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287
외전 박시린(4)
이침햇살이 따갑다.
온몸이 저릿한 고통을 호소하고 체내의 혈액이 바싹 마른 것처럼 지끈거렸다.
“아파······.”
그나마 부드러운 촉감은 자신이 침대 위에 있다는 걸 자각하게 했다.
“오··· 빠?”
그리고 그 앞에, 바닷가의 전경을 구경하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코린이 있다.
“······.”
그, 저기──”
“좀 닥쳐봐. 지금 생각 중이니까.”
“으응······.”
시린은 코린의 눈치를 한껏 살피며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졌어.’
태양 클라우 솔라스.
그 광대한 힘 앞에 자신은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전 회차에서 그녀는 클라우 솔라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클라우 솔라스가 인정한 건 파티원 중에서도 코린 뿐.
하지만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그에겐 클라우 솔라스를 운용할 마력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실로 오하드 브레스··· 아니, 그 이상으로 태양을 다루고 있었으니.
‘아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어.’
태양은 규모만 큰 페이크. 진짜는 바다조차 박제하는 봉인지정의 틈새를 뚫고 모든 불합리한 마법을 파훼한 끝에 닿은 창끝.
타테스 발타자르.
그와 마찬가지로 그가 가진 재능은 힘의 크기와 관계없이 발휘된다.
‘이젠··· 다신 못 이기겠구나.’
시린은 새삼 그것을 깨달았다.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걸까.
“야.”
“어? 어어, 오빠······.”
“후···.”
작은 한숨. 하지만 시린에게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숨이 멎을 것 같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는 시린의 삶에서 너무나 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변함없이 넌 썅년이야.”
“으으······.”
책망하는 말에 질려간다. 겁이 나서 참기가 어려웠다.
끝내 눈물이 났다.
후회와 자기혐오에 빠지면서도 저를 긍정해주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도 구차하게 구걸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런 질척거림이, 코린을 질리게 할 것이라 생각하면 그저 입술을 깨문 채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괴로움은, 처참한 감정만큼은 너무나 절절히 전해진다.
“미안··· 해. 잘못했어······.”
NPC인줄 알았다. 효율 때문에 그랬다. 세상을 구하려는 건데, 그 정돈 괜찮지 않느냐.
혼자서 분을 삭힐 때, 스스로에게 변명하던 것들이 무엇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끝끝내 그녀가 토해낼 수 있는 건 미안함과 후회······.
“잘못했어···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용서해줘.
그 비참한 구걸만큼은 입에서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실망하지 않을까.
비웃으며 내치지 않을까.
오히려 역효과가 아닐까.
염치스럽게 태도를 뒤집듯 바꾸는 짓을 차마 할 수 없다.
그러할 때, 상대가 실망하고 비웃을까 두렵다.
자신이 이기적인 년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런 자신이 그처럼 선량한 이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게 처음부터 불가능하지 않은가.
“으흑··· 흑··· 흐윽······.”
그저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렸다.
차마 용서를, 이해를 바랄 수가 없다.
물에 기름이 섞이길 바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울고 또 울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몇 시간을 울고 또 우는 동안 코린은 말없이 시린을 바라봤다.
“하연이는.”
뚝, 하고 눈물이 그친다.
대신 요동치는 건 심장이었다.
그래, 내가 구걸해야 할 게 용서 말고도 있었구나.
그녀는 코린의 앞으로 기어가 무릎을 꿇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하, 하연이는··· 우리 딸은······ 잘못이 없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하연이만큼은··· 빼앗아 가지 마······.”
쏟아지는 눈물이 바닥을 적신다.
냉혹하고 냉정했던 그녀의 삶에 두 번째 온기.
실패한 사랑을, 실패한 인생을 이어지게 해준 그 온기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힘으로도, 명분으로도 지킬 수 없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구걸이었다.
“······.”
코린은 눈물과 함께 빌고 있는 시린을 보며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잔혹하고 냉정했던, 세상 그 무엇보다 강했던 자존감과 자존심의 대마법사가.
이렇게나 비굴하고 비참하게 자비를 구걸한다.
그것이 자신의 삶이나 이득 때문이 아닌, 순수한 모정. 아이를 향한 사랑이라는 건 솔직히 놀라웠다.
그처럼 잔혹하고 자존심 높은 인간이, 이렇게나 비굴해질 수 있구나.
플레이어로서,
대마법사로서,
마신으로서,
대총통으로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강대한 힘과 지위를 섭렵한 그녀가 인간 박시린이 되는 유이한 순간이.
사랑과 모정이라는 것이, 참으로 모순적이고 인간다워서.
회귀하고서 3년. 내내 품고 있던 증오와 분노가 식어가고 만다.
“······너도 사람의 자식이구나.”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이라고 여겼다.
그녀가 제게 고백하는 사랑이 악어의 눈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사람이었고, 감정이 있고, 이토록 비참하고 비굴해질 수 있는, 무언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만 묻자.”
그 말에 고개를 드는 시린의 얼굴은 참으로 더럽고 비참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코린은 물었다.
“나 왜 좋아하냐?”
의문이다.
이토록 차갑고 이기적인 여자가, 어째서 날 이토록 갈구하고 집착하는가.
“오빠는··· 나랑은 다른 사람이야.”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는 절절한 고백을 한다. 끝내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며.
거짓이 있을 수 없는 진심을 전했다.
