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308
제308화
71. 당신에게 가호를 (5)
정확히는 등급 미정이 된 무언가. 얼마 전까지는 등급이 제대로 규정되어 있었기에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심지어 아이템도 아닌걸.”
그게 대체 뭐냐고? 내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하나밖에 더 있겠는가.
[특성, 영원불멸의 가호(?)]나를 이곳까지 이끈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특성, ‘영원불멸의 가호’. 나의 성장에 따라 개화한 ‘탐색자의 눈’처럼 이 녀석 역시도 방금 있었던 전투를 계기로 새롭게 피어났다.
‘아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뭐,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면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특성을 재료 삼아, 탑을 축복한다니. 하나부터 열까지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세계탑에서 합리를 찾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지.”
농담 삼아 한 말은 아니었는데. 괜히 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나왔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합리며, 논리 같은 걸 따지면서 움직였다고. 고집스럽게 다섯 잎 클로버를 따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비합리적이었다. ……어쩌면 매일 흉을 보던 세계탑보다도 더.
그래도 언제나 나의 최선은 빛을 발했으니. 이번에도 그 가능성에 걸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도와줄 거지?”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속삭인 순간, 눈가가 화끈 달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영원불멸의 가호(?)’가 당신의 선택을 지지합니다.]상냥한 긍정이 떠오르고, 뒤편으로 스물다섯 장의 카드가 허공에 펼쳐졌다. 나의 고유회로이자, 특성을 얻게 된 이래 누구보다 견고히 날 지탱해 준 아군들이었다.
호흡처럼, 피처럼 내 안을 타고 흐르는 기운들이 날 인도하니. 본 적도, 배운 적도 없는 일임에도 나는 능숙하게 카드들을 지휘했다.
손길이 닿는 자리를 따라, 다섯 개의 열로 줄을 선 카드들이 이어졌다. 그리고는 이윽고 한데 모여 한 장의 카드만이 남았다. 다른 이들의 기운을 전해 받았는지, 카드에서 전에 없이 응축된 힘이 느껴졌다.
이름 모를 카드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하기도 전, 화살의 형태로 변한 카드가 내게 날아들었다. 뒤이어 적히는 문구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스킬 ‘인챈트(?)’가 활성화됩니다.– 0번 슬롯 : 가호 (잔여횟수 0)]
“가호라. 좋은 이름이네.”
만월의 화살과 달리, 이번 화살은 여느 때 내가 만들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생김새였다. 평범하다 못해 밋밋한 외양이란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되레 기꺼웠다.
‘가장 나다운 모습이잖아.’
[효과 발현 시, 특성 ‘영원불멸의 가호(?)’가 삭제됩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경고 조의 문구를 무시하고 화살을 건 시위를 팽팽히 잡아당겼다.
활을 쏘아 내기 전, 긴장이 유지되는 몇 초간. 내색한 적은 없으나, 헌터가 된 이후 내가 가장 사랑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찰나가 되리라. 작은 감각까지도 모두 기억하려 사력을 다하며 목표를 겨누었다. 이 손을 놓으면, 나는 다시 C급 헌터로 돌아가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그리고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니까.’
그러니 괜찮다. 그렇게 확신하며 화살을 놓아주었다.
“인챈트.”
마침내 도달한 나의 가호가 종말을 꿰뚫고, 세계를 적시는 순간. 나는 보이지 않던 큰 계단을 한층 뛰어넘은 듯한 감각을 느꼈다.
첫 번째 성공과는 전혀 달랐다. 좀처럼 실감하지 못했던 그때와 달리, 나는 화살이 미처 우주수에 닿기도 전에 나는 성공을 직감했다. 그리고 직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헤아릴 수 없는 업적! 인챈트 ‘영월의 가호(?)’에 성공했습니다.] [영월의 가호, 우주수]모니터가 하나둘 빛을 잃고, 그들을 휘감고 있던 뿌리들이 구속을 풀고 땅 아래로 뻗었다. 하얀 공간, 아니 세계탑 전체에 번지는 따뜻한 축복 덕분이었다.
같은 순간, 작은 가호와 희미한 종소리가 나를 감싸 안으니.
