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26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26화
026
새벽부터 산들하게 내린 봄비는 아침까지 계속 이어졌다. 얇은 빗방울이 새초롬한 잎새에 맞아떨어지고, 조그맣게 인 웅덩이 안에는 빗방울이 무수한 파문을 일으킨다.
그런 풍광을 바라보며, 나와 실비아는 등굣길에 올랐다.
“………….”
“………….”
가도를 달려가는 차량의 안.
실비아와 나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왜 그리 우울한 얼굴이냐.”
결국, 내가 먼저 운을 뗐다.
매일매일 다사다난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긴 하다만, 실비아의 표정이 어제보다 어두웠으니까. 가만히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리아가 그렇게 심하게 괴롭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리아는 현재 자신의 실력을 숨기며, 누구에게나 선을 지키고 살아간다.
굳이 친하게 다가서지도, 굳이 거리를 두게도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시종들도 리아를 어려워하면서도, 어느 한편으로는 의지하는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
‘실비아도 대충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제는 그냥 넘겼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리아가 너무 괴롭힌다고 하면, 둘을 떨어뜨려 놓든지 내 곁에 둘 필요가 있을 터.
나는 리아를 어떻게 설득할까 고민하는데….
“아니, 그냥… 미안해서.”
“나 몰래 빚이라도 졌나?”
“아니, 그냥… 이것저것 다 미안해서….”
실비아의 태도가 어딘가 마음에 걸린다. 저건 누군가 괴롭혔을 때 우울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괴감’에 가까운 기색.
나는 대충 눈치껏 말을 던졌다.
“어제의 일 때문에 그러나?”
분명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어딘가 신경 쓰는 모양새 같았는데… 아직 마음에 담아 놓은 모양이다.
“샤르미넨 총장님 때도 그렇고, 류리크 씨의 동생도 그렇고… 내가 반즈인 것 때문에 너무… 우웃!”
콩, 나는 실비아의 정수리를 가볍게 내리찍었다.
“뭐, 뭐야! 류리크 씨! 왜 정수리를 때려?!”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쓰, 쓸데없다니… 내가 지금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을…!”
그런 거에 진지하게 임한다는 것부터 쓸데없다는 거다.
세상에 스트레스받을 일은 많고, 그중 대부분이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이다.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업보 같은 거란 말이다.
애초에 그걸 진지하게 ‘해결’하려고 하는 접근법부터가 잘못된 거다.
‘악플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고 세상 오만 악플러들을 다 감옥에 처넣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
그럴 때는 차라리 모른 척 넘기고, 자기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맞다만… 이런 식으로 위를 했다간 조금도 도움이 안 될 테니, 나는 말을 꾸며냈다.
“너는 내가 어떤 인간인 것 같은가.”
“존나게 계산적이고, 지 잘난 맛에 사는… 헛!”
“…뭐, 됐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기대하던 내용이었기에 그대로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
“무척이나 계산적이고, 냉철하며, 매사에 빈틈을 보이지 않는 철두철미한 남자… 그게 바로 본인이며, 그런 게 류리크다. 그리고 그런 인간이 너를 두둔하는 것이다.”
“…나한테 뜯어먹을 게 있으니까 내 편을 들어준다는….”
“표현이 저렴하다만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여러 차례 말했지만, 너는 너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
실비아라는 캐릭터에 대한 데이터가 많지 않아 심리를 깊게 파악할 순 없다. 하지만 아는 것도 있었다.
콤플렉스 같은 트리거만 해결된다면, 위르겐하이 도박장에서 ‘대장’ 노릇 하는 실비아가 될 수 있다는 것.
“정 마음이 무겁다면, 네가 할 일은 하나다.”
콩, 다시 한번 실비아의 정수리를 쥐어박으며 말을 이었다.
“내 말 좀 잘 들어라.”
실비아는 울상을 지으며 정수리를 부여잡았다.
“마, 말을 잘 들으라니.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
“나 대신 일 하라고 하면 군말 없이 일하고, 돈 좀 꿔 달라면 잘 꿔주고, 과제도 대신해 주고, 배고플 때는 대신 빵도 사 오고… 가만 보니 네가 할 일이 꽤 많군.”
