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169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169화
169
통신 구슬 너머로 보이는 메이린의 표정의 무척 밝아 보였다.
—아~ 정말, 류리크 씨도 같이 왔었어야 했는데…… 너무 아쉬워요!
일주일의 휴가를 받아, 실비아와 함께 휴양도시로 떠난 그녀는 수시로 근황 보고를 했다.
오늘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었고, 그곳이 얼마나 좋은지 꽤나 꼼꼼하게 얘기를 했다.
“모쪼록 즐거워 보여 다행이군.”
—기왕 이렇게 쉬는 거면 류리크 씨도 함께인 편이 좋았을 텐데…….
“상회도 그렇고, 아이언포지의 뒷마무리도 그렇고. 누군가는 여기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
푸우, 메이린은 아쉬움을 버릴 수 없는지 괜히 볼을 부풀린다.
—뭔가, 이렇게 진짜 마음 놓고 쉴 때는 류리크 씨랑 함께 있던 적이 없는 거 같아서요…….
생각해보면 이 세계에 온 뒤, 내가 저런 식으로 ‘휴양’을 즐긴 적이 있었나.
너무 생존에만 매몰된 채 살아온 건 아닌가.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헤헤, 그런데 저 없어도 괜찮아요? 지금이 막 바쁜 시기일 텐데…….
하긴.
내가 어디 여유 부릴 만한 입장은 아니지.
“괜찮다네. 도로 건설은 2황자파에 넘겼고, 아이언포지 공사는 어차피 저들의 일이지 않던가.”
—으음, 그런가요?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다.
도리어 그녀 말대로, 이제부터 상회를 굴리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녀야 할 타이밍……이다만, 메이린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진 않기에.
“여기 걱정은 말고, 푹 쉬게나.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할 터이니.”
—네, 그러면 또 연락할게요!
메이린이 밝게 손 흔드는 것을 끝으로 통신이 끊겼다.
장장 1시간에 걸친 통화에 지친 나는 발을 쭉 펴며 드러눕듯 의자에 몸을 누인다.
책상 위로 수북한 서류들이 무척이나 갑갑하게 느껴졌다.
“후우, 일이 끝나질 않는군.”
세상에 서류 업무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나는 특히나 이게 싫었다.
‘차라리 머리 쓰는 게 낫지.’
특별히 이렇다 할 사업이 없는 상회인데도 서류가 뭐가 이리 많단 말인가.
심지어,
“리아, 그리 멀뚱멀뚱 보기만 할 겐가. 여유가 있다면 본인을 돕는 게 어떻겠나.”
우리의 유능한 집사님께서는 한참 전부터 홍차를 즐기며 일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소인의 관할이 아니라 사료되기에 별도리가 없습니다.”
“………….”
“소인은 이 저택의 집사일 뿐, 상회의 직원이 아니니 말이지요.”
나는 작게 한숨을 지었다.
“후우, 그러면 적어도, 동물 관찰하듯 본인을 바라보는 것 좀 삼가겠나.”
“송구하나 류리크 님을 관찰하여 특이사항을 보고하는 게 소인의 임무이기에.”
그렇네.
리아는 아직도 류미엘에게 정기적으로 나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고 있었다.
늘 그래왔듯이.
“류미엘은 잘 지내는가.”
“소인은 보고서를 올릴 뿐, 류미엘 님의 근황을 파악하는 것은 아닌지라.”
꽤나 가까워졌다 생각하건만, 여전히 리아는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했다.
우리 사이에 선을 두어야 하는 지점도 확실히 구분하는 중이었고.
“아, 그러고 보니 류미엘 님이 류리크 님을 찾긴 했었습니다.”
“…………?”
“상회와 관련해 긴히 나눌 말이 있다고 하셨지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류미엘이 나를 찾았다는 건 꽤 중요한 사항일 텐데, 마치 그걸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뉘앙스이지 않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리아가.
다른 누구도 아닌 리아가?!
나는 여러 가지 의미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왜 말을 안 했지?”
“류리크 님이 가면, 류미엘 님의 정신건강이 염려되어 일부러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넌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글쎄요. 류미엘 님께 301만 3,902리브라의 빚이 있는 채무자?”
그렇군.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 나랑 류미엘이 만나서 좋을 일은 없을듯하다.
“헌데 이제 와 그 말을 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것인가.”
“예. 아주 급한 일은 아니지만…… 북부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류미엘이 감당 못 할 일이던가.”
“소인이 감히 류미엘 님의 능력을 재단할 순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일은 류리크 님이 전문이라 생각되기에.”
그녀의 말투로 미루어보아 일단 급한 일은 아닌 듯하다.
다만, 늦든 빠르든 내가 손을 쓰긴 해야 할 것 같아 보이긴 했다.
“메이린과 실비아는 휴가를 갔는데…… 으음.”
