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4
계율(1)
박시후를 죽였다.
플레이어를 죽였다.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향인의 시체를 옆에 두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플레이어가 죽음으로서 생겨날 앞으로의 공백. 최종보스를 쓰러뜨리고 세계를 구하는 의 스토리가 시작도 전에 끝났다.
「흐흐, 대박이다!」
“잘 죽였네. 잘 죽였어.”
하다못해 성공이라도 했으면 죄책감이라도 들었을지 테지. 죽이기 전에 고민이라도 해봤을 거다.
녀석이 미래에 죽일 십만의 목숨과 세상을 저울질할 수 있는가 하는 뻔한 고민 말이다.
문제는 박시후를 죽이면서 생긴 메시지창인데······.
[서브 플레이어 코린 로크]상태창을 처음 보는 건 아니다. 박시후의 그림자에 삼켜지고 녀석의 안에 갇혔을 때 보았으니까.
-두근두근
심장이 콩닥거린다. 박시후가 상태창으로 얼마나 꿀을 빨던가. 옆에서 지켜봤기에 잘 알았다.
“······상태창.”
『코린 로크(Hero)』
오오, 오오오···! 드디어 나에게도 갓태창이!!
직업 – { 열람불가 }
성격 – { 열람불가 }
재능 – { 열람불가 }
오러 – { 열람불가 }
마력 – { 열람불가 }
특성 – { 전무 }
『캐릭터 스킬 – 4개』
상세 – 열람불가
··················
············
······
“조합창?”
[시스템 권한이 없습니다.]“인벤토리!”
[시스템 권한이 없습니다.]“스킬창!”
[시스템 권한이 없습니다.]아잇싯팔! 게임 삭제 맛 좀 볼래?
최소 백업이라는 게 이런 소리였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남들은 상태창! 하면 스킬도 찍고 전설의 무기도 만들고, 퀘스트도 착착 진행하는데 난 왜 이러는데!
심지어 또 아무것도 없는 건 ‘전무’라고 표현하셨어요? 아이고 친절하셔라.
“쿨럭···!”
“하······”
허탈함은 뒤로 하고 사람부터 살려야겠지.
“아리샤 아덴? 괜찮아?”
“어으··· 안 괜차나요······.”
“어··· 그래 보여.”
말할 힘 있는 걸 보면 괜찮은 모양이다.
“으으··· 누운, 누니 안 보여요.”
“현기증이 나고 냄새도 잘 안 맡아져? 귀도 멍하고?”
“어, 어떠케 아라쏘요?”
“혀도 꼬였구만.”
눈 안 보이고 현기증 나고 혀까지 꼬였으면 하나밖에 없다.
“공작 개구리 독인 거 같은데.”
동방 쪽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독이다. 플레이어의 스타팅 마을에서 우물에 서식하는 공작 개구리를 잡아달라는 의뢰가 있었으니까.
아마 그걸 시스템창의 조합 시스템을 이용해 독으로 분리한 것이리라.
조합레벨이 낮았을 테니, 치명적인 맹독은 아니지만, 방치하면 계속 HP를 깎아 먹는다. 저급 해독제라도 먹여야 했다.
조합창만 있었어도 5초면 해결되는 일인데······.
이거 생각만 해도 열 받네.
어쨌든 메르카바 시티까지 업고 가려면 몇 시간은 걸릴 텐데, 여기서 지혈하고 해독까지 다 하는 게 좋겠지.
치명적인 독은 아니니까 지혈만 하면 며칠 골골대다 일어나겠지.
“흐흑··· 저 이제 주거요?”
-꾸욱!
“끄악?!”
상처 부위를 허리띠로 꽉 조이자 애처로운 비명소리가 숲속을 울렸다.
원래 지혈은 아픈 법이다. 죽을 만큼 아프지만 안 죽으려면 해야지.
“────!!!!”
“괜찮아. 내가 상처지혈 같은 건 아주 도가 튼 사람이야.”
하긴, 내가 언제부터 시스템창 이용해봤다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지.
────!!
