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13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13화
013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과부화된 뇌에 혼동이 찾아온다. 주인공 캐릭터가 아닌, NPC에게 튜토리얼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물며 퀘스트가 생성되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류리크라는 NPC는 주인공 캐릭터와 전혀 다른 환경을 지니고 있으니 ‘퀘스트’라는 걸 진행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나는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자세히 확인해 보았다.
―――― 『 생존 』 ―――――
▶ 분류 : 튜토리얼 퀘스트
▶ 등급 : –
▶ 설명
: 사망 요인 2개 이상 회피
: 특성 ‘약물 중독’의 랭크 격하
▶ 보상
: 메인 퀘스트 진행 자격 획득
――――
이런 게 있었던 것인가. 나는 내가 처했던 환경이 튜토리얼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애초에 퀘스트 커맨드조차 활성화가 되어있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본래 튜토리얼 퀘스트는 이런 내용이 아니었다.’
나는 이어 새로 생긴 퀘스트도 확인해 보았다.
―――― 『 준비 』 ――――
▶ 분류 : 사이드 퀘스트
▶ 등급 : –
▶ 설명
: 직업 특성 C랭크 이상 획득.
: 캐릭터 기본 특성 중 C 랭크 이상인 것은 포함하지 않음.
▶ 보상 : 무작위 보조 특성
――――
이쪽은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분류도 사이드 퀘스트였고, 내용 역시 평이했다. 보상은 꽤 관심이 갔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었다.
‘기간 제한도 없고, 단순히 C랭크를 달성하는 거라면 마도가 상당히 근접해 있다.’
보조 특성으로 무엇이 나올까. 마도 특성을 최대한 빨리 C까지 달성해야 할까. 메인 퀘스트는 언제 등장할까.
생각할 것들이 많아지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후우. 일단 좀 씻을까.”
생각을 정리할 겸,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자 따뜻한 온수가 쏟아졌다.
그제야 달아올랐던 몸의 긴장이 노곤노곤 풀리기 시작했다.
‘…찬물은 이제 진짜 그만해야지.’
확인한 결과, 유감스럽게도 찬물은 시스템 보너스가 없었다.
“푸엣취!”
그날 오후, 신관의 힐링 값으로 200리브라가 지출되었다.
* * *
3월, 겨울이 지나고 신입생의 계절이 다가왔다. 위르겐하이의 곳곳에서 교복을 입은 이들이 곧잘 보이기 시작했다.
잠깐 밖을 걷노라하면, 기차역으로 가는 이들과 그들을 배웅하는 가족들이 눈물의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저택에 돌아온 나는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 리아에게 물었다.
“후인의 반지를 갖고만 있으면, 특별한 전형 없이 입학식에 참여할 수 있던가?”
“제게 물으신 것입니까?”
“혹시 지금 내 옆에 너 말고도 다른 이가 있는가?”
리아가 조금 의외라는 어투로 말한다.
“…샤프란의 입학 전형이라면 이미 통달하신 줄 알았기에.”
나라고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다. 하물며 나는 마법사 캐릭터로 플레이할 때, 후인의 반지를 보지도 못했다.
그저 그런 ‘전형’ 존재한다는 것만 알았을 뿐.
“지금까진 나 홀로 많은 것을 해왔다만, 이제 너에게 짐을 좀 덜어보려 한다.”
“저는 류리크 님의 수족이 아니옵니다만.”
“홍차값은 해야지. 그리고 자네는 지금 본인의 집사임을 기억했으면 좋겠군.”
홍차값의 거래는 끝난 줄 아옵니다만, 리아가 눈으로 쏘아붙였다.
그에 대해 나는 ‘내 옆에 붙어 있으면 귀한 홍차가 떡고물로 떨어질 수 있네만.’이라고 표정으로 답했다.
“…입학식 당일에, 아침 일찍 입학처에 반지를 보여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언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어쩌면 리아와 나는 천생연분이 아닐까.
나는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면서 되물었다.
“시간은?”
“6시부터 8시 사이. 그전까진 반지를 꼭 지니고, 입학처까지 가셔야 합니다.”
