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143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143화
143
짧은 새, 얼굴이 수척해진 레기아가 이쪽을 들여다본다. 생각할 게 많은 듯했다.
눈엔 혼란과 혼돈이 뒤섞여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다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가 거절할 거라는 사실을.
“류리크 아스트레이.”
“그래.”
“안타깝게도 그 제안은 거절해야겠어. 종합적으로 생각했을 때,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말이지.”
실망하진 않았다.
어떻게 첫술에 배부를 수가 있을까.
다행히도 그의 어조는 완전한 거절을 논하는 것도 아니었다.
“종합적으로 생각했다는 건, 고려의 가치는 있었다는 소리인 듯한데.”
“맞아. 아이언 포지는 우리가 먹었을 땐 좋지만 빼앗기면 또 엄청 골치가 아프거든. 그래서 차라리 북부에 넘기는 것도 방법의 하나긴 하지.”
레기아는 신중한 남자다.
상태 이상으로 신경쇠약을 달고 사는 만큼 잔걱정이 많되, 그만큼 틈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이언 포지는 상당히 복잡하게 작용하는 변수.
‘설득에 따라서 충분히 그를 이용할 수 있을 터다.’
다만 그럼에도 그가 거절한 것은…….
“하지만 결정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하는 거야. 아버지가 그 정도의 근거로 결정하실 거라 생각하지 않아. 그저 내가 혼쭐만 나겠지.”
“뭐, 그 부분은 인정하지.”
상대방한테 뺏길 수 있으니 모르는 남한테 줘버려라……라는 건, ‘철천지원수한테 뺏길 바에야’ 같은 상황이 아니고서야 잘 먹히지 않는 논리다.
그래서 다음 논리를 제시한다.
“허면 2황자를 설득할 때, 이 말을 곁들이면 어떻겠나.”
“어떤 말?”
“첫째. 앞서 말했듯, 정치적으로 계산했을 때의 불안 변수를 제거하게 된다.”
그거야 뭐. 레기아는 적당히 납득하는 모양새로 고개를 끄덕인다.
“둘째. 대의(大義)를 위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대의?”
“자네도 알겠지만, 북부는 영원의 벽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내가 개혁을 꾀하면서 사정이 달라져 보이는 거지, 북부의 대부분은 여전히 농업이고 상업이고 아무것도 없이 중앙에만 의존하는 군사 요새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그리고 별거 없는 그 설원에 무장(武將)과 요새 도시들만 있는 건 당연히 영원의 벽을 지키기 위해서인 것이고.
“몇 달 전, 프레이야 대신전에서 극야를 예언했다.”
“극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전부터 잘 막아 왔던 걸로 아는데.”
이번에 특별히 위험하다는 말이 있던가? 레기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가볍게 도리질 치며 부정했다.
“그런 건 아니다만, 예전과 달라진 게 있지.”
“……아, 그렇네. 마녀사냥이 사라지고, 전쟁도 없었으니 북부로 이송해야 할 죄수 자체가 줄었겠어.”
“그렇다. 그런 마당에 황위계승전으로 무기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는 틈을 타 극야가 발생하면 어떻겠나.”
레기아가 북부에 무관심해도, 극야가 무엇인지 잘 몰라도.
대충 상황이 안 좋다는 계산은 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류리크. 그건 그저 우연과 확률을 최악으로 가정했을 때의 일인 거 같은데. 그걸로 아버지를 설득하기엔…….”
“그 최악을 우려하는 인물이 트리스탄이다.”
“……트리스탄? 설마 알테온의 트리스탄?”
“그래. 영원의 벽의 트리스탄이라면 그뿐이 없지.”
이전에 그에게도 약조를 받아낸 바 있다.
기사로서 이 세계의 정점을 논하는 알테온의 말이라면 상당한 무게가 실릴 터다.
결정타까진 아니지만, 황태자나 2황자에게 한 번쯤 재고하게 해 볼 법하달까.
