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122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122화
122
아르메이어의 당주, 노르먼은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급한 용무가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하네.”
“용무?”
“자세히는 말할 수 없네만, 여하간 일이 생겨서 말이지.”
류리크 아스트레이.
멘토링인가, 뭔가 하는 걸로 찾아온 아르메이어의 가정교사.
현재 노르먼의 마음속에서 여러모로 기대를 끌어모으는 사내였다.
“이에 대한 보충은 주말에 채우도록 하지.”
“괜찮네. 괜찮아. 일주일을 버틴 것만으로도 기적이야. 기적. 용건이 있다면 하루쯤은 푹 쉬어도 좋네.”
멘토링에서 뭘 가르치고, 뭘 하는지는 모른다만. 적어도 확실한 건 있었다.
—딸아이가 사람 골탕 먹이는 짓을 안 하고 있다는 것.
가정교사의 머리 위에 초콜릿 폭포가 쏟아져 초콜릿 트라우마가 생겼다든가.
바닥에서 날아온 화염 덩어리에 가정교사의 모근이 죄다 불타 대머리가 되었다든가.
그러한 괴소문이 더 이상 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노르먼은 감사했다.
심지어 최근엔 아르메이어의 작은 악마가 어른이 되었다, 라는 말이 저택 안팎으로 나도는 수준이었으니까.
‘그거면 되었지. 그거면….’
심지어 눈앞의 청년은 꽤나 멀끔하고 예의도 있었다.
예전에 망나니로 유명했다던 건달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격식과 예의를 아는 이로 바뀌었다.
그래서 더욱 믿음이 가고, 기대하게 된다.
‘조금만 더 욕심내자면, 혹시….’
류리크가 그 쓰레기 같던 모습에서 개과천선했으니, 자신의 딸도 그렇게 변할 수 있지 않을까.
노르먼은 그런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 말은 감사히 마음으로만 받겠네. 정해진 시간을 채워야 하는 것이 또 규칙이라 말이지.”
시간?
‘그러고 보니 그 멘토링이라는 게 언제까지더라. 되도록 오랫동안 곁에 두고 싶은데.’
노르먼은 저도 모르게 다소 조급해진 어투로 말했다.
“뭐 필요한 건 없나? 내가 도와줄 거라든가.”
“괜찮네.”
“그 용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가 도울 수 있다면 작게나마 힘을 써보겠네.”
“마음은 감사하나, 사적인 일이라 말이지.”
한 박자 늦게 노르먼은 자신이 조금 초조한 티를 냈다는 걸 깨달았다.
“흐, 흐흠. 그런가. 알겠네. 그러면…….”
“한두 시간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될 것이고, 되도록 빨리 돌아오겠네.”
노르먼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리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오필리아에게는 얌전히 있도록 말해두었으니, 시녀든 집사든 되도록 방에 들어가는 건…….”
“아, 물론이지.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겠네.”
애당초 누가 그 호굴(虎窟)에 들어가고 싶어 하던가.
초면인 가정교사들에게 그런 짓궂은 장난을 치던 오필리아다.
저택의 시종들은 당하면 더 당했지, 덜 당하진 않았었다.
“실비아. 나가도록 하지.”
“응.”
그렇게 류리크가 당주의 방을 나왔다.
한산한 복도를 지나고, 저택의 방들을 지나면서 마주치는 시종마다 고개를 꾸벅인다.
“류리크 씨, 그거 알아?”
“뭐가 말이냐.”
“저택의 시녀들, 류리크 씨 없을 때면 맨날 류리크 씨 얘기만 한다?”
“잡담이라면 밖에 가서 하지.”
“다들 막 류리크 씨가 잘생겼다든가, 밤이 되면 짐승처럼 변할 거 같다든가, 그런 소릴 하는데~ 정말 눈이 제대로 삔 거지.”
순간적으로 류리크가 꾸욱 주먹을 말아 쥐었지만, 일단은 참아내는 모양이었다.
“하여튼 다들 신기해하는 반응이야. 새로운 가정교사가 와도, 일주일도 못 버티니까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고 사라졌는데. 류리크 씨는 오~래 버티고 있으니까.”
“실비아.”
“우리야 교류하는 가문도 없고, 밖의 사람이 찾아오는 일 자체가 거의 없으니까… 응응. 그럴 법도 하… 짓!”
쿵.
“뭐, 뭔데!”
류리크의 눈가에 어렴풋하게 살기가 어렸다.
“피해?”
“갑자기 발 밟으려고 하는데 당연히 피하지!”
그리고 류리크는 말한다.
“실비아’는’ 피하지 않는다.”
***
아르메이어의 본채에서 나와 저택 입구에 이르렀다.
