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90
검술명가 아덴(2)
남부의 대표가문이 듀나레프라면 동부의 대표가문은 틀림없는 아덴일 것이다.
극지의 수호자들.
엘 라스 왕국이 건국된 이래 교단의 성지 제루엠과 지온이 위치한 서부, 비옥한 옥토와 다도해를 비롯한 교역로를 확립한 남부.
반면 동부와 북부는 왕국의 우환이요, 포기할 수 없는 변경이었다.
야만인들의 연합국가 노스 킹덤이 존재하며 사악한 마종들의 대지가 된 북부.
이교도 제국과 맞닿았을 뿐 아니라, 천혜의 자연과 대치하여 불모의 땅에서 끊임없이 마물들이 몰려오는 동부.
왕국이 건국된 이래 동부와 북부가 안정된 바가 있었는가.
없다.
단연코 없다.
그렇다면 이 동부가 지금까지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왕국민들은 너도나도 입을 모아 아덴의 이름을 외칠 것이다.
“루니아 각주께서 귀환하셨습니다!!”
우렁찬 포효와 함께 본가의 대문이 열리자 족히 천이 넘는 아덴의 제자들이 우리들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각주님!!”
“오셨습니까, 각주님!!”
천 명의 인원들이 허리를 푹 숙이며 인사하는 광경은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으음······.”
말이 천명이지, 시야를 꽉 채우는 검은 도복이다.
기와 건물의 지붕 위에서 보수작업을 하고 있던 인부들이나 돌아다니는 하인들까지 들어오니 보통 어지러운 게 아니다.
그녀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급사 차림의 노인이다. 호리호리한 체형과는 달리 허리춤에 찬 대도가 노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루니아 각주님. 마물 사냥 수고하셨습니다.”
“다른 조는?”
“13조와 19조 외엔 귀환했습니다.”
“전령매를 보내고 상황을 알아봐. 피해가 적은 조들을 대기조로 편성해라.”
“네, 그리고······.”
급사 차림의 노검사가 이쪽을 응시한다. 정확히는 내 옆에 있는 아리샤였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루니아가 말을 꺼냈고.
“동생과 그 친구들이다. 사랑채를 내어주도록.”
“알겠습니다.”
“아리샤, 넌 나를 따라와라.”
“앗, 네······.”
아리샤는 위축된 표정으로 싸늘한 분위기의 루니아 씨를 따라갔다. 그것이 못내 신경 쓰였는지, 유엘이 내 소맷자락을 건드리며 물어왔다.
“아리샤는 어디로 가나요?”
“여긴 저 녀석 집이기도 하니까. 본인 방이 있겠지.”
“······그런가요.”
“손님분들은 이쪽으로.”
급사를 따라 도착한 사랑채. 우리는 짐을 풀었다.
2시간 뒤, 각자에게 주어진 방에서 쉬고 있는데, 우리를 안내했던 급사가 찾아왔다.
“코린 로크님. 루니아 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좋아, 드디어 본론이군. 결혼 이야기도 있고 궁금한게 많았다. 그녀에게서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지.
“이곳이 루니아 각주님의 전각입니다.”
루니아의 전각은 주인의 성격처럼 고요하고 강직했다.
하지만 주변에 펼쳐진 정원과 연못, 복도를 장식하는 고풍스러운 예술품들은 그녀가 이 아덴가에서 가진 위치를 표명한다.
차기 당주 후보. 아리샤만 없었다면··· 아니, 아리샤가 있었어도 실질적인 차기 당주인 그녀다.
“왔나?”
옛 사극에서 볼 것 같은 왕궁의 전각. 그곳을 배경으로 루니아가 서 있었다.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꼿꼿한 사람이다.
철심이라도 박힌 것 같은 완벽한 수직의 자세와 곱게 내려앉은 장발.
도복이 가리지 못하는 풍만한 곡선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부드러움보다는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군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앉지 그러나.”
“네.”
내가 방석에 앉자 그녀가 미리 준비된 내 찻잔에 주전자를 쪼르르륵 따랐다.
“그래, 이제 곧 열여덟이라지.”
“동생분과 동갑이니까요.”
“혹 묻겠네만, 자네. 결혼은 했나?”
“어··· 안 했겠죠?”
“그렇군.”
찻잔을 들어 찻물을 넘기는 루니아. 그 단순한 행동마저 강직하고 잡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짝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나와 혼인할 생각이 있나?”
“······진심이십니까?”
“내가 허언을 할 성미로 보이던가?”
아니겠죠. 예··· 이 사람을 3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허언은커녕 사소한 거짓 한마디 하는 것조차 본 적이 없다.
“객관적으로 자네는 우수한 씨앗이야. 무(武)의 재능도, 정진하는 자세도 훌륭하지. 얼굴도 뭐, 내 취향에 그럭저럭 합격선이군.”
“얼굴도 보시는 성격인 줄 몰랐네요.”