“착하고 배려심 깊고··· 호구 같고······.”
“······.”
자신은 결코 따라할 수 없는 타고난 선량함.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손을 내주는,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베푸는 그 선함이.
“멋있다고··· 생각했어. 바보 같다고 비웃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될 순 없으니까.”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동경한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혐오한다.
어리석고 호구 같다며 조롱하면서도 동경하고 시원하고 통쾌하다 여기면서도 혐오한다.
박시린은 악인이다.
이득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다른 이를 희생시킬 수 있다.
거기에 NPC니 타인이니 하는 적당한 핑계거리를 만들고 악행에 대한 죄책감마저 덜어낸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뭐가 나쁜가.
성공을 위해선 냉정해져야 하는 법이다.
아름답게 패배하는 것보단 추하게 승리하는 게 옳다.
그런··· 어느새 당연해진 관념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명문대생인데 왜 트레이너나 하고 있었어?」
「코치 새끼가 협회장한테 돈 받아 처먹고 승부조작하잖아. 들이박았다가 밉보여서 쫓겨났지.」
병신새끼. 상호구.
그렇게 비웃으면서도 자각하게 된다.
「국가대표 후보였다면서 체육관 트레이너나 하는데 후회 안 해?」
「소신을 지켰잖아. 난 그게 훨씬 더 가치 있다고 봐.」
「국가대표 미끄러진 거? 그때 안 들이박았으면 지금도 후회했을 거야.」
「내 인생 아직 안 끝났어. 언제든지 다시 시작하면 돼. 국가대표가 더 가치 있다고 누가 그래? 내 가치는 내가 정하는 거야.」
소신. 정의. 올바른 일.
등신 새끼. 그게 뭐라고.
금방 바닥을 드러내겠지. 말만 번지르르한 착한 척 하는 놈. 하지만──
「내가··· 너 구하는데 이유가 왜 필요해.」
그 소신이,
그 배려가,
그 정의가.
나에게도 기꺼이 행해진다는 걸 알았을 때, 박시린은 깨달았다.
“히어로··· 같았어.”
혼자서 독식하는 자신과 다르게,
모두와 나누는 그를 보면서.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자신과 다르게,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를 보면서.
헌신과 희생이, 정의가.
유치한 관념이라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 삶의 자세를 관철하는 이를 동경했다.
동경했다.
나라도 옆에서 챙겨주고 싶었다.
“오빠가 날, 처음으로 구했던 그 날부터 진심으로.”
사랑해.
이것만큼은 한 치의 거짓 없는 내 진심이야.
아마 처음 있을.
진심을 담은 고백이었다.
* * * *
별장을 나오니 에린이 아이와 놀고 있었다.
“아···.”
엄마를 닮은 검은 머리카락에 냉한 기운이 느껴지는 눈매. 하지만 루비빛 눈동자와 야성적인 이목구비는 나를 닮았다.
“으우······.”
에린의 등 뒤로 숨으며 나를 노려보는 하연이. 하긴, 아이 입장에선 다짜고짜 지 엄마를 후드려 팬 무뢰한으로 보였을 테지.
“나쁜 아저씨······.”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지나치는 하연이를 본다.
“애아빠인가······.”
“후후, 그래도 코린 널 닮아 당차고 착한 아이란다.”
나는 벤치에 앉아 쿡쿡 웃는 에린의 옆자리에 앉았다.
“받아들이기로 했니?”
“내 자식의 엄마니까요.”
“그래, 그럴 것 같았단다.”
“어째서요?”
에린은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너는 아이와 부모를 떼어낼 만큼 가혹한 성정이 못 돼.”
“······할 수는 있었어요. 그럴 려고도 했고요.”
“그럼 왜 받아들이기로 한 거니?”
“······.”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진 기분이다.
“전 회차의 죄업을 따지면··· 사실 미르암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녀 또한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끝내 자신마저 망쳐버렸다.
박시린과는 규모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미르암을 용서했고, 그녀를 내 부인으로 삼기로 했다.
“미르암과 박시린의 차이가 있다면··· 그건 아마 두 가지 정도··· 첫째는 배신감이겠죠.”
“배신감?”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게 있어 전 회차의 박시후는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당황스럽고 두려운 타향살이에서 만난 동향 사람.
일개 엑스트라로 끝났을 내가 이야기의 주역은 아니더라도 조연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박시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함께 싸웠고, 목숨으로 서로를 지켰고··· 세상을 구해보려 했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배신감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그런 짓을 벌이고 있었던 박시후가, 내 의사를 묻지 않고 강제로 취하려 했던 박시후가.
끔찍하고, 미웠고, 배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녀석이 폭주했을 때, 제게 그것을 막을 힘이 없다는 것이 컸어요.”
또다시 녀석이 폭주하면 그땐 어떡하지? 내 소중한 사람들을 녀석으로부터 지킬 수 있나?
박시린에게 아이를 데려가겠다 협박하며 싸움을 걸었던 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나는 박시린을, 전 회차의 박시후를 압도하고 있었고, 그녀는 처절할 정도로 내게 굴종하며 사랑을 갈구한다.
제어할 수 있다면··· 녀석의 방향을 옳은 곳으로 돌릴 수 있다면······.
