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103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일단 에밀리나부터 그것에 신경 쓸 틈도 없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었으니까.
가령 조금 전 전해 들은 여주의 행방 같은.
클로이 트로비나가 왜 뜬금없이 동대륙으로 갔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느라 행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동안 연습해 온 보람이 있게 결과물이 썩 나쁘지 않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염려했던 웃음거리가 되는 일도 없었다.
무난하게 차례를 넘김과 동시에 다른 귀부인의 품평이 이어졌다.
이윽고 가든파티의 목적인 메인 행사가 종료되고, 친분이 있는 자들끼리 담소를 나눈 후 파티가 해산되었다.
에밀리나는 그길로 곧장 후작저를 떠났고, 자신의 집이 된 수도 공작저로 돌아와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 * *
가든파티에 다녀오고 난 이후부터 에밀리나의 일상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귀부인들의 초대는 물론이고, 동대륙 사절단의 입국이 다가오면서 새로운 사업 계획을 세우느라 하루가 모자랄 정도였다.
사실 새로운 사업 계획이라고 해 보았자 헤더 상단의 무역권을 빼앗아 오는 게 전부였지만.
어쨌든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키르젠과 마주치기도 쉽지 않았다.
그 탓에 키르젠은 여러모로 불만이 쌓인 상태였다.
수도로 거처를 옮기면 에밀리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 반대이니 속상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그나마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침실에서도 에밀리나가 밤늦게 찾아오면서 보기가 어려워졌다.
바쁘다는 이유로 서재에서 거의 지내다시피 하니 자신이 직접 데리러 가야만 볼 수 있었다.
이때 키르젠은 본의 아니게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서재에서 지내는 것도 상대에게 몹쓸 짓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키르젠의 관점에서였다.
어쨌든 그런 자신을 반성하고 후회하며 오늘도 서재에서 나오지 않는 에밀리나를 데리러 갔다.
사냥제까지 앞으로 이틀.
행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더 이상 그녀를 무리하게 둘 순 없었다.
“부인, 많이 바쁘십니까?”
서재에 노크하고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키르젠이 바로 건넨 말이었다.
서류에서 눈을 뗀 에밀리나가 간결히 답했다.
“아, 음. 조금 바쁘네. 금방 들어갈게.”
“요즘 무리하는 것 같습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서요.”
“……그랬었나.”
“그랬습니다.”
키르젠이 단호하게 답하며 미리 하녀들에게 준비하라 일렀던 야식을 책상 위에 두었다.
배가 출출할 에밀리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에밀리나는 그제야 아침 이후로 먹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곤 배고픔을 느꼈다.
키르젠의 말대로 요즘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정신없이 일만 한 자신이 다소 미련스러웠다.
에밀리나는 키르젠이 준비해 온 야식을 먹고선 그와 소파에 마주 앉아 가벼운 대화를 이어 갔다.
“록벨과 하녀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부인이 몸 상하며 일하는 것을 원치 않고요. 차라리 사람을 고용하는 게 어떠십니까?”
키르젠의 제안에 에밀리나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하지만 이건 내 일인걸…… 남한테 맡기기 불안하기도 하고.”
“신뢰의 문제입니까?”
“그런 셈이지.”
“그런 부분이라면…….”
키르젠이 방법을 제안하려던 찰나, 에밀리나가 말을 끊었다.
“괜찮아. 나 혼자 할 수 있어.”
“괜찮지 않아서 그럽니다. 부인이 정말 혼자서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서재에서 날을 지새우면 안 되지요.”
식사 또한 거를 이유가 없고요. 키르젠의 뒷말에 에밀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의 말대로였다.
에밀리나는 현재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최근 멀린과 계약을 새로 맺으면서 디저트 사업까지 확장했다.
갈수록 신경 쓸 게 많아지고, 해결해야 할 게 산더미처럼 늘어나는데 몸은 하나라 잠잘 시간도 부족했다.
