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12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12화
012
―씨발. 시간 존나 빠르게 가네. 그동안 좆같았고, 나는 존나게 고생했으니까 우리 웬만하면 다시 보지 말자.
류아라는 그 말을 끝으로 별장을 떠났다. 예르파드의 승급 심사가 결정된 것이었다. 아마 이 뒤로도 예르파드 용병단은 자신들의 실력에 걸맞게 승승장구를 할 터였다.
‘언젠간 또 볼 일이 있겠지.’
나는 잠시 창가에 기댄 채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지난 열흘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벌어졌던 일들이 떠오른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뜨자마자 느꼈던 당혹감, 그리고 시한부라는 압박감.
어디에도 내 편은 없고, 피했다 생각했던 사망 플래그인 류아라가 찾아오기까지 했다.
천천히 튜토리얼하면서 레벨업을 해야 할 초반부터 얼마나 고생이 많았던가.
‘사망 플래그였던 류아라와 샤일라가 중립적이게 된 것만으로도 수확은 크다.’
눈앞까지 닥쳐왔던 죽음이 멀어지니,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대한 감사를 깨닫게 된다.
“하늘이 맑구나.”
“의외로 감상적인 면도 있으시군요.”
돌연 끼어든 목소리는 어처구니없게도 열리지 않은 문 저편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똑똑.
“류리크 님. 실례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차가운 듯, 평온한 목소리에 마음이 놓이게 된다. 다만 나는 괜히 심술 난 아이처럼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다못해 내게 말을 걸고자 하면, 옆에서 서 있기라도 하거라. 무슨 문밖에 있으면서, 마치 옆에 있는 사람처럼 말을 한단 말인가.”
“류리크 님의 청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 파악하고자 간단한 실험을 한 것이옵니다.”
“갖다 붙이는 것도 가지가지구나.”
그 역시 소인의 유능함이므로, 덧붙이는 리아의 얼굴은 뻔뻔 그 자체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경매장에서 주문하셨던 물품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내 책상 위에 여러 개의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총합은 리아의 키를 훌쩍 넘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상자 안에는 유리관+금고의 형태로 물품을 보관했을 텐데.
“혼자 들고 왔느냐?”
“유감스럽게도 류리크 님은 아직도 시종들에게 신망이 없으시기에.”
“………….”
“왜 그러십니까?”
어떻게 저 가녀린 몸에서 저만한 힘이 나오는 걸까. 이런 걸 보면 새삼 판타지 세계구나, 라는 걸 느끼게 된다.
나는 그런 속내를 가린 채 덤덤하게 말했다.
“열어 보거라.”
“예.”
예상대로 상자 안에는 저마다 금고가 있었고, 그것들을 여니 경매품들이 유리관 안에 담겨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유리관까지 개봉하도록 지시했다.
“………….”
하나하나 꺼내 열던 리아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나는 그 눈빛이 어디에 머물렀는지 유심히 바라보았다.
“뭘 그리 놀라는가. 그대의 뒷조사로 이미 경매장에서 무엇을 구매했는지 알 텐데.”
“이런 고가의 물품들을 실물로 보는 것은 처음이기에.”
“너 줄 거 아니니 그런 표정은 짓지 말라.”
사실은 아니다. 이 중 하나는 내게 쓸모가 없되, 어떤 NPC의 호감도를 올리는데 쓸모 있는 아이템이 있다.
물론 그 NPC는 류미엘의 기사 ‘리아’와 전혀 다른 캐릭터이다.
다만,
‘리아는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류미엘의 기사 7 같은 엑스트라라고 보기엔… 너무 유능하다.’
의심의 발로는 그것이었다. 리아는 너무 유능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능력 있고 뛰어난 캐릭터를 내가 모를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물론 가울처럼 메인 스토리가 진행될 시점에 은퇴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리아와 닮은 캐릭터를 알 것 같단 말이지.’
