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72
나즈레아, 죽은 자들의 도시(3)
에린 스승님을 처음 만난 건 막 2년 차 겨울방학 중이었다.
「형. 지난번에 말했던 거. 아직도 안 고쳐먹었어?」
「고치고 자시고 할 게 있냐?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가야지.」
「······.」
박시후는 내 대답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평소 감정표현이 그리 강한 녀석은 아닌지라 미묘하게 찌푸린 인상으로 기분을 알아챘다.
「시후야.」
「······.」
「시후야. 형이 말하는데, 눈 보고 말해야지.」
「형은 개뿔. 나보다 약한 게.」
말은 험하게 해도 곧장 나와 눈을 마주친다.
「으이구~ 지난번에 형 다친 게 그렇게 걱정됐냐.」
「아씨, 그런 거 아니야.」
「하여간 새끼. 덕분에 일도 잘 해결됐잖아.」
「운이 좋았던 거지. 형은 주제 파악을 좀 해야 해. 괜히 나대다가 훅 가는 거 금방이라고.」
「사람 덜 죽었으면 된 거지.」
「············」
몇 번이고 있었던 침묵이다. 녀석과 나 사이의 간극. 우리는 이 때문에 여러 번 의견충돌을 해왔다.
「강해지고 싶다 했지.」
몇 번이고 고민한 듯 녀석은 어렵사리 그 말을 꺼냈다.
「형을 강하게 해줄 스승을 소개해줄게.」
플레이어의 특권.
메인 시나리오 클리어 과정 중에서 4막 ‘마탑’ 사건 중에 연을 맺게 되는 이사장의 진짜 정체.
나와 박시후는 알고 있었지만, 정사를 진행하기 위해 모른 척 넘어가고 있었던 진실의 막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네가 코린이구나. 제자로 받아줄 수는 없지만··· 지도 정도라면 해줄 수 있단다.」
후일 그녀는 나를 자신의 계승자로 선택했다.
* * * *
“됐다. 어지간한 언데드는 이 건물에 들어오지 않을 거란다.”
로브 차림의 미녀가 2층에서 내려왔다. 각종 룬을 건물에 새겨 은폐한 에린 다누아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실력의 룬 술사다.
“가, 감사합니다. 저기··· 초콜릿 드실래요?”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 이곳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음식을 먹어선 안 돼.”
“아, 넷······.”
이곳은 300년 전의 시간이 되풀이되는 곳.
300년 전의 음식이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둘 중 하나다.
음식이 올바른 시간대로 흘러가던가.
음식을 섭취한 자가 과거에 박제되던가.
모순된 시간의 혼재로 생기는 버그. 세계의 반발작용. 그 반대는 시험해보지 않았으나 무언가가 있긴 있겠지.
“그래서.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스승님이라고 불러주지 않는 거니?”
“······.”
“흐음~ 그렇구나.”
알겠다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결국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맞다! 코린 씨의 스승님은 굉장히 과거 사람인 거죠? 300년 전 사건 때, 도시에 있으셨던······.”
이곳은 300년 전의 시간을 되풀이하는 곳이다.
이 시간의 감옥 속에서 모든 주민들과 시체들이 같은 시간을 반복하는데, 왜 그녀만큼은 멀쩡하게 이지를 가지고 돌아다니는지.
“사신하고 친구 먹었거든.”
“예? 그게 무슨······.”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쉬잇, 하고 입가에 손을 댔다. 무언의 표현이었다.
“나즈레아라는 도시는 언데드를 탄생시키는 고독. 나는 ‘불사왕’의 탄생을 막고 있었단다.”
본래 흑마법사의 의도대로라면 이 나즈레아라는 고독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한 언데드들 중에 궁극의 ‘불사왕’이 탄생해야 했다.
모든 언데드를 통솔하는 불사왕은 진정한 재앙. 원작에서도 이 불사왕이 탄생하고 백만 언데드를 지배했다면 세계가 멸망했을 거라고 했던가.
“그, 그럼··· 300년 동안이나 이 도시에서······.”