“애엄마니까 고민을 해볼 수는 있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만약 내가 시린을 압도하지 못했다면, 하다못해 힘에서라도 밀렸다면 나는 결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뭐, 저는 그렇다는 거예요. 중요한 건 이제 다른 사람들이죠.”
“다른 사람들?”
“일단 에린부터요.”
내 말에 멀뚱멀뚱 바라보는 에린. 그녀는 이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괜찮단다.”
흔쾌히 그녀를 받아주는 에린에게 난 감사하며 이마를 맞대었다.
“늘 고맙고 미안해요.”
“괜찮단다. 너는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은인이며 내 평생의 스승인 분.
그녀는 언제나 내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때?”
“”······.””
이 결정은 나와 그녀만의 마음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분해.”
마리에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코린과의 첫 아이는 우리 덕구야. 장남은 우리 덕구라구.”
-컹!
“당연하죠.”
“그럼 됐어.
그것으로 됐다는 듯 마리에는 고개를 돌리며 긍정한다.
“아리샤 너는?”
아리샤는 아까부터 무엇이 그리 좋은지 히죽히죽 웃고 있다. 그 상냥한 시선이 하연에게 가 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다.
“코린 씨, 저 사생아예요.”
“아니, 그게 왜······.”
“하연이를 사생아로 만들 셈인가요?”
“······너 진짜 할말 없게 만든다.”
아리샤는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하연에게 꿀폭탄사탕을 건네며 미소 지었다.
“아이는 행복해야 해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요.”
“······고맙다.”
나는 화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파란 눈으로 보아 란인가.
“화는 관심없대요. 인제 와서 한 명 더 늘어나도.”
란은 히죽 웃으면서 불길한 미소로 코린을 응시했다.
“뭐, 시기상으로 보면 저희보다 한참 전에 황새와 만난 거죠?”
“어음··· 미안하다.”
“어쩌겠어요, 오빠. 이미 일은 벌어졌는걸.”
란은 폴짝폴짝 다가오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저도 오빠 아기 가지고 싶어요.”
“크흠···!”
싱긋 미소 짓는 란이가 요망하다.
“그··· 졸업하고 나서는 안 되겠니?”
“뭐, 차차 계획을 세워보아요.”
다들 그래도 반대해주지 않아 고마웠다. 에스텔과 미르암, 루니아에게도 허락을 맡아야겠지만.
“1차 허락은 맡았다.”
내 말에 문 뒤에서 눈치를 살피다 조심히 나오는 시린. 그녀는 한없이 수그러진 자세로 나와 마누라들의 눈치를 보았다.
“저, 정말··· 가도 돼? 나, 나··· 괜찮아?”
주저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아리샤였다.
“박시린 양이라고 했죠? 한 가지 중요한 게 있는데요?”
“어? 그, 그게 무슨······.”
“혹시 자녀계획은 몇 명까지 계획하고 계신지? 열한 명 정도 더 낳을 수 있나요?”
“?????”
해괴한 질문을 들은 듯 어리둥절하는 시린. 아리샤야··· 쟤가 제일 먼저 죽인 게 너야······.
“박시린 양.”
“마, 마리에··· 선배.”
“음? 아, 전생의 연이라고 했었죠.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전 회차의 이야기는 해뒀기에 마리에는 스무스하게 시린의 말을 넘겼다.
“혹시 감자 잘 먹어요? 우리 로크 집안은 감자 못 먹으면 안 되는데.”
“예? 어, 그··· 자, 잘 먹어요.”
“그럼 됐어요! 하연이는 감자 잘 먹니?”
마리에 다음으론 란이었다. 전 회차에서 끝내 화란이 후로 승화하고 란의 인격은 소멸했었다.
아마 시린이 란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테지.
“물어볼 게 있어요.”
“어, 음··· 어어······.”
란은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내게도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속삭였다.
“아기 낳을 때··· 정말로 황새가 안 와요?”
“???”
결국 세 사람의 인정과 배려를 받은 그녀는 어째선지 침울한 기분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왜. 따지고 보면 니가 원수나 마찬가진데 너무 쉽게 넘어가는 거 같아서?”
“······.”
시린은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훌쩍이며 감정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을 뿐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끝내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며 숙인 시린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다.
“노력해.”
지금까지 잘못한 것들. 저지른 죄들은 만회할 수 없다.
이미 저질러버린 것들은 없었던 것으로는 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것을 만회할 방법 따위 모른다.
하지만 남편으로서. 애아빠로서.
“함께 찾아는 줄게.”
평생을 함께 동반하며 찾아볼 것이다.
외전 에피소드 5
박시린 完
에필로그. 아카데미 서브 플레이어는 하렘엔딩이다.
대륙의 중심. 엘 라스 왕국의 수도는 한달 전부터 축제 분위기다. 아니,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감자 농장주의 수상할 정도로 많은 후원금과 지지자들 덕일까. 왕도뿐 아니라 전 대륙의 이들이 이 축제에서 먹고 마시고 노는 중이었다.
“브륀힐트 언니, 보세요. 남부인들의 축제는 대단하네요!”
장난스러운 목소리의 스쿨드가 재잘거린다. 신선한 스캴드메르(방패처녀)가 보이는 가벼운 모습에 거구의 여전사 스루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런 게 뭐 좋다고.”
“그러는 스루드 언니도 솜사탕 맛나게 드셔놓고.”
“그, 그건 그냥 입안에서 녹기에 신기했을 뿐이야!”
