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131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131화
131
“그래서 족보 사는 걸 포기했다고?”
“그럼 어떡해! 류리크 씨의 정보를 팔 수도 없잖아.”
나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너희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얼마나 있더냐.”
“그건….”
“그중에 값을 매길 만큼, 귀한 것이 있더냐.”
어차피 페리사도 큰 기대를 하진 않았을 터라 아마 그냥 한강 물에 낚싯대 드리워보는 심정으로 대충 던져본 것이겠지.
혹여 쓸만한 정보가 있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느낌으로.
‘애당초 진지하게 정보를 얻을 셈이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 테니까.’
따라서 실비아와 메이린은 적당히 나에 대한 잡다한 정보를 던져주고, 족보를 취하는 것이 이득이었을 터다.
“하지만….”
“우리는 나름 류리크 씨의 사생활을 지켜주려고 한 건데!”
“다시금 말한다만, 너희가 나에 대해 알면 뭘 얼마나 안다고.”
가볍게 혀를 차려는 순간,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류리크 씨는 불안해하면 겉옷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습관이 있어.”
“…………?”
“옛날에 향초 쓰던 버릇이 남은 거 같은데… 아침마다 리아 님이 그거 다 빼두는 거 알지?”
이건 무슨 소리인가, 잠시 머리가 멈춰버린다.
그러는 사이 메이린이 맞장구를 쳤다.
“아, 맞아요. 그래서 류리크 씨가 비상용 향초는 개조한 양복바지의 발목 쪽에 숨겨놓았잖아요.”
“응응. 리아 님도 알고 있긴 한데, 남용하지 않으니까 봐주고 있는 거잖아.”
“…………??”
몰랐다. 정말로 몰랐다.
내게 그런 습관이 있었다는 것도, 리아가 내 ‘비상용 향초’의 존재를 안다는 것도.
“그리고 류리크 씨. 모모란 선배가 특제 단약 만들어주기 전까지 수전증 심했던 거 알아? 또 생각에 잠길 때, 막 몸 부르르 떨기도 했고.”
“그거 진짜 이상했어요. 보이는 증세는 약물 중독자, 정신이상자인데 겉으로는 또 멀쩡한 듯 구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내 부끄러운 치부가 이렇게 많았던가…….
“맞다. 그리고 류리크 씨, 본인한테 이상한 잠꼬대 있는 거 알아? 맨날 악몽 꿀 때마다…….”
“거, 거기까지.”
“에에, 아직 말할 거 더 많이 남았는데~.”
평소 같으면 머리 한 대 쥐어박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실비아가 리아만큼이나 무서웠다.
나는 질끈 두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거, 어쩌면 레베카도 이미 내 약점 리스트를 쫙 적어놓고 분석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는데?’
크흠, 나는 괜히 헛기침하며 둘에게 말한다.
“여하간 그런 족보는 필요 없다. 너희가 머리가 나쁘긴 하지만, 이전처럼 악으로 깡으로 공부하면…….”
“죽여어어어! 차라리 죽여어어어어!”
“역시 류리크 씨의 정보 팔아넘기죠! 그것밖에 답이 없네요!”
얘네가 정말 20살의 성인인가.
제국의 앞날…… 아니 내 앞날이 캄캄하다.
“후우, 정 그렇다면 공부할 양을 줄여주지.”
“예전부터 느꼈지만, 역시 류리크 씨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없는 거 같아. 거 진짜 너무한 거 아니오?!”
“기왕 이렇게 된 거, 류리크 씨의 속옷 색깔까지 분석해서 제대로 한탕 하는 게…….”
—탁.
나는 슬슬 정신줄을 놓아가는 둘 앞에 얇은 책 두께의 서류뭉치를 내려놓았다.
“뭔데 이게?”
“설마 저희가 공부할 거 목차만 정리해놓은 거 아니죠?”
“족보다.”
순간 우리 사이로 싸— 한 공기가 지나갔다.
“………….”
“………….”
본인들이 그렇게 찾던 건데, 왜 저런 반응인가.
나는 의아하게 여기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내 나름대로 교수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어느 부분을 강조하는지, 또 수업한 내용의 구조상 어느 부분이 중요한지 체크해 시험에 낼 만한 부분을 추렸다.”
“하, 한 과목이죠? 한 과목만 정리해서 이 분량인 거죠?”
“에이, 메이린 씨. 당연히 그렇겠지. 류리크 씨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간…….”
“전 과목이다.”
털썩.
갑자기 실비아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거기에 메이린 역시 현기증이 도진 것처럼 비틀거리더니, 쓰러지듯 옆에 있던 책장에 몸을 기댄다.
“…이런 씨발,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줘야지이이이이이!”
“너무해요! 진짜아아아!”
나는 정말 한심한 것들을 보는 눈으로 둘을 흘겼다.
“뭔가 성대한 착각을 하는 것 같다만, 대학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그러면 대학이 뭐 하는 곳인데!”