그것이 얼마나 아득한 시간이었는지를 상상한 아리샤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괴물 사냥은 익숙한 일이란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아리샤를 안심시켰다.
“에린.”
“으음?”
“지금부터 어쩔 거예요?”
내 질문에··· 아니, 내 태도에 에린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받아들였다.
“도시 중심부에 불사왕이 탄생하려고 한단다. 나는 그걸 막아야 해.”
“그렇습니까?”
끙차! 하고 일어난다. 갸웃거리는 에린.
“뭐 하니?”
“막아야 한다면서요. 불사왕 잡으러 가죠.”
“······위험한 일이야.”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누군가는 해야죠.”
“내 일이기도 하단다.”
“조수 안 필요해요?”
“······.”
에린은 침묵했다.
그래, 이것이 본래 나즈레아 필드의 메인 퀘스트.
죽은 자들의 도시에 방문한 플레이어는 사신과 ‘정체불명의 창술사’를 도와 나즈레아 불사왕의 탄생을 저지해야 한다.
비록 시기가 빠른 데다가 단체전까지 겹쳤지만, 뭐 내가 그 플레이어의 역할을 대신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 퀘스트. 언제 깨더라도 상관없는 퀘스트니까.
“흐음··· 그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란다. 하지만··· 굳이 너희들이······.”
“도, 돕겠습니다!”
아리샤는 호기롭게 손을 들었다.
“부, 불사왕이 탄생하면 위험한 거죠? 저라도 힘이 된다면 돕겠어요!”
아리샤는 자신도 나름대로 강하다며 읏샤! 하고 힘을 줘 알통을 보여줬다. 그게 뭔 의미가 있냐?
“안 그래도 저희 단체전 미션이 있거든요. 겸사겸사 중복 클리어한다고 생각하죠 뭐.”
“으음··· 알겠어. 그럼 후학들의 도움을 좀 받아볼까?”
에린은 잠시 고민하다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내 퀘스트를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이건 그런 시스템이다.
* * * *
“불사왕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선 세 언데드를 쓰러뜨릴 필요가 있어.”
레버넌트 타이탄.
어비스 쉬리커.
와이트 킹.
세 사람은 가장 먼저 레버넌트 타이탄의 출몰지인 도시 경비대 막사로 향했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거인이 달린다. 건물조차 일격에 베어버리는 거대한 대검을 사방팔방에 내리치는 기세는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것처럼 가볍다.
-콰앙! 콰쾅!
일격일격에 무너져 내리는 도시의 주택들. 호흡 한 번 내뱉는 것으로 제트기처럼 뛰쳐 오르는 괴물이 코린과 에린을 쫓는다.
“이쪽이란다···!”
거인이 쫓는 두 명의 창술사. 그들은 한 마리 표범처럼 복잡한 거리를 능숙하게 주파했으나 거인의 포효를 듣고 몰려오는 언데드들이 금방 길을 가로막았다.
횡소호풍.
육합창의 휘두르기 자세.
-부웅!
심, 기, 체를 일거에 폭발시키는 중합기가 공간을 가른다. 창에 얽혀든 바람은 선풍이 되었고, 그 기세는 천군(千軍)을 휩쓸 수 있는 전장의 폭풍으로 화한다.
선풍대마창. 이 괴력난신의 기세가 동시에 둘이나 발해지자 망자의 군대가 추풍낙엽처럼 휩쓸렸다.
에린과 코린.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기술로 망자의 군대를 휩쓸기 위해 멈춘 찰나.
거인에게는 그 찰나의 정지는, 추격을 완수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구우웅!
공기를 가르는 대검. 대폭력의 기세로 내리친 폭풍에 맞서는 에린의 가녀린 손목.
대검에 비하면 나뭇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창이 란(攔)의 묘리를 담아 빗겨낸다.
이야말로 나찰마기(拿扎魔技)의 란(攔)과 나(拿).
그러나 란나찰의 묘리는 단순히 빗겨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대방의 중심을 꿰뚫는 찰(扎)이 있고서야 완성된다.
“으음···!”