“자자, 다들 솔직하게 축제를 즐기자꾸나. 고향에서도 결혼만큼은 성대하게 치르잖니.”
영락한 북구 신들의 여전사들. 살아있는 반신인 방패처녀들의 수장 브륀힐트는 북부인들을 이끌고 남부의 왕도를 찾았다.
본래라면 남부의 국혼이야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겠지만, 그 대상이 그 남자였으니.
북부인들은 기꺼이 호의를 가지고 남부를 찾았다.
“그런데 결국 그 예언은 뭐였던 거냐? 피를 토하고 죽을 거라며.”
“글쎄요~ 피를 토하는 모습은 봤지만, 죽은 건 아니라서.”
본디 예언이라는 건 단편적인 장면뿐이어서 스쿨드는 그 예언이 어떠한 형태로든 이루어지긴 했으리라 직감했다.
“아쉽구만. 죽었으면 얼른 그 목을 베어 우리의 발할라로 인도하는 건데.”
태양전쟁 이후로 세상은 올바른 신성을 되찾고 있었다.
태양과 광명이라는 실존하는 신성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가짜 신의 존재를 의심했으며 신성교단이 필두로 이 신앙의 방향을 조정했다.
허나, 그것이 북구 신화의 회복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주신이 존재하지 않는 북구의 신화는 다시금 회복될 길이 없다. 그렇기에 브륀힐트는 국혼을 축하할겸 몸을 의탁하러 왔다.
본디 북구와 남부의 신들은 그럭저럭 어울린 사이다. 새로이 신왕이 된 그 남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신, 제대로 된 신위 하나쯤은 하사받을 수 있으리라.
“근데 브륀히트 언니. 언니는 시집갈 생각 없수?”
“나, 나 말이니? 내, 내가 누구랑?”
수천년 간 처녀신이었던 여전사는 동생의 발언이 당황스럽다. 스루드를 비롯한 발키리들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좋은 상대가 있잖수. 태양신님이.”
“코, 코린 님을?! 경망··· 스럽구나.”
화악, 하고 얼굴을 붉히는 브륀힐트. 그녀들은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맞아요. 스루드 언니. 우리 북구 신화의 부활을 위해서라도 정략혼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맞아맞아. 스쿨드. 태양전쟁으로 자매들도 많이 줄었어. 아직 발할라의 우리 전사들도 육신을 되찾지 못했지. 하지만 태양신의 힘이라면, 그가 강력한 신위 한 자리만 내어준다면 뼈만 남은 우리 전사들도 부활할 수 있을 거야!”
“그럼요그럼요. 그러니까 브륀힐트 언니. 언제 한번······.”
자빠뜨려봐요.
그 노골적인 말에 브륀힐트는 눈에 띌 정도로 홍당무가 되어갔다.
주신의 저주로 인해 남자의 손길 한 번 닿아보지 못한 천년처녀는 저런 농에 면역이 전혀 없다.
“그래도 뭐··· 당장은 힘들겠지.”
“타이밍이 좀 그렇긴 해요. 자그마치 여덟 명과 일제히 결혼하는 거니.”
“백년 정도 시기를 보면서 각을 재보죠.”
“애들아? 그, 그러지 마렴······.”
발키리들의 언니 시집 보내기 백년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
이번 국혼은 대대적으로 예고되었고, 성대하게 준비되었다.
2년 전,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태양전쟁’.
빛이 사라지고 우주까지 뻗어 나간 세계수를 목격하며 사람들은 세상이 멸망하리라 여겼다.
그곳에서 예언된 영웅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태양 코린 로크’다.
어느 순간, 통합 교단의 이름을 바꾸고 진실된 신앙을 천명한 ‘태양교’는 초대 교황 에스텔 하닷사 엘 라스에 의해 그가 인간의 육신으로 신에 도달한 존재임을 발표했다.
신과 이어진 아이.
이 시대에서 가장 신과 근접한 성녀가 주장하는 말은 무엇이든 옳은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녀가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지겠는가?
그녀가 신의 은총과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면 어찌 손짓만으로 땅의 소산을 가득하게 채우겠는가.
여기에는 미르암의 귀족파벌, 마리에의 남부의 목소리, 왕당파 파벌들의 열렬한 정치적 지원도 한몫했다.
언론, 학자, 권위 있는 이들이 한 목소리로 코린 로크를 추대하고 찬양하니 신앙심이 깊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기류가 생길 수밖에.
하지만 그 정치적, 종교적 권위도 왕국이 속한 대륙에 한할 뿐이다.
“어? 저 사람들은?”
“동방에서 온 사절단이야. 천 제국의 황룡기도 있어!”
“저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은 누구지?”
“명교라던데? 요즘 동대륙에서 가장 잘나가는 종교라더라.”
“흐음~ 그쪽 종교는 뭘 믿는데?”
“화란.”
“······응?”
“화란을 믿어.”
“그리고 코린 로크를 믿는데.”
“?????”
사실이었다.
한때, 동대륙의 마교로 천대받으며 핍박과 탄압의 대상이었던 명교는 현재 동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세력이 되었다.
마신 화란과 태양신 코린 로크를 섬기는 명교의 교리는 강자존을 벗어나 약자를 지키고 선행을 강조하는 바람직한 종교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그런 명교의 무시무시한 확장세를 보면서도 천 제국 황실은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의 빛을 꺼뜨리는 신화경의 존재와 수라마신의 힘을 이은 비천야차를 적대한다는 건 곧 국가의 흥망을 건 도박이다.