어우, 비명소리 우렁차기도 하지. 장군감이야, 장군감. 내 목소리가 들렸는가 몰라.
-왈칵!
피가 울컥 쏟아졌다. 생각보다 베오울프에게 뚫린 구멍이 큰 탓이다.
“흐··· 으닌님······.”
“응?”
“유언을······.”
“유언은 개뿔. 이거나 물어.”
“······?”
아리샤의 입에 물려준 건 박시후의 손목이었다. 무진장 아플 테니까 그거라도 물어서 버티라고 말이다.
“꽉 물어도 괜찮으니까 버텨봐.”
“······!”
많이 아픈지 울먹거리는 아리샤. 지혈이 계속되자 정말 많이 아팠는지 박시후의 손목이 움푹 패일 정도로 물었다.
내 손 아니니까 상관없지 뭐.
대충 옆구리 지혈이 완료됐다. 이제 남은 건 목덜미의 독을 해독하는 건데··· 이 세계에서 3년을 굴렀다. 시스템창 없이도 기본적인 해독제 정도는 만들 수 있다.
마침 재료도 있었고. 문제는 물과 약을 담을 양철 찬합 같은 게 있으면 좋은데······.
“찾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예상대로 배낭이 방치되어 있었다. 아마 아리샤가 메고 온 배낭이겠지. 박시후를 구하기 위해 대충 던져두고 달려온 것이리라.
“오, 양철찬합도 있네.”
양철찬합에 물을 넣고 몇 가지 재료들을 섞었다. 캠핑 경험이 많아서 모닥불을 지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고.
“해독제 만드는 중이야. 조금 참아봐.”
“으으······.”
독이 여전히 몸을 잠식한 듯 대답이 없고 훌쩍거린다. 유언이 어쩌고 한 걸 보면 자기가 죽는 줄 아나 본데.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는데.’
해독제를 끓이면서 박시후의 시체를 저 멀리 던져놨다. 아리샤에게 물려둔 손목을 보니 얼마나 뜯어댄 건지 뼈가 다 드러날 정도였다.
급하게 모닥불을 붙여 해독제에 주요 재료를 넣고 끓이고 있는데, 아리샤가 코를 킁킁 거리며 씰룩거렸다.
랫혼 쓸개 냄새가 보통 고약한 게 아니긴 하지.
“져··· 으닌님······.”
아리샤는 힘겹게 입을 열며 나를 은인이라 지칭했다.
“서, 성함··· 은인임, 함자를 알려주세여······.”
“알 거 없어. 알려고 하지 마.”
“예?”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해독제 완성되면 깨울 테니까.”
“녜에······.”
내 정체를 알려줘서 빚을 지우는 것도 좋지만,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최대한 모르는 게 좋다.
해독제가 완성되기까지 대충 30분. 아리샤의 눈에 약초물을 먹인 헝겊을 얹어놓았다.
자, 일단 상황을 정리해보자.
지금의 시점은 튜토리얼 퀘스트와 입학식이 시작되는 학기 초. 내가 죽기 3년 전으로 회귀한 거다.
앞으로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벌어질 사건 사고들. 그로 인한 스토리 변화.
은 말 그대로 영웅의 전설이 써 내려지는 게임이었다.
플레이어는 곧 영웅이고 세계를 구하는 역할. 숱한 악당들과 최종보스를 쓰러뜨려야 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그 플레이어가 내 손에 죽었다. 그럼 그 역할은 누가 할 것인가?
‘내가 해야지.’
박시후를 죽이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다.
이 게임의 스토리를 클리어하면 어떻게 될지 박시후와도 여러 번 이야기가 오갔었고······.
녀석이 악한인 건 둘째 치고 순순히 스토리를 클리어해나간 건 최종보스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세상이 끝장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빙의한 시점에서 우리들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선택지 외엔 없었다.
그렇기에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간다. 녀석이 효율효율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죽인 이유가.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그렇게 이기면 안 됐다. 승리자가 되겠답시고 패배자가 되어선 안 됐다.