“아이언 포지 부지 이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 트리스탄은 공개 성명을 통해 북부에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라네.”
“……트리스탄까지 끌어들였다니, 굉장히 공을 들였던 모양인데.”
“마지막으로 셋째. 이 제안을 승낙함으로써, 우리는 종강 파티에 대응할 우호적인 계획을 짤 수 있게 된다.”
결국, 지금의 이 대화의 시작은 종강 파티 때문에 시작됐다.
타이밍상으로도 아이언 포지는 조금 뒤인 반면, 종강 파티는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온 상황이기도 하고.
“낯빛이 안 좋군. 레기아.”
“……아, 생각할 게 많아져서.”
“시간이 필요한가.”
레기아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럴 것까진 아니고…… 다만 그쪽 대화를 하기 전에 하나 확인하고픈 것이 있는데.”
“뭐가 알고 싶지?”
“너와 레베카는, 대체 무슨 관계인 거냐.”
그의 다크서클이 짙어지며 동시에 눈썹이 휘어진다.
누가 보면 화난 줄 알고 오해할 법한 얼굴이지만, 저건 단순히 생각이 많아져서 저런 것뿐이다.
다시 말해, 지금 레기아는 머릿속으로 나와 레베카의 관계에 대한 무수한 시뮬레이션을 굴려보고 있다는 소리다.
“너와 레베카는 공식적인 연인관계잖아. 그리고 이번 종강 파티의 판을 주도하는 건 레베카지.”
“그렇다만 그게 왜…….”
“거기에서 네가 우리와 작당한다는 건…… 그녀를 배신하는 행위처럼 비춰질 수 있을 텐데?”
그걸 따지고 들 거면 시작부터 말하던가.
나는 조금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며 입을 연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 오래된 고전을 말해야 하는가.”
“그리고 오늘의 친구는 내일의 적이지. 류리크.”
순간, 피로에 찌들어있던 레기아의 눈이 빛난다.
“요새 북부가 꽤 잘 나가잖아. 그런 마당에 아이언 포지까지 더해지면 더 잘나갈 테고. 그런데 너는 레베카의 연인이니까, 북부가 황태자랑 결탁할 수 있다는 거잖아.”
사실 그게 나한테는 최악인데, 레기아가 덧붙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그의 말은 직관적이고, 또 단순하게 들리지만.
품고 있는 생각과 정치를 꿰뚫어 보는 안목은 탁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일종의 공격이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약간 어설펐구나.
상대가 레기아인데,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나는 말한다.
“……애초부터 협상에 응할 생각 따윈 없었군그래.”
“응?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나는…….”
“본인의 의중을 떠보고 싶었고, 패를 들여다보고 싶었을 뿐. 그렇게까지 진지한 생각은 없었던 게야.”
레기아의 입장에서는 그럴 터였다.
류리크라는 인간을 모르기에 한번 만나보는 것이었고.
류리크라는 인간이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했던 것이었고.
류리크라는 인간이 무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
레기아가 피식, 가볍게 웃는다.
“왜 웃지?”
“아니, 그냥…… 이 대화를 돌이켜보니 웃음이 나와서.”
그는 수사학이 발달한 인간이 아니다.
정치력이 높긴 하나, 그건 결코 세련된 말을 잘해서가 아니다.
그의 정치가 뛰어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꽤나 날카롭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북부는 예전부터 중립을 지켜왔잖아.”
“………….”
“거기에 현(現) 당주 대리이자 네 여동생인 류미엘은 보수적이고, 중립적인 성향이 강하지.”
“………….”
“그렇게 따졌을 때. 사실 곤란한 것은 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
“결국, 너는 류미엘의 눈치든, 북부를 위해서든 중립을 지켜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레베카한테 코가 꿰인 거 아냐?”
“………….”
“그리고 종강 파티로 옴짝달싹 못 하게 될 거 같으니까, 나를 찾아온 거 아니야?”