그러나 거인의 대검은 빗겨내는 것만으로 심력을 소모해야 하는 것이었다. 정면에서 막아내지도 않고 빗겨낸 것만으로 이 정도.
그 충격으로 생긴 경직을 코린이 커버한다.
발초심사(撥草尋蛇).
거인의 명치를 꿰뚫는 찰(扎)의 묘리.
한 사람이 빗겨내고, 다른 한 사람이 꿰뚫는 란나찰의 묘수는 서로가 계획 없이 이어진 합격기다.
“지금이다, 아리샤···!”
빗겨낸 대검이 땅에 박히고, 급소를 꿰뚫린 거인이 주춤하는 사이, 신형(身形)이 거인의 등 뒤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
호흡조차 잊은 듯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 명경지수의 검사. 참마(斬魔)의 검집에는 요동치는 무형의 기운이 날뛰고 있다.
-오싹!
“그르?”
거인의 본능이 그 기운을 눈치챘는가. 무심코 뒤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미려한 손가락으로 새겨지는 룬.
“극···!”
숨소리조차 억제되는 속박의 룬. 순식간에 전개된 일곱 개의 룬 문자가 문장이 되어 거인을 억제했고 코앞에 도착한 아리샤가 검을 뽑았다.
다음 순간을 목격한 건 이 세계에서 오직 두 명뿐. 정지된 세계에서의 한 걸음 속, 코린과 에린은 눈을 마주쳤다.
-후두둑!
거인의 목이 바닥을 구른다. 죽음에서 부활한 언데드조차 목이 잘리면 살 수 없다는 걸 증명하듯 거대한 몸이 쓰러졌다.
* * * *
메르카바 붕괴 사건.
의 후반부의 최대 이벤트이며 타테스 발타자르의 본격적인 공세가 개시된 이 사건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같이 막고 있다고 생각했던 박시후도 은연중에 이 사건이 확대되도록 유도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코린. 도망치렴.」
「스승님!」
「형! 뭐해!」
타테스 발타자르와 페르막 다만 등 왕의 수하들이 코앞까지 찾아왔다.
지금까지 함께해온 파티원들과 준동하는 마수들을 뚫고 도망쳐야 했지만··· 에린 스승님은 등을 보이며 자리를 지켰다.
「누군가는 시간을 벌어야 한단다.」
시나리오에서는 없었던 사건이었다.
예상보다 적이 빠르게 쳐들어왔고, 상황이 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린 다누아는 기꺼이 자리에 남으려 했다.
「그걸 왜 스승님이 합니까! 차라리···!」
스승님은 내 눈에서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나는 어른이란다, 아가. 어른인 이상 나는 아이인 너를 우선해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단다.」
당신은 나를 모른다.
나는 코린 로크가 아니다. 나도 엄연한 어른이고 당신이 보살펴야 할 아이가 아니란 말이다.
「다 잘 될 거란다.」
그것이 스승님을 본 마지막 기억이었다.
시리고, 아픈 기억이었다.
* * * *
외부 임무에 있어서 취침시간을 갖는다면 보통 저녁에 캠프를 차리고 나서부터지만, 나즈레아에서는 정반대로 행해야 한다.
이곳은 밤이 위험하고 낮이 안전한 모순된 전장이기 때문이다.
“아리샤는 잠들었니?”
“네.”
왁자지껄한 도시의 낮. 우리들은 외곽의 빈 건물에 숨어들어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같이 잠들어도 괜찮은데. 낮에는 잠든다고 해서 누가 건들지도 않는단다.”
“괜찮습니다. 며칠 정도는 안 잔다고 해서 컨디션이 떨어지진 않아요.”
“그럼 안 되지. 아이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법이란다.”
“제가 애로 보이십니까?”
“그럼 아가지. 뭐니?”
에린은 입을 가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씰룩거리는 입가에 장난기가 녹아든다.
“그래, 그 시험이라는 건 잘 될 것 같니?”
“네, 무난하게 통과할 것 같습니다.”
나는 레버넌트 타이탄을 쓰러뜨리고 얻은 큼직한 월명석을 럭비공처럼 들어 올렸다. 이번 시험은 양보다 질이다.