당장 2년 동안 끝없는 논의가 오갔음에도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
답 없어요.
저거 못 이김.
당장 세상의 빛부터 앗아가면 어찌 대처할 수가 없다. 온 제국인들이 장님으로 살아가야하는데, 이를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결국 그들은 명교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국교로 선포하며 조만간 태양신의 은혜라도 입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실제로 시범 삼아 찾아왔던 서대륙의 성녀가 축복을 걸고 간 땅이 역사상 유례 없는 풍작을 맞이하기도 했었고.
“후우~ 그 자식, 결국 결혼하는구만.”
“그러게.”
그리고 여기.
서대륙과 동대륙을 아우르는 태양신으로 드높은 명성의 코린 로크를 동네 친구처럼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거와 라크. 그리고 그를 알고 고락을 함께한 동기들이다.
“이야~ 고용주도 참 대단한 걸물이긴 하군. 통도 크다니까.”
“도론··· 너 영구고용됐다고 했던가?”
“건당으로 합의 봤지.”
도론은 왕실이 운용하는 정예 토벌단의 단장이 되었다.
신들의 저주였던 그림자 마수들의 실체화인 마물과 마령들은 더이상 새로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제 남은 건 온 대륙의 마물과 마령들을 차근차근 줄여나가는 것이다.
“크라넬은 어쩌기로 했어요?”
“······골렘 개발. 졸업한 듀나레프 선배가 세운 마탑에서··· 돕기로 했어.”
골렘술사 크라넬 루든은 신(新) 마탑 듀나레프 타워에 취직이 결정됐다.
기본은 농업용, 개발 및 개척용 골렘 개발 부문을 맡았지만, 그것 외에도 한 가지 밀약을 맺었다.
크라넬의 비효율적이고 쓸데없을 정도로 커다란 슈퍼 골렘은 이후에도 로망과 낭만을 위해 계속 개발될 거라나.
“유엘 너는?”
“전 숲을 재건하기로 했어요. 왕국으로부터 정당히 숲의 권리를 인정받고 흩어진 일족을 다시 모을 거예요.”
마물들에 의해 불타버린 아벨로른 숲의 드루이드는 졸업 후 숲을 재건하기로 했다.
참견쟁이 동기 덕에 오검문자와 드루이드의 비술을 습득한 그녀는 이제 숲의 현자를 자청할 수 있다.
현자의 부름에는 정령들과 드루이드들이 다시금 모일 것이다.
“만나기 어렵겠네··· 우리들, 궁합이 잘 맞았잖아······.”
“그 슈퍼골렘인가 하는 거라면 말이죠. 뭐··· 조제핀 교수님이 공간 포털을 개발 중이시잖아요. 그게 완성되면 재건할 숲에도 설치할게요.”
그게 아니더라도 가끔은 왕도로 돌아오겠다면서 그녀는 언젠가 있을 만남을 약속했다.
“라크, 넌 듀나레프 타워로 바로 취직하지?”
“응. 배울 게 아직 많으니까.”
라크는 친구 찬스로 신 마탑에 속한 전 마탑 출신 고위 마도사들을 스승으로 배정받았다.
고압적이고 지식을 전수하는 데 좁쌀 같은 성미로 유명한 그들이지만, 제까짓 것들이 어쩌겠는가?
몇년 전에 로씨아인이라는 스킨헤드 빡빡이 신입들이 가득 들어오면서 여유가 생긴 춘식이들은 염전으로 귀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심껏 라크를 가르칠 것이다.
“예거 너는?”
“난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마을 주변의 마물들을 싹 날려버릴 거야. 그리고 흠··· 엄마한테 이번엔 목에다가 타투 해달라 할까.”
“겉으로 막 드러나면 징그러워. 여자 못 사귈 걸.”
“으윽···!”
코린 로크의 1학년 동기들. 그들은 졸업 후 저마다의 진로를 찾았다.
더러는 코린의 덕을 보았고, 더러는 목표로 했던 일을 하기 위해 멀어지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언젠가 한번씩 모이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 * * *
“와아~ 렌! 렌! 엄천나! 이 사람들이 전부 형아와 누나들을 축하해주기 온 사람들이래.”
“······.”
모두가 기뻐하고 축하하는 자리. 그 결혼식의 들러리 준비를 하고 있는 늑대남매 렌과 론은 서로가 상반되는 표정을 지었다.
“렌··· 왜 그래?”
“몰라, 론. 넌 그냥 좀 다물고 있어.”
“······.”
렌은 이제 겨우 고등부 수준으로 성장한 제 누이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랫동안 성장하지 않았던 늑대남매는 그에게서 구해진 뒤로 차츰차츰 성장했다.
오랜 유아기를 끝내고, 그간 성장하지 못했던 몸을 천천히 성장시켰다.
이를 보며 코린은 진심으로 축하해주며 웃어주었다.
「그래, 너무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도 슬픈 일이야. 조금씩, 천천히. 순리에 맞게 성장해나가는 게 아이에겐 가장 좋은 거겠지.」
그런 축하와 축복을 받으면서 렌의 표정은 아쉬움과 분함으로 가득 찼다. 론은 제 누이의 마음을 충분히 안다.
