라스(6)
대륙은 넓고 마물과 마령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중앙의 법치가 닿지 않는 곳은 너무나 많다.
작은 사회, 권력자의 횡포 등 법의 그늘이 닿지 못하는 곳. 그런 곳에서 마땅한 법을 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치안판사다.
그들의 권한은 막강하다.
조선시대의 암행어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체적으로 사건을 조사,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판결까지 내릴 권한이 있다.
그리고 지금. 방금 전까지만해도 전장이었던 좁은 협곡은 순식간에 재판정으로 돌변했다.
정당한 명분을 들이밀고, 치안판사로서의 재판권 행사에 크게 반발하는 이는 없다.
“피고인 쿠 쉬. 앞으로.”
내가 군대를 막아서는 동안, 지시대로 뒤에서 지켜보던 그는 재판관으로서의 내 호출에 순순히 응했다.
죄목은 왕녀의 암살미수. 다나 쉬 전체에 씌워졌던 이 혐의는 지금 한 명의 늑대인간에게만 적용되고 있었다.
“복잡하게 묻지 않겠다. 치안판사의 재판은 간결성을 중요시하니까. ‘왕국민’ 쿠 쉬. 너는 엘 라스 왕국 제2왕녀 미르암 엘리사벳 엘 라스 전하를 해하고자 암살을 시도하였다.”
이 자리에서 나는 검사다. 죄를 따져묻고 쿠 쉬의 범행을 증명해야 한다.
“증인출석! 코린 로크!”
검사가 증인을 출석시켰는데, 그 증인이 검사 본인이다. 하지만 내가 왕녀를 구했다는 사실은 꽤 널리 알려졌기에 반발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본 증인은 피고인이 왕녀 전하를 해하고자 한 시도를 현장에서 목격하였다. 피고는 증인의 증언을 인정하는가?”
“······인정한다.”
“그래, 결론났군요. 피고가 자백하였으니 본 판사는──”
“이게··· 뭐하는 촌극이지?”
나는 자연스레 미르암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다가오는 피해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인들을 보호하던 놈이, 마인을 재판정에 세웠다.
그래, 좀 웃긴 상황이긴 해. 현대 법정이었다면 이익상충이니 뭐니 하면서 변호사 협회의 고발이라도 당했겠지.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판사로서. 합당한 법적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왕녀 전하. 왕국법의 지엄함을 존중하십시오.”
미르암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나를 향한 비난과 평가절하의 말들을 곱씹는다.
하지만 그녀도 이성으로는 알 것이다. 이 하잘 것 없는 작은 명분이, 치명적인 외통수란 걸.
이미 ‘법’이라는 명분이 들이밀어진 이상, 다나 쉬, 그 다나 쉬의 이익을 대변하는 마운드 전체에 암살 미수혐의로 토벌을 진행하던 그들은.
“왕녀전하··· 코린 로크 치안판사의 행동은··· 지극히 합법적입니다.”
멈출 수밖에 없다.
애당초 왕녀의 암살미수 혐의는 토벌군이 조직된 명분이었다.
그 암살 미수범이 스스로 죄를 밝힌 이상, 마운드는 둘째 치고 다나 쉬에 속한 모든 마인들을 쓸어버린다는 억지는 부리지 못한다.
전 회차에서 미르암이 다나 쉬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당연한 절차를 밟을 수 없었기 때문이니까.
스스로를 변호할 권리조차 없는 비시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다나 쉬의 3천여명의 마인들은 정식 왕국민이 되었고, 그들에게는 스스로를 변호할 권리가 있다.
3천명이 넘는 왕국민을 정당한 법적 절차도 없이 학살한다? 왕이라 해도 불가한 일이지.
“반역자야··· 코린 로크는 반역자라고.”
“그에겐··· 면책권이 있습니다.”
그래, 이 일련의 과정은 모두가 계획된 것이었다.
