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25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25화
025
“지금… 뭐라 한 것이지?”
차갑다.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올린 감상이었다.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표정, 그녀의 태도… 그 모든 것들이 차갑다는 수식어 하나로 귀결된다.
하지만 서릿발처럼 시린 그것은 한편으로 흐림 없이 투명하고, 또 순수했다.
‘역시 아직은 어려서 그런 걸까.’
루시아사가에서 봐왔던 류미엘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웃으면서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캐릭터였다.
세계관을 통틀어 몇 없는 소리장도(笑裏藏刀) 특성을 보유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의 감정은, 최소한의 여과조차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하. 그래. 네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었겠지. 아니, 내가 잘못 들은….”
“너를 대신해, 내가 아스트레이의 당주가 되겠다 말하였다.”
“…미친 건가?”
“본인은 무척이나 냉정하고, 침착한 상태다만.”
잠시 풀어졌던 류미엘의 얼굴이 다시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전보다 깊고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날이 저물었다고는 하나 완연한 봄이 찾아왔건만, 그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빌어먹을 오라비를 운운하며 따져 들던 당돌한 입술이 멈췄다.
“…………….”
“…………….”
미묘한 침묵이 이어지기를 10여 초, 류미엘이 마침내 아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것이로고.”
“그런가?”
“오라비여, 너는 지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라고 생각하나?”
물론.
류미엘의 등장은 예정에 없던 것이지만, 짧은 시간 동안 이 뒤에 벌어질 수많은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리고 거기엔 내가 아스트레이의 당주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거기서 비롯될 수많은 메리트, 디메리트까지 대략적으로 계산했다.
그 결과, 내가 아스트레이의 당주가 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아스트레이의 망나니, 그게 네 현실이다. 빌어먹을 오라비여.”
“나에 대한 보고라면 계속 듣고 있지 않았던가. 파르넨 시어의 경매장에서 꽤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나름 제국 3대 경매장에 손꼽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자리엔 나름 명망 있는 귀족들이 모였었다.
호사가로 유명한 오를레앙 공작부인도 있었고 말이지.
“그 허무맹랑한 소문은 사교계에서 반나절도 돌지 못하고 묻혔다. 그리고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그 약수병을 낙찰받은 유르겐 백작이 땅을 치고 후회했다더군.”
…오를레앙 공작 부인, 본인은 무척이나 실망했다.
아무래도 경매장에서의 쇼맨쉽은 안타깝게도 좋은 효과를 내지 못한 모양이다.
“네 평판은 지금도 바닥을 기고 있다. 그리고 샤프란에서도 별로 좋은 이미지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제 첫 수업을 들은 것뿐이다. 편견은 차차 해소해 나갈 문제지.”
“유감스럽게도 오라비에게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류미엘은 두통이라도 일었는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누른다. 그러면서 아예 돌아설 듯한 태도를 취한다.
나는 그녀를 붙잡듯 툭 말을 내뱉었다.
“요컨대, 네 말은 이런 것이지. 망나니인 류리크는 아스트레이의 당주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허! 네 주제를 안다면….”
“그런데… 다른 가신들도 그리 생각할까?”
류미엘은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억지로 맡게 된 당주 대리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최선은, 결국 최선일 뿐이다.
“무슨… 소리냐.”
“주도 할카데르의 내정은 어느 정도 다잡았겠지. 너를 지지하는 이들도 꽤 많을 테야. 하지만 아스트레이 공작령은 할카데르 하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어리숙한 신입사원에게 짬 때리듯 넘긴 프로젝트. 신입이 눈 시뻘겋게 밤을 새가며 PPT를 만들었다 한들, 그게 어디 임원진들 눈에 찰까.
여기서의 최선이라는 것은 결국 ‘나는 최선을 다했다.’라는 자기 위로밖에 되질 않는다.
“북부의 변경백들을 필두로, 동맹 세력이나 요새 도시의 군장들은 너를 마뜩잖게 여긴다지.”
