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Obtained a Mythic Item RAW novel - Chapter 281
281화 밀레스 학원제(3)
“내가 널 좋아한다는 이야기지.”
“…뭐?”
재현은 그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들은 이야기. 그것의 내용이 너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이다.
그동안 김유정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단 한 번도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를 겪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레이더가 되어야 한다.
또 어머니를 보살펴 드려야 한다.
그런 맹목적인 강박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
한데, 아무래도 그녀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재현은 김유정의 흔들리지 않는 두 눈동자를 보았다.
툭 치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눈이다. 여기서 자신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알 수 없다. 그래서 한참을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재현은 알았다.
최근 그녀의 행동이 달라졌고, 트라우마 속에서 자신과 관련한 무언가를 보았다는 것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이런 감정이 자신에게 허용되는 걸까.
서이나 때도 그랬다.
자신에겐 여유가 없다. 지금 누군가에게 한 편의 감정을 내어주기에는 아직 재현은 너무나 약했고, 더 강해져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재현이 나아갈 방향은 자신이 아닌, 오로지 신들에 의해 결정돼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여기서….
“대답은 지금 안 해줘도 돼.”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떼려던 순간.
김유정의 입에서 먼저 그런 말이 나왔다.
재현의 동공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의 눈에 담긴 자신의 모습이 그처럼 볼품없었던 적이 없었다.
우유부단하고, 쉽게 뭔가 결정도 내리지도 못한다. 모든 것들을 회귀 이후 청산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에는 부족했고, 그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라면 더더욱 그랬다. 김유정은 누가 뭐라 해도 가장 오랜 친구였다.
이 관계가 더 진전된다면, 되레 더 후퇴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순간, 재현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김유정의 눈을 피해버렸다.
“미안해.”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가 아니야. 너 때문에 이나랑 나랑 사이가 안 좋아질 일도 없으니까 걱정도 하지 말고. 그냥 지금은….”
김유정이 재현에게 손을 뻗었다. 곧 그녀의 손이 재현의 얼굴에 닿는다.
“그대로 있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계속해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던 재현에게, 그 말은 어째서일까.
감정의 격류를 끌어내는 말이었다.
재현은 겨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몇 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을 약간 넘긴 시각이었다.
* * *
축제의 둘째 날 아침이 밝아왔다. 오늘은 서이나와의 약속이 있는 날.
재현은 약속 장소인 동쪽 게이트로 향했다.
가는 걸음은 당연하게도 전혀 가볍지 않았다. 가슴이 갑갑했고, 금세라도 머리가 새하얗게 질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제 김유정에게 들었던 고백의 여파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한 탓이었다.
물론 초월적인 신체를 지닌 레이더에게 며칠쯤 밤을 새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계속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김유정. 자신의 가장 오랜 친구.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
그것은 지금까지의 두 사람의 관계를 틀어버릴 수 있는 중대 사안이었다.
다행히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 주었기에,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있지만….
‘너무 오래 희망 고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나도 그렇고, 김유정도 그렇고.’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헬라는 어제 고민에 잠긴 재현을 향해 그렇게 물어왔다.
재현은 그 순간 아무것도 답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모든 것을, 그저 뒤로 미뤄둬도 괜찮은 것일까?
“답답하네.”
재현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와중.
먼발치에서 이미 도착한 서이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나야 원래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타입이니까.’
재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서이나 역시 재현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게이트 앞의 서이나는 어제의 김유정처럼 옷에 꽤 신경을 쓴 것처럼 보였다. 검은 H라인 스커트 위로 하늘거리는 숏 원피스를 입은 모습.
머리엔 가벼운 웨이브가 들어가 있어 새하얗고 둥근 이마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많이 기다린 거 아니지?”
“…응. 일단 갈까?”
서이나는 평소보다 약간 들뜬 표정으로 그렇게 제안했다.
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오늘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으니까.
처음으로 두 사람이 방문한 곳은 동쪽 게이트에 자리한 백화점이었다.
그곳에서 서이나는 재현을 남성복 코너에 데리고 갔다.
“안녕하세요!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점원이 인사해오자, 서이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릴게요.”
“어떤 옷 보러 오셨나요?”
“…여름 셋업을 사고 싶은데….”
서이나의 말에 점원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재현과 서이나를 셋업이 준비된 코너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재현이 서이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나 옷 사려는 생각은 크게 없었는데…?”
“…괜찮아. 내가 사 주는 거야.”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거 아니었어?”
서이나가 실망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왔다.
재현은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여름 셋업으로 준비된 상품이에요! 여기서부터 이쪽이 제일 잘 나가고….”
서이나는 그렇게 한참을 재현에게 이것저것 입혀보더니, 결국 셋업을 세 벌이나 사 주었다. 재현은 진이 빠졌으나, 서이나는 기쁜 표정이었다.
점원은 한 번에 값비싼 셋업을 세 벌이나 판매하게 돼 기쁜 듯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재현 군과 이나 양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역시 사귀시는 거였군요?”
“…아, 그게.”
재현이 뭔가 말하려던 때. 서이나가 재현의 발을 살짝 눌러 밟으며 중간에 말을 잘랐다.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까.”
거기서는 더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졸지에 점원을 속인 채(?) 백화점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재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구매한 옷을 담은 봉투를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왜 옷을 사 주겠다고 생각한 거야?”
참고로, 이미 한 벌은 조금 전에 새로 산 것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짙은 푸른색을 띤 고급스러운 블레이저와 바지로 구성된 셋업이었다.
“…항상 칙칙한 색 옷만 입고 다니는 거 보기 싫어서?”
서이나가 하는 말에, 재현은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통탄해했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이긴 했다.