겉모습의 얘기가 아니었다. 외형으로 따지자면 지금과 현격히 다른 누군가였다. 하지만 그 유능함과 성격, 말투가 묘하게 떠오르는 NPC가 있었다.
아직은 가능성의 얘기지만, 그리고 리아가 내가 예상한 아이템을 고른다 해도 100% 맞을 얘기는 아니지만.
‘말 그대로 소소한 도박이지.’
맞추면 리아의 정체에 대한 확률이 조금 올라가고, 덧붙여서 호감도도 얻는 셈일 테고. 틀리면 류아라의 돈이 쓸모없게 날아버리는 소소한 도박.
나는 리아를 채근했다.
“무엇 하느냐. 열었으면 어서 물러가지 않고.”
“예.”
리아가 천천히 물러섰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시선이 끈덕지게 향하는 무언가를 확인했다.
“혹 여기서 원하는 것이라도 있느냐.”
“………….”
“입으로 욕망을 말하지 않되, 눈으로 사람을 이해시키는 것이 참으로 너답구나.”
리아가 입을 열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저와의 돈독한 관계는 류리크님께 상당한 이득이 될 터입니다.”
“허어,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소작농이 지주가 아닌 세리(稅吏)에게 뇌물을 주는 건 흔한 일이었지요.”
“허, 이제는 본인을 농노에 비유하는가.”
“비유일 뿐입니다.”
나는 경매품 중 ‘나브릭스 홍차’라는 글자가 쓰인 철제 케이스를 손에 쥐었다.
저 멀리 서대륙에서도 고급 사치품으로 취급되며, 정기적인 거래량도 없고 몇몇 모험가들이 배낭에 넣어 가져오는 것이 물량의 전부인 희귀품이었다.
리아의 눈동자가 아주 미미하게 흔들렸다. 역시 이걸 눈독 들이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래 봐야 너는 류미엘의 기사이지 않느냐.”
“기사의 충성은 영원한 것입니다. 제가 류리크 님께 드릴 수 있는 건 소소한 호감뿐입니다.”
“눈으로 확인조차 할 수 없는 호감으로 나브릭스 홍차를 가져간다라? 그녀의 양심이 안녕한지 묻고 싶군그래.”
“………….”
내가 놀리듯 그런 말을 하자, 리아는 아쉽지만 포기한다는 눈빛을 내비친다. 아는 아예 토라질까, 재빨리 조건을 걸었다.
“좋다. 거래를 하자.”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걸 고려해서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그녀가 동요하지 않도록, 되도록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네 주군이 너를 버렸을 때, 너는 그를 받아들여라.”
“………….”
리아의 눈이 사납게 휘어졌다. 무표정이 트레이드 마크인 그녀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기에, 그 분노를 어림짐작케 했다.
나는 사나운 기세를 흘려넘기며, ‘별거 아니잖아?’라는 투로 설명했다.
“기사들은 영원한 충성을 마치 덕목처럼 여기지. 물론 나도 그 뜻은 존중한다. 허나 주군이 버렸다 하면, 그를 받아들일 필요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거래로서 성립하지 않습니다. 류미엘님이 저를 놓아주실 가능성은 그야말로 0으로 수렴하기에.”
“그러면 잘된 일이군. 너는 공짜로 나브릭스 홍차를 얻겠구나.”
원하던 것을 갖게 된다 말했건만, 리아의 표정은 얼어붙은 겨울 바다처럼 차가웠다. 거기엔 단순한 적의를 넘어 의심과 증오마저 일렁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혹 류미엘님께 무언가….”
“내가 네 주군을 겁박해 너를 내려놓게 만든다. 그리고 버려진 너를 내가 거둔다… 혹 이런 생각을 했느냐?”
“…류리크 님께서 평소 저를 바라보는 눈길로 미루어 보아, 그 의심을 저버릴 순 없군요.”
얼씨구. 요놈 봐라.