“헛소리!”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망나니 류리크’라는 말 자체를 믿지 않을 정도라던데.”
류리크가 주로 망나니짓을 했던 건, 제도 근처의 위성도시 위르겐하이. 북방과는 거리가 멀다. 하물며 북방의 군장들은 지박령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족속들이라 눈과 귀가 어두운 편이기도 하고.
“계승 서열이 높은 내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이유로 정통파가 반발한다. 변변한 기사 훈장 하나 없는 이가 어찌 당주가 될 수 있냐며 무투파가 반발한다. 거기에 몇몇 박쥐 같은 놈들은 망나니인 나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자기들이 권력을 갖길 바라지.”
그것이 현재 아스트레이의 현실이었다.
류미엘이 아무리 노력해 봤자, 그녀를 고깝게 여기는 무리는 존재한다. 몇몇은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그리고 몇몇은 자신의 실리를 좇아서.
“………….”
“다시 한번 묻겠네만, 아스트레이의 가신들 모두가 류리크 당주를 거부할까.”
아니다.
그 때문에 아스트레이의 분열이라는 대형 이벤트가 발생하고, 그 때문에 류미엘은 류리크를 죽이게 된다.
“류미엘, 나의 누이여. 지금부터 본인의 계획을 말해주겠네. 만일 이 자리에서 내가 위르겐하이로 돌아가게 된다면, 즉시 내게 우호적인 가신들과 접촉할 것이네. 그리고 네게 비협조적인 세력들을 규합해 본격적인 ‘후계자 전쟁’에 돌입할 생각이라네. 어떤가?”
“이 미친 자식이…!”
“아버지는 방관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기뻐하겠지. 더 뛰어난 이가 아스트레이를 다스릴 거라 여기며 말이야.”
사자가 절벽에서 새끼를 떨어뜨리듯, 류오넬의 교육 방침이 그러하다. 시련에 밀어 넣고, 극복해 내면 성공한 것이고, 아니면 그만인 것.
아버지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런 태도를 취할 터.
물론,
‘가만히 내버려 뒀을 때, 류미엘은 결국 당주가 되긴 한다. 점점 성장하면서 반발하는 세력들도 제압하고, 나름 괜찮은 당주가 되지. 하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당장의 눈앞에 있는 문제들이 많아 거기까지 고려하진 않았었지만,
‘아스트레이의 당주… 탐나는 직업이지.’
이 세계에는 수많은 직업들이 존재한다.
여기엔 단순히 마법사, 기사, 조각가 같은 직업뿐 아니라 ‘마법 대학 학부생’ ‘대장간 아르바이트생’ ‘모험 조합 접수원’ 같은 종류의 직업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직업들은 복수로 가질 수 있고, 그 직업들에는 저마다 ‘직업 보너스’라는 것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마법 대학 학부생’. 단순히 갖는 것만으로도 마법 수련에 메리트를 주는 괜찮은 직업이다.
이렇듯 단순한 대학 학부생이라는 직업이 이럴진데, ‘공작’이며 ‘아스트레이’를 지배하는 당주가 된다면 어떨까.
“이제 와 당주가 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건….”
“포기했으면서! 도망쳤으면서! 왜… 왜 이제 와서…!”
아스트레이를 포함해, 어느 정도 급이 되는 가문의 ‘직업’은 가문의 금언(金言)과 관련된 직업 보너스를 가진다.
―마스체니의 심장은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화할지니.
화염 계통 마법에 상당한 어드밴티지를 제공하며, 생애 단 한 번, 죽음을 거스르고 일정 시간 활동할 수 있는 마스체니의 직업 보너스.
―아이율라의 저울은 반드시 기울어 있다.
화술과 협상에 대한 어드밴티지를 제공하며, 어떤 식으로든 유리한 무언가를 얻어내게끔 만드는 직업 보너스.
