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illed the Player of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93
태양 – 클라우 솔라스(1)
“형아.”
가슴의 중심에 말뚝이 박힌 것 같은 충격에 의식이 꺼질 것 같다.
“허, 허억······.”
청각이 들려오는 정보와 시각이 보여주는 증거. 이에 호흡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심장을 도려낸 것 같은 통증, 현실을 부정하는 시야가 점멸했다.
“아, 아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요.”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
이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안녕, 형. 오랜만에 보네.”
“오우우우쉐에에에에에엣······.”
군청색에 가까운 나와 달리 새까만 검은 머리의 동방인. 그 이름 석자 부르기가 두려운 이 게임의 메인 플레이어.
“박시후······.”
“그래, 형이 죽인 박시후야.”
“넌 가짜야.”
“당연하지.”
놈은 씨익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마저도 심장이 덜컥거렸지만, 내 시야가 보내는 정보는 그만큼 강렬했다.
“세계를 구한다라, 참 재밌는 짓을 벌였어. 근데, 형. 자신 있어? 나보다 더 잘할 자신.”
“······.”
“나는 그 모든 걸 독식하고도 실패했어. 근데 형이 뭔데? 그 반쪽짜리도 못 되는 시스템만 가지고 형이 뭘 할 수 있어? 정말로 타테스 발타자르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 그건 나도 확신을 못 하는 부분이다.
박시후.
메인 플레이어.
정당한 세계의 주인공.
비록 그 방법은 사악했을지언정, 녀석이 가진 힘은 진짜였다.
단신으로 세계를 뒤흔드는 개인의 무용. 최종결전 직전쯤 되면 녀석은 신(神)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차원이 다른 강자가 되었지.
그런 박시후도 실패했다.
세계를 구하는 데 실패했고, 타테스 발타자르에게 패배했다.
우리는 게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놈의 계율을 공략하고, 약화하여 인간으로 끌어내렸을 텐데.
“형은 날 죽이면 안 됐어. 날 설득했어야지. 나한테 꼽사리 붙어서 다시 한번 시도해야 했어.”
“내 순결도 위험했겠지만.”
“그게 뭐 중요해? 형, 사람 구하는 거 좋아하잖아.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이건 왜 못해?”
순간 놈의 손짓에 세상이 변모한다. 변모한 세상은··· 평화로운 세계였다.
그림자 낙원의 도래가 실패로 돌아가고, 세상을 안정을 되찾고 다시금 평화의 시대로 돌아가는··· 의 엔딩 크레딧.
“보이지? 형이 만들 수 있었던 세계야. 메인 플레이어를 죽이지만 않았어도.”
형은 실패할 거야. 처참하게.
“그깟 NPC 몇 명 죽은 게 얼마나 대단하다고. 세계를 구하는 대망에 비하면 작은 거야.”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뭐?”
“내 기억을 바탕으로 보여주는 환영이라. 흥미롭긴 한데······.”
내 안의 세반시아의, 마성의 코어를 활성화한다. 흑현의 힘을 내 오른팔에 집중했다.
“이게 뭘 시험하는지는 몰라. 하지만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아.”
흑현마창.
본래는 무기에 깃들어야 하나 지금은 주먹을 있는 힘껏 휘두르고 싶은 기분이다.
어차피 화란 같은 금강불괴에 두드리는 것도 아닌데, 뼈에 금가고 하루면 낫겠지.
“야 이 씨발놈아. 니가 뭔데 그 사람들의 생사를 판단해. 게임과 현실은 뭐로 구분해? 그리고 왜 그리 쉽게 판단해?”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선택을 반복할 것이다.
-꽈앙!
공간에 금이 간다. 눈앞의 시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것이 내 대답 때문인지, 아니면 전력으로 휘두른 극권 탓인지는 모른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뿐.
“나는 왕도(王道)를 걷는다.”
후회 따윈 하지 않는다.
마리에 듀나레프.
아리샤 아덴.
화(火)와 란(蘭).
내가 구한 사람들. 효율과 관계없이 구하고 앞으로 구할 사람들.
『나는 세계를 구한다.』
내가 구하는 세계에는 모두가 있어야 해.
* * * *
나는 박시후를 좋은 놈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아무튼, 원치 않는 세계에 끌려와서 세계를 구한답시고 영웅 노릇을 하는 놈이니까.
애가 좀 싸가지가 없고 쿨찐내를 풍겨도 그러려니 했지.
결국 내 기억의 대부분은 박시후에 대해 좋게 평가하는 기억이라는 것이다.
충격적인 반전은 불과 10분도 채 안 되니 말이지.
“어쩐지 새끼 눈깔에 독기가 없더라니.”
목소리와 그놈의 ‘형아’ 소리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나는데, 이마저도 마지막의 그 기억에 비하면 약과다. 그마저도 내가 모르는 십만 명 킬 로그를 반영하지 못했다.