“렌은 왜 고백 안 해?”
“······아직 작아.”
“작아?”
“그 사람은··· 아직도 날 아이로 대해. 그러니까··· 다 자라고, 마리에 언니보다, 루니아 씨보다··· 에린 이사장님보다 훨씬 쭉쭉빵빵해지고서 말할 거야.”
“음··· 그건 힘들지 않을까?”
사실.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코린이 마지막으로 관측한 렌은 실로 그러했기에.
“무엇보다··· 지금은 타이밍이 안 좋아.”
“타이밍?”
론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렌은 피식 웃으며 제 계획을 설명했다.
“한번에 여덟 명이랑 결혼하는 거잖아. 당장은 더 신부를 맞이한다고 하면 난리가 날 걸. 여기서 더 뭘 결혼하겠느냐고.”
“하긴······.”
“그러니까··· 장기전이야. 천천히, 조금씩 다가가는 거야. 언니들한테도 조금씩 스며들면서 가까워지는 거지.”
다행히도 렌과 론의 수명은 더없이 길다. 늑대인간의 순혈 왕족의 혈통. 그 격세유전의 금랑들은 흡혈귀만큼이나 오래된 삶을 산다.
“게다가~ 오라버니가 요즘 신위를 이을 그릇들을 고민하고 있잖아. 신위의 자리가 넘쳐나는 걸 보아 우리한테도 분명 한 자리 줄걸.”
“오오··· 렌 대단해.”
똑부러진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야심 있는 계획을 하고 있다니.
“난 렌만 따라갈게!”
“당연하지.”
오늘은 들러리다.
렌은 분함을 숨기고 야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
메르카바 아카데미의 졸업식. 그와 동시에 황금세대 졸업생들의 대표라고 불리는 의 결혼식이 동시에 주최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축하하러 찾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입장하는 축제의 입구. 태양교의 심볼이 새겨진 깃발을 휘두르며 열성적으로 전도하는 한 신도가 있다.
“태양신을 믿으십시오! 살아있는 인신이 우리들을 축복하고 인도하실 겁니드아아아아!”
그의 이름은 제르맹 루터.
전 제루엠 교단 소속 신부. 스파이로서 메르카바 아카데미에 위장입학했던 그는 언제부턴가 통합교단의 나팔수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 모습이 성녀님 보시기에 좋았으매 열아홉의 젊은 신도는 벌써부터 왕도 담당의 전도사장 겸 태양교의 차기 추기경으로 추대받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는 한 남자. 그와 동기인 전 암살단의 후계자 라시드 앗 딘 무스탈리다.
“수고가 많다.”
“라시드 왔어?”
이제 내년 졸업반이 될 동기를 반갑게 맞이하는 제르맹.
“코린 선배의 결혼식에 빠질 순 없지. 그나저나 끝내주는데. 이런 규모의 결혼식 역사상 본 적이 없어.”
“위대한 태양교의 태양신이시니까.”
“완전 열성교도 다 됐구만.”
“흐흐··· 너도 이럴 때 잘해. 혹시 몰라? 코린 선배가 너도 한 자리 챙겨주실지.”
“뭐··· 이미 챙겨주셨지만.”
지긋지긋한 암살단의 음지에서 벗어나 기사의 꿈을 품고 입학한 라시드는 가디언 협회 공인의 1급 기사가 되었다.
그는 졸업 후 도론의 마물 토벌단에 합류하여 온 세상을 유랑할 것이다.
“내 기사전기를 내놓을 때가 기대된다~”
“암살자 출신이면서 은근 명예욕 있구나?”
“당연하지. 그게 멋지니까 기사가 되려고 한 거거든.”
“······.”
제르맹은 히죽거리며 제 동기의 길을 축복했다. 그 또한 3학년 1학기에 1급 기사로 승급했지만, 그가 바라는 길은 기사의 길이 아니다.
“난 태양교단의 추기경이 될 거야. 교황성녀님께서 은퇴하시면 차기 교황도 노려볼 생각이지.”
“오오~ 야망 있는데.”
“이 모든 건 태양신과 대지의 여신··· 진실된 신들께 가까이 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제르맹을 비롯해 많은 종교인들이 진실된 신앙을 깨달았다.
그들은 차츰차츰 기존 종교세력들을 잠식해 이 땅에 진실된 신앙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교황성녀이시자 대지의 여신께서 약속하신 ‘낙원’에 이를 것이니.
사후의 영원한 축복을 위해 그들은 어디까지나 헌신적일 수 있다.
“뭐, 그런 것보다 오늘은··· 순수하게 우리 아카데미의 선배님들을 축하하자고.”
“물론이지.”
두 사람은 주먹을 맞대며 곧 진행될 식장의 자리를 찾아 떠났다.
* * * *
조제핀은 백여년의 삶을 살아오며 많은 제자들이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젊은 피의 그들은 뜨거운 사랑을 했고, 혼약을 맺었으며, 때론 안 좋게 끝났고, 때론 마지막까지 해로하며 끝냈지만.
“결혼··· 하시는군요.”
“후후, 새삼 왜 그러니?”
제 어머니가 웨딩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 착잡하다.
“아름다워요, 엄마.”
“······그 말은 오랜만에 듣는구나. 클라라.”
두 사람은 유사 모녀관계였다.