“둘을 돌아오라고 하시지요.”
아니, 그건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실로 오묘하고, 또 복잡한 것이다.
만일 그게 망가진다면 어디서부터 균열이 일었는지, 그것을 회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쉬이 알 수 없다.
최선은 그런 사태가 오지 않도록 최대한 예방을 하는 것.
‘메이린은 지금 쉬어야 한다.’
그게 내 결론이기에.
“그럴 필요는 없다. 다행히 지금 요루아와 오필리아가 있지 않던가.”
* * *
솔직히 말해, 하루 정도는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만…… 북부의 일도 그렇고, 상회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면 손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아이언포지의 이전이나 도로 정비야 저들에게 맡긴다 쳐도, 상회가 굴러가기 위한 ‘거래처’는 이쪽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다만,
‘상련과의 사이가 틀어진 게 문제였지.’
아이언포지의 건으로 나는 본의 아니게(?) 상련을 물 먹인 셈이 되었다.
상련은 제국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가진 상인들의 연합체다.
그들의 눈 밖에 난 채 상행(商行)을 하기란 무척 곤란하다.
‘본래라면 북부라는 시장이 새로 생겼으니, 여기에 납품하고 싶어 하는 상인들이 찾아와야 정상이거늘…….’
오히려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북부에 물품을 공급하려는 상인이 없다. 그 때문에 북부라는 시장을 쥐고도, 내가 발품을 팔게 생긴 것이다.
“에엑, 그러면 나보고 영업을 뛰라는 거야? 나는 좀 변장해서 막 속이고 다니는 그런 게 좋은데.”
“걱정 마라. 영업 대신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할 테니까.”
“으응? 그런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지금 문제는 나와 상련의 관계가 틀어졌음에도 북부에 유통되는 물류가 확 늘었다는 점이다.”
이게 바로 리아가 지적했던 ‘이상한 움직임’이었다.
“물류? 상련 눈치 때문에 거래처 뚫는 게 문제라면서 갑자기 웬 물류?”
원래부터 북부엔 상업이랄 게 없긴 했다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보부상(褓負商) 말이다.”
상단이라 불릴 정도의 규모가 되면 어디든 상련의 눈치를 보겠으나, 보부상 같은 개인은 상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애초에 이쪽의 보부상들은 이전부터 쭉 북부에서 활동해오던 이들이니, 갑자기 터전을 옮길 리도 없고.
다만, 문제는…….
“그 보부상들의 수와 규모가 확 늘었다. 본래 혼자서 움직이던 녀석들인데, 지금은 적게는 네댓에서 많게는 열까지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 그게 뭔가 문제가 되는 거야?”
“아무래도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니까.”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가끔은 아주 우연한 일인 경우도 있다만…….
‘적어도 이번은 아닐 테지.’
현재 북부에서 보이는 움직임은 말이 보부상이지 그 수와 규모는 지금 여느 상단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니까.
“……으음, 뭔가 어렵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는 보부상들의 틈에 끼어들어 저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만 파악하면 되니까.”
흑막의 정체만 밝혀낸다면 그 뒤는 어렵지 않을 테니까.
* * *
제도 뤼겐베르크, 상련 총회관(總會館).
“간부 회의라니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네.”
아세라리온의 당주, 예네프 아세라리온이 따분하다는 듯 기지개를 켠다.
그녀는 오늘 고액의 채무자를 만나 진지한 면담을 하려 했었다.
헌데 갑자기 간부 회의가 열리면서 이렇게 제도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돈이야 ‘어떻게든’ 받아낼 게 당연하지만, 거액이 걸린 이 건을 뒤로 미룬 채 이곳으로 불려오니 영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으휴, 진짜. 이놈의 연합. 딱히 도움 되는 것도 없는데 탈퇴해버리든가 해야지.”
남들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말에 마셰우스를 비롯한 몇몇 이들이 눈살을 찌푸린다.
이번 아이언포지의 일로 ‘상련의 체면이 구겨졌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뭐? 탈퇴? 당신은 이번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사안인 건지 모르는 건가!”
“흥. 고리(高利)로 편하게 돈놀이만 하는 아세라리온은 모를 만도 하지.”
“어이, 아저씨. 그 돈 놀음으로 상단 하나 망하게 만드는 거 보여줄까?”
그 말은 쉽게 나왔지만, 거기서 비롯된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불만으로 입술을 비죽였던 상인은 노기를 내비치면서도 강하게 대꾸하지 않는다.
아세라리온과 맞서 싸워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한편 연합끼리 드잡이질하는 게 싫었던 이들은 상황을 중재하며 화제를 바꾼다.
“우리 다 같이 돈 벌자고 모인 건데, 왜 우리끼리 싸우나.”
“대부분 모인 거 같은데, 슬슬 회의를 시작하자고.”