“그렇군.”
특별한 절차는 없었다. 입학식 전까지 뭘 준비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리아가 그런 말을 했다.
“이제 안녕이군요.”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창밖을 보았다. 마치 곧 이별이라도 할 것 같은 태도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녕이라니, 마치 우리가 헤어질 것처럼 말을 하는구나.”
“실제 헤어지는 게 맞지요.”
실로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고? 나는 앞으로도 그대와 계속 함께 할 생각이다만.”
이번에는 리아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샤프란은 기숙사제를 채택한 대학입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소인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분류되기에, 류리크 님과 같은 기숙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네겐 유감스러운 소식이겠지만, 그렇게 쉽게 놔줄 생각은 없다. 이런 식으로 헤어질 것 같았으면, 나브릭스 홍차를 주지도 않았겠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샤프란에는 후작가 이상의 자제들에 한해 사택에서의 통학을 허용한다, 라는 교칙이 있지. 학교에도 미리 말을 해 놓았다.”
“…그걸 아시는 분이 후인의 반지에 관한 절차를 물으신 겁니까?”
“그거야 자네의 실력을 테스트할 겸이었지.”
사실은 그때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었다.
“잘 부탁하네. 어차피 자네의 역할은 나를 감시하고, 주기적으로 동향을 보고하는 것 아닌가.”
“………….”
리아의 얼굴에 당혹감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목소리에서도 조급함이 묻어났다.
“샤프란의 커리큘럼은 상당히 체계적이고 복잡합니다. 기숙사제를 택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지요.”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샤프란은 방과 후의 연구회, 동호회 활동이 상당히 중요하지. 사교를 위해서도 필요할뿐더러, 그곳에서의 활동을 평가하기까지 하니까.”
“그걸 아신다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류리크 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유들이 있는 만큼, 기숙사제에 순응하심이 옳을 줄 아옵니다만.”
그건 또 다른 얘기다. 내가 무슨 고등학교 동아리 활동하는 것도 아니고, 연구회나 동호회 같은 것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순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입회는 하되 꼭 필요한 상황에나 가끔 참석할 생각이다. 적어도 1학년 때는 말이지.
“벌써 잊어버린 것 같은데, 본인은 아직 약물 중독자라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매일 상당한 시간을 명상에 투자해야 하지.”
자네가 질색하는 그 얼음물에서 한 것처럼 말이지, 내가 덧붙였다.
“황족이라는 것만으로도 학부생들의 관심이 모일 텐데, 내 어찌 기숙사 같은 곳에서 마음 편히 명상을 할 수 있겠는가.”
“…샤프란의 기운이 영험하여 그곳에서 하는 명상이 도움이 된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샤프란에 재학하면 생기는 ‘마법 대학 학부생’ 직업이 마도 수련에 어드밴티지를 제공하는 거지, 꼭 거기서 수련해야 하는 건 아니다.
물론 리아에게 그런 설명을 해줄 순 없기에, 기억이 나지 않는 척 넘겼다.
“………….”
그나저나 리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와 함께 한다는 걸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포커페이스를 잃어버린 걸 의식도 못 할 만큼 깊은 생각에 빠진 것이, 조금 귀여웠다.
“뭐, 더 할 말 없다면 본인은….”
“아뢰옵게 황송하오나, 이곳은 위성도시 위르겐하이입니다. 제도의 대학까지 통학하기엔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이는 오히려 시간 낭비를 야기할 가능성이….”
리아가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쥐어 짜낸 마지막 한 방을 날렸지만,
‘나는 이미 네 머리 위에서 놀고 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돌려주었다.
“통학은 물론 제도에서 할 예정이다.”
“…무슨 수로 말씀이신지요? 류리크 님의 잔고로는 제도의 조그마한 가정집도 구할 수 없….”
“제도에 류네온이 수호기사로 서임 받기 전 쓰던 아스트레이의 사저(私邸)가 있다 들었다. 거기를 이용할 생각이다.”
리아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나는 흐뭇하게 1승의 채점표를 기억하며, 놀리듯 말했다.