문의 양옆으로는 4m가량 되는 높은 담장이 죽 이어져 있고, 저택의 입구는 두꺼운 쇠창살 문으로 막혀 있었다.
그 사이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느낌으로, 저 문에 방어결계까지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끼이이이익.
열린 창살의 너머에 꽃밭이 있었다.
시야가 닿는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꽃밭.
아르메이어의 상징이자, 역사이고, 유산이기도 한 거대한 화원.
방문하는 이마다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풍광이었지만, 오필리아에겐 달랐다.
“나 말이야. 여기까지 오면 바로 뛰쳐나갈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는 않네.”
“실비아, 두렵더냐.”
“여긴 가문의 사람 없으니까… 진짜 이름으로 불러도 되잖아.”
실비아의 모습을 한 오필리아가 작게 투덜거렸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였다. 특히 스스로를 귀족(貴族)이라 여길 이라면, 더욱 신경 써야 하는 법.”
“이게… 잘 될까?”
“잘 되고 자시고, 이미 저택의 입구까지 오지 않았더냐. 남은 것은 그저 저 화원을 지나는 것뿐.”
—목적을 이루는데, 방법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류리크의 작전은 간단했다.
실비아가 오필리아인 척 저택에 남고, 오필리아가 실비아로 변장한 채 이곳을 나가는 것.
오필리아는 손끝이 떨렸다.
‘이게 이렇게 쉬운 거였어?’
‘이렇게 쉬어도 되는 거야?’
‘내가 몇 년 동안 고생했던 게… 이렇게….’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무서운 거지.’
류리크가 말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재잘재잘 떠들더니. 그 위세는 다 어디 갔느냐.”
“그, 그렇게까지 떠들지 않았거든……!”
“떨리느냐.”
“응.”
오필리아가 깊게 숨을 쉬었다.
기분을 바꿔보려는 심산이었지만, 여전히 눈동자는 흔들릴 따름이다.
“왜. 떨린다고 생각하느냐.”
“누군가 금방이라도 잡으러 나올 것 같아서?”
“즉답이로군.”
“사실이니까.”
그녀의 말엔 가감이 없었고, 그저 한없이 맑고 또 투명했다.
“이 앞으로 한 걸음만 내디디면 경비병들이 쫓아오고, 나는 다시 저택에 갇히고…… 그럴 거 같아.”
“그럴 일이 없다는 건, 머리로 이해하고 있을 터다.”
“하지만 떨리는걸.”
그녀의 머릿속에서 상상이 거듭되며, 마음의 한켠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온몸으로 퍼져간다.
갑작스레 오필리아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어라…… 이게 뭐라고. 갑자기… 눈물이… 하… 씨….”
“………….”
“나 우는 거 아니거든? 갑자기 아니… 아… 씨….”
“………….”
그리고 류리크가 말한다.
“눈을 감아라.”
“왜… 왜?”
“감으라면 감아라.”
오필리아는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얌전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덥석.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너….”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이 떠지고,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저벅.
류리크의 발은 이미 화원을 밟은 뒤였다.
그리고 맞잡은 손과 함께 그녀 역시 이끌려 화원에 발을 내디뎠다.
“………….”
걸음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
멈춰있던 걸음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
오필리아는 굉장히 다루기 어려운 타입의 인물이다.
—아이의 마음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그것을 헤아리는 것도, 풀어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내가 괜히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오필리아.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너를 그럭저럭 잘 알고 있다.”
“나는 류리크 씨… 아니, 너랑 제대로 얘기한 적이 없는데?”
“겉으로는 강한 척, 사고뭉치인 척 굴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여리지.”
“뭐, 뭐라는 거야. 바본가.”
“저택에서 그리도 나가고 싶어 했건만, 막상 그 기회가 눈앞에 있음에도 너는 망설였다. 왜지?”
“그건…….”
다른 것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으면서, 이것만큼은 망설인다.
이래서 사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닐까.
“아버지가 실망할까 두려운 게 아니냐. 사실, 누군가에게 걱정을 끼치는 게 싫었겠지.”
“뭐, 뭔 소리야! 나는….”
“나는?”
“………….”
아르메이어의 작은 악마.
민폐란 민폐는 사방에 끼치고 다니면서도, 저 혼자서 속앓이를 한다는 아이러니.
이상하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게 오필리아라는 인간이었다.
‘아버지가 그녀를 사납게 다그치고, 벌주는 타입이었다면 전형적인 반항아가 되었겠지만…….’
노르먼은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딸아이를 사랑하고, 또 아낄 줄 알았다. 그리고 오필리아 또한 태생이 반골(反骨)인 게 아니라, 저 나름대로 반항하는 이유가 존재했다.