벌써부터 자기 가치는 자기가 안다는 양 저리 말한다.
“내가 그리하면 너는 내게 충성을 바칠 수 있겠느냐.”
“절대. 단연코.”
“그러면 내가 그것을 모르겠느냐. 너라는 사람을, 네가 가진 신념과 의지를 내 진정 몰라 그런 말을 하겠느냐.”
“………….”
나는 리아와 2주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 시간의 밀도는 무척이나 깊었다. 리아의 말에 따르자면, 지난 3년간 합친 것보다 많은 말을 나눴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나도 알았고, 그녀도 알 터였다.
리아는 말을 않았다. 나 역시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릴 뿐,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
“………….”
나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녀를 채근하지 않고, 지그시 바라보며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경매품들을 살피는 시늉을 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리아의 입술이 어렵사리 떨어졌다.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두렵습니다.”
“내 말이 진실이 될까 봐, 그런 것이더냐?”
“예. 하지만 동시에 저는 류미엘 님을 믿겠습니다. 그분이 건네주신 은혜와 온정을… 믿겠습니다.”
그거면 되었다, 나는 리아에게 홍차를 건네주었다.
오늘부터 네 별명은 홍차 괴인이다.
* * *
하여튼 빌어먹을 난이도 때문에 성장은커녕 주변 NPC들의 호감도 관리조차 벅차다.
그냥 루시아사가를 플레이하는 거였다면, 주인공에게 처음부터 호의적인 NPC들을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리아를 내보내고 겨우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주변 정리가 겨우 끝난 이제야, 레벨업의 첫 단계가 되어줄 아이템을 꺼내들 수 있었다.
―영월화(永月花).
아마 이걸로 류리크도 어느 정도 쓸 만한 캐릭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 『 마도魔道 』 ――――
▶ 분류 : 특성
▶ 등급 : E-
▶ 설명
: 마력으로 주술, 마술, 마법 등의 술법을 펼치는 재능.
▶ 효과
: 마도와 관련된 수련에 미미한 이점을 제공한다.
――――
언제 봐도 처참한 랭크다. 특히나 이전에 플레이했던 캐릭터가 엔딩 무렵, 어지간한 특성을 S로 도배했던 만큼 괴리감도 컸다.
‘하지만 이것도 안녕이다.’
지금까진 터무니없이 낮은 랭크 탓에 명상과 수련을 해도 약물 중독을 어쩌지는 못했다. 마력의 운용이 그만큼 힘들었고, 느렸기 때문이다.
허나 랭크가 몇 단계나 올라간다면, 그리고 곧 마법 대학에 입학한다면 이 문제는 눈 녹듯 사라지리라.
“………….”
나는 영월화를 씹었다.
【 영월화의 영험한 기운이 체내에 스며듭니다. 】
【 마도 특성이 E 랭크로 격상됩니다. 】
【 마도 특성이 E+ 랭크로 격상됩니다. 】
…
【 마도 특성이 D 랭크로 격상됩니다. 】
연달아 떠오르는 수많은 시스템 메시지들. 나는 그 하나하나를 또렷이 눈에 새겼다. 그리고 곧장 직접 확인해 보았다.
―――― 『 마도魔道 』 ――――
▶ 분류 : 특성
▶ 등급 : D
▶ 설명
: 마력으로 주술, 마술, 마법 등의 술법을 펼치는 재능.
▶ 효과
: 마도와 관련된 수련에 약간의 이점을 제공한다.
――――
‘미미한’이라는 수식어가 ‘약간의’로 바뀌었다. 하지만 여기엔 세세히 기재되지 않았을 뿐, 세부적인 혜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을 터다.
대표적으로는 마력의 총량 증가, 마력 회복 속도 증가, 마력 수련에 대한 보너스가 있을 테고,
‘마력 운용에 대한 보너스도 있겠지.’