“나 또한 한 사람의 여인이다. 밤에 나를 안을 낭군의 얼굴과 몸 정도는 보지. ······혹시 성기능에 장애가 있나? 그럼 곤란한데.”
“아쫌···!”
누나! 너무 노빠꾸인 거 아니야?
“진짜 의도가 뭡니까? 갑자기 결혼하자고 들이대실 거면 그 정도는 설명해주셔야죠.”
“저런. 네 나이 때는 스치기만 해도 결혼을 상상하는 건강한 시기 아닌가. 나 정도 되는 여자가 구혼했으면 넙죽 받아먹을 줄도 알아야지.”
“10대의 대부분은 바보입니다만, 함부로 결혼을 결정할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진심인가?”
“······대부분은요.”
그야 뭐··· 루니아가 미인이긴 하다.
일류 모델처럼 쭉 뻗은 각선미와 여성스러운 풍만한 라인은 멋있다와 아름답다를 공존시킨다.
그래도 이건 별개. 다짜고짜 데릴사위로 들어오라고 하는 경위가 더 중요하다.
“아리샤가 제5검각주가 된 것은 들었나?”
“네, 들었습니다.”
출발하기 전 봤던 신문 내용에 있었다. 아리샤도 모르는 제5검각주 취임. 그건 전대 당주이자 지금도 아덴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검제의 선언이었다고.
“노망난 늙은이가 갑자기 나타나 선언하더군. 아리샤를 제5검각주로 임명하라고.”
루니아의 말을 듣고 대강 이해가 갔다.
“뭐, 검 깨기에서 날 이긴 이상, 시간문제였다. 가문 내에서 절차를 거쳐 졸업 후 2검각이나 3검각을 맡길 생각이었다만······.”
타이밍이 나빴다. 기본적으로 은둔생활을 하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검제 가란드가 갑자기 나타나 아리샤를 제5검각주로 임명한 것이다.
그것도 마침 아덴을 취재하러 온 기자가 있을 때.
“그런데 아리샤가 검각주가 된 것하고 루니아 씨의 구혼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영감이 그런 선언을 하고 나갔으니 내 지지자들이 몸이 달아오른 거야. 아리샤에게 조언하고 그 발칙한 계획을 세운 너라면 이해하겠지.”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다.
본디 아덴 가에서 루니아의 입지는 독보적이었다.
같은 당주 후보라고는 하나, 혈통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아리샤는 루니아의 상대조차 안 됐다.
하지만 검 깨기 사건 이후로 루니아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절대적인 강자인 줄 알았던 짐승무리의 알파가 패배했으니까.
“정략결혼··· 인가요?”
“바로 그렇다. 동부의 유지나 명망 높은 검사들과 맞선을 진행 중이지.”
“정략결혼으로 좁혀진 입지를 회복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강력한 한 수이긴 하죠.”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 결혼시장의 상품 노릇을 하기엔 내가 너무 잘났거든.”
“그래서 저와 거짓 혼약을 맺자는 거군요?”
“바로 그렇지.”
대강은 알겠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근데 누가 감히 루니아 아덴에게 결혼을 강요합니까?”
천하의 루니아 아덴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하다니.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
“내 어머니다.”
“아······.”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동시에 부모 이길 수 있는 자식도 없는 법이다.
* * * *
아리샤는 본가의 제 방에 짐을 풀자마자 몰려드는 방문객에 정신이 없었다.
“아리샤 아가씨! 저 팔각산 아랫마을에서 도장을 운영하는 아무개입니다!”
“아가씨, 저 기억하시죠? 어렸을 때부터 봐왔는데 장성하셨네요!”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고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리샤는 첩조차 되지 못하는 혼외정사의 증거다. 그런 이유로 아덴 가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였다.
하지만 아리샤와의 검 깨기 이후 변화한 분위기. ‘혹시’하는 분위기가 여름방학 때부터 보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어프로치가 오는 건······.
“할부지··· 때문이겠지.”
아덴에서 절대적인 입지를 가진 제왕 같은 존재. 검제 가란드 아덴. 그가 돌연 자신을 5검각주로 임명하라 지시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예전부터 그랬다. 모두가 반대해도 가란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을 후계자 후보로 밀어 넣었다.
안 그래도 가문의 천덕꾸러기였던 그녀가 더더욱 견제받고 무시당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일 것이다.
“아가씨, 이건 저희 가문에서 만든 검으로······.”
-벌컥!
그때였다. 제 방의 장지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가 들어온 것이다.
흑요석처럼 요요한 검은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매. 루니아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녀였다.
“소, 소피아님······.”
아리샤에게 찾아온 상인, 무가의 사범 등을 노려보는 소피아. 루니아 아덴의 친어머니이자 현 당주 제이드 아덴의 정실부인.
“더 볼 일이 남아있나요?”
“아, 아닙니다!”
그녀가 눈길을 흘리자 찍힐세라 허둥지둥 방을 나가는 불청객들. 곧 자리에는 아리샤와 소피아만이 남았다.