단지, 이를 눈치챈 사람이 주위에 없었다 뿐이지.
‘그 복잡한 인과는 조금 더 천천히 풀어야겠군.’
일단은 적당히 화제를 돌려 볼까.
“참고로 나는 진짜 실비아의 손도 이렇게 잡아준 적이 없다.”
“…그래?”
“이번만. 특별히다.”
“흐, 흥. 특별히라고 하면 내가 좋아할 줄 알고? 바본가, 진짜.”
지금 생긴 게 딱 실비아처럼 생겨서, 경쾌하게 발등을 밟아주고 싶었다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어느덧 화원을 중간쯤 지나왔다.
손에 닿아 있는 오필리아의 손가락이 꼬물꼬물 움직였다.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니, 그게 아니라… 뭐든 말 좀 해봐.”
“조용하니 뒤에서 누가 쫓아올 것 같은가.”
“그래 바보야. 좀… 떨리니까, 뭐든 얘기 좀 하자고.”
오필리아의 반말은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거북살스러웠다.
원래 그녀는 내년에 샤프란에 입학하니, 내가 ‘플레이어’로 만났을 땐 반말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한 살 연상인 셈이니까.
‘이것 또 참 곤란하군.’
나는 복잡하게 헝클어지는 생각을 접어두며 본래 ‘하려고 했던 얘기’를 꺼내 들었다.
“눈앞에 산이 있다고 치자. 너라면 어찌할 테냐.”
“산? 그거 꼭 넘어야 해?”
“뭐, 그런 건 아니다만.”
“나라면 그냥 안 넘고 포기할래.”
“………….”
이건 또. 참.
생각하지 못한 반응이군.
‘원래는 산을 넘는 여러 방법을 나열하며 얘기를 이끌어가려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포기가 빠른 꼬맹이다.
골려주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뭐, 이쪽의 의도가 잘못 전달 된 거라 여기고 일단 생각나는 대로 변주를 주기로 했다.
“네가 산을 넘으려는 이유는 뒤에서 암살자들이 쫓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허면 어찌하겠느냐.”
오필리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꽤나 몰입해서 상상하는 모양이었다.
“그 암살자라는 사람들, 강해?”
“네가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적이다.”
“그러면 산을 넘어야지.”
“암살자들보다 빠르게 산을 넘을 수 있겠느냐.”
“…그건 무리일 거 같은데.”
“허면 어찌하겠느냐.”
고민하던 오필리아는 그래도 꾀를 냈다는 듯, 밝아진 표정으로 말한다.
“내가 역으로 암살자를 고용할 수도 있잖아? 우리 집 돈 많으니까!”
“맞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사실은 오류가 많은 방법이다만, 어쨌든.
“헤헤. 내가 좀 똑똑…….”
“또 다른 방법은 없겠느냐.”
“또 다른 거? 그, 글쎄에….”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지금 네가 한 것처럼, 타인으로 변장하면 간단하게 암살자들을 피할 수 있을 테니.”
“아….”
나는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며 온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밖에도 함정을 파서 유인을 할 수도 있겠고, 네가 도리어 용병 따윌 구해 암살자들을 먼저 공격할 수도 있을 터다.”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점은 이것이었다.
“산을 넘는 방법도, 암살자를 피하는 방법도 결코 하나가 아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제대로 알아들었군.”
“에헤헤, 내가 원래 좀 눈치가 빨라.”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니 순간 마음이 여려졌다. 실비아를 볼 때 가끔 떠오르던 감정이었다.
그저 평화롭게 지켜주고 싶은.
나라는 어둠과 혼돈에 휩쓸리지 말고, 제 작고 소박한 평안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
하지만.
나는 말해야 한다.
시나리오를 진행하기 위해.
레베카와의 복잡한 인과를 풀기 위해.
—나를 위해.
“그렇기에 하는 말이다.”
“…………?”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그럭저럭 너를 잘 알고 있다.”
오필리아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다.
이제 얼굴을 알고 지낸 지 일주일 조금 넘었고, 제대로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건만.
이미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눈에 보일 듯했다.
“너와 자스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
“…………!”
내가 에서 오필리아의 이름을 보자마자 두통이 밀려온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네가 왜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했는지, 왜 가정교사들을 싫어하는지, 왜 스스로가 고립되도록 길을 자처했는지… 그 역시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다.”
자스민은 이 세계관에서 마법계의 루키이자, 주인공이 마법사로 활동할 때 옆에 동료처럼 붙는 메인급 NPC이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꼭 마법으로 그 아이를 이겨야겠더냐. 오필리아.”
그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악역(惡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