시간을 벌어 주민등록을 완수하고, 왕국민이 된 마인들을 정식으로 재판한다.
군대만 이끌고 왔기에 사법권은 오직 나에게만 있다. 내가 검사이고 증인이며 판사. 피고인인 쿠 쉬조차 자기변호를 할 생각이 없다.
그리고 자격? 반역자인데 치안판사도 박탈되는 거 아니냐고?
그래, 하지만 내겐 면책권이 있다. 설사 반역이라 할지라도 왕이 내 죄를 한 번은 사해준다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완벽한 명분이었고, 치졸한 명분 싸움이었으며, 온갖 불법의 경계선을 넘나들었지만.
“본 재판관은 미르암 왕녀 전하에 대한 암살미수범으로 쿠 쉬를 구속한다.”
이 작은 차이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또한 암살을 사주한 배후세력으로 지정된 사적단체 마운드의 구성원은 왕도 중앙법원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라.”
체크메이트였다.
“······.”
선고는 끝났다. 쿠 쉬는 왕도로 이송되어 왕녀 암살 미수와··· 10년 전 사건의 정당한 벌을 받을 것이다.
자세한 진상이 규명되고, 선고가 내려질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공식적으로 여기서 끝이다.
이제부턴, 뒷면의 비공식적인 이야기다.
* * * *
국혼이 결정되었던 그날 밤. 그녀는 내게 제 사연을 고백했다.
“복수야. 10년 전 그날부터 내가 원한 건 오직 그것뿐이었어.”
미르암의 동기는 누구나 알기 쉬운 것이었다.
살해당한 어머니. 유모. 가족처럼 지낸 왕궁의 시녀들. 불구가 되어버린 한쪽 발.
그들이 살해당했기에,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야 하기에.
그녀의 복수는 지극히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다.
“도와줄 거지, 코린 경.”
“뭐··· 마누라니까 그 정도라면.”
나는 오판했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녀가 어디까지 저지를 지 나는 상상조차 못 한 것이다.
·········
······
···
“씨발.”
다나 쉬와 마운드의 생존은 원작에서도 최종전에서의 지원세력이 추가되느냐 마느냐를 따지는 엔딩 요소 중 하나다.
그들이 생존하고 미르암 왕녀의 복수극을 저지하는 것은 엔딩을 위해서도, 미르암 왕녀와 무고한 마인들을 위해서도 중요했다.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거지?”
미르암이 마운드를 급습했다. 원작보다 너무나 빠르게, 순식간에 명분을 만들어내더니 ‘우리’가 없을 때, 일을 벌였다.
예정대로 일어난 원작의 사건을 해결하고, 갑작스런 마운드와의 전쟁 소식에 허겁지겁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형, 이거 이미 끝났는데.”
잿더미로 변해버린 다나 쉬를 보면서 허탈함에 젖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뭐, 미르암 왕녀는 누가 범인인지 모르니까.”
그건 우리도 모른다.
원작에서 미르암의 복수대상은 마인이라 뭉뚱그려져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10년 전 참극의 범인을 내놓으라는 것으로 시작했다 한다.
그러나 마운드는 미르암 왕녀와 토벌군에게 저항했다. 10년 동안 자신들을 사냥한 뱀 왕녀의 말만 믿고 동포를 내놓으려 하는 이는 없었을 테지.
“하··· 하하··· 씨발. 씨발.”
그렇다고 다 죽여버렸다고? 보이는 족족? 그중에 범인이 있을 테니까?
미쳤다.
미쳐버린 거다.
복수에, 증오에 잠식되어.
이런 참극을 벌인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그런 날 일으켜세운 건 왕국군 병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늑대아이였다.
“뭐야, 생존자가 있었네. 형? 어디가!”
박시후의 제지를 무시하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꺼져어어···! 꺼지라고······!”
내 허리춤보다도 작을 아이는, 저보다도 작은 두루마기에 무언가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왕국 병사는 성가시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늑대새끼가 감히···!”