아마 내 기억을 토대로 형성된 현혹이라 어쩔 수 없는 한계겠지.
“나왔나?”
현혹에서 벗어나자 눈앞에 유엘과 루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엘이야 드루이드니까 이 현혹에 걸리지 않았겠지만, 루니아는······.
“어떻게 그리 빨리 나왔어요?”
“영감의 형상을 한 것이 헛소리를 하기에 베어줬다. 원본에 비하면 너무 약하더군.”
영감이라면, 할아버지인 검제를 말하는 거겠지.
나야 현혹이란 걸 알고 당했다지만, 루니아는··· 이 사람도 참 빠꾸 없는 인생이다.
“아리샤는요?”
슥 시선을 보내는 루니아. 내 뒤에 아리샤가 초점 없는 동공으로 서 있었다. 현혹에 걸리면 대충 저런 느낌인가 보다.
“이런 류의 현혹에 가장 취약할 녀석 아닌가.”
“······그렇긴 하죠.”
나는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유엘에게 다가갔다.
“죄, 죄송해요. 이런 게 있는 줄··· 몰랐어요.”
“네 탓 아니니까 진정해. 근데 만약 이걸 벗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되냐?”
“아마··· 비경 바깥으로 추방될 거라 생각해요.”
“그럼 곤란해지는데.”
“어쨌든, 아리샤가 깨기엔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아예 업고 가지.”
그렇게 말하며 루니아는 멍한 눈을 한 아리샤의 눈을 감기며 제 어깨에 얹었다.
“곧 깨겠죠?”
“아리샤를 믿자. 별로 안 믿기지만.”
“아리샤가 들으면 화낼 거예요.”
우리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고대하던 비경에 도착했다.
“와우~”
“이 산맥에 이런 곳이 있었나······.”
눈 앞에 펼쳐진 도시의 전경.
오롯이 자연의 것으로만 조화로이 엉켜있는 신비로운 전경은 숨이 덜컥 먹힐 정도의 위용을 자랑한다.
“숲의 주민들··· 드루이드들인가?”
“네, 이곳은 드루이드들의 도시니까요.”
그때였다. 근접한 인기척에 나와 루니아가 자연스럽게 무장에 손을 댄다.
아마 비경의 입구. 그쪽에서 한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나 쉬이 안개를 헤쳐나올 줄이야. 비범한 손님들이군.”
윤기가 좔좔 흐르는 새까만 털의 아름다운 표범. 그것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사람의 말을 했다.
“마물은 아닌 것 같고.”
“드루이드의 비술인가.”
나와 루니아의 추측은 정확했다. 유엘이 무언가 설명하려다 우리의 추측을 듣고 입을 다물었으니까.
“모두 모인 듯하군. 실례를 용서하시게.”
표범의 형상이 곧 인간의 그것으로 변모한다. 순식간에 변신을 완료한 뒤에 남은 것은 지팡이를 짚어야 할 것 같은 노년의 드루이드였다.
“반갑네, 어린 드루이드와 그 친구들이여. 나는 이곳 핀디아스를 수호하는 드루이드. 우스키아스라고 한다네.”
우스키아스.
4대 비보 태양 클라우 솔라스가 숨겨진 핀디아스의 수호자.
드디어 그를 만났다.
* * * *
우스키아스의 안내를 받아 진입한 핀디아스는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인공적인 건축물은 무엇 하나 없이 뿌리에서부터 자란 나무들이 도시의 전경을 대신한다.
주민들은 하나 같이 신비롭고 단아한 인상이다.
“유엘, 이 사람들 전부······.”
“네, 저와 같은 동포예요.”
외지인인 우리들을 응시하는 시선들. 적의는 없었지만, 신기한 걸 보는 눈치다.
가끔 유엘과 밥 먹으러 시내에 갈 때면 이런 표정을 지었지.
“신비롭군. 나무로만 지어진 도시라.”
루니아가 감탄할 만하다. 핀디아스라는 비경은 정말로 쭉 뻗은 나무들만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도시였으니까.
집 하나하나가 나무 스스로 줄기를 엮어 안식처로 만든 느낌이라고나 할까.
SNS에서 신비한 집 탑15 안에 들 것 같다.
“드루이드들 집은 다 이런 느낌이냐?”
“뭐, 저희는 나무와 정령들이 알아서 만들어주는 느낌이라.”
“오우야, 나도 분양 좀 어떻게 안 돼?”
“속세 사람들 기준으로는 ‘그린벨트’라고 하던데. 코린 씨 돈 좋아하잖아요. 괜찮겠어요?”
“부동산은··· 미래 보고 가는 거야.”