그렇다 보니 그녀 역시 혼자서는 역부족이라는 걸 알았다.
이젠 정말 사람을 써야 할 때라는 걸 진작에 깨닫고도 남았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냥 쉽게 사람을 고용하면 되는 것을, 쓸데없는 걱정으로 인해 미루게 되었다.
오지 않은 앞날을 염려하며 한 번의 선택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혼자서 처리하다 보니 업무 과다로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자신의 실책이었다.
에밀리나가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사람을 고용하는 건 좀 천천히 하려고 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타인을 신뢰하기까지가 되게 오래 걸려. 설령 단순한 고용 관계일지라도.”
“좋은 자세입니다. 원래 타인은 쉽게 믿어선 안 되는 거지요. 신뢰하더라도 일말의 의심은 남겨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에밀리나는 키르젠을 바라보았다.
남을 의심하라는 키르젠의 모습이 어딘가 낯설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부인, 빈말이 아닙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절대 온전한 신뢰를 나눌 수 없습니다.”
에밀리나는 문득 키르젠에게 묻고 싶어졌다.
“그럼 너도 의심하라는 말이야?”
“네.”
키르젠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에밀리나는 이상한 얼굴이 되어 그를 쳐다봤다.
그를 의심하라는 말은…….
“그럼 너도 나를 믿을 수 없겠네.”
그 역시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이므로.
하지만 키르젠의 대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아니요, 저는 부인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심할 수 없어요.”
참으로 모순적인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의심하지 않는다니.
저보고는 의심하라 해 놓고, 정작 당사자는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하란 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에밀리나는 키르젠이 저를 놀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순간 어이가 없어 화를 내려고 했다.
그런데 화를 내기도 전, 키르젠이 선수 치듯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역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부인은 제 심장에 각인된 반려자이니까요.”
“뭐……?”
“제 반려자라고 하였습니다.”
에밀리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각인은 무엇이고, 반려자는 또 무엇인지.
단순히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뜻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심장에 각인되었다니?”
불길한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심장에 각인되었다는 말 자체가 좋은 뜻으로만 들리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키르젠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냈다.
“그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부인을 반려자로 각인했고, 부인 없인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습니다.”
에밀리나는 황당함을 넘어 기가 막혔다.
“허……!”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키르젠의 목숨은 저한테 달려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자신이 아는 각인의 의미가 맞는다면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키르젠을 쳐다보니, 키르젠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인한 수인은 반려자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으니까요.”
에밀리나는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짚어 줄 수조차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모든 게 잘못됐다.
각인도 각인이지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대목에서 소름이 끼쳤다.
그 또한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에 의해 강제로 구속되는 계약이 아닌가.
자신의 의지라고는 없이,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되는.
소설 속 설정을 생각하면 클리셰이긴 하지만, 이걸 실제로 마주하게 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게 당사자가 되면, 아무런 피해가 없을지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마냥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은근한 압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남의 인생을 자신이 책임지게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물론 결혼까지 한 마당에 이제 와서 물릴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각인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지라 책임에서 벗어나긴 어려운 일이었다.
제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데, 남의 목숨까지 챙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키르젠이 괜찮다고 하여도, 제가 괜찮지 않았다.
제 행동 하나로 상대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게 생겼는데, 어디 마음 놓고 있을 수나 있을까?
그래서 기막히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르젠은 그저 걱정하지 말라며 다독일 뿐이었다.
에밀리나는 마른세수하며 키르젠에게 물었다.
“……언제부터야?”
“예?”
“언제부터, 그런 거냐고.”
“각인한 시기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에밀리나의 대답에 키르젠이 볼을 긁적였다.
“북쪽 숲에 다녀오고 열병을 앓았던 그때 같습니다. 처음엔 각성으로 인한 성장통인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당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극심한 감정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게 계기였던 거죠.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부인에게 각인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