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120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120화
120
아르메이어로 향하는 길.
리무진 안에서 이런저런 설명을 듣던 실비아가 눈을 크게 떴다.
“아르메이어가 대공 가문이었어?!”
“그걸 모른다는 게 더 놀랍군. 제국에 일곱만 존재하는 대공가이거늘.”
“아, 아니… 그걸 쳐 외우고 있는 류리크 씨의 두뇌가 이상한… 악! 아악! 악!”
엄살은.
이제는 무슨 가볍게 앞굽을 밟기만 해도 비명이 튀어나온다.
슬슬 다른 방법을 고안해야 할 때인가.
그러고 보니 저번에 묘하게 상냥하게 굴었을 때, 학을 뗐던 거 같은데.
“그 아무튼… 엄청난 집안이겠네? 대공 가문이니까?”
“단일 세력으로 놓고 보자면 후작령에서 공작령 수준이다만, 파벌이 없으니 권세가 그리 드높다고 보긴 어렵지.”
“응? 권세? 파벌? 어쨌든 대공이면 공작보다 높은 거 아냐?”
“제국은 기본적으로 오등작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대공은 예외적인… 일종의 명예직이지.”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등작제?”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네가 알던 대로 귀족의 작위에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 있다는 소리니까.”
“어음, 근데 제국에는 준남작도 있잖아?”
“그것도 일종의 명예직이다.”
대공이 좋은 쪽으로 명예직이라면, 준남작은 다소 아쉬운 쪽으로 명예직이다.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서훈해야 하나 귀족으로 봉하기에는 애매할 때. 보통 기사 훈장과 함께 준남작의 지위를 주곤 하지.”
준남작은 딱히 봉토를 받지도 않으니, 정말로 ‘네 마음속 자랑거리’라는 의미로 주어지는 명예직이라 볼 수 있다.
“반면에 대공은 명예직이기는 하나, 황제를 선정할 수 있는 선제후를 겸하게 되고 또 대공령으로 주어지는 봉토가 있으니…….”
“류리크 씨, 말이 어려워. 복잡해. 지루해.”
“네가 물어봤잖느냐. 네가.”
이 썩을 녀석이.
후우,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여하튼 대공이 공작보다 높은 거다.”
“뭐야, 간단하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거랑도 같고!”
실비아가 그래도 마법 실력은 늘어나는데, 왜 지능은 늘 제자리인 건가.
그 안타까운 사실에 개탄하자니, 그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근데 하나 더 물어봐도 돼?”
“그래.”
“선제후라는 게 뭐야?”
“………….”
너 제국민이 맞기는 한 거냐.
그 말이 목구멍까지 샘솟았지만, 나는 그럭저럭 잘 참아내며 답했다.
“차기 황제를 선정할 자격을 가진 일곱 제후를 뜻하는 말이다.”
“응? 황제는 황위 계승전에서 이긴 사람이 되는 거 아냐?”
“원래는 일곱 선제후 중 과반이 찬성하는 이가 곧 황제가 되는 게 기본적인 방식이다.”
“그런 거였어?”
“다만 선정해야 할 그 대상자가 한 명이라면, 선제후들의 표가 갈릴 수가 없다는 것이지.”
그리하여 작금의 황위 계승전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모종의 이유’로 황위 계승을 포기하면, 황제가 될 이는 그 한 명뿐이 없게 되니까.
“애초에 황위 계승전 자체가 꼭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게 아니다. 제국이 파벌 단위로 나뉘어 대전을 치르기도 했고, 황자 간의 암살도 있었고, 평화로운 시기엔 일종의 무사 수행을 하기도 했었지.”
“무사 수행?”
“몬스터를 잡거나, 뭐 도적 따위를 토벌해 공을 세워 황제의 자격을 증명하는 거다. 그 밖에도 선제후들을 잘 포섭해서 표결로 황위가 갈리기도 했고.”
물론 다가올 황위 계승전은 높은 확률로 내전이 될 터다.
어떻게 손을 댈 수도 없이 이미 거대한 흐름이 굴러가기 시작했으니까.
“뭐야, 그러면 지금부터 선제후들한테 밑밥(?) 같은 걸 잘 깔면 황제가 될 수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만… 선제후들도 바보가 아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선제후는 명예직이다.
종신직도 아니고, 건국부터 이어지던 13가문과 달리, 이따금 바뀌는 일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선뜻 약한 후보를 황제로 옹립했다가, 살해당하거나 가문이 멸문당할 수 있다는 거다.”
