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307
제307화
71. 당신에게 가호를 (4)
“음, 역시 내버려 두지 않네.”
대체 왜 실패한 것인지 차분히 고민해 보면 좋겠지만, 상대는 수많은 세계를 삼킨 아귀.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었다.
[무엄. 당신. 징벌.]하얀 하늘 가득 드리운 가지들이 빛을 내뿜으며 내게로 쏟아졌다. 사각을 노리고 달려드는 우주수의 회로를 가까스로 회피했다. 인챈트 시전 후에는 날 막을 도리가 없으니, 시도부터 싹을 자르려는 거다.
우리 세계를 흡수하고 있어서일까. 우주수는 장인처럼 다채로운 공격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그저 물량 공세로 덤벼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고작 몇십 초밖에 버티지 못했다.
“윽, 숫자가 너무 많은데.”
민첩을 올리는 버프까지 발동했는데도 몇 놈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스멀스멀 나를 구속하려 드는 회로를 떼어 내기 위해 팔다리를 털었다.
“아이템 주제에 기생 생물처럼 굴……. 아, 잠깐만.”
그래, 아이템. 결국 우주수는 아이템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인챈트를 시전할 생각을 한 거고. 그리고 인챈트의 기본은 이해. 재료 아이템만이 아니라, 대상이 되는 아이템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그렇다면…….
갈피를 잡은 것을 기폭제 삼아 선학들이 남긴 말들이 차례로 재생되었다.
‘네가 추구하는 진리를 보여 줘.’
섭리조차 뒤흔드는 연금술사가 등을 밀어주고,
‘그가 해 준 이야기들을 잊지 말렴.’
이름 없는 장인이 당부한 속삭임이 나를 인도하여,
‘장인에게 있어, 신념은 곧 힘이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과 같은 신념을 보인 대장장이가 일깨움을 내렸다.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들이 너무나도 선명하여, 나는 마치 계시라도 받은 듯한 착각에 들었다.
진리, 스승님, 신념, 아이템, 힘……. 마구잡이로 뒤엉킨 깨달음은 곧 정제된 문장이 되어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수식언을 비틀어야 해.”
장인에게 있어 신념은 곧 힘. 그리고 수식언은 그러한 신념의 정수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 데나 노려서 될 일이 아니었는데….’
망설임이 없더라도 제대로 된 방향이 아니라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작은 오차가 곧바로 실패로 돌아오는 제작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고.
전부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었는데.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나 보다.
“하지만 이제 깨달았으니까 괜찮아.”
모두와 쌓아 온 추억들로 녀석이 쌓아 올린 댐을 무너뜨리자. 오랜 세월 고인 독을 흘려 내는 거야. 그리하면 고독에서 잉태된 놈의, 장인의 수식언을 비틀 수 있을 것이다.
화살을 만들어 시위에 거는 동작 자체는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데. 내가 길을 찾기만을 고대했다는 듯, 나의 특성이 기쁨 어린 문구를 띄웠다.
[특성, ‘영원불멸의 가호(?)’가 주인의 의지를 받듭니다.] [부가 스킬, ‘탐색자의 눈(S)’의 특수 효과가 발동됩니다!]누굴 닮아서 이렇게 호들갑인지. 괜스레 실소하면서도 나는 녀석이 보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바른 자리로 향하는 화살은 길을 잃지 않으니.”]시위를 당기는 사이, 팔다리가 완전히 붙들렸지만 이미 늦었다. 간발의 차이로 화살촉이 빨갛게 빛나는 우주수의 중심을 가리키니. 이제는 빗나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며 아귀힘을 풀었다.
“인챈트!”
방금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 나무가 모든 가지를 끌어모아, 핵을 가렸다.
그러나 그 역시도 내가 바꾸고자 했던 아이템의 일부. 화살은 회로에게 스미어 닫힌 ‘고독’이라는 본질을 둘러싼 외피들을 무너뜨렸다. 끝내 우주수 스스로를 가두었던 벽이 모두 허물어져, 환히 열린 문이 되니.
우주수가 발산하는 빛으로 물들었던 공간이, 순간 백금빛 광채에 둘러싸였다. 따뜻한 빛 사이로 피어나는 메시지를 보며 눈을 둥글게 휘었다.
[믿을 수 없는 업적! 인챈트 ‘영겁의 만월(?)’에 성공했습니다.]두말할 나위 없는 성공. 그리고 승리를 알리는 축포였다.
“아, 정말……?”
감탄사를 다 뱉지도 못하고 그대로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금 전까지 화살을 쥐고 있었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활을 내려놓고, 깍지를 꼈음에도 떨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거목의 이름을 비추는 저 창이 아니었다면, 한동안 계속 그런 상태였을 것이다.
[영겁의 만월, 우주수]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만상을 비추는 허무’라는 칭호가 자취를 감추고, 내가 내린 가호가 공백을 메웠다. 깊은 속내를 어루만지고, 외로움을 달래는 이야기에 감화되어 우주수의 회로가 내뿜던 사나운 빛도 한결 옅어졌다.
자신은 있었지만, 그것이 두려움을 모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느릿하게 현실감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꾹 두 눈을 감았다.
‘정말 끝났구나.’