‘그리고 아스트레이의 금언은, 제국의 모든 가문을 통틀어 전투 계열에 한해 최상(最上)의 직업 보너스를 자랑한다.’
특히 당주는 다른 직업들보다 더 좋은 효과를 누리고, 그 밖의 특권들이 수도 없이 많기에. 그 자리를 노리는 것이다만… 이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류미엘이 예상치 못했을 이유를 제시했다.
“너를 위해서다.”
“뭐… 라고?”
순간적으로 류미엘의 얼굴이 순수한 혐오와 경멸로 일그러진다. 나는 그 부의 감정을 전혀 내색치 않는 양,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앞서 말했었지. 류네온은 네가 당주 대리를 맡은 것 때문에, 늘 마음의 빚을 지니고 있다고. 지금에서도 그것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그게 왜….”
“나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네게 말했었지. 그저 미안하다고. 그건… 너를 보자마자 떠올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던 내 솔직한 진심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새삼 내가 참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걸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자각하는 것과 별개로 내 혀는, 쉬지 않고 거짓을 늘어놓는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예의 ‘그 사고’를 겪은 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검은 제대로 쥐지도 못하고, 마법도 쓸 수 없었다. 심지어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지.”
사실은 지금도 ‘그 사고’의 전말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것을, 심지어 리아조차도 잘 모르는 그것을… 류미엘이 알 리가 없기에.
나는 적당한 날조와 그럴싸한 거짓을 뒤섞어 내뱉는다.
“그 때문에 가문에서 도망쳤고, 너에게 당주라는 짐을 떠넘기게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집을 떠나온 그 날부터,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다.”
“………….”
“오히려 그것이 너무 괴로워서 잊고 싶을 정도였다. 약에 취하면 너에 대한 죄책감을 잊을 수 있을까, 술에 취하면 너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 있을까…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
“거짓… 말…!”
떨리는 목소리. 울먹임. 붉게 달아오른 피부… 그녀는 이미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류미엘. 나는 진심으로, 너를 생각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지금이 류미엘과 담판을 짓기 위한 가장 적절한 순간이었다.
일단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셋.
―류미엘은 애당초 아스트레이의 당주가 되고 싶지 않았었다.
―나는 아스트레이이며, 동시에 바타체스의 피를 잇고 있다.
―나는 류미엘보다 계승 서열이 높고, 미약하게나마 지지 세력이 있다.
여기에 이 시점에서 내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조건이 둘.
―이 시점의 반(反) 류미엘파는 꽤 규모가 있는 편이다.
―이 시점의 류미엘은 아직 당주 대리에 능숙하지 않아 많은 고배를 마시고 있다.
그리고,
‘…이 시점의 류미엘은 아직 18살의 소녀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는 이 어리숙한 소녀는, 이제 겨우 18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선 나는, 이 세계를 수백 번 반복해온 괴물.
애초에 승부가 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제 와…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라비여, 이미 늦었다.”
“아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네가 처음부터 당주를 맡으려 했다면 괜찮았겠지만…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은 ‘후계자 전쟁’을 일으킬 뿐이다. 우리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아버지가, 그리고 가신들이 그리 두지 않을 터다.”
처음에는 협상의 여지조차 없이 강경하게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사족이 붙어 있는 부정형.
그녀의 마음은 이미 흔들렸고, 그럴싸한 먹이만 던져준다면… 망설임 없이 덥석 물으리라.
“우리가 후계자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당주를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첫 번째 방법은, 내가 가신들 모두 납득할 수 있는 당주로서의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다.”
류미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대외적인 당주 대리는 네가 계속하되, 복잡하고 어려운 사안은 내가 해결한다. 이번 광산 인수 건처럼 애먹는 것들 말이지.”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난제들. 응당 당주가 해결하거나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일들. 그것들을 내가 대신하면서 당주가 되기 위한 업적을 쌓는 것이다.