혈석의 기운을 상대하는데 가장 필요할 효과.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리아를 불렀다.
“여봐라.”
“부르셨습니까.”
호감도가 상승했다는 반증일까, 부르자마자 문밖에서 리아의 대답이 들려왔다.
“얼음물을 준비해 두거라.”
“………….”
그녀의 침묵에서 ‘제정신이십니까?’라는 말이 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 옆에 난로도 함께 둘 수 있도록.”
이것 역시 약간의 실험 정신을 가미한 도전이었다.
‘폭포, 얼음물에서 하는 명상은 시스템에 의한 보너스일까, 아니면 순전히 정신 집중을 잘 되게 하는 부가적인 요소일까.’
잘은 몰라도 이제 알아가야 할 일이었다.
* * *
“수고했다. 나가 보거라.”
“신관을 수배해 놓을까요?”
“필요하면 부르도록 하겠다.”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공손해진 리아가 욕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천천히 욕조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
뼈에 스미듯 시린 한기가 밀려왔다. 당장에라도 빠져나가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지만, 내 의지는 그것보다 단단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은 세계의 무언가를 조망하며, 마력을 움직였다.
평범한 인간 한유진에겐 불가능한 일이겠으나, 신동 A라는 특성이 마력의 운용력만큼은 고위 마법사의 수준만큼 높여주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절대적인 마력의 총량 차…!’
붓에 묻은 물감 조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백지에 페인트 통을 들이부으며 그리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명확한 차이가,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큭!”
전신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당장 마도 특성이 올라갔을 때는, ‘몸이 가벼워졌다.’라는 느낌밖에 없었지만.
실제 마력을 운용하는 순간, 그 어마어마한 차이가 피부로 와 닿았다.
“………!”
마력으로 인해 느껴지는 압박감부터가 달랐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에 전신은 물론 뇌리까지 뜨겁게 들끓었다.
눈을 감은 세계에서, 나는 마치 어느 거대한 물줄기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무언가의 위를 흐르고 흐르며 요동치던 내 시계(視界)가 저 멀리, 무언가를 직시한다.
―혈석(血石).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내 심상에서 조망하는 개념적인 무언가일 테지만.
‘엄청나군.’
단순히 내가 느끼는 심리적인 무언가일까, 아니면 내가 가진 마력과 혈석에 들어 있는 마력의 총량에 이만한 격차가 있다는 것일까.
베너렛에 이른 육체를 폐인 A가 될 때까지 좀먹으며, 모든 생체기관을 마력 흡수에만 몰두하게 만든 마성(魔性)의 무언가.
그렇게 모으고 모은 마력의 총체(總體).
나는 거칠게 그것을 들이받았다.
―쿠쿠쿠쿠쿠쿠!
흐르는 마력의 파도를 날카로운 창처럼 벼려내 혈석을 찔러댔다.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고….
마치 기사와 결투라도 벌이듯 끊임없는 맹공을 펼쳤다.
그 끝에 거대한 혈석의 아주 일부가 깨졌다.
“하아.”
깨진 혈석의 조각은 마력의 파도에 휩쓸리듯 스몄고, 그것이 곧 내 힘이 되었다.
【 마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
【 정순한 마력의 순환에 따라 체내의 약기가 배출됩니다. 】
【 약물 중독 특성이 B+ 랭크로 격하됩니다. 】
【 업적 ‘불가능에 대한 도전’을 달성하였습니다. 】
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들에 나는 차오르는 고양감을 느꼈다. 마력의 총량이 받쳐주니, 단순히 순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혈석을 ‘공략’하는 것이 가능했다.
거기에,
‘드디어 약물 중독의 랭크가 떨어졌다.’
새로운 업적은 의외의 선물이었다. 효과에 대해서는 이후 확인해 봐야겠지만, 척 봐도 나쁜 효과는 아니었다.
다만, 시스템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
【 퀘스트 커맨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
【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