이걸 굳이 입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게 그저 가슴 아플 따름이다.
“대학은 각 학문의 권위자이자, 최고의 연구자인 교수들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존재하는 거다.”
“………….”
“시험만 통과할 생각이라면 그냥 가정교사나 들여 공부하지, 무엇 하러 대학을 오겠나.”
“………….”
실비아가 나지막하게 ‘나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는데.’라며 입술을 비죽였다.
“여하간 너희가 워낙 공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이 족보만 달달 외우도록 해라. 그럼 이전보단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이 나올 거다.”
“이 족보로 괴롭히지 않을 거죠?”
“그러게. 족보 외우는가 못 외우는가로 달달 볶는 거 아냐?”
둘이 우려와 공포가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라면 걱정 마라. 애초에 나는 너희 공부를 봐줄 시간이 없으니까.”
“…응? 그건 또 뭔 소리야?”
“류리크 씨, 어디 가요?”
참 애석한 일이기도 하지.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에게 데이트 신청이 왔다. 주말은 물론, 방과 후 시간 날 때마다 ‘공부 데이트’라는 걸 하자고 하더군.”
시험 기간을 앞둔 연인이라면 이게 당연하다나 뭐라나.
“그, 그러면….”
“류리크 씨가 저택에 없다는…?”
실비아와 메이린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와자뵤오오오!”
“만세! 만세! 레베카 님 만세에에에!”
“………….”
정말.
한숨만 깊어지는 기말고사다.
* * *
샤프란 마법대학의 정례 교무회의.
기말고사를 앞두고 다시 한번, 교수들 중심의 회의가 열렸다.
다만 저번 중간고사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땐, 베르넬 삼림지대의 화재와 비에자 숲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지만, 이번엔 그런 복잡한 의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밖에 하고픈 말이 있으신 분 있나요?”
회의는 ‘모두 순조롭게 기말고사 준비를 하고 있다.’라는 걸로 순식간에 지나갔고, 어느덧 마무리에 다다랐다.
교수들은 이미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면 회의는 이 정도로 하고 마칠까요?”
부총장이 자리를 정리하듯 말하며 일어섰다.
그에 맞춰 교수들도 적당히 일어설 준비를 한다.
—이따가 밥이나 같이 할래요?
—저야 좋죠.
—아, 웨인즈 교수. 자네 연구에 대한 건데….
그때였다.
쾅!
어떤 정신 나간 무뢰한이 회의실 문을 박차고 갑자기 안으로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교수들은 대체 ‘어떤 미친놈이…!’ 라는 의미를 담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문 쪽을 노려보는데…….
“이런이런~ 지각을 조금 했는데~ 설마 회의가 끝나 버린 건 아니겠죠오오오?”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샤, 샤르미넨 총장님?”
“갑자기 여기엔 어쩐 일로….”
매번 ‘저는 귀찮아서 패스요오~’라고 도망치는 게 일상인 양반이 왜 갑자기?
교수들의 눈에 불안과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앗핫핫! 다들 자리에 앉아계신 걸 보니, 회의가 아직인가 보네요오오! 어, 근데 부총장님은 왜 서 계세요오오? 멀뚱멀뚱 계시지 말고 앉으세요오오~!”
“………….”
평소에는 샤르미넨이 회의에 불참하는 걸로 빡쳐 하던 부총장이건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얼굴이 굳어졌다.
“여기… 앉으시지요. 총.장.님.”
“어머어머. 그런 살벌한 눈빛과 정중한 말투의 언밸런스. 역시 표정 못 숨기는 건 여전하네요오~ 우리 부.총.장.니이임.”
빠직.
부총장의 손이 닿아 있던, 테이블 일부가 마력으로 우그러졌다. 그렇지만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뭐, 상석 같은 좋은 자리에는 우리 부총장님 앉으세요오오~. 어차피 저는 짧게 말하고 나갈 거니까아아.”
본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듣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갑자기 학과 통폐합을 거론하는 건 아닌가, 실적 없는 학과의 연구비 날려버린다고 하는 건 아닌가.
교수들은 저마다 별의별 생각을 하며 긴장의 눈빛을 보낸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샤르미넨이 입을 열었다.
“돌아오는 주가 기말고사 한 주 전인 걸로 아는데, 다 같이 휴강하죠! 학생들도, 교수님들도 한주 푹 쉬는 거예요!”
“………….”
“………….”
“…………?”
누군가는 어이없어 말을 잃고, 누군가는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못 했다.
그런 와중에 절망 섞인 표정으로 이마를 짚던 부총장이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샤르미넨 총장님. 그게 대체 무슨….”
“아핫핫. 알아요. 알아. 뭐 커리큘럼이니 뭐니, 운운하면서 안 된다는 거잖아요오오? 그건 안 들어봐도 아니까 들은 셈 치고 생략!”
아니, 이 미친 양반아.
그걸 그런 식으로 뭉개는 게 어디 있냐아아아악!