“지혜가 필요할 때는 지혜를 내어줄 것이고, 힘이 필요할 때는 내가 직접 가서 해결하겠다.”
“지금부터라도 공적을 쌓겠다… 라는 것은 알겠다만, 그랬다간 너를 주목하는 가신들이 억지로라도 너를 당주로 추대할 것이다. 그때부터… 지독한 암투가 시작되겠지.”
“맞다. 그러니 내가 세우는 모든 공적은 네 것인 것처럼 알려라. 그러는 동안 나는 샤프란에서 엘베드 등위를 취득할 것이고, 기사로도 리테르 훈장을 수여 받을 것이다.”
여전히 류미엘은 잘 모르겠다는 눈치. 나는 차분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졸업하는 순간, 그동안 내가 가문을 위해 해왔던 일을 밝히고 당주가 될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
“가문을 위해 쌓은 치적이 있고, 엘베드 등위와 리테르 훈장을 둘 다 갖고 있다면… 누가 감히 내게 당주의 자격을 운운할 수 있을까. 거기에 네가 당주가 될 것을 포기한다 선언하면, 더 논할 것도 없지.”
어딘가 허술해 보이지만, 급조해낸 것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계획이다. 내가 류미엘 대신 가문의 일을 맡는다면, 가문에서 크게 문제 생길 것이 없을 테고, 나는 기회주의자들한테 휘둘리지 않은 채 조용히 학업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때 류미엘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오라비여, 거기엔 중대한 문제가 있다.”
“무슨 문제지?”
“내가… 모른 척할 수 있다. 네가 세운 공적들을 모두, 내 것이라도 말해 버릴 수도 있다.”
“상관없다. 그게 네 바람이라면.”
단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내 즉답이 의외였던 것일까. 류미엘은 저도 모르게 놀라, 작게 입을 벌린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자상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이건 모두 너를 위해서 시작한 일이다. 네가 진정 당주가 되길 바란다면, 나는 미련 없이 포기할 것이다.”
“그, 그러니까… 너는… 진짜로 나를 위해서….”
류미엘이 나를 배신하고 당주가 될 가능성?
단언컨대 그럴 확률은 감히 0에 수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더욱 뻔뻔하게 나갈 수 있었다.
“바란다면 한 번 더 말해주겠다. 이건 모두 너를 위해서 시작한 일이다. 네가 진정 당주가 되길 바란다면….”
그때 류미엘이 얼굴을 숨기는 고개를 약간 돌리며 말했다.
“허, 허황된 계획이다! 너는 마치 네가 모든 걸 당연히 해낼 것처럼 말하지만, 일을 실패하거나, 리테르의 훈장을 수여 받지 못한다면…!”
“거기서 두 번째 방법이 나온다.”
지금 그녀의 감정 상태로는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는 얘기.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떨림이 멎을 무렵 입을 열었다.
“내가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못할 시, 혹은 엘베드 등위를 취득하지 못할 경우, 혹은 리테르 훈장을 수여 받지 못할 경우, 또 기타 당주가 되기에 부적절한 사유가 발생할 경우… 제국에서 영영 사라지겠다.”
“그게… 무슨 소리냐!”
사라진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던 걸까. 이전과 다르게 류미엘의 목소리가 노기가 맺혀 있다.
나는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후계자 전쟁이라는 것은, 후계자가 결국 여럿이기에 발생하는 문제지. 내가 떠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류네온은 수호기사가 되면서 아스트레이와 연관될 수 있는 여지 자체가 끊어졌고, 류아라는 가문과 관련된 모든 자산마저 정리한 뒤에 독립을 했다. 의지도 완강할뿐더러, 바타체스의 이름마저 버렸으니 억지로 추대할 수도 없지.”
그러니.
“애매하게나마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나만 없어지면, 다른 가신들이 뭐라 하던 네가 당주가 된다는 것이다.”
“…………….”