“그, 그렇구나.”
“그런 의미에서 선제후들은 보통 황위 계승전의 명백한 우승자에게 금관을 씌워주는 일을 한다, 라고 보면 된다.”
결론을 들은 실비아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러면 별거 없네. 그냥 땅 넓은 귀족이라는 거잖아.”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다만… 속사정을 따져보자면 꼭 그렇지도 않다.
선제후는 제국 정치의 큰 어른으로, 황위 계승전 이후의 귀족 사회의 봉합을 주도한다.
파벌로 나뉘어 죽을 둥 살 둥 싸웠던 이들을 중재, 화해시킨다는 소리다.
또한, 선제후들이 황위 계승전에서 방관만 하는 건 아니다.
‘제국은 성군(聖君), 선군(善君), 명군(明君), 심지어 폭군(暴君)과 난군(亂君)까지도 인정하나, 예외 역시 존재하지.’
—혼군(昏君). 그리고 암군(暗君).
누가 보아도 제국의 장래를 어둡게 할, 자격 없는 이가 황위에 오르려 할 때. 선제후들이 움직인다.
물론 어떤 가문의 누가 선제후냐에 갈리기는 하겠다만, 기본적으로 선제후들의 성향이 그러하다.
마치 황실의 수호기사단 같은 느낌이랄까.
‘되도록 파벌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되,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단을 내리는 거지.’
그중에서도 아르메이어는 가장 보수적이고 신중한 편이다.
아마 황제가 민간인을 학살한다 해도, 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방치할 종류랄까.
물론,
“뭐, 그런 셈이지.”
실비아에게 설명하진 않겠지만.
* * *
아르메이어의 특징은 드넓은 화원이다.
저택 내부가 아니라, 밖에 수천 평 규모의 화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안에 대저택이 있는 것이다.
이는 외관상으로도 훌륭하지만, 나름의 전략적인 이유도 있다.
‘암살자를 방지하려는 거지.’
앞서 말했듯, 황위 계승전은 이렇다 할 규칙이 없다.
이는 다시 말해, 선제후를 협박하거나 암살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는 소리이다.
그러니 넓은 꽃밭을 조성해 암살자가 저택에 접근하면 경계병이 알아볼 수밖에 없게끔 해둔 것이다.
“와나, 씨.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걸어가야 한다고?”
“별수 있나.”
“류리크 씨 평소의 그 뭐야, 뻔뻔한 철면피로 밀어붙이면 안 돼?”
“실비아, 나는 아르메이어와 싸우러 온 게 아니라, 멘토링을 위해 온 것이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
꼭 지킬 생각은 없다만, 적당히 지켜줄 수 있다면 지켜주는 게 맞으니까.
“아니, 꽃밭이 예쁜 건 알겠는데. 이 집구석은 무슨 꽃을 이렇게 무식…….”
“실비아, 그 정도까지만 하지. 집주인이 저 앞에 나와 있으니 말이야.”
“어흡?!”
고작해야 딸자식 멘토의 방문일 뿐인데, 저택의 주인이 입구까지 마중을 나왔다.
아버지인 류오넬이면 모를까, 그 아들인 내가 온 것만으로 저렇게까지 하는 게 이상하긴 했다만.
‘그러고 보니 아르메이어는 딸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더라지.’
나는 적당히 납득하며 당주 쪽으로 다가선다.
“그대가 류리크인가.”
“그렇다네.”
아르메이어의 당주, 노르먼 베철러 폰 울벨룸 아르메이어.
대공 가문의 당주치고 꽤나 평범하고, 밋밋한 외형. 좀 착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류리크 아스트레이, 저택에 온 것을 환영하네.”
“직접 마중을 나와 주다니, 환대에 감사를 표하네.”
“환대는 무슨. 어서 안으로 들지.”
우리는 그대로 접객실로 향했다.
대공가의 저택다운 화려한 복도. 그리고 역사의 고풍이 느껴지는 옛 예술품들.
그것들을 지나 접객실 안에 들어선다.
테이블엔 다과와 찻잔 따위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수업을 진행하면 되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잠깐 자네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말이지.”
일단 앉지, 노르먼의 말에 나는 접객용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실비아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노르먼의 시종 바로 맞은편에 선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히 노르먼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다.
“그러고 보니 그쪽은….”
“멘토링의 보조일세. 우수한 친구이니, 실력은 믿어도 좋네.”
그런가. 노르먼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곧장 넘겼다.
