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172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172화
172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페리사가 나간 지 10분 정도 되었을 즈음, 그녀와 함께 가문의 당주가 직접 행차했다.
“세상에 바타체스의 말석 따위가 당주를 오라 가라 하다니, 아세라리온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네.”
허리를 넘어 둔부까지 치렁거리는 백금발의 머리칼. 연회용이라고 하기엔 독특하고, 평상복이라고 하기엔 과한 드레스.
그리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가라앉은 금안(金眼)의 눈동자.
—예네프 마드레이 폰 셰리나카 아세라리온.
그녀는 이 세상 모든 권태와 지루함을 몸에 인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말한다.
“정말, 귀찮아 죽겠어.”
말은 그렇게 하나, 그 내리(內裏)에서는 ‘상인의 눈’으로 이쪽을 잡아먹을 듯 관찰하고 있을 터.
본의 아니게 시험대에 오른 나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능숙하게 대처한다.
“어서 오게, 당주.”
“소문으로 듣긴 했는데, 너 정말 말하는 꼬라지가 황족 그 자체구나?”
“칭찬으로 듣겠네.”
“분명 뻔뻔하게 구는 건데도, 그게 자연스러워. 역시 잘생겨서 그런가?”
난데없는 칭찬은 아니었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으니까.
“얼굴 괜찮고, 키도 크고, 배경 좋고, 눈치도 꽤 있는 거 같고…….”
“………….”
“우리 딸이랑 결혼할래?”
초면부터 참 별소리를 다 하는군.
내가 그런 불만을 입에 담기도 전에 페리사가 시뻘겋게 얼굴을 물들이며 소리쳤다.
“어, 어머니?!”
“왜~ 너도 예전에 말했잖아. 그 쟁쟁한 소문의 거포랑 한번 놀아보고 싶다고.”
“어어어어, 어머니니닛?! 그그극 그건!”
샤프란에 있을 때는 그야말로 유능한 정보상이자 뛰어난 수완가였던 페리사이다만…… 제 어머니 앞에서는 한없이 무른 인간이 되어버린다.
꽤 볼만한 광경이었다.
나는 홍당무 같이 익어버린 페리사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농담은 그 정도로 하지.”
“잘생긴 학생. 나는 농담 아닌데?”
“본인에게는 이미 연인이 있다만.”
“어차피 그거 ‘진짜’는 아니잖니?”
아주 노골적으로 말을 내뱉었지만, 확신일 리 없다.
그저 낚싯대를 드리우듯 적당히 미끼를 던지는 것뿐일 터.
나는 의도적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말한다.
“그 발언은 본인의 연인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말이라 생각한다만.”
레베카가 들으면 심기가 불편할 거다, 그 말을 돌려서 표현했다.
다만 예네프는 나름 우아한(?) 제스처를 취하며 말한다.
“어머 어머, 그러면 혹시~ 나는 어떠니?”
“………….”
예네프의 외견은 20대 후반의 아름다운 미인이고, 게임에서도 엄연히 공략 가능한 캐릭터 중 하나이다만.
“다시 말하지만, 농담은 그 정도로 하지.”
“그것도 아니라면 돈이라도 빌리든가~.”
그래.
그녀의 진의는 여기에 있다.
결혼이니 뭐니 하는 건 반쯤 장난으로 던지는 말들.
그녀가 진정하고 싶었던 말은 돈을 빌리라는 것일 테니까.
“1,000만 리브라. 네가 무슨 얘기를 하든 시작은 여기서부터란다. 잘생긴 학생.”
페리사도 그렇지만, 아세라리온의 누군가와 얘기할 땐 ‘대출’이 기본이다.
그걸 시작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거절하지.”
그것은 독이 든 성배.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2,000만 리브라.”
“액수는 상관없다.”
“3,000만 리브라.”
“내키지 않는군.”
“5,000만 리브라.”
“글쎄.”