“네가 정 기숙사제를 바란다면, 예외 조항을 들 수도 있다.”
“예외 조항… 말씀이십니까?”
“황족은 호위를 대동할 수 있고, 그로 너를 지명한다면야… 금녀(禁女)의 구역인 샤프란 대학 남자 기숙사에서 우리가 혼숙을 할 수도 있겠지. 어떤가? 조금 관심이 동하느냐.”
리아는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경멸을 담아 말했다.
“차라리 절 죽이시지요.”
“그러면 결론이 나왔군.”
나는 여유롭게 소파에 걸터앉으며 리아에게 손짓했다.
“시종들에게 모두 모이라 이르거라.”
* * *
아스트레이 별장의 시종들은 큰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근래 들어 류리크가 망나니짓을 그만두더니, 무려 기숙사제인 샤프란 마법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만 된다면 망나니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처음부터 모두가 철썩 같이 믿으며 만만세를 부른 건 아니었다.
―마법 대학으로 진학한다니? 당주님께서 허락하실 리가 없어.
―샤프란 대학에서도 쉽게 받아줄 것 같진 않은데.
―잘은 모르지만 샤르미넨 총장님이 당주님과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도 있고.
그러던 와중, 류리크가 후인의 반지를 얻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후인의 반지가 뭔데?
―갖고 있으면 천민이라도 샤프란에 들어갈 수 있는 보물이야!
―지, 진짜? 그러면 류리크 님이 정말로 대학에 들어가는 건가?
―내가 알기로 샤프란 마법 대학은 전원 기숙사제일 텐데….
―그, 그러면…!
진짜 류리크가 대학에 붙을 가능성이 커져 버렸다. 오히려 이렇게 되자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시종들이 나타났다.
그러던 와중 류리크가 별장 내의 모두를 불러 모았다.
시종들은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을 품으며 하나둘 별장의 현관으로 모였다.
“류리크 님이 기숙사를 이용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쪼, 쫓겨나지는 않겠지. 류미엘 님의 인망이 있으신데. 아마 여기 위르겐하이의 별장처럼,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어?”
“그렇다 쳐도 우리 모두가 갈 수는 없을 텐데….”
“우리 모두 헤어지게 되는 거야?”
모두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져가는 가운데, 그들의 바로 뒤에서 류리크가 나타났다.
“너희들이 헤어질 일은 없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시종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앗?!”
“류, 류, 류, 류리크 님?!”
“방금 저희들이 한 말은…!”
가끔 있는 외출을 제외하곤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류리크다 보니 모두 방심해버렸다. 자신들도 모르게 익숙하게 쓸데없는 잡담을 떠들고 만 것이었다.
물론 지금 한 말 중에 류리크의 험담은 없었지만, 그 변덕 심한 류리크가 무엇에 눈이 돌아갈지 모르는 것도 사실.
시종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파들파들 떨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여기서 살아남으면, 그냥 일을 그만두겠어!’
그런 시종들의 속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류리크는 넓은 아량을 베풀듯 말했다.
“내 어찌 너희들을 버려두고 가겠는가. 너희들 모두 나와 함께 간다.”
같이 간다니.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설마 마법 대학의 기숙사에?
기숙사에 시종을 들일 만큼 정신머리가 없었던 것인가!
시종들이 반쯤 패닉에 빠진 상황에서 류리크는 제 할 말만 한 뒤 훌쩍 떠나버렸다. 남겨진 이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저들끼리 우왕좌왕 떠들기 시작한다.
“저게 무슨 소리래?”
“같이 간다니, 설마 마법 대학에?”
“마법 대학이라면… 나 좋을지도….”
그러던 도중, 현관에 리아가 나타났다.
리아 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겠지, 시종들이 두 손 모아 다가가자 리아가 교통정리를 하듯 설명을 시작했다.
“류리크 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여러분 모두, 제도의 아스트레이 소저택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류, 류리크 님은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류리크 님은 아스트레이 소저택에서 통학을 하실 예정입니다. 그러니 소저택에서 류리크 님을 보필하기 위해 모두를 데려간다는 것이지요.”