혹시라도 재차 실패할까 봐 잔뜩 힘을 주었더니 전신에 기운이 없었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쉬었다가 도서관으로 돌아가자. 그러면 왜 이렇게 일찍 끝났냐면서 한차현이 깜짝 놀라겠지. 믿는다고 했으면서 너무하다며 너스레를 떨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긴장이 풀려서인지 잡념들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평소에는 마찰을 피하려 갈무리하던 마력도 안일한 마음가짐을 따라 엉망진창으로 흘러나갔다. 성취와 노곤함은 정비례한다더니. 이번에는 유독 늘어지는 정도가 심했다.
‘다른 헌터도 없는데 괜찮겠지.’
그대로 나는 흰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호흡을 따라 마력이 이리저리 넘실거렸다.
직업병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휴식을 취하면서도 나는 주변의 흐름을 더듬었다. 공기 중 가득 내 마력이 번져 있기에 버릇이 나온 거겠지.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만월의 기운. 아무래도 익숙한 것이라 쉽게 구분이 되었다. 튜브를 낀 채 유수 풀을 떠다니는 사람들처럼 편안한 기운 사이를 헤엄쳤다.
……이상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뭐야? 다 끝난 거 아니었어?”
맥없이 뻗은 마력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정말로 인챈트에 성공했다면 보이지 말아야 하는 잔재였다. 감지와 동시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뜨니 더욱 이상이 더욱 선명해졌다.
분명 나는 세계탑의 수식언을 변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왜 저것들은 멈추지 않는 거지?
여전히 지구의 모습을 송출하고 있는 화면들이 나의 혼란을 비웃듯 팟! 같은 단어를 띄웠다.
[불변.] [잔여 시간 : 00:03:03]모든 것이 끝났음에도 멎지 않는 재앙에 마음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 나는 금방 침착을 되찾았다. 내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었으니까.
[영겁의 만월, 우주수]정말 내가 실패했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문구였다. 그렇다는 건…….
가정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거대한 나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기둥에 손을 얹고 정보 열람을 시도했다. 만약 내가 우주수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면, 당연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권한 부족! 정보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내가 내린 축복을 머금은 것이 무색하게, 거목의 회로는 나를 거부했다.
원론대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성공과 실패의 징표가 동시에 나타나다니. 문외한이 보아도 이상한 상황이 아닌가. 몇 초간의 고민 끝에 나는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성공하지 못했지만, 실패하지도 않았다는 건가?”
남들이 듣기에는 무슨 궤변이냐고 하겠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탑의 모든 것들을 좌지우지하는 나무라고 한들, 자신의 본질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것은 그보다 앞선, 그래, 진리에 가까운 문제였다.
성공과 실패. 두 가지가 모두 일어난 이 모순된 상황은 대체 왜 일어났을까?
지난할 줄만 알았던 고민의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생각해 보니 이미 비슷한 일을 여러 번 보고 겪었거든.
“등급 차 때문이구나.”
만월의 힘으로 수식언을 뒤트는 작업은 따지자면 일종의 오염이었다. 사유가 어찌 되었든 상대방의 근원을 건드리고, 물들이는 일이니까.
관성을 꺾고 누군가를 변화시키다 보면, 줄다리기가 벌어지기 마련. 그렇기에 보통 타고난 힘의 차이가 오염의 성패를 좌지우지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길 것이다.
“만월은 어떻게 등급 불명인 우주수를 꺾었을까.”
나와 스승님들의 합주로 만들어진 검, 만월은 제작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에 남을 위업이 되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등급을 매길 수조차 없는 우주수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녀석이 흡수한 전설만 해도 얼마인데. 당장 L급 장비를 여럿 만든 나의 스승님만 해도 그에게 당하지 않았는가. 이런 이유에서 만월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완전한 패배자가 되지도 않았으니. 회로 안에 심어진 한 인챈트가 이룩한 성과였다.
“침식.”
내가 해석하고, 구상하여 만든 첫 인챈트인 침식. 염치를 모르고 가지를 뻗고, 상대도 모르는 사이 스며드는 이 식은 오염과 상당 부분 닮았다.
“그래서 불완전하게나마 인챈트가 성공한 거겠지.”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우주수가 더 이상의 횡포를 부리지 않게끔 막기는 하였으나, 나의 세계를 구원할 수는 없는 반쪽짜리 성취.
우스운 일이었다. 세계탑을 축복하겠다는 본래의 목적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가장 중요한 알맹이를 빼먹지 않았나.
차라리 방금 있었던 실패처럼 만월이라도 내게 돌아왔다면, 다시 시도라도 해 봤을 텐데. 운명이 날 돕는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나 보다. 두 번째 실패에는 다음이 없었다. 탄창이 빈 권총을 발사하듯 공연히 활을 만지작댔다.
“L급은 고사하고, S급 아이템도 없잖아.”
인벤토리 안에 넣어 둔 아이템들의 등급을 헤아리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것들로는 턱도 없지.
‘L급이 하나 더 있더래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판국인데, 뭐.’
등급 미정인 우주수를 완전히 물들이려면, 적어도 동급인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이제 갓 L급 아이템 하나가 발견된 우리 세계로서는 불가능한…….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문득 어떤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등급 미정이라면, 내가 하나 가지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