“어, 어머님······.”
“그래, 오랜만이구나.”
어두운 색을 한 눈이 아리샤를 흘려본다.
시선과 동일하게 억양없는 목소리.
예전부터 아리샤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한없이 수그러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소식은 들었겠지. 아버님께서 너를 5검각의 각주로 임명하셨다.”
“네에··· 하지만 전···!”
“아덴에서 아버님의 명령은 절대적. 네 의견 따위로 번복되지 않는다.”
소피아의 목소리에는 비난이나 힐난은 없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을 읊을 뿐.
“너는 제5검각의 각주로서 가문의 영예와 인류의 수호를 위해 힘써야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던 소피아가 웬 검 한 자루를 놓았다.
-툭!
거대한 외날검. 아리샤의 키보다 살짝 작을 정도로 기다란 검이다.
“각주의 상징인 지휘검이다. 본가의 인원들을 선발해 머무는 동안 그들의 지휘와 무공을 세우도록.”
“······네.”
아리샤는 반박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고 자라며 배운 굴종의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결국 이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아도.
* * * *
아리샤는 터벅터벅 제 방을 걸어 나왔다. 방에 있어봤자 불청객들만 마주할 것 같았고, 코린과 훈련이라도 하는 것이 더 나을성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주하는 별채를 지나 사랑채로 향하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럼 긍정적으로 생각해봐라.”
“뭐··· 나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아······.”
낯익은 두 사람의 목소리. 그 주인들이 이복언니와 코린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심코 숨었다.
아리샤는 루니아를 조심스럽게 응시했다.
냉철한 무표정은 약간 입꼬리가 치켜 올라왔고, 드라이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들떠 있다.
언니가 드물게 호의를 주고받는 이와 대화할 때면 미세하게 보이는 감정표현.
「자네, 나와 결혼하지 않겠나?」
갑작스레 언니가 꺼낸 말을 떠올린다. 그 맥락 없이 꺼내진 말은 과연, 언니답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언니가 이유 없이 결혼 같은 중대사를 꺼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 이유에 호의가 없었을까, 하면 그것도 아니리라.
중간고사의 실기 테스트 때부터 느꼈지만, 루니아는 코린에게 호기심과 호의를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검사로서 경지에 오른 무사에 대한 존중, 영역에 대한 염원. 그런 것과는 별개로 코린이라는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런 제안 따위 하지 않았겠지.
“······좋은 일이야.”
아리샤는 두 사람이 다 좋다.
루니아는 어린 시절 자신의 엄마 노릇을 해준 동경하는 이복언니다. 지금은 원치 않은 대립을 이어나가고 있으나 솔직하게 그녀가 행복하길 바란다.
코린도 아리샤에게는 특별한 사람이다.
자신의 재능을 믿어주고, 등을 밀어주었으며 언니의 추종자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런 두 사람이 혼사를 치른다. 좋아하는 두 사람이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되는 것이다.
‘어울리기도 하고······.’
루니아는 타고난 리더십과 카리스마로 아덴의 검사들을 이끄는 차기 당주 후보고, 코린은 엄청난 실력을 가진 무인이자 호인이다.
게으르고 겁 많은 자신과는 달리.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울리고,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두 사람이 연을 맺는 건 좋은 일이다.
응원하는 게 좋을까?
그건 잘 알 수 없었다.
기뻐서인지, 느닷없는 결혼 선언이 당황스러운 건지 싱숭생숭한 기분이다.
* * * *
아덴에 도착한 뒤로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유엘은 아덴이 방위하고 있는 국경선 너머 ‘마물의 숲’에 대한 정보를 정령으로부터 수집했고, 아리샤는 여기저기 인사하고 다니느라 바빴다.
이번에 제5검각의 각주가 되었으니 인원 편성과 권한인계 같은 행정적인 일을 하기 바쁘다는 모양이다.
자, 그럼 나는 그동안 뭘 했느냐?
“오늘은 즐거웠나? 극단의 배우가 생각보다 목소리가 좋더군.”
“천상의 목소리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리 과대광고는 아니었네요.”
“아니, 그보다 코린. 자네가 즐거웠냔 말일세.”
“어··· 예. 색다른 경험이었고 재미있었어요.”
“흠, 그럼 됐다.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즐거워야 하는 거 아니겠나.”
“······.”
본가로 귀환하는 길. 마당을 쓸고 있는 하인들이 보인다. 그들이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봤지만, 루니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였다.”
“······손등에 키스하는 건 남자인 제 역할 아닌가요?”
“음··· 영애들에게 하던 습관대로 행동했군. 다음엔 그대에게 양보하지.”
과연, 여걸. 레이디보다는 젠틀맨에 가깝나.
-엄머머머···!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주변의 시선들이 호들갑을 떤다.
“내일 또 보지. 널 위해 준비한 게 많다.”
아덴에 오고 사흘째. 나는 루니아에게 열렬히 유혹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