내가 5,000만이라는 금액에도 덤덤하게 받아치자, 예네프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금액이 튀어나왔다.
“1억 리브라.”
“………….”
한화로 환산하자면 1,000억가량 되는 금액.
금액이 이렇게 치솟으니 살짝 혹하는 기분이 들었다.
독이든 성배라고는 해도, 이건 성배의 황금만 긁어 팔아도 팔자 고칠 수준이었으니까.
나는 농지거리를 던지듯, 은근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1억이라면, 나쁘지 않군.”
“학생. 진심?”
“대충 질러본 금액이었나.”
“그래. 마지막은 농담이란다. 아무리 전도유망하다 해도, 이실리엔도 아닌 인간에게 1억은 아니지.”
예네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 참, 누구는 돈 빌리고 싶어서 발가락도 핥는 세상에. 돈 빌려준다는데도 마다한다니.”
“1,000만 리브라면 이자만으로 살림이 거덜 날 터이다만.”
“무이자라면 받을 거고?”
“그건 더욱 큰 문제이지.”
차라리 고율의 이자를 내는 편이 신상에 이롭다.
아세라리온에서 가장 주의할 건 ‘무이자 대출’이니까.
“그대들은 이자 대신 다른 것을 바랄 테니까.”
아세라리온의 힘은 돈(金), 그 자체이다.
그들은 뇌물을 빙자한 무이자 대출을 해주고, 그 대가로 채무자들의 이름과 권세를 빌린다.
제국을 비롯해 이 세계 곳곳에 그 채무자들이 널려 있다.
급전이 필요했던 상인은 물론, 유력한 정치인, 이름난 용병단, 혹은 군권을 거머쥔 장수들까지.
농담 아니라, 그들을 하나로 합친다면 국가(國家)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이다.
“어머 어머. 아직 어린 나이인데, 그런 것도 알고 있니?”
그리고 이 자가 상련의 귀이자, 눈이며, 검이 될 수 있는…… 아세라리온의 수좌(首座).
“아, 정말 탐나는데.”
예네프 마드레이 폰 셰리나카 아세라리온이다.
* * *
내가 연이어 대출에 관한 얘기를 모른 척 넘기자, 예네프도 곧 포기한 듯 더 따져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겨우내 밀수에 대한 본론으로 진입한 것이었다……만.
전모를 듣고 난 예네프의 표정은 그닥 밝지 않았다.
“그러니까, 북부에서 보석을 밀매하는 간 큰 상인이 있다…… 정보는 그게 끝인 거니?”
“그렇다네.”
“아니, 정말로 그게 끝이라고?”
그녀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고작 그 얘기를 하기 위해 나를 부른 거고?”
“무시할 만한 정보는 아니라 생각해서 말이지.”
“………….”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예네프 안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실시간으로 수직 낙하하는 게 느껴졌다.
“이름이나 물증이 없다면, 딱~히 쓸모없는 정보인데. 이런 걸 값 쳐준다고 해봐야…….”
“돈은 받지 않을 걸세.”
“으응. 뭐, 줘봐야 차비 정도나 챙겨줄 생각이었으니까.”
흥이 식었다는 듯 예네프가 몸을 돌렸다.
물론 이대로 보낼 생각은 없었다.
“대신 대가로 정보를 요구하고자 하네.”
“뭐?”
어쭈? 요놈 봐라? 예네프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친다.
“후후. 그래 들어나 보자. 무슨 정보가 알고 싶은 거니?”
“현재 북부에서 밀매를 벌이는 상인의 이름. 그것을 알려주면 된다네.”
뒤에 서 있던 페리사가 입을 떡 벌렸다.
평소와 다르게 쉽게 쉽게 기복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썩 유쾌했다. 그리고 예네프의 표정은 한술 더 떠, 아주 흥미진진한 쇼를 보듯 이쪽을 바라본다.
“학생, 정~말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
“그런가?”
“그건 정보를 파는 게 아니라, 알려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도 볼 수 있지.”