최악의 결말에 시종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었다. 그렇지만 고참 중 몇몇은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최, 최소한의 인원은 별장에 남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류미엘 님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그렇지만 별장 일에 익숙한 이들도 있으니….”
“소저택은 별장보다 훨씬 넓습니다. 일거리가 꽤 많아지겠군요.”
리아는 거기서 딱 끊은 뒤, 총총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밤 시종들은 다 같이 모여 눈물의 회식을 했다.
* * *
제도(帝都) 뤼겐베르크, 아스트레이 소저택.
류네온 바타체스 폰 카르펜 아스트레이는 감회에 젖은 얼굴로 저택의 정원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어느덧 6년, 할카데르의 본가보다도 이곳에 친숙함이 깊었다.
“이곳도 이제 안녕이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곧 가신다는 게 실감됩니다.”
줄곧 그를 보필했던 노집사가 허허, 웃으며 말한다. 그에 맞춰 류네온도 아쉬운 듯, 후련한 듯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동안 수고 많았어.”
소저택이라고는 하지만, 본가에 비해서 그럴 뿐이지 적은 수의 시종들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그런 저택을 노집사는 혼자서 관리해오고 있었다.
이제 류네온마저 이곳을 비운다면, 그는 혼자 남게 되는 셈이었다.
“집사, 달리 생각해 본 거처는 있는가.”
“소인에겐 이곳이 고향이고, 무덤이옵니다.”
“그런 말 하지 말게. 자네가 바란다면 내 작게라도 할카데르 주변에 집과 농토를 내어주겠네. 소작을 부리면 노후를 편히 살 수 있을 테야.”
하지만 노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전란으로 주도(主都) 할카데르에 변고가 생겼을 때, 누군간 이 소저택을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류네온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자, 노집사가 환히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수습 과정이 끝나고, 정식 수호기사로 서임을 받으셨으니 아스트레이의 영광입니다.”
“내가 멋대로 수호기사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류미엘이 고생이 많았지. 그녀에겐 늘 큰 짐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해.”
“모름지기 각자의 길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요.”
“나는 나의 길을 갈 테니, 자네는 류미엘에게 혹 무슨 일이 생긴다면 마음 좀 써주게.”
“제 신명은 오롯이 아스트레이를 위하는 것뿐입니다.”
“그리 말해주니 마음이 좀 놓이네. 하하.”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나니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정리할 것들이 많네.”
짐은 소박했으나, 갖고 있는 아이템들은 적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의복부터, 애장과 여러 아티팩트들 하나하나가 보물로 취급되는 물건들이니까.
류네온은 갖고 있던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것들 모두 본가로 돌려보내야겠지?”
“수호기사는 빈손으로 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 법도이잖습니까.”
수호기사가 되어 떠날 땐, 가문에서 하사받은 명검도, 자신의 애장도 함께할 수 없다. 수호기사끼리 출신이나 부 따위의 차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출신, 파벌, 경쟁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신명(身命)을 바쳐 황가를 위해 일해야 하므로.
“시간만 된다면 류미엘에게 인사라도 하면서 돌려주고 싶었는데.”
황실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침이니, 오늘이 가기 전엔 약속의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 수호기사의 부름은 불현듯 찾아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 숙명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저택 내의 비밀 은신처에 본가와 이어진 워프게이트가 있긴 합니다만.”
“그건 한 번 쓰고 나면 무너지는 일회성이잖나. 작별의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류미엘이 복구비용을 운운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게 눈에 선해. 하하.”
작게 웃어 보인 그는 어딘가 쓸쓸한 눈으로 아이템들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들이 저택의 수장고로 들어가면 오래도록 빛을 못 보겠지?”
“그럴 것입니다. 류아라 님도, 류미엘 님도 아티팩트에는 그리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니까요.”
그의 심상과 맞아떨어지듯, 날이 서늘해지며 저 멀리 보랏빛 하늘이 밀려온다.
류네온은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는 별을 헤아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하다못해 이 브로치라도, 주인을 찾으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