“아니… 류리크 씨? 우리 뭔가 깊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는 거 같은데요…!”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으니 조금 표정이 풀린 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엔 무언가의 응어리가 남아 있을 터.
‘감정이라는 게 원래 바로바로 바뀌는 건 아니지.’
그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인간은 극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아마 실비아도 내 말 한마디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진 못할 터다.
하지만 차차 달라지면 될 일이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어느새 차량에서 내리자니 어느덧 비가 그쳐 있었다. 흐리던 날이 개고, 구름 사이로 내리는 햇살이 산들바람을 몰고 오는 완연한 봄의 날씨.
나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부터 그런 표정을 지으면 정수리로 혼날 거다.”
“아, 아니! 잠깐만! 류리크 씨! 우리 인권에 관한 얘기를 조금 나눠 볼 필요가…!”
* * *
―오늘부터 그런 표정을 지으면 정수리로 혼날 거다.
―아, 아니! 잠깐만! 류리크 씨! 우리 인권에 관한 얘기를 조금 나눠 볼 필요가…!
민머리 보이즈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리는 기숙사에 살면서도 아침 일찍 신전에 가서 ‘자라나라머리머리’ 기도를 드리고 오는데…!”
“저 자식은 대낮부터 여자애와 꽁냥거리다니!”
그들의 분노는 비단 자신들의 비어버린 모근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류리크라는 남자는, 그야말로 모든 게 하나하나 다 거슬렸다.
“아, 맞다. 신전에서 탈모 샴푸도 사야 했는데… 깜빡했어!”
“오늘은 내 거 빌려줄게. 내일 기도드리러 갈 때 사자.”
“그래. 내일도 기도드리러 가야 하니… 까아….”
후우, 누구랄 것 없이 네 명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신전에서 ‘꾸준하게 기부금을 마치고, 성실하게 매일매일 기도를 드리면 언젠간 돌아올 수 있어요!’라고 말해줬다는 정도.
“이 시간에 기도드리고 돌아오는 거면, 저 꼴을 또 봐야 한다는 거 아냐?”
“저것들을 보고 있으면 자라나는 머리카락도 그대로 빠져버리고 말 거야!”
“그, 그러면 새벽 기도로 바꿀까?”
“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끔찍한데 어떻게…!”
세상에. 지금만 해도, ‘탈모 탈출’을 외치면서 겨우 일어나는데 이보다 일찍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류리크 저 자식을 학교에 못 다니게…!”
“하지만 어떡해? 류리크 저 자식 실력 봤잖아. 마력 한 줌 없다던 폐인은 아니라고!”
“마, 맞아. 저번에 나한테 비바람의 구슬을 날렸을 때도….”
그때의 슬픈 기억이 돌아왔는지, 말을 꺼냈던 한 명이 우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자 다른 학생이 버럭 소리쳤다.
“…그거 다 허세야! 운이 좋았던 거라고!”
“어, 아니.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류리크가 맨날 끼고 다니는 여자애, 걔 헤루인이라면서?”
“실비아… 라고 했던가? 그 이단의 반즈?”
“생각해 보니까, 수업 때도 꼭 옆자리에만 앉고 맨날 데리고 다니는데… 혹시….”
순간 어이없지만, 생각보다 그럴싸하게 들리는 가설이, 그들 머리에 떠올랐다.
“류리크 대신 걔가 마법 쓴 거 아냐?”
* * *
학내 분위기는 여전히 밝고 청춘이라는 단어를 실감하게끔 했다.
아직 학업(學業)의 무게를 모르는 신입생들은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에 만족하면서, 대학 생활을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그런 학생들을 보며 교수들도 미소를 아끼지 않았는데, 내 눈에는 왜 ‘웃을 수 있는 건 이번 주가 끝이랍니다~.’라고 하는 것 같을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한 학기를 같이할 조를 편성할 겁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수업이 끝났다.
여기까지는 아주 무난하고 부드러운 일상인데….
“………….”
저번에 내게 된통 당했던 양아치들.
현재 민머리 보이즈라 불리는 4명의 작자가 나를 맹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저걸 먼저 가서 박살을 내놓을 수도 없고….’