“그래. 일단 이 먼 곳까지 와주어 참으로 고맙네.”
“학내 프로그램의 일환이네. 가정 방문이야 당연한 것이니, 그리 말할 것도 없네.”
“그렇군. 흠흠. 아무튼, 그… 멘토링? 이라는 걸 하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노르먼은 쉽게 말하기 어려운지, 잠시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인다. 그러다가 입이 마르는지 찻잔으로 목을 축였다.
나 역시 그에 맞추어 찻잔을 들자니, 노르먼이 겨우내 입을 열었다.
“내 딸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과연. 그게 확인하고 싶었던 건가.
나는 들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답했다.
“소문이라면 익히 들었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좋은 쪽이라면…….”
“어린 나이에 헤루인 등위를 취득한 천재라는 점.”
여하간 내년은 메인 NPC들이 대거 등장하다 보니, 이놈도 저놈도 역대급 재능이 많다.
“나쁜 쪽이라면…….”
“아르메이어에서 막대한 기부금을 냈음에도,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했다는 것. 그리고 한 달을 버틴 가정교사가 없다는 것 정도?”
노르먼의 얼굴이 구겨졌다.
“일주일이라네.”
“…………?”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을 버틴 가정교사가 없단 말일세.”
“…그렇군.”
내가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거리자, 노르먼의 얼굴에 약간의 놀람이 일었다.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는구만.”
“한 달이든 일주일이든, 여하간 버틴 교사가 없다는 말 아니던가.”
“그, 그렇지.”
“자네가 알고 싶은 건, 본인이 그런 사실을 알고도 여기에 온 건지. 딸아이를 가르칠 각오가 있는지를 묻고 싶은 것일 테고.”
“그, 그렇다네.”
나는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들었다.
찻물이 조금 식었지만, 적당히 미지근한 것이 딱 좋은 느낌이었다.
그대로 찻잔을 비운 뒤, 노르먼을 보며 말했다.
“본인은 그 모두를 알고서 여기 왔으니, 이걸로 그 답이 되었을 것 같은데.”
“…그렇군.”
노르먼은 어딘가 물기 섞인 눈으로 이쪽을 보며 말한다.
“내 딸아이를… 잘 부탁하네.”
아니, 그건 좀 뉘앙스가 이상한데.
* * *
—방 안내는 집사가….
—괜찮네. 위치만 알려주면 내가 찾아가겠네.
—괘, 괜찮겠나?
—이미 말했다만, 감당할 수 없다면 여기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라네.
—……알겠네. 딸아이의 방은 복도 끝에 있는 방일세. 열려 있으니, 알아보긴 쉬울 테야.
당주의 말대로 오필리아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
그 앞에 서자니, 안쪽 창가에서 밀려든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그 바람 안에서 옅은 꽃향기와 쓸쓸함이 느껴졌다.
“………….”
그녀의 방은 고요하고, 또 무거웠다.
분명 사람이 사는 방임에도 생활감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고, 작은 오차조차 없이 잘 정돈된 모습은 일종의 강박을 연상케 한다.
그 적막의 가운데서 나는 열려 있는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
그리고 녀석이 몸을 돌렸다.
“반갑네. 앞으로 한 달 정도, 자네의 멘토링을 맞게 된 류리크 아스트레이라네.”
“안녕하세요. 류리크 선생님.”
단정한 블라우스에 절제미 있는 액세서리로 기품을 갖추었고, 발아래의 구두까지 한 치의 구김도 없는 말끔한 옷차림이 인상적인 소녀.
하지만 그 위에 떠 오른 표정은, 어딘가 금이 간 유리 공예품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녀석은 처연하게 웃었다.
어딘가 슬픈 듯, 어딘가 외로운 듯.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고 싶어지게끔.
“그래.”
“안으로 들어오세요. 선생님.”
자연스럽게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사람의 방심을 이끌어내는 그 모습은…… 일종의 악마적인 재능이었다.
“글쎄. 별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군.”
“…………?”
소녀, 오필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를 가르치기 위해 오신 거 아닌가요?”
“그렇다.”
“그런데 왜…….”
나는 아주 잠시, 물끄러미 바닥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구슬을 하나 꺼냈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그저 공예품일 뿐인 평범한 유리구슬.
나는 그걸 바로 앞쪽에 떨어뜨렸다.
—툭.
“지금 다가가면, 그대로 발밑에서 마법이 발동하지 않겠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닥에서 내 몸뚱이만 한 화염구가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