“그러면 차라리, 처음부터 북부에서 밀매하는 상인의 이름을 알려달라 하지 그랬니?”
그 말이 맞다. 하지만,
“그리 말했다면, 지금 내 앞에 자네가 없었겠지.”
“………….”
요루아의 이름을 빌려 아세라리온의 정문을 돌파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요루아라한들 예네프를 불러낼 수는 없었다.
—후움. 어머니는 바빠서 나올 수가 없는데, 나한테 얘기하면 된다뇽!
페리사도 그를 당연하다는 듯 거절했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페리사에게 ‘북부에서 밀수를 벌이는 상인의 이름을 알려달라.’라고 묻는다면…… 과연 예네프가 직접 나를 보러 왔을까?
“잘생긴 학생…… 듣던 대로, 정말 ‘나쁜’ 남자네.”
내가 북부에서 밀매를 벌이는 상인이 있다는 정보를 내뱉었으니 예네프의 입장에서는 확인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내가 범인의 정체를 파악했는지.
알아냈다면, 그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지.
그것이 혹시 상련을 위험에 몰아넣을 가능성이 있는지.
다만 그건 모두 예네프의 착각.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묻기 위해 여기까지 끌어낸 것뿐이었다.
“하여 그 이름은 누구인가.”
“어머, 잘생긴 학생. 나는 학생이 그걸 알려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전~혀 짚이는 구석이 없거든, 예네프가 생글생글 웃는다.
“이해하네. 상련은 서로가 서로의 이권을 침해하지 않고, 위기에는 서로 돕기에 존속될 수 있는 것이니까.”
“………….”
“허나, 약해진 연합원의 이권을 먹어 치우는 것도 상련이지 않던가.”
상인이란 무릇, 물욕(物慾)이라는 채워지지 않은 굶주림을 안고 사는 존재이다.
당연, 빼앗을 기회가 있다면 얼마든지 짐승으로 변해 그를 탐할 수 있다.
“글쎄? 나한테는 도무지 이득이랄 게 보이지 않는데.”
“과연 그럴까?”
나는 말한다.
“범이 이빨을 드러내지 않으면, 혹자들은 그가 여우인 줄 착각한다네.”
* * *
예네프 아세라리온은 생각한다.
—뭐? 탈퇴? 당신은 이번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사안인 건지 모르는 건가!
—흥. 고리(高利)로 편하게 돈놀이만 하는 아세라리온은 모를 만도 하지.
직전에 있던 간부 회의에서 그런 망발을 꺼내던 놈들이 있었다.
감히.
아세라리온에 대해 그런 망발을 내뱉는 것들이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니? 학생.”
눈앞의 남자는 그 광경을 직접 보기라도 한 듯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혹시, 근래 다른 연합원들이 아세라리온을 여우로 보고 있지 않던가?”
“어머 어머, 그건 나한테 정말 실례되는 말 같은데.”
예네프는 도리어 겁박하듯, 약간의 위협을 담아 그리 말했지만.
남자는 끄떡없이 당돌하게 제 할 말을 이어간다.
“지금의 상련은 제국 내에서 금력으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요새를 만들었지. 그리고 거기엔 아세라리온의 공이 아주 크다고 생각하네.”
“학생. 갑자기 칭찬해봐야 아~무것도 안 나와.”
남자가 묘하게 심기를 건드리긴 했어도, 고작 이런 것에 흔들릴 그녀가 아니다.
이런 같잖은 요설에 흔들려 다른 연합원의 뒤통수를 칠 생각 따위 조금도 없다.
‘마음에 안 들어도, 연합은 연합. 그걸 깨트릴 생각은 없으니까.’
남자가 말한다.
“나도, 그대도 알고 있을 터다. 상련이 어찌하여 만들어졌는지.”
“어머 갑자기 역사 공부?”
“법은 멀고, 목에 닿은 칼은 가깝다. 먼 옛날, 상인은 빼앗기는 피식자(被食者)였지.”