긴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앉아 대화를 나눈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을 터다.
헌데 레기아는 본질을 꿰뚫어 본다.
레베카와 내가 구축해가던 비틀어진 관계의 단면을, 아무렇지 않게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내가 가졌던 주도권을 빼앗아 저들이 나를 구원할지 말지를 선택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역시 눈치도, 흐름을 읽는 것도 빠르다.’
절대 이건 내게 만족스런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레베카를 ‘괴물’로 치는 반면, 레기아를 괴물로 여기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너는 항상 어설프지.’
흐름을 읽는 것도 빠르고, 손해 보지 않게 계획을 짜는 것은 좋다만. 그 밖에는 별로다.
‘여하간 나를 이겨 먹기엔 아직 멀었다는 소리지.’
나는 말한다.
“레기아, 나는 소모적인 논쟁을 싫어한다네. 특히나 내일 시험이 있다 보니, 더더욱.”
“어. 바쁘면 돌아가도 좋은데.”
“정말 그리 생각하나?”
승부에서 이겼다고 생각할 셈이었냐.
미안하지만 네 단점은 그 어설픈 것에 있다.
상대를 만났으면 죽거나 죽일 각오를 해야지. 어설프게 탐색전만 하고 끝낼 각오로 오니까 안 되는 거다.
—내가 정말로 죽이려 들 때, 아무것도 못 하게 되니까.
“스텔라 루메논 호텔의 테러를 사주한 게 자네들이라는 거, 알고 있네.”
“…………!”
“폴트먼 재상을 이용하고, 또 살해한 것 역시 말이지.”
확실한 건 아니다.
나는 폴트먼이 죽는다는 건 알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살해당하는지는 모른다.
내가 아는 건, 본편 이전에 그가 ‘죽는다.’라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예단하기에…… 거의 확실히 흉수는 레기아와 그 형제들이다.
“류리크. 그런 터무니없는 억측을 내놓을 거면…….”
“설마 여기서 시시하게 증거를 제시하라는 말은 안 하겠지?”
“………….”
당연히 그런 건 없지만, 있다고 해도 안 내놓을 거다.
여기서부턴 오롯이 내 특기인 말로 승부를 봐야 할 것이기에.
“여하간 그 전제하에 아주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던져보고자 하네.”
“………….”
“만일. 정말로 만일 누군가 테러 사건에 대해 제보를 한다면 어찌 될까.”
아까부터 느낀 것이지만, 레기아의 표정은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애초부터 그는 신경과민에 스트레스를 둘둘 싸매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피로에 찌든 눈동자의 어디선가 혼란과 당혹이 느껴졌다.
“류리크. 그래 봐야 바뀌는 건 없다. 신문의 논조, 치안국과 제도방위군의 인터뷰. 거기에 너와 레베카의 인터뷰까지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이 사건은 이미 가라앉았고 위에 인간들도 그걸 바라고 있어.”
새로운 불씨를 지펴보려 해도 잘 먹히지 않을 거야, 레기아가 덧붙인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네가 바라는 바고.
“그대의 말도 맞지만…… 거기 있던 당사자와 그 부모들은 어떨까.”
“………….”
“본인에겐 아주 흥미롭게도, 그리고 자네에겐 불운하게도…… 당시 현장엔 치안국장과 제도방위군 사령관의 여식들이 작은 파티를 열고 있었네.”
찰나.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레기아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몰랐었나? 아니, 알았더라도 상관없지.’
나는 독 사과를 입에 문 독사처럼 그에게로 다가선다.
“그러니 나는 제보할 때, 이렇게 말할 거라네. 테러리스트의 주요 목표 중엔 그 딸들 역시 있었다고.”
“그 말을 누가 믿…….”
“레기아. 내게는 증거가 있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레기아는 반신반의하면서 믿을 터다.
그는 신중한 남자이기도 하고.