아깝군. 여기에 리조트 개발하고 노점 쫙 깔고 관광지 개발하면 대박이다 싶었는데.
“이쪽으로 오시게.”
우스키아스가 안내한 작고 아담한 트리하우스에 들어온 우리는 곧 자리를 깔고 앉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제로는 처음 뵙네요, 핀디아스의 현자님.”
“그래, 아벨로른의 어린 드루이드. 그곳의 참사는 안타깝게 되었네.”
“지난 일이에요.”
유엘은 아벨로른이라는 숲의 드루이드 일족이었다. 현재 아벨로른 숲은 마물들의 습격으로 사라져버린 곳.
서로가 사는 곳이 완전히 다름에도 우스키아스는 먼 친척을 대하듯 유엘을 반겼다.
“그래, 어린 드루이드가 이곳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정령으로부터 들었지. 듣자하니 코린 로크라는 이의 부탁이라던데.”
“제가 코린 로크입니다.”
“코린 로크. 그대의 어깨가 짊어진 업(業)은 실로 신화를 이룰 대계로군.”
우스키아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늙어 주름이 진 눈가였음에도 눈동자에 깃든 생명력은 젊은 청년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 어린 영웅이여. 어째서 이 벽지에 찾아왔는고.”
“태양검.”
“흐음?”
“다누의 일족이 남긴 4대 비보. 태양검 클라우 솔라스를 찾으러 왔습니다.”
“그것을 어찌······.”
나를 꿰뚫는 우스키아스의 시선. 당황하는 듯하면서도 나를 탐색하고 있다.
“자격은 있습니다. 저는 낙원의 여왕 에린 다누아의 일번창의 자격으로 이곳에 있으니까요.”
거짓이지만, 거짓은 아니다.
나는 나의 스승, 에린 다누아의 정당한 계승자. 이 사실만큼은 회귀하고서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스승님의 일번창을 자처했을 때였다.
“끄, 핡! 학, 캬, 하, 흐, 히··· 호.”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웃음소리. 곧이어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더스터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들어왔다.
호리호리한 남자는 길쭉한 뱀 같은 장신이다. 더스터 코트로 가렸기에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눈에 띄는 건 남자의 동공이다.
뱀처럼 길게 찢어진 시선. 흡혈귀로서의 눈과는 분위기가 다른, 보랏빛의 동공은 이쪽을 잠식하는 것처럼 끈적하고 치명적인 맹독이다.
“안녕, 꼬마들.”
남자는 반갑게, 하지만 흉포한 시선을 숨기지 않은 채 인사했다. 나는 이 남자를 알고 있다.
“누군가 올 거라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 왔네.”
“나를 아니? 여왕님의 충성스러운 번견아. 끄힉힉···!”
“짐승들의 왕 노릇 하시는 둔 스카이스께서 여긴 어인 일이신가?”
“너와 같은 이유지, 페르막을 죽인 꼬마야.”
수왕(獸王) 둔 스카이스.
‘무리아스’의 괴물. 어두운 그늘의 왕. 세간에서는 수인 계통의 마인들을 대표하는 테러리스트로 유명하지만······.
“페르막을 죽여? 우리 교수님을 알아?”
페르막 다만과 마찬가지로 낙원의 왕 타테스 발타자르의 수족. 중간보스 렌&론 남매의 스승 되는 남자다.
“거짓부렁을 할 생각하지 마라, 꼬마야. 네게는 페르막 그 녀석의 짙은 피 냄새가 나. 그것도 아주 짙은 사투의 피 냄새가! 어떻게 죽였지? 너처럼 약한 놈이?”
“페르막이 나보다 약했나 보지.”
“끄, 끄흙! 끄흐흐흑···! 약했··· 약했대크크큭크···!”
배꼽을 붙잡으며 꺽꺽거리는 스카이스. 이내 뱀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림자 왕좌의 군주는 오직 한 명뿐이야, 꼬마. 곧 세계를 집어삼킬 어둠의 시대에 오고 선택받은 신들이 직접 이 땅을 거닐 것이다.
나 짐승의 왕 둔 스카이스는 모든 짐승들을 이끌어 네 여신을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울 텐데··· 그땐 네 머리를 예쁘게 잘라 쟁반 위 특등석에 올려주지.”
“내 눈을 봐, 꼬마. 잘 기억해 둬. 이게 진실을 말하는 눈이란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저편에서 들린다. 하지만 그 정도 도발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아가리 똥내 나. 치워.”
“크히힑!”
광인처럼 씰룩거리는 스카이스. 그는 나를 보며 키득거리다 홱! 고개를 돌렸다.
“부르지마!”
“나 부르지 말라고 했지!”
어딘가를 향해 짜증을 터뜨리는 스카이스. 마치 무언가를 향하듯.
“오우, 미안해, 친구들. 시끄러운 친구가 있어서. 끄히히힉···!”