이 정도 크기의 월명석이라면 단체전도 무난하게 통과할 것이다.
“흐음······.”
에린이 나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나저나 나는 네게 모든 걸 가르쳐준 모양이구나.”
“육합창. 무간. 원초. 전부 스승님이 가르쳐준 거죠. 의외죠?”
“······그래. 내가 계승자를 선택한 것도 의외지만, 그게 너처럼 평범한 아이라니.”
“제가 좀 난놈이죠.”
“후후.”
나는 그녀가 나보다 앞서 선택했던 계승자를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 시간대의 그녀는 발타자르를 만나지 않았다.
그녀가 80년을 후회하며 자책하던 선택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이 사람은 너무나 많은 걸 짊어진 사람이다. 굳이 300년 전의 박제된 시간을 사는 그녀에게까지 걱정거리를 안겨줄 필요는 없······.
“아까부터 무얼 그리 숨기고 있니?”
“예?”
내 생각을 끊은 그녀는 높이 치켜든 턱과 훤히 목선을 드러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후후, 나도 참 복 받은 여자야. 이리도 제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니.”
“또 뭔 소립니까.”
“너는 네 스승을 진심으로 사랑했구나.”
“······.”
그녀는 부드럽게 내 뺨에 손을 대었다. 슬퍼 보이는 눈을 하면서.
“내 미래가 그리 밝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아니······.”
“제자야,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잖니?”
“······.”
알다마다. 그녀는 거악에 맞선 어른이었다.
나를 이끌고, 가르쳐주고, 바꾸어주었던 은사였으며 나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었다.
아련한 추억과 뼈아픈 기억이 심장을 아프게 했다.
“말해보렴. 때론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큰 축복이란다.”
꾸욱 나를 껴안는 에린. 나보다도 작은 체구인 주제에, 품 안만큼은 따뜻하고 넓어서 나도 모르게 안락함에 젖고 만다.
“옳지옳지. 괜찮단다. 다 잘 될 거란다.”
달래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를 간질거렸다.
··················
············
······
“그냥··· 저는 멍청한 놈이었던 거죠. 의심할 만한 증거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내 코를 찡긋, 하고 꼬집는 에린. 눈 맞춤을 회피하는 나를 꼬옥 붙잡더니 기어코 제 눈과 마주치게 한다.
“실패하긴 했지.”
“······그렇긴 합니다만, 굳이 그걸 말해야 합니까.”
“후후, 아가. 타인의 실패를 곱씹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란다. 하지만 자신의 실패를 곱씹는 사람은 현명한 이지. 너는 적어도 후자에 속하잖니?”
“저는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네가 처음부터 영웅이었을까? 그 시후라는 아이처럼 실패할 상황을 무조건 피하는 이가 결국 성공했니?
아니란다. 영웅은 실패를 저지를지 모르는 상황을 피하기만 하는 이가 아니란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실패지.”
그녀에게는 자세한 이야기 따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조금씩 푼 이야기만으로 에린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듯 말했다.
“······당신이 실패하더라도 같은 생각인가요?”
“후후, 아가. 나는 지금껏 수많은 실패를 거듭해온 실패자란다. 하지만 적어도 너에 대해선 실패한 게 아닌 것 같구나.”
언젠가 그녀가 내게 항상 해주었던 선물처럼. 내 이마에 포근한 입맞춤을 하는 에린.
그녀는 입술에서 흘러나온 숨결이 가슴에 얹히는 것 같다.
“낙원의 여왕인 내가, 기꺼이 네 앞길을 축복할 거란다.”
그리운 미소였다.
“지금은 쉬렴. 잠깐만 잠들어 있어. 다 잘 될 거란다.”
나는 그렇게 그녀의 품 안에서 잠이 들었다.
* * * *
흑마법사 게롤그는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도대체 왜? 이게 아닌데. 내 계산이 틀리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가······.”
그는 제 공방에 널브러진 마도서를 뒤적거린다.