“그만.”
“어? 부마 저하께서 이곳엔 어쩐 일로···.”
병사를 제지하고 물렸다. 아이는 내가 이곳을 쓸어버린 왕녀의 남편이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너도···! 너도 그 뱀의 편이지! 죽여버릴 거야! 전부 죽여버릴 거라고!”
증오로 이글거리는 시선. 미르암과 닮았다.
잃어버린 이들의 악의는 어찌도 이렇게 닮았을까.
왜 나는 그 시선 안에 담긴 악의를 읽어내지 못했을까.
아마 이 아이는 죽는 그 순간까지 복수를 잊지 않겠지. 미르암이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목숨을 걸고, 삶을 잃더라도 증오를 이어나갈 것이다.
살인자에게, 원수에게 복수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니.
이 악의는 역병처럼 다시 연쇄될 것이다.
“씨발.”
“부마 저하?”
“이젠 아니야.”
끊어내야 했다.
끊었어야 했다.
* * * *
마운드와 다나 쉬 토벌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나에 의해 흐지부지된 그날 밤.
나는 별 의미없는 포승줄에 묶인 쿠 쉬를 찾았다.
“요정왕 나리.”
“생각보다 편안해 보이네.”
“그런가.”
은랑··· 늑대인간들의 수장인 그는 달빛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공허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을, 왕국을, 교단을 증오하는 늑대인간 쿠 쉬. 그는 선인이 아니다. 결코 선인일 수가 없었다.
“넌 분명 악인에 속하고 빌어먹을 개새끼지만······.”
“너무하는군.”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야. 비슷한 사람을 알고 있거든.”
“뱀 왕녀인가.”
나는 묵언으로 긍정했다.
“네 복수의 시작도 분명 정당했겠지. 딸을 잃었다고 했나?”
“그래. 멸지의 그놈들이 내 딸을 납치했다. 고문하고 실험하고 가죽을 벗겼지.”
“그래서 구교의 동조자인 전 왕비를 죽였고?”
“······.”
“그렇게 몇 명이나 죽였냐. 제루엠의 성직자들이건, 그 동조자들이건. 전부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했지?”
“틀린가?”
“틀려. 분명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겠지만.”
마인들이 탄압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분명 마인들로 인해 살해당하고 가족을, 친구를 잃은 자들이 증오의 화살을 마인 전체로 돌렸기 때문이다.
만약 마리에 듀나레프가.
만약 화란이.
각성의 순간, 누군가를 살해했다면. 그 살해당한 이의 가족들은 마리에를, 화란을 용서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렇게 쌓인 증오가 역사가 되어, 교단의 교리가 되었고,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었다.
괴물이 되어 마인을 핍박하고 그 마인은 증오의 이빨을 갈고 돌아와 그들이 두려워한 진짜 괴물이 되어 돌아왔을 테지.
시작은 분명 무고한 피해자들이었지만.
복수와 증오는 너무나 쉽게 악의로 연쇄된다.
슬퍼하며 죽은 자를 추모했던 일이, 악인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럼 어쩌자는 거냐. 대체 우리가 어떻게 했어야 했단 거냐. 적을 죽이고 멸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몰라. 그걸 알면 내가 하느님이지. 하지만······.”
어둠을 틈타 뱀이 꾸물거린다. 납득하지 못한 뱀들이 움직인다.
“그래도 한 가지는 말해줄 수 있어.”
어둠 속. 검붉은 드레스를 한 뱀이 나타났다.
“돌아올 지점은, 연쇄를 끊어낼 곳은 여기라고.”
············
·········
······
미르암은 싸늘하게 굳은 채 나를 응시했다.
“예상한 모양이네.”
한 무리의 병대를 이끌고.
“그게 전부야?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적은데.”
“······.”
그들이 누군지 안다.