지금까지 돈과 포인트를 꽤 벌면서 옷은 샀었지만, 언제나 칙칙한 색이었다.
검은색이나, 회색 조. 그런 옷들만 수집했으니, 화사할 일이 있을 리가.
“…그래서 이번 기회에 좀 바꿔주고 싶었거든.”
“고마워.”
재현은 덤덤히 그렇게 말했다.
물론 마음은 싱숭생숭했지만, 자신을 배려해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여기서 굳이 불필요한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그럼 이제 다음 장소로 갈까?”
옷을 고르느라 꽤 시간을 쏟았지만, 아직 시간은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두 시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각.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에 재현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도달한 다음 장소는 다른 생도들이 연 부스 중 하나였다. 알고 보니 아예 학원 건물 자체를 대관해 진행하는 연극이라고 한다.
재현과 서이나는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았다. 앞을 자세히 보니 꽤 익숙한 얼굴이 많았다. 거기엔 놀랍게도 정현과 강주협도 있었다.
그것도 무대 위에!
그들은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서로 싸우는 역을 맡고 있었다.
“너 이 자식… 당장 악행을 거기서 그만두지 못해?! 이 입에 욕이나 달고 사는 쓰레기 같은 놈이…!”
정현이 먼저 그렇게 소리치자, 강주협이 코웃음 쳤다.
“X발!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나는 너 같은 새끼들을 잘 알아! 앞에서 착하게 구는 주제에 뒤에서는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거 다 안다고!”
두 사람의 대사를 듣던 무대 아래의 생도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앞에 대사까지는 맞는데… 뒤에 대사들은 처음 듣는데? 애드리브인가?”
물론 재현이 이를 눈치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연극은 그대로 진행되었고. 대사는 누가 짰는지 약간 유치했지만, 재현은 그것 나름대로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대체 얼마 만에 이런 시간을 보내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어느새 깔려 있던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극이 모두 끝난 뒤.
서이나와 재현은 커튼콜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예의는 아니지만, 너무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이미 이곳 축제에는 갖은 기자와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다.
생도들의 사생활은 최대한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사진과 영상물을 찍게 돼 있지만, 어쨌든 주변에 쫙 깔린 게 기자들이다.
그런 규정 따위 제대로 지킬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인지도가 높은 재현과 서이나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입은 옷도 약간 튀긴 하고.
“그럼 갈….”
“어!? 재현이랑 이나 아니야?!”
그렇게 자리를 뜨려던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지안. 성은의 수장이 그곳에서 잔뜩 이상한 분장을 한 채 서 있었다. 머리에 괴상한 피에로 가면과 가발을 쓴 모습.
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재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물었다.
“꼴이 좀… 심하네요. 혹시 서클 원들한테 왕따라도 당해요?”
“아, 이거? 우리 서클 애들이 다른 사람은 다 안 어울리는데 나한테만 이 옷이 어울린다더라고! 하하, 이게 또 맵시가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하게 된…!”
“…왕따 당하는 거 맞나 봐.”
서이나가 소곤거렸다. 물론 목소리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중. 한지안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희는 여기서 뭐 해?”
“연극 봤죠.”
“다른 애들은? 화장실?”
“…아뇨. 오늘은 저희 둘이서 나왔어요.”
“…둘이서?”
서이나의 답에 한지안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치솟았다.
‘이 애들이 벌써…!’
그녀가 빙긋 웃으며 큼큼,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눈치 없이 너희를 붙잡았구나. 어서 가봐.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아뇨. 딱히 그런 게 있다기보다는 뭐.”
재현이 뭔가 더 말하려 했으나,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이미 저쪽에서는 충분히 오해한 모양이고, 해명하는 모양새도 영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차근차근 이야기해도 늦지 않겠지.
“그럼 난 간다!”
한지안은 다시 기괴한 가면을 쓴 채 뒤돌아섰다. 그녀는 손을 휘휘 저으며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럼 우리도 가자. 슬슬 돌아가야지. 내일은 카페도 열어야 하잖아.”
“…그래.”
재현의 말에, 서이나가 순순히 동의했다.
두 사람은 건물 밖으로 나섰고,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걸었다.
기자들은 거의 없었다. 지금쯤 거의 돌아간 거겠지.
사실, 뒤에서 사람이 따라오는 것쯤은 재현 정도의 실력자라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긴 했다.
잠시 후. 사람이 모두 사라진 것을 느낀 재현이 문득 입을 뗐다.
서이나를 데려다주던 길이었다.
“할 말이 있어서 날 부른 거 아니었어?”
그 말의 의도는 명확했다.
지난번 서이나의 고백과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녀의 말.
재현은 그것의 종지부를 맺기 위해 지금의 말을 꺼내는 것이다.
서이나가 잠시 옷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있어.”
“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재현은 그녀의 말에 의문을 느낀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그러려고 날 부른 거잖아.”
“…어제 유정이한테 고백 받았지?”
갑작스레 들어오는 서이나의 말. 재현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서이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처음부터 알았어. 유정이가 너 좋아하는 거. 너랑 본인만 몰랐던 거지.
…사실은 끝까지 모르길 바랐지만….”
“그래서. 이제는 마음을 좀 정리한 거야?”
“아니.”
그 순간에서만큼은 서이나 역시 즉답했다.
서이나는 재현을 보며 계속해 이었다.
“…포기하기에는 내가 널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번 역시 재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서이나의 두 눈이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꿰뚫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통찰안처럼,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선연히 관조하고 있었다.
“…그럼 돌아갈까?”
정작 자신을 혼란스럽게 한 서이나는 그저 웃으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