‘내가 코샤르와 폴트먼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했으니까.’
신중함은 독이 되어 그의 숨통을 조일 거다.
천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딸의 목숨이 노려지고도 분노하지 않는 아버지는 없어.”
영화에서 본 거니까, 확실하다.
* * *
기말고사를 의식해 최대한 빨리 끝내려 했건만, 그래도 늦은 저녁이 되어버렸다.
학교로 돌아가면 실비아와 메이린, 요루아가 이미 식사를 했을 듯해서 일단 저택으로 돌아왔다.
“피곤하군요.”
“……그게 집주인을 보면서 할 소리더냐.”
레기아랑 협상하고 돌아와 피곤한 건 난데, 집에만 있던 녀석이 뭘 또 볼멘소리야.
“돌이켜보면, 차라리 류리크 님이 망나니처럼 살 때가 편했던 듯합니다.”
“………….”
“주변에서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고, 그야말로 폭풍을 몰고 다니시니…….”
“………….”
“이젠 소인을 고블린 발닦개라고 부르시던 시절이 그립기까지 하군요.”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을 감시하는 것만 적당히 해도, 그 과중한 업무가 상당 부분 괜찮아질 터이다만?”
“그 감시가 느슨해졌다면, 스텔라 루메논 호텔에서 벌어진 일은 영웅담이 아니라 참극이었을 테지요.”
참 할 말 없게 만드네.
나는 옷을 갈아입을 것도 없이, 적당히 외투만 옷걸이에 두고선 식당 쪽으로 향한다.
풍기는 냄새로 보아 이미 요리가 한창인 듯했다.
“자네를 괴롭힐 생각은 없네. 지금은 그저 식사만 하고,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니까.”
“소인도 그렇게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오신 김에 전해 드려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
뭐야. 그거. 무서워.
기말고사에 종강 파티에, 레기아에 아이언 포지에…… 이미 내 머릿속은 복잡하다 못해 포화상태다.
그나마 이게 하나의 흐름이라 다행인데, 여기에 뭐 하나 얹어지면 아무리 나라도…….
“칼라모르 대학에서 종강 파티를 신경 쓰기 시작했습니다.”
“……설마.”
“세계 최고의 마법 대학이, 그리 큰 축제를 여니 세계 최고의 기사 대학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기사와 마법사의 해묵은 갈등.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지만, 이내 나는 정신을 차린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 그게 무슨 문제인가? 어차피 그치들이 우리 따라 종강 파티를 연다는 것도 아닐 텐데.”
“예. 졸속으로 열었다가 망신만 당할 테니, 올해는…… 아니, 적어도 이번 학기에는 계획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잖아?
그냥 칼라모르가 샤프란을 신경 썼다가 끝난다는 얘기인 거 같은데.
“대신 샤프란에 사람을 심어 넣어 축제를 낱낱이 살피고, 그보다 더 화려하게 후에 축제를 열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흠. 뭐 칼라모르 입장에서는 그게 마땅하겠지.”
다만 재학생이나 학교 관계자를 보내기엔 까다로울 터다.
아무렴 마법사들의 본진에 기사를 집어넣어 좋은 일이 생길 리 없으니까.
“그런데 이게…… 꼭 전달해야 할 사항이던가?”
“꼭이라 할 것까진 없습니다만, 류리크 님이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응? 더 알아야 할 게 있다고?”
리아가 말한다.
“그 인물로 샤일라 마스체니 양이 선정되었습니다.”
“아, 샤일라 마스체니…… 마스체니? 샤일라 마스체니라고?”
고귀의 13가문, 마스체니.
마법사들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명문이, 기사 학교의 첩자가 되어 샤프란에 들어온다.
여기서부터 이미 불길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거기에 최후의 일격을 날리듯, 리아가 말한다.
“그 샤일라 마스체니 양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다가오는 종강 파티에서 류리크 님의 파트너가 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