칼라틴과 그 세 딸. 로호, 페르지아. 그 외에도 이름 모를 병사들, 제루엠 교단의 성직자들.
원작에서도, 전 회차에서도 미르암을 따르던 사람들.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동지들.
전 회차에서도 그녀의 광기에 함께 먹혀가며 기꺼이 목숨을 불사른······.
“알고 있겠지만, 겨우 그 정도 병력으론 마운드를 쓸어버릴 수 없어.”
“알아. 하지만 중요한 게 아니지. 우린 목숨을 걸었으니까.”
마법사 칼라틴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의 세 딸에게는 자랑스러운 큰 오빠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왕실에서 마법사로 일하며 공주를 가르치던.
로호에게는 왕실 마굿간에서 말을 관리하던 동생이 있었다. 종종 왕족들의 외유에 따라나서며 말들을 관리하던 공무원이었다.
페르지아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공주가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부터 제 공주님을 자랑하던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시녀가.
쿠 쉬가 마리아 왕비와 그 식솔들을 죽였을 때, 무너져내린 이 많은 인생들이··· 그 끔찍한 복수극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비키시게, 태양의 기사. 어차피 우리가 실패할 거라 알고 있겠지. 그럼 무시하게. 스스로 산화되길 기다리시게.”
“우린 당신을 못 이겨. 알아. 알고 말고.”
“그래도 해야지. 복수란 그런 것 아닌가.”
「내가 데리고 다니는 이 키메라 괴인은, 아들의 피를 이용해 제조한 것이네. ······알고 있네. 별다른 의미는 두지 않아. 하지만··· 그래, 늙은이의 헛된 바람이지.」
「오, 부마 저하. 왕녀님하고는 뜨거운 밤을 보냈나?」
「강하군, 당신은. 강자의 합류는 언제나 환영이지.」
게임에서는 그저 쓰러뜨리고 끝냈던 단역들. 그들의 서사를, 과거를 전 회차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
이해한다. 분명 이 복수는 정당하다. 정당하기에, 정당한 것에서 끝내야 한다.
“‘무한뱀’은 작동하게 두지 않아.”
“”······!!””
내 발언에 저편의 모두가 경악한다. 어떻게 네가 그걸 알고 있느냐고.
다난이 이 땅에 숱한 신비를 남기고 떠났듯, 신화조차 소멸할 정도로 대파괴를 일으킨 파멸의 전조.
미르암에 서리거인에게서, 타테스 발타자르에게서 받은 것은 그 전조의 하나 미드가르드오름. 무한뱀의 각성이다.
그 종말의 힘을 사용한다면, 어떻게든 다나 쉬 깊숙한 곳까지 가 무한뱀으로 각성한다면 미르암은 능히 다나 쉬를 몰락시킬 수 있을 테지.
그 한 번의 기회를 위해, 이들은 자살특공을 감행한 것이다.
내가 미르암과 결혼하면서 좀 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복수는, 옳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이 외치는 정의는, 그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멈춰. 이 이상 앞으로 가게 두지 않겠다.”
“웃기지 마!”
끝내 참지 못한 미르암이 고함쳤다.
격분한 그녀가 당장이라도 분노를 터트릴 듯 노려본다.
“고작 이딴 걸로··· 이따위 촌극으로 내 숙원을 끝내겠다고?”
그녀의 증오의 시선을 가로막듯 쿠 쉬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감행했고, 내가 실행했다. 내가 모든 것의 책임자야, 왕녀. 나만 죽이고······.”
“아가리 닥쳐! 니가 뭔데! 니가 뭔데 혼자 책임을 진다 마라야!”
그녀의 드레스자락에서 뱀이 형체를 가지고 튀어나왔다. 미르암이 사역하는 뱀이 몸통을 비틀며 튀어나가 쿠 쉬의 어깨에 이빨을 박아넣는다.
“넌 뱀의 꼬리일 뿐이야. 넌 시작일 뿐이라고···!”
“큭···!”