중론이 모이자 자리에 앉아있던 상인 하나가 대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번에 우리 상련은 아이언포지를 유치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로 인해, 몇몇 우리에 반하는 이들이 이를 가십거리로 삼고 있죠.”
간부들은 코웃음을 쳤다.
얘기를 꺼낸 상인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가 언급한 ‘반하는 이들’을 멸시한 거다.
“하찮은 무리엔 귀 기울일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상련에 들지 못한 잡상인들의 모임. 뭐라고 떠들어봐야 듣는 사람 하나 없을 테지.”
“어차피 그놈들 돈 받아먹고 기사 써주는 언론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상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그쪽에 대한 대응은 아무것도 않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반론은 없었고, 대체로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큰 문제가 아닌데 구태여 인력이나 자금을 투입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다음 의제입니다만…… 우리가 앞으로 북부를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의견을 나눴으면 합니다.”
북부(北部).
이게 상련의 간부들을 모은 이유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북부는 매력적인 시장이라고 생각한다. 거기는 물건이 없어서 못 사는 곳이지. 뭘 가져가든 어지간하면 죄다 팔릴 거야.”
“으음. 그렇지만요? 하지만 말이죠? 구매 욕구는 높은들, 소득 수준이 낮지 않습니까. 애초에 물건을 구매할 여력이 없단 말이지요.”
화폐 사용률도 개판이고요, 남자가 덧붙인다.
“내 생각에는 물물교환도 나쁘지 않은데. 거기 사냥꾼들이 설원 트롤 피를 취급한다면서?”
“그거라면 이미 아이율라의 계집애가 손을 써놨다. 뭐,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흐려지는 말끝에 다른 이가 입을 열었다.
“그놈이 있지. 류오넬의 아들.”
이번에 상련에 물을 먹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간.
덕분에 이곳에 소속된 이들 모두 그 이름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류리크의 얘기가 나오자 이제껏 조용하던 예네프가 입을 열었다.
“그래그래~ 류리크. 류리크 아스트레이. 나도 소문 들었는데, 걔 보통내기가 아니라더라~.”
페리사에게 들은 바가 있던 그녀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별생각 없이 북부에 들어갔다가 완전 털리기만 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 왜, 예전에 워프게이트 지었던 것도 홀랑 뺏겼잖아.”
“………….”
“3년 안에 극야가 온다는데, 그때 또 징발로 뭔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그녀의 말에 상인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하긴, 그건 또 그렇지.
—북부는 원래부터 말 안 통하던 곳이었는데, 3황자가 자리 잡으면서 더욱 심해졌잖아.
—심지어 그 아들이 상회 연다는데, 극야를 구실삼아 왕창 빼앗길 게 분명해!
그때였다.
“북부에 거점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모르셴코가 툭, 그런 의견을 던졌다.
“어차피 징발로 빼앗기는 건 북부에 한할 뿐이잖아. 그러니까 북부와 중앙의 접경지역에 거점 세워서, 거기까지만 상품을 옮기는 거지.”
그리되면 류리크와 마찰이 일어날 게 없다.
물건 가져와 그의 영역에서 파는 게 아니라, 그의 영역까지 물건을 가져다주는 것뿐이니까.
다만,
“그렇게 되면…… 결국 물건을 파는 건 류리크잖아?”
“우리는 수수료만 떼먹는 정도일 텐데, 그걸로 재미 보기 힘들지.”
그 정도로 만족할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상련에 발을 들일 수가 없다.
그들은 연합원의 것을 억지로 빼앗지 않을 뿐, 그 밖에는 가차 없이 빼앗는 게 기본이니까.
다만 모르셴코는 여전히 밍밍한 의견을 고집한다.
“시장이 북부 전체라면, 수수료만 떼먹어도 꽤 남는 장사일 거 같은데.”
그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직접 물건을 파는 것보단 못하겠지만, 북부라는 넓은 시장에서 수수료만 떼먹어도 꽤 쏠쏠한 장사가 될 테니까.
상인들이 저마다의 주판들 두들기기 시작하자 모르셴코가 슬쩍 말한다.
“뭐, 그런데 이 거래를 하려면 어쨌든 류리크와 얘기는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거야 뭐…….”
“끄응. 아이언포지로 투닥거린 게 있어서…….”
앓는 소리를 내며 서로서로 눈치를 본다.
어차피 회의에 거론된 이상, 수수료든 거래든 혼자 독식할 순 없을 터다.
그러니 여기서 나서면 고생만 하고, 남들 입에 밥숟가락 떠 먹여주는 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나 류리크와 관계가 불편한 지금이기에 더욱 직접 담판 짓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러면 내가 류리크와 얘기를 해보겠네.”
모르셴코가 말한다.
“독식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들 하고, 딱 녀석의 의중과 조건만 확인해 보겠어. 혹시…… 나 대신 가고 싶은 사람 있나?”
이견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