다른 점이라면, 내가 없을 테니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아스트레이를 장악할 수 있다는 정도.
친절하게 메리트까지 설명해주었지만 류미엘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위로하고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것이 네 짐을 덜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겠지.”
물론, 거짓말이지만.
* * *
―류리크 씨의 동생이 온 거, 나 때문이야?
―아니다.
―역시… 나 때문인 거지?
―나는 분명 아니라고 했는데, 너는 왜 반대로 알아듣는 것이냐.
―그러면… 무슨 얘기 했는지 물어봐도 돼?
―별거 아니다. 류미엘을 대신해 내가 아스트레이의 당주가 되기로 했다.
―에에엑?!
류미엘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개인적으로도, 아스트레이라는 가문의 입장에서도 거절할 이유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물론 앞으로 고생할 것들이 더 늘어난 셈이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나는 쓰게 웃었다.
어느덧 캄캄한 밤이었다.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었고, 류미엘과의 대화까지 있었기에 예상보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저택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제도의 야시장도 불을 꺼뜨린 늦은 밤, 아직 불 밝은 저택은 어딘가 포근한 감상을 안겨준다.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기에 몸도 마음도 무척이나 피로했다. 특히 류미엘의 등장 때문에 머리가 과도하게 움직였다.
휴식이 절실했다… 만, 유감스럽게도 이 저택은 스위트홈이 아니라지.
“돌아오셨습니까. 류리크 님.”
주름 하나 없이 매끄럽게 펴져 있는 집사복, 흠집 하나 없이 곧게 서 있는 레이피어, 윤기 나는 단발머리….
“무척 오랜만에 해후하는 듯하구나. 리아.”
푸르스름한 달빛이 내려앉은 정원은, 여기저기 쌓여 있는 짐으로 가득하다. 아마 류미엘이 집을 비우라고 했기에, 저택을 정리하며 생긴 것들.
리아의 눈은 아무런 흔들림 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돌연 장난기가 돌았다.
“예정보다 귀가가 조금 늦기는 했다만, 이 짐들은 무엇인고?”
“이것들은….”
“허어, 설마 자네 정도 되는 능력자가, 본인이 류미엘을 설득하는 건 예측하지 못했는고?”
“류리크 님의 짐을 정리하라는 류미엘 님의 명령에 따른 것뿐입니다.”
그게 그거지, 내가 1승을 챙겼다는 도취감에 흠뻑 젖자니, 돌연 리아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물론 소인은 류리크 님이 돌아오실 것을 알았기에, 제 자신의 짐은 하나도 꾸리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류리크 님의 물건들은 모두 우정국에 맡긴 터라, 오늘은 이불 하나 없으실 겁니다.”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슬슬 밀려오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정원에 쌓여 있는 짐들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것들은….”
“저건 시종들의 짐입니다. 류리크 님의 물건은 단 하나도 없지요.”
이런 악랄한!
내가 돌아올 걸 알면서도 일부러 이런 일을 꾸몄단 말인가!
“…아참, 이불의 대여료는 하루에 200리브라라는 합리적인 가격에 모시고 있습니다.”
“악독해… 너는 정말로 악독한 인간이다!”
“더없이 아름다운 극찬, 감사합니다.”
뭔가 이상하다. 뭔가 잘못되었다.
원래 이렇게 성격 나쁜… 나쁜 건 맞지만, 이렇게 악독… 한 것도 맞지만… 뭔가 이런 느낌의 캐릭터는 아니었는데!
“농담입니다. 류리크 님의 침상은 그대로입니다.”
“………….”
“우정국에 짐을 맡긴 것도, 영업시간 직전에 보낸 것이라 위르겐하이로 보내진 않았습니다. 내일 하교하시기 전에는 모두 저택에 돌려놓을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
리아가 내 적이 아니라서,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 걱정했다.
‘나 때문에 리아 성격이 꼬여서… 나중에 문제되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