뱀은 한 마리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마력을 먹고 덩치를 부풀린 거대한 구렁이가 쿠 쉬를 한입에 집어삼킬 요량으로 달려들었고.
“멈춰.”
나는 구렁이의 머리를 잘라내 쿠 쉬를 구해냈다. 이 녀석은 여기서 죽어선 안 된다. 이런 곳에서 객사하는 것이 아닌 정당한 벌을 받아야만 한다.
“코린 로크···!”
“시작이라고 했지, 왕녀.”
“거기서 비켜!”
“10년 전, 당신의 어머니와 식구들을 죽인 건 이 개자식이야. 그런 일이 벌어진 이유 같은 건 그닥 중요하지 않겠지.”
미르암은 전 회차에서도 쿠 쉬를 죽였다. 그리고 부하들도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은 누군데? 쿠 쉬를 따른 다른 수인들? 마운드의 다른 장로들? 그 휘하의 관계자들? 또또 그 다음은? 10년 전 사건으로 이익을 본 다나 쉬의 주민들? 지금까지 다나 쉬를 묵인하고 감쳐준 신교도들은? 어디까진데.”
“전부. 다 박살내야지. 그래야 끝난다고.”
아니, 끝나지 않는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생존을 위해, 그로 인한 선택으로 살아남은 자들, 이익을 본 자들, 협력한 자들, 묵인한 자들···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르암 엘리사벳 엘 라스는. 끝내는 지점을 정하지 못하고 폭주 기관차처럼 끝없이 달려나갈 뿐이다.
제 몸이 타올라 전소될 때까지.
“선을 정해야 해, 미르암. 끝내는 지점을 선택해야 해.”
“내가 왜?”
“그럼 또 복수가 시작될 테니까.”
늑대아이를 기억한다.
가족을 잃고 미르암과 똑같은 눈을 했던 그 아이를.
쿠 쉬에게서 옮겨간 증오가 미르암에게로, 미르암에게서 그 늑대아이로.
끝이 보이질 않는다.
“복수의 허망함 따윌 논하려는 게 아니야. 복수는 해야지. 벌받아 마땅한 녀석들에겐 벌을 내려야지. 하지만 그건 분명 합당한 절차를 따라 내려져야 해. 이런 식으로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게 아니라.”
“하··· 성인군자 나셨군.”
미르암은 비아냥거리며 걸어왔다. 쿠 쉬의 앞을 가로막은 나를 대면했다.
“내 가족이 죽었어. 놈들이 죽였어. 근데 내가 왜 그 뒤를 생각해야 해.”
가슴을, 심장을 욱여쥐며 비어버린 공허한 시선으로, 울 것처럼.
“내가 왜?”
-샤아아악!
드레스에서 튀어나온 뱀이 내 목을 휘감았다. 독액이 뚝뚝 흐르는 독니를 드러내며 사이한 소리를 냈다.
“비켜.”
“······.”
“기어코··· 마인들을 지키겠다는 거야? 경은···?”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창을 든다.
그래, 말로만 설득해서는 듣지 않겠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너희들은 나를 넘지 못해.”
미르암이, 너희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짓밟고 부수고서 내 억지를 강요할 것이다.
“해치워!”
달려드는 병사들을 향해 돌진한다.
이 모든 이들이 무에 소용이 있는가.
병사는 내가 휘두른 주먹질에 나가 떨어졌고, 기사는 나를 넘지 못한다.
환영술이 나를 현혹했으나 태양의 가호 아래 있는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좀··· 꺼지라고!”
테이밍한 마물들을 잃은 로호가 검 한 자루만 들고 달려든다. 새까만 오러가 넘실거리는 은창이 검째로 절삭했다.
검이 잘려 망연자실한 로호를 지나쳐 페르지아가 휘두르는 도끼를 나찰로 튕겨낸다.
“큭···!”