“그런 재미없는 얘기만 계속할 거라면 돌아갈…….”
“잠자코 들어라. 예네프.”
감히.
건방지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는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머릿속에 되뇐다.
마치 진짜 황족을 알현했을 때처럼, 그 짧은 한마디에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있다.
“도적들에겐 약탈당하고, 영주들에겐 수탈당하고…… 칼을 쥔 이들의 횡포에 힘없는 상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래.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합쳤단다.”
이상하게 조급해진다.
그냥 무시하고 가버리면 될 텐데.
하여 예네프는 빨리 이 대화를 끝내고자 말을 서둘렀다.
“제국의 막대한 부를 독점하자,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힘을 합친 것이었지. 그런데…… 그게 이 대화에 무슨 상관이 있는 거니?”
“힘을 합치긴 했다만, 거기서 다른 연합원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
“다른 이들이 황금에 눈이 멀어 돈 한 푼을 더 벌지 궁리할 때, 그대들은 상련의 미래를 걱정했다.”
“………….”
“그대들은 유력한 정치인을, 강력한 무장들을, 이름 높은 마법사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였지.”
아세라리온의 채무자들.
대출이라는 미명하에 거액의 뇌물을 건네받은 제국 각지의 유지들.
그들을 곁에 두게 된 상련은 더 이상 빼앗기는 피식자가 아니었다.
“그때부터 상황이 달라졌지. 도적들이 건드리면 기사단이 나서 쓸어버리고, 핍박하는 영주가 있다면 중앙의 권력자가 그를 좌천시켰으니까.”
“그게 전부 아세라리온의 공이다?”
“아니라고 생각하나?”
예네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류리크가 말한 그것이 아세라리온의 역사(歷史), 그 자체이니까.
“그렇지만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온다니까?”
“다시 말하지만, 범이 이빨을 드러내지 않으면 혹자들은 여우인 줄 착각한다네.”
“………….”
“아세라리온의 영향력은 지금에서도 분명하다.”
채무자들을 이용해 상련의 권익을 지킨다.
거기에 고리(高利)이긴 하나, 자금이 떨어진 연합원에게 급한 자금을 안정적으로 융통시켜 준다.
자금난에 시달려 금고에서도 대출을 거절당한 상단을 몇이나 살려냈던가.
“헌데 지금의 몇몇 상인들은, 그 아세라리온의 비호가 너무도 당연한 건 줄 알아. 은혜를 모르고, 감사를 모르고 헛소리들을 지껄이지.”
“내가 그런 말에 휘둘릴 거라 생각했다면…….”
“이건 배신 같은 시시한 일이 아니라네. 이건 뭐랄까…… 일종의 교육이지.”
남자의 눈이 빛난다.
이전과 같은 위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흔하디흔한 탐욕도 아니었다.
홀연히 스미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예네프의 귀를 간질인다.
“너희들의 누리는 그 당연한 것은, 아세라리온의 비호가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알려주는 교육.”
너희들이 도적에게 약탈당하지 않는 것은,
너희들이 영주들에게 교역품을 수탈당하지 않는 건,
너희들이 마음 편히 배때지에 금칠을 하는 건.
“……모두 아세라리온의 덕이다.”
어느샌가 남자는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잡고 몸을 낮추어 귓가에 속삭인다.
“검은 아스트레이가 휘두를 것이라네. 명분도 충분하지. 밀매를 일삼는 범법자를 단죄하는 것이니까.”
“………….”
“자네는 그저 방관하면 된다네. 그럴싸한 이유를 대면서 말이야.”
“………….”
“허면 상련의 이리떼는 죽어버린 동료의 사체를 뜯어먹으며 생각하겠지.”
남자가 눈으로 말한다.
—너는 나와 손을 잡기만 하면 된다. 예네프.
“아세라리온을 거스르면, 내가 그 시체가 될 수도 있겠구나……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