“후······.”
그나마 다행이라면 서브 플레이어인가 뭔가 하는 걸로 내게 시스템적인 백업이 붙은 것 같긴 한데······.
[시스템 권한이 없습니다.]해주려면 제대로 해주던가. 상태창은 그냥 없다고 봐야겠다.
어쨌든 내가 플레이어 역할을 해야한다.
문제는 내게 플레이어를 위한 편의장치가 전혀 없다는 거다.
원하는 스킬을 포인트로 찍는 시스템창도,
어디에서든 물건을 꺼낼 수 있는 인벤토리도,
퀘스트를 위해 필요한 아이템 조합창도 없다. 무엇보다······.
‘박시후는 그 모든 걸 가지고서도 졌다.’
이 게임에서 박시후는 나 이상으로 에 빠삭했다.
그런 녀석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이용해 히든피스와 경험치를 독식하고서도 최종보스에게 패배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백업과 앞으로의 정보만으론 부족하다. 내게는 시스템 외적인 힘이 필요하다.
다행이라면 나도 평범한 빙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3년.
스토리를 진행하며 극한의 싸움 속에서 단련되었다.
나는 나대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박시후가 스킬 포인트를 늘리기 위한 이벤트로 넘어갔던 훈련도 남김없이 터득했다.
네임드 캐릭터 최고등급이라 할 수 있는 히어로 등급만 봐도 엑스트라 주제에 출세한 셈이지.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당장 히든피스만 해도 플레이어와 다르게 내가 사용하지 못하는 게 허다하다.
나는 시스템 외적인 것을 이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지익
지면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겼다. 흙바닥을 칠판과 분필 삼아 새겨진 글자는 ‘바람’을 뜻하는 고대문자.
-화륵!
약을 끓이는 모닥불에 미약한 바람이 불고 불길이 흔들렸다.
됐다.
지금 내가 한 건 룬 마법이다.
글자 그 자체가 마법으로서 작용하는 고대의 문자이자 전 회차에서 내가 배운 유일한 ‘마법’. 마법잼병인 나라도 할 수 있는 마법이다.
지금은 메르카바 아카데미의 대도서관 구석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사어(死語).
지금부터 내가 할 건 문자 그 자체로 힘을 가지는 이 룬 문자를 조합해 만든 문장을 내 몸에 새기는 거다.
이를 계율이라 칭한다.
의무, 반드시 지켜야 할 맹세.
구속, 자신을 제약하는 제한.
맹약, 추구해야 할 대망(大望)이다.
이 세 가지를 합쳐 계율이라 묶이니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법칙’ 중 하나다. 초인적인 힘의 근원이자 파멸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이건 플레이어의 스킬이나 스탯 같은 게 아니다. 강력한 보스 캐릭터를 위한 뒷설정이었을 뿐이다.
이 좋은 힘을 전 회차에서는 왜 사용하지 않았느냐고?
리스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계율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세 가지는 강력한 힘의 근원이 되지만, 몸에 새겨진 문장을 들키면 공략당할 수 있었으니까.
우리가 그랬듯이 적들도 계율을 이용해 파멸의 단초를 만들 수 있다.
무결점 플레이를 했던 전회차에서는 굳이 쓸 이유가 없는 힘이었으나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뒤 몸에 룬 문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의무.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맹세이며 이를 지킬 때, 내게 힘을 주는 것이다.
계율의 의무를 새기는 요령은 ‘반복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매일 50m 달리기를 한다고 치자.
그럼 매일 50m 달리기를 달성 할 때마다 내 스탯을 상승시키는 법칙으로 작용하는 거다.
안정적인 의무는 ‘평생 새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식으로 ‘누적’시키는 방식이지만, 여기선 리스크를 높일 필요가 있다. 나는 미래에 알고 있는 게 많으니까.
거기다 의무에 걸리는 맹세 또한 그 무게에 따라 더해지는 힘이 다르다.