음침하고 어두컴컴한 방안을 밝히는 호롱불에 의지하여 기괴할 정도로 크게 뜬 눈으로 활자를 파헤쳤다.
“후우, 후우··· 이상하다.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어. 기적에 가까운 기회였다고.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은 넋이 나간 것 같다. 침 삼키는 것도 잊은 채 질질 흘리는 것이 신빙성을 더했다.
“이상해. 누구지. 누가 개입한 거지?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떻게 한 거지?”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게롤그는 구석진 곳 책장에 놓인 자신의 기록을 발견했다.
슈퍼 문과 블루 문. 블러드 문이 동시에 겹치는 기적 같은 천체현상을 관측한 건 운이 좋았다.
과거의 기록과 특유의 마법적인 현상. 땅을 적시는 달의 마력을 응용한다면 지금껏 역사에 없었던 위대한 대의식을 펼칠 수 있음을 깨닫고 의식을 준비했다.
의식은 성공적이었고, 잠깐? 성공했나? 아직 마법진을 발동하지 않았는데? 아니, 어제 발동했나? 그런데 도시는 왜 이리 평온하지?
게롤그는 미친 듯이 서적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번을 살폈던 마법진을 다시, 또다시 살폈다.
그리고 깨닫는다.
식은땀을 흘리며 가설을 세운다.
“마녀. 마녀가. 마녀야. 마녀가.”
방을 빛내는 호롱불을 툭 건든다. 다분히 의도적이고 학술적인 시도였다.
-화륵!
깨지는 호롱불. 랜턴 내부에 담겨있던 불과 기름이 쏟아지며 방안은 삽시간에 불길로 휩싸······.
“하, 하하··· 하하하!”
······이지 않았다.
이제 알겠다. 알아버렸다.
“마녀. 그 마녀. 망할 창잡이. 은발. 푸른 눈. 괴물. 룬술사.”
멍청하게 정보를 나열한다. 그것이 흑마법사 게롤그가 제 총명한 이지를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임을 아는 이는 없다. 게롤그 자신조차도.
“마녀! 마녀! 마녀!”
게롤그는 어두컴컴한 제 방안을 뛰쳐나왔다. 도시의 풍경이 보인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백만의 언데드가 도사렸던 죽음의 도시는··· 너무나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마녀다! 마녀 때문이야! 마녀가 원인이었어!”
등허리에 전기가 지지직! 오른 것처럼 전율이 일어났다. 마녀··· 그래, 마녀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반복되는 사흘은 어떻게 수백 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거지?
다리에 힘이 풀린다. 게롤그는 비틀거리며 평화로운 도시 속을 시야에 담았다. 하늘에 숨겨진 마법진의 희미한 잔향을 읽는다.
달의 마력을 한껏 받아 자신이 도시에 새긴 마법진이다. 역사 속 그 어떤 대마법보다도 순수하고 강렬한 힘이 적셔진 순수의 마력.
그렇기에 이 거대한 마법진 속에 ‘이물’이 새겨졌음을 깨닫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 n 』
얼핏 보면 공용 문자와 비슷하지만, 마법적인 의미로 따지고 보면 훨씬 더 오래된 것이다.
시작의 언어. 300년 전에는 쇠락해가고 잊혀지기 시작한··· 특별한 문자.
8개의 문자가 모여 문장으로 완성되는 이 원초는··· ‘낙원은 계속된다’.
“으하, 으하하하···! 나는 알아! 안다고! 마녀! 네 비밀을 알아! 알아채고 말았다고! 원초! 원초였다고···!”
“안녕, 게롤그.”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지껄이던 목소리가 멈춘다.
“너야! 너였어! 시간은 반복하고 이써써! 네가 그러게 만드러쓰어어어어어···!”
발음이 뭉개진다. 또렷했던 시야가 침침해진다. 살덩이가 불어난다. 부풀어가는 살점에 가려진 눈동자에 요사스러운 푸른 눈이 비쳤다.
“불사왕 게롤그. 맡은 배역에 충실해야지.”
흑마법사 게롤그의 3,203번째 깨달음은 언제나처럼 무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