[특성, ‘당신에게 가호를(C)’이 주인의 개화를 축복합니다.]내게 남은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리는, 다정한 선포였다.
***
“안녕.”
차분한 듯하면서도 명랑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언제 떴을지도 모를 눈을 깜박이며 상황을 되짚었다.
‘인챈트에 성공했고, 바깥으로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여긴…….’
한없이 어두우나, 동시에 문틈 사이에서 보았던 영롱한 빛들이 떠다니는 역설적인 공간. 어느 모로 보나 내가 목적지로 삼았던 곳이 아니었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중, 나는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아이를 발견했다.
“이제야 보는구나. 여기야, 여기.”
몇 발자국 다가가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자마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삿대질을 하고 말았다.
“어머, 무례하구나.”
“다, 당신은. 지고의 장인?”
틀림없었다. 내가 보았던 장인보다 앳되어 보이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있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똑같이 생겼다.
“그럼 내가 지금 무저갱을 헤매고 있다는 건가?”
“눈만 나쁜 게 아니라 머리까지 나쁘다니. 실망이야, 실망.”
아이가 입술을 쭉 내민 채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어린아이는 아니겠지만, 그 모습이 퍽 앙증맞아 절로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신가요?”
아이는 내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잠시간 고민했다. 그러더니 톡톡 허공을 두드리는 게 아닌가. 묘하게 낯익은 손짓에 눈살을 찌푸린 그때, 그의 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대화하다. 이렇게. 가능. 인지?]“세계탑? 아니, 우주수라고 불러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둘 다 내 이름이니까.”
휙 성의 없는 손짓으로 창을 지운 탑이 배시시 웃었다.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천진한 낯이었지만, 이번에는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또 뭔가 잘못된 건가?’
두 번째는 정말로 성공 같았는데. 이쯤 되면 나 장인 때려치워야 하는 거 아니야? 따위의 부정적인 생각이 피어오르던 중, 탑이 냉큼 상념을 끊어 주었다.
“걱정 마. 넌 날 제대로 부쉈으니까.”
“……부쉈다고요?”
“뭘 모르는 척하나 몰라. 그 정도로 근원이 헤집어졌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정말 모른다면 통탄할 일이라며 탑이 엉엉 우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나는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긴. 그렇게 복잡한 구조를 가진 아이템을 내 입맛대로 뒤집어 놨으니까. 멀쩡할 리 없지.’
자신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변화하는 내 표정이 재밌었는지 탑은 집요하게 날 응시했다. 부담스러워 슬쩍 얼굴을 돌리자, 그는 그제야 본론을 꺼내 놓았다.
“이제 나는 서서히 사라질 거야. 네 축복이 내 고독을 모두 달래면 그때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겠지.”
“‘서서히’라고 함은, 정확히 얼마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겁니까?”
“너희 쪽의 시간으로 치자면…… 음, 200년 정도이려나. 하지만 내게 그러했듯, 내 안의 이야기들을 바꿔 준다면 그날이 조금 더 이르게 찾아오겠지.”
맥락을 통해 유추해 보건대, 히든 피스를 말하는 것 같았다. 세계탑과 이현상은 어느덧 우리 세계의 일부처럼 자리 잡았지만, 기억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 나를 지켜보다 말고 탑이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뒤이어 눈이 슬슬 감기고, 몸까지 휘청휘청 흔들리니. 연기라고 보기는 어려운 모습이었다. 기다란 소매로 눈가를 문지르며 그가 중얼거렸다.
“아아, 혼자 자기엔 지루한데. 그이한테라도 가 봐야겠어.”
“지고의 장인에게로 가시려고요?”
탑은 답하지 않았지만, 긍정이나 다를 것 없는 침묵이었다.
허공을 찢고, 나를 두고 떠나려던 탑이 돌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매번 그러하듯 이해하기 힘든 발언이었다.
“응. 아, 그래. 마지막이니 선심도 조금 쓰고 갈게. 하나, 둘, 음, 몇 가지.”
뭘 말하는 것이냐고 되묻기도 전, 그는 게이트 속으로 쏙 들어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초 뒤, 생각지 못했던 이가 그곳에서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한차현 헌터?”