이 세계는 경험치를 게임 속 용어로 설명하는 ‘업(業)’이 있고, 5급 마물을 쓰러뜨리는 것과 1급 마물을 쓰러뜨리며 얻는 업은 차원이 다르다.
고로 이 의무는 세계가 판단하기에 충분히 무거운 업을 짊어져야 한다.
『나는 선한 이의 불행을 좌시하지 않는다.』
-치이이익!
“끄윽···!”
문장으로 완성된 룬 문자들이 내 몸에 새겨졌다. 고온으로 지펴진 쇳덩이를 새기는 게 이런 느낌일까.
목구멍에서 벅찬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후우··· 후우······.”
무겁다. 내 몸에 새겨진 의무는 그만큼의 무게가 있었다.
계율의 법칙은 시전자의 인지 범위에서 적용된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 사건이라 할지라도 내가 ‘인지’하는 한, 내 업으로 다가오는 거다.
키워드는 ‘선한 이’ 그리고 ‘불행’.
이 게임은 선악의 구분을 캐릭터 성격이라는 스탯으로 명확히 구분해놨다. 그리고 선역 캐릭터들의 불행이 극복되는 것은 내게도 도움이 된다.
이 게임에서 선역은 세계의 위기와 맞서는 네임드 캐릭터들이었으니까.
즉, 이 게임의 스토리를 해결해갈수록 의무의 계율은 반복적으로 작용하여 그에 걸맞은 힘을 내게 더해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 모든 선한 이들을 구할 필요는 없다. 계율은 내가 ‘인지’한 범위 내에서 적용되니까.
지나가던 거리에서 불행한 사람이 만약 선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이상 의무는 작용하지 않는다.
‘그 다음은 구속.’
구속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추가함으로서 자체적인 스펙을 올리는 상시발동형이다.
기본적으로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 세 가지 계율 중 가장 취약하며 약점으로서 공략되는 부분이기에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스스로 약점을 만든다. 평범한 구속이라면 나를 묶는 치명적인 주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령(靈)을 인지하지 않는다.』
-치이이익!
“끄으······!”
령(靈).
말 그대로 영체를 뜻한다.
귀신, 정령과 같은 물질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
마물처럼 헌터가 쓰러뜨려야 하는 인류의 적을 이 세계는 마령(魔靈)이라 칭한다.
뭐, 마령이라곤 해도 큰 의미는 없다. 그냥 인간에게 적대적인 영체들을 죄 마령으로 몰아붙이는 거니까.
인간에게 적대적인 정령, 고대 유적의 방위용 영체 등 인간을 공격하는 건 죄 마령으로 뭉뚱그려 표현하지.
그리고 이 세계에서 영체는 한 가지 법칙을 따른다.
영체는 상호인지 하에 서로에게 간섭한다. 의식을 잃은 이에게 영체는 간섭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세계에서는 아무리 재능이 없는 인간이라도 최소한의 영감을 가지고 있다.
1이나 2의 영감은 있을지언정 결코 0은 없다.
지금 내가 한 건 이것을 0으로 만들어버린 구속이다.
즉, 나는 영체를 인지하지 못한다.
상호인지라는 법칙에서 제외된다. 내가 영체에게 간섭하지 못하는 만큼, 영체 또한 내게 간섭하지 못한다.
끽해야 정령술사에 의해 실체화된 정령 같은 특수 케이스가 내게 간섭할 수 있겠지.
나는 이 구속의 강력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름 아닌 이 세계 최강의 룬 술사이자 보스 캐릭터 발타자르의 구속이었으니.
그 효과는 령에 명중률 0%가 적용되는 대신, 물질 존재에게 50%의 추가 어드밴티지.
즉, 나는 이 세계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질 존재를 상대로 50%의 추가 어드밴티지를 얻는 것이다.
발타자르를 공략한 방식이 아니라면 내 구속의 계율은 깨지지 않는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건 맹약.
전사가 추구해야 할 대망(大望)이며 그 무거움이 곧 백업으로 작용한다. 그야말로 대망. 거대한 야망을 추구하는 맹세.
고민할 필요조차 없지.
『나는 세계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