박해받던 꼬마 마녀를 구하고 그런 그녀를 위해 기꺼이 세상과 맞선 위대한 어머니.
교단에 맞서고, 마탑을 무너뜨리고 끝내 세상에 마녀와 마인의 기본권을 정립했다.
비루한 악마의 자식으로 취급받던 이들이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도록 했다.
그 모든 시작이 꼬마 마녀 클라라와 방랑하던 에린의 만남이었으니.
“행복하실 겁니다.”
“고맙구나.”
조제핀은 아주 오랫동안 에린의 행복을 바랐다.
제자의 배신으로 상처 입은 그녀가, 그림자 왕성에 봉인되어 세상을 등져야 했던 그녀가 끝내 자신의 짐을 나누고 행복을 바라는 날이 오길 기대했다.
그리고 그날이 찾아왔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것이다.
“클라라. 너는 어떻니?”
“예?”
“너도 이제 사랑을 찾아야 하지 않겠니.”
“······음.”
그녀는 굳이···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마녀는 오랜 삶을 산다. 물론 그것도 한계가 있어 조제핀은 꽤 오래 산 마녀다.
하지만 신왕이 되어 신화부활을 이룬 코린이 신앙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은근히 신위 한 자리를 조제핀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뭔가 친인척 비리 같은 느낌으로 차기 신위의 자리들이 채워지고 있었지만, 조제핀은 상관하지 않았다.
오래 살아서 나쁠 건 없으니. 무엇보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 그녀의 삶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다. 반려를 찾는 건 나중으로 두어도 괜찮다.
“급할 건 없으니까요.”
“나는 클라라의 아이가 보고 싶구나.”
무려 8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온 은근한 기대. 에린은 할머니라 불리는 날을 고대했다.
“뭐··· 조건이 좀 엄격하지 않습니까.”
조제핀의 신랑 조건은 꽤 엄격하다.
일단 잘생겨야 하고, 선량해야 하며 또 어머니를 지킬 만큼 강해야 한다.
몸도 좀 좋았으면 좋겠다. 그녀의 비밀스러운 애독지는 근육쟁이들의 선정스러운 사진이 가득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한 인간과 시간관념이 다른 조제핀에 맞출만큼 오래 살아야 한다.
젊고 강하며 선량하고 잘생기고 오래 사는 반려.
‘코린 로크?’
아니, 잠깐. 잠깐만잠깐만.
왜 갑자기 그 이름이 떠올랐지? 조제핀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경악했다.
‘진정해 클라라. 코린 로크는 이제 내 양아버지··· 아니아니, 절대 인정 못 하지. 아무튼 엄마의 반려라고!’
“왜 그러니?”
“혜흣?”
“클라라?”
“아므겻도 아녜여.”
혓바닥을 씹은 조제핀은 얼굴을 잔뜩 붉히며 엄마의 웨딩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 * * *
길고 긴 시간이었다.
노말 엑스트라로 빙의해 삼재권법과 창법 하나 가지고 숱한 네임드들과 싸웠다.
플레이어의 배신을 깨닫고 3년 전으로 회귀했다.
처음으로 빙의하고 3년.
회귀하고 다시 3년.
졸업하기까지 또 1년.
참 많은 것들이 있었고, 갈등이 있었고, 싸움이 있었으며, 결말이 있었다.
이제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가려 한다.
마리에는 나보다 1년 먼저 졸업해 남부에 새로운 마탑 듀나레프 타워를 세웠다.
500명의 전 마탑 출신 구울 마법사들을 데리고 양질의 마법교육과 연구를 진행했다.
남부의 마탑주 마리에라 하면 이제 온 대륙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아리샤는 정식으로 아덴가의 당주 후보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리샤는 제게 당주로서 사람을 이끌어갈 재주가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루니아는 정식으로 아덴가의 당주직을 이어받았다. 아리샤가 당주직을 포기한 건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내심 그녀의 본의를 읽어냈다.
그 녀석, 동부에서 아덴이 벌이는 당주 업무를 보곤 질색하며 도망친 거라고.
화란은 방학 때마다 틈틈이 명교로 가 새로운 교주 노릇을 해냈다. 에스텔의 태양교단과 통합을 준비 중이라는데, 란이 특히 열성적이었지.
미르암은 차기 여왕으로 왕위를 이을 예정이란다.
다비드 국왕이 애처로운 시선으로 내게 왕위를 이어달라 부탁했지만, 이쪽도 요즘 할 게 많아서 말이지.
오래 전, 고이델 민족들이 다난들을 배신하고 몰아냈을 때, 다난들이 그들에게 남긴 저주.
그림자 낙원에서 끝없이 생성되는 마수들을 소멸시키고 낙원 티르 나 노그도 다시금 소환할 예정이다.
다난들의 신위와 신력이 다시금 부활하려면 티르 나 노그가 제대로 기능할 필요가 있거든.
뭐, 지금의 낙원은 오랜 시간 방치되어 정리가 좀 필요하지만.
그동안 낙원의 여왕으로서 낙원과 현계의 경계선을 지켜온 에린이 날 도울 것이다.
-지잉!
공간이 열리며 누군가가 날아든다. 조제핀 여사는 아닐 테니······.
“오빠!”
마신이라 불리던 대마법사 박시린 뿐이다.
“대뜸 안기지 말랬지.”
“헤헤, 헤헤··· 오빠 냄새 너무 오랜만이다······.”