낄낄거리며 물러서는 스카이스. 우리의 맞은편에 털썩 앉더니 태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왜 그래? 나도 태양을 찾으러 왔거든.”
“그래, 그럴 것 같더라.”
이곳의 드루이드의 영역. 나나 타테스 발타자르의 세력이나 드루이드들은 중립적인 존재다.
피차 이곳에서 문제 일으켜봤자, 클라우 솔라스를 얻을 확률만 줄어들 뿐이다.
“희한한 적들을 달고 다니는군, 코린.”
“제가 이렇게 힘들게 삽니다.”
신경전이 끝나자 우스키아스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 모두 클라우 솔라스를 원하나 본인에게는 이를 양도할 권한은 없소. 그저 태양을 손에 쥐기에 적합한 이를 대신 시험할 뿐.
따라서 나 핀디아스의 수호자. 우스키아스는 두 분께 합당한 시험을 내릴 걸세.”
“시험?”
“히히히. 시험··· 나 시험 좋아해.”
이렇게 나왔나.
아니, 애초에 전 회차에서도 이런 방식이었을 것이다. 전 회차에서 비경의 수호자 대부분은 생존해 중립을 지켰다.
그들은 여왕도, 왕도 따르지 않는 오직 자연의 수호자들. 그렇기에 타테스 발타자르도 드루이드들을 굳이 건드리지 않았지.
문제는 정사대로라면 여기에 온 게 스카이스일 텐데.
전 회차에서 발타자르 세력은 4대 비보를 모두 소유했다. 그렇다는 건··· 스카이스가 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소리지.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숙소에서 대기해주시게. 시험 내용은 논의 후 알려줄 것이니.”
지금까지의 메인 시나리오와는 다르다. 이것은 본래 정사에서 없었던 내용.
플레이어가 경험하지 못한 시야 바깥의 사건이다.
“페르막을 죽인 꼬마야. 기대하마.”
왕의 수하와 부딪칠 건 예상했지만, 이런 식으로 경쟁하게 될 줄이야.
* * * *
때아닌 밤. 아리샤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침상에 들렀다.
낮의 현혹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아리샤가 깨어있다면 밥이라도 먹으라고 할 참이다.
“아리샤, 깼냐?”
조명이라곤 달빛밖에 없는 드루이드들의 침상. 그곳에는 아리샤가 새근새근 잠들어있다.
아직도 현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가? 이러다가 끝날 때까지 잠드는 거 아닌지 몰라.
“에휴. 내일까진 깨라 좀······.”
저녁이나 먹으러 등을 돌렸을 때였다.
-텁!
소맷자락을 붙잡는 손. 깬 건가?
“아리샤? 드디어 깼··· 우억?!”
순간 나를 끌어당기는 아리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대처할 틈도 없이 침상에 깔렸다.
“쉬잇······.”
“아, 아리샤?”
몽롱한 시선이 나를 내려다본다. 달빛에 비친 아리샤의 얼굴에 붉게 상기된 기운이 돋보였다.
“······형부.”
“어? 뭐?”
스윽, 내 귓가에 간지럽게 속삭이는 아리샤.
그리고 내 왼손 약지의 무언가를 빼는 시늉을 하더니······.
“형부··· 지금 언니 없는데.”
“어? 예? 뭐?”
너무 당황스러워서 숨이 턱 막혔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당황한 것과는 별개로 아리샤는 요염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본다.
스르륵, 피부를 스치는 천조각······ 풀썩! 하고 내 가슴팍에 엎어지는 아리샤.
-코오오오오
기절하듯 잠든 아리샤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 * * *
새벽녘 아리샤는 눈을 떴다.
익숙한 매트리스 침상이 아니라 그런지 허리가 아프고 머리가 징징 울린다. 아니, 그건 핑계다. 적어도 머리가 아픈 건 그 때문이 아니다.
“······.”
전신에 알이 배긴 것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아리샤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천장이 스크린이 되어 낮에 보았던 환상을 재생한다.
단란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었다.
동경하고 존경하는 두 사람이 언약을 맺고, 사랑을 나눴다.
열두 명의 조카들이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며 얼싸안았더랬다.
이건 분명 하나의 행복이겠지. 깨뜨려서는 안 될.
언니는 지독히도 충실한 사람이고, 코린도 배우자를 눈물 흘리게 할 이는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해피엔딩이다. 모두에게 바람직한.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그것이 불편했을까. 어째서······.
「형부. 지금··· 언니 없는데.」
-스르륵···!
“으갸아아아아아악!!”
왜 그랬지?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도대체 왜? 왜? 왜?!
“자, 잘못해써요오오··· 잘못해써요오오오. 언니, 코린 씨이이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소녀의 비밀이 또 한 가지 쌓여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