그대로 후려쳐 날린다. 1급 기사가 이 정도로 나가떨어지진 않겠지만······.
“미르암···!”
달린다.
녀석들의 자폭작전의 핵심. 무한 뱀의 알을 품을 수 있는 뱀술사.
“코린 로크···!”
표독스러운 시선이, 증오로 가득한 눈이 내게로 향했다.
드레스, 머리장식··· 숨겨져 있던 비장의 독사들이 일제히 아가리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내게 독은 통하지 않는다.
“크으···!”
미르암의 지팡이가, 그녀를 지탱하던 한쪽 발이 통째로 뱀이 되었다.
그녀가 가진 비장의 뱀. ‘미드가르드오름의 새끼 뱀’. 성체가 되면 신조차 죽일 수 있는 독뱀이다.
하지만 내가 더 빠르다. 저 지팡이가 완전한 뱀이 되어 나를 무는 것보다, 내가 그녀를 때려눕히고 확보하는 게 더 빠를 수밖에 없다.
은창이 번뜩였다.
「코린, 사랑해.」
“······.”
당연히 나는 찌르지 못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 * * *
이길 수 없다.
코린 로크는 저리도 간단히 저와 자신의 간격을 좁힌다.
말아쥔 창이 내 품을 향해 파고들 것이다.
이길 수 없는 건가.
이 남자에게 막혀, 결국 이루지 못하는 건가.
운명은, 리아 팔은 내가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보여줬는데, 어째서······.
“어?”
답지 않게 멍한 목소리.
예상했던 아픔은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따뜻함만이 온몸을 감쌌다.
싸늘한 새벽바람이 아닌 사람의 온기.
질끈 감았던 눈을 스르륵 뜬다.
“······경?”
그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처음부터 창을 찌를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그 손에는 창이 사라져 있다.
대신, 뱀이, 신조차 죽인다는 맹독을 가진 뱀이 그를 물어뜯고 있었다.
“······왜.”
분명 그는 저를 찌를 수 있었다.
짐승보다도 훨씬 빨리. 그런데도 왜.
“내가··· 내가 다 해줄 테니까···.”
지금까지 적으로서, 자신만만하게 내 모든 것을 부술 것처럼 호언장담했던 기사의 목소리가.
“여기까지만 하자. 이건,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전례 없이 힘없는 목소리로 자신감마저 사라져 있었다.
“여기서 좀··· 끝내자. 응?”
“내가, 내가······.”
왜··· 라는 말은 자신이 아닌 그에게 향하는 말이다.
왜.
당신은 왜 이렇게까지.
「이 멍청한 여자야··· 내가, 내가 기다리랬잖아.」
리아 팔이 보여주었던 미래.
후회와 한으로 가득찼던 사내의 등이 보인다. 그런 그에게 나는 뭐라고 답했지?
“미르야··· 미르야······ 여기까지만 하자··· 그럴 수 있어. 여기서··· 끝낼 수 있어.”
그렇게나 치밀하게 지금을 대비해왔으면서, 마지막에서는 이리 허술하게 내 선의에 기대는 이 멍청한 남자를······.
“이거··· 놔.”
떨쳐낼 수 없다.
고장난 것처럼, 따뜻한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벗어나야 한다. 이 안온한 품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면··· 리아 팔의 힘을 빌어서라도!
“‘이는 내 운명이 아니’──!?”
「쿨럭··· 흐흐, 그러게.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 우리 아이··· 낳고 싶었는데.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어?”
아··· 이?
「······사랑해.」
끝내 숙원을 이루고서, 모든 걸 잃은 끝에.
「당신은 나의 운명이었던 거야. 깨닫는 게 너무 늦었지만······.」
후회를 고백하는 내가 있다.
마치 이 앞으로 가면 이것이 네 ‘운명’임을 경고하듯.
차갑게 식어간 시신을 끌어안고, 울 것 같은 사내를 보여주며.
미래의 운명은 잔혹하고 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