“결혼식이 오늘인데, 뭐 이리 늦었어?”
내 말에 시린은 방긋 웃으며 자랑하듯 말했다.
“남부 해안도시에 태풍이 있었거든. 그거 막느라.”
“태풍?”
“거기 도시 인구가 십만 명에 태풍이 닥치면 재산피해가 어마어마했을 거야. 공간 째로 멈춰서 제자리에서 소멸시켰어.”
잘했지, 하고 칭찬을 바라는 시선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줬다. 그것만으로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지구에서 귀환한 뒤, 시린은 2년 동안 온 대륙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마물로부터 침공을 받는 마을이나, 자연재해가 일어난 도시. 산적 따위들을 토벌하며 사람들을 도왔다.
그러곤 공간도약으로 찾아와 일일이 내게 보고하는 것이다. 나 속죄 잘 하고 있다며, 내게 사랑을 고백하고, 안기면서 하연이의 안부를 물었다.
“다들 기다린다. 씻고 신부 대기실로 가서 드레스 입어. 하연이가 엄마 결혼식이라고 기대 많이 하더라.”
“응! 오빠, 좀 있다가 봐! 사랑해!”
싹싹하게 굴며 떠나가는 시린. 여전히 성격이 냉하고 차가운 녀석인데, 결혼식이라고 많이 들뜬 모양이다.
“후~ 진짜 결혼이군.”
그것도 마리에. 아리샤, 화란, 에스텔, 미르암, 에린, 루니아, 박시린 여덟(아홉) 명 모두와의 합동 결혼식이다.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태양신에 내로라 하는 여인들이 나와 결혼한다니.
이래 봬도 여전히 소시민이란 말이지.
식장으로 향하는 길. 친정 장인어른, 장모님들이 보인다.
-크흑! 코린 로크, 네이노오옴···!
-여보! 좋은 날을 왜 망치고 그래요!
마르드 공작과 엘렌시아 공작부인. 그리고 마리에의 삼남삼녀 동생들.
-흠~ 난놈이긴 하군.
-그으으··· 지금이라도 단식투쟁을···!
-그, 그만두시오, 부인. 내가 잘못했소.
검제 가란드 아덴과 소맷자락을 깨물며 이를 가는 소피아 아덴 그리고 이번에 루니아에게 당주직을 계승한 전 당주 제이드 아덴.
-뭐···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다면야.
-이만하면 훌륭한 사위 아니겠어요?
-그냥 왕 하라니까······.
다비드 국왕과 아셰르 왕비는 싱숭생숭한 표정이지만, 그래도 우리 결혼의 가장 큰 지지자이시다.
그 외에도 명교의 사절단과 화란의 사촌언니 강유화와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의족의 사내 사진혁.
조제핀 클라라 여사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모님들.
-캬~ 저 제비놈 결국 하렘이네.
-하여간 씹새끼라니까.
동기인 예거와 라크. 도론과 유엘, 크라넬을 비롯해 한학년 후배인 라시드나 제이드. 들러리 역할을 해주는 귀여운 늑대남매 렌과 론.
-그으으윽! 코린 선배··· 왜! 어째서···!
-아아, 진짜 결혼하는구나··· 이럴 줄 알았았으면 들이대볼 걸······.
-허허헝! 오빠아아······.
못 들었어. 응 나 못 들었어. ‘인지’ 안 할 거야.
하여간 내가 먼저 입장하여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
내가 유행시킨 천마이클 잭슨의 축가가 울려 퍼지며, 연회 참석자들이 나를 바라본다.
렌과 론 남매··· 그리고 어엿한 성인처럼 자란 하연이가 꽃을 뿌리며 앞장서고, 그런 그들 뒤로 장인어른, 장모님들이 신부들의 팔짱을 끼고 입장한다.
나를 중심으로.
마리에, 아리샤, 화란, 에스텔, 미르암, 루니아, 박시린이 선다.
모두가 새하얀 순백의 웨딩 드레스를 입은 채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두 사람··· 아아아니! 아홉 사람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니, 이게 맞나. 신부님들 머리색이 가지각색이라······.
-하하하하!
명교와 태양교의 고위 사제들은 이 희대의 결혼식에 익숙지 않아하면서도 차츰차츰 식을 진행시켰고 곧 마지막 축사를 끝냈다.
“그럼 신랑 코린 로크는 신부··· 들을 영원토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그럼 신부들··· 마리에 듀나레프, 아리샤 아덴, 루니아 아덴, 화(火), 란(蘭), 에스텔 하닷사 엘 라스, 미르암 엘리사벳 엘 라스, 에린 다누아, 박시린.”
잠시 숨을 고르며 태양교와 명교의 사제들이 입을 연 그때였다.
[신화창생이 엔딩을 맞이합니다. 구원자 코린 로크, 그 모든 계율을 달성하셨습니다.]내 몸에 새겨진 계율이 차츰 사라져감을 느꼈다. 세계에 한 맹세가 결혼식이라는 히든엔딩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나의 의무와,
나의 구속과,
나의 맹세를 가져간다.
[코린 로크. 히든 엔딩을 축하드립니다.]의외의 축사와 함께 사제들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신랑 코린 로크를 영원토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그녀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로 약속이라 한듯 웃으며 대답한다.
“”네, 맹세합니다.””
아카데미 플레이어를 죽였다
完
삽화有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