“……가호 씨? 왜 여기 계세요?”
서로를 보며 의아해하다 웃음을 터뜨린 우리는 짤막하게 서로의 상황을 공유했다.
“특성이 사라지셨다고요?”
“지고의 장인을 찾으려 하셨다고요?”
음, 다소간 언쟁 같은 해명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서로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이대로 조금 더 해후를 나눠도 좋겠지만, 일단은 나가야지. 분위기가 조금 차분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눈짓으로 한차현의 낫을 가리켰다.
“그걸 사용하면, 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심을 쓴다더니. 그가 쥔 낫에서 탑의 기운이 느껴졌다.
허튼소리면 어떻게 하려고. 한차현은 내가 제안하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을 내리그었다. 이름 모를 별자리가 긴 상처를 내며 길을 내었다.
그렇게 나는 비로소 긴 여정을 끝 마치고, 나의 세계로 돌아갔다.
***
“윽, 이건 대체…….”
“가호 씨, 일단 제 뒤에 서세요.”
게이트를 통과해 밖으로 나오자마자, 난데없는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언뜻언뜻 보이는 배경으로 보아선 서울역, 그러니까 탑의 환영이 있는 곳 같은데. 나는 반사적으로 내 앞에 나선 한차현의 뒤에 몸을 숨겼다.
‘대체 무슨 소란이야?’
카메라 플래시며, 마이크며, 여기저기서 날아 오는 질문들까지. 본인이 기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종합해 나는 간신히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메시지가 모든 각성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거다.
[77층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 최대 기여자 : 윤가호] [믿을 수 없는 업적 달성! 최대 기여자의 의지에 따라, 세계탑이 개변합니다.]
심지어 이 문구가 탑의 외관에 출력되었단다.
그렇지 않아도 멸망의 징조 때문에 혼란스러운 판국이었는데. 메시지가 떠오름과 함께 모든 이변이 사라지니, 나의 귀환에 이토록 관심이 쏠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식으로 회견을 열 생각이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뭐라도 한마디 하지 않으면, 길을 내어 주지 않을 것 같은 눈치였다.
툭툭 등을 두드려, 한차현을 비켜서게 하자 순식간에 소란이 가라앉았다. 내가 무언가를 말할 것이란 걸 눈치챈 것이다. 찰칵거리는 플래시 소리와 내 목소리만이 광장을 울렸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바가 맞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한차현 헌터와 함께 77층을 공략했습니다. 세계탑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것 또한 맞습니다.”
이런 번드르르한 말을 하는 건 내 특기가 아닌데. 공연히 머쓱해져 뺨을 문지르며, 나는 마저 말을 이었다.
“기대를 충족시켜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만, 생각하신 것과 다르게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어디에나 있을 법한 C급…….”
거기까지 말했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S급 특성을 잃었으니, C급이라는 표현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 앞의 수식어는 조금 바꿀 필요가 있어 보였으니까.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귓가가 미미하게 달아오르는 건, 내 천성의 문제이리라.
부디 의연해 보이기를 빌며, 나는 대중에게 비로소 ‘윤가호’를 소개했다.
“온 세계를 통틀어, 아무도 세운 적 없는 업적을 달성한 제작계 헌터. 그게 접니다.”
내가 입을 연 이래로 고요하던 광장에 웅성거림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심상찮은 발언이었다.
‘이 정도만 말하고, 일단은 도망칠까.’
한차현에게 타이밍을 재자고 신호를 보내려는데, 인파 속의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자신을 모 방송사의 기자라고 밝힌 여자가 모두가 궁금해했을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윤가호 헌터께서는 S급 헌터 이상의 역량을 품고 계시다는 건가요?”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멀리서 사람들을 제치고 달려오는 동료들이 보였다. 흐릿해진 탑의 환영과 인파, 미처 정리되지 못한 소란의 흔적이 뒤섞인 역사 주변은 여전히 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풍경이 기꺼워 미소 지었다.
나와 당신이 숨 쉬는 이 자리. 아무도 몰래 찾아온 나의 가호가 감도는 이곳이야말로 바른 자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