라는 말이 부총장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억눌렀다.
물론 그 인내심과 비례하듯 테이블의 균열이 커졌지만.
“푹 쉬라고 했지만, 설마 진심으로 한 말이겠어요? 교수님들은 모두 평소 하시던 연구에 집중해달라는 거랍니다! 물론 연구비도 듬뿍 지원해드릴 거고요!”
“………….”
“………….”
교수들은 선뜻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렴 부총장이 눈 시퍼렇게 뜨고 저리 앉아있었으니까.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샤르미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입가에 가져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어어… 다들 눈치 없어서 못 알아들은 거 같은데, 휴가비 챙겨줄 테니까 나가서 쉬다 오라는 얘기예요!”
콰앙!
참다못한 부총장이 테이블을 아예 박살 내면서 소리쳤다.
“샤르미넨 총장님!”
“앗차차. 우리 부총장님이 화나셨네요오. 그런 고로 빨리 결정하죠오오. 어차피 다들 찬성할 테니까, 반대할 사람만 거수!”
스윽, 조용히 있던 오스트람이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그에 맞춰, 몇몇 교수가 헛기침하며 손을 들었다. 소위 부총장을 실세라 믿는 이들이었다.
“흐응. 오스트람 교수님.”
“저는 연구할 분야도 없고, 연구비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뿐입니다.”
어차피 학과가 있는 정교수도 아니고, 본래 신전 소속이라 샤르미넨이 뭐라 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어, 맞다. 오스트람 교수님은 돌아오는 주에는 수업 못 하세요.”
“저는 총장님이 뭐라 하신들 결코 굴하지 않을…….”
“치안국에서 조사가 있을 예정이거든요.”
“…………?”
샤르미넨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볍게 오스트람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다.
“보완 수사와 사후 처리를 겸해 치안국의 조사관이 갈 테니까 그리 알고 계세요.”
“아니, 언제 그런 일이…….”
“방금 막 제가 정했거든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반드시! 그 일은 일어날 테니까!”
“………….”
“혹시 또 불만이신 교수님, 계실까요오오?”
손을 올렸던 교수들이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샤르미넨은 방긋 웃었다.
“그러면 모두 동의한 걸로! 다음 주는 모두 쉬는 거예요오오오!”
* * *
—갸아아아악!
회의실을 가장 먼저 박차고 나간 부총장의 비명이 복도에 울렸다.
이어서 교수들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샤르미넨은 홀로 회의실에 남았다.
“………….”
방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음에도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싱글싱글 웃고 있는 샤르미넨.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갑자기 툭, 말을 내뱉었다.
“레베카 이실리엔. 결국, 당신의 뜻대로 되었네요오오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회의실 복도 쪽에 서 슬그머니 레베카가 나타났다.
그녀는 아주 작게 고개를 까닥였다.
“감사를 표하네, 샤르미넨 총장.”
“저도 뭐 재밌었어요! 오스트람 교수를 꿀 먹은 벙어리 만드는 게 흔한 기회는 아니거든요오오오.”
그 얼빠진 얼굴은 꽤 볼만했죠, 샤르미넨이 쿡쿡 웃었다.
“그나저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아아? 어기면… 죽어요오오오?”
“설마 그대 앞에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거론했겠나. 그 부분은 걱정 말게.”
레베카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고, 샤르미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근데… 당신도 저한테 말을 놓았던가요?”
“유유상종이라 하지 않던가. 연인이 그 모양인지라 옮은 모양이야.”
“………그거 확실히 납득되는 설명이네요오오.”
끄덕이던 샤르미넨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그런데 설명이 안 되는 부분도 있어요오오.”
“………….”
“왜 그런 약속을 하면서까지, ‘이런 일’을 꾸민 거죠오오?”
“글쎄….”
레베카가 답을 흐리는 가운데 샤르미넨의 눈이 침잠이 가라앉는다.
레베카의 내면에 가려져 있는 무언가를 헤아리듯.
“그동안 학생은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죠오오오.”
실제 레베카 이실리엔은 입학한 뒤 이렇다 할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샤프란은 교육기관임과 동시에 제국에서 손꼽히는 ‘사교의 장’임에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성실한 학생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야, 어차피 계승전의 큰 그림을 그리는 건 첫째 오빠와 둘째 오빠의 몫이고, 그 자식들이 무언가를 해봐야 그건 사실 애들 장난에 불과하니까요오오.”
“………….”
“저는 물론 첫째도 둘째도 북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당.연.히. 류오넬 오빠를 노려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오오?”
“………….”
“학생도 그걸 ‘알기에’ 가만히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움직이는 건….”
샤르미넨이 말한다.
“당신, 정말로 류리크 아스트레이가 북부의 맹주가 될 거라 생각하는 거군요?”
마치 거대한 용이, 뱀의 눈을 빌어 세상을 살피는 것처럼.
그녀의 눈이 레베카의 이지(理智)의 너머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