가능은 하겠다만, 아직 저들이 먼저 움직인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기가 조금 애매하다. 더군다나… 나도 사람인지라 민머리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을 수가 없었고.
“류리크 씨, 저것들 내가 몰래 아작내버릴까?”
실비아도 민머리 보이즈의 시선을 느꼈는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서라. 가엾은 놈들이다.”
일단은 내버려두고, 정 아니다 싶으면 그때 처리해도 될 터다.
왜냐면… 그만큼 별 볼 일 없는 잔챙이니까.
“그보다도 생각은 해 봤나?”
“응? 어떤 거?”
“오컬트 동아리에 들어가는 거 말이다. 분명 네게 큰 도움이 될 거다.”
샤르미넨의 묵인하에 비공식적으로 흑마술을 연구하는 집단. 그 안에서도 부장인 카네라는 ‘반즈’에 관한 호기심이 지대한 사람이다.
실비아의 친구가 되어줄뿐더러, 지금의 낮은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리라.
“그렇지만… 나를 싫어할지도… 모르고….”
“참고로 나는 방과 후에 도서관에 갈 생각이라네. 문을 닫기 전까지 진득하게 마도서를 읽을 참이네만… 함께하겠나?”
“와! 오컬트 동아리 재밌겠다!”
갑자기 방긋, 웃은 실비아는 조울증 환자처럼 곧바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도서관에서 묵상하고 있느니, 차라리 오컬트 동아리에 가 보기라도 하는 게 낫겠네.”
“그러면 점심 식사나 하러 가지.”
“이히히, 좋아! 여기 밥 진짜 끝내주더라!”
실비아와 내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던 때였다.
갑자기 교내 방송으로 누군가를 찾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실비아 헤루인 옥스턴 반즈. 두 학생 모두 지금 즉시 총장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맛있는 점심으로 싱글벙글 웃던 실비아가, 마치 렉 걸린 캐릭터처럼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류… 리크 씨? 방금… 뭐야?”
“글쎄.”
후, 가볍게 한숨을 쉬자니 마치 뭉그적거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양, 교내 방송이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반복합니다.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실비아 헤루인 옥스턴 반즈. 두 학생 모두 지금 즉시 총장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점심은 아무래도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 * *
갑자기 무슨 일일까.
원래는 빠르게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서 느긋하게 책이라도 읽을 생각이었다만… 훼방꾼이 나타났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 공복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기분이 영 별로이건만, 옆에서 실비아까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류, 류리크 씨. 갑자기 샤르미넨 총장님이 왜 우리를 부른 걸까? 설마… 으갹!”
“쓸데없는 소리 한 번. 두 번째면 두 대다.”
“무, 무슨 그딴 부조리한?!”
제발 저 안에 있을 때 ‘꼬르륵’ 같은 소리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총장실에 노크했다.
그러자 곧장 안쪽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오~!”
―끼익.
총장실의 내부는 무척이나 넓었다.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에 비해 누가 보더라도 월등히 높은 면적과 넓이를 자랑했다.
거의 백 평은 가까이 될 법한 넓이였고, 온 사방이 책으로 가득했다.
벽지 대신 서가와 책이 자리 잡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수준이었고, 그 ‘책의 벽’은 원형의 천장까지 죽 이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아예 기울어지다 못해 떨어지지 않는 게 이상한 책들도 있었다.
‘책 한 권, 한 권, 영구적으로 중력 마법을 걸어 놓은 것인가.’
샤르미넨의 책사랑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는 총장실을 주욱 살핀 뒤, 아주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다리를 꼬고 있는 샤르미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용건인가.”
“류리크 학생. 그 얼굴 무척이나 불온한데요오! 지금 저를 점심을 방해한 훼방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오?!”
“오해의 여지랄 것 없는 사실이 그러하다만.”
“헤헤. 사실은 류리크 씨 괴롭히려고 이 시간에 부른 거 맞아요오!”
너무 당당한 거 아니냐.
반사적으로 따지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임볼릭이었다. 심지어 나와 마찬가지로 면책 특권이 있는 바타체스의 황족.
나는 무표정을 일관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용건은?”
“괴롭히려고 불렀다니까요?”
“돌아가겠다.”
“자, 자, 잠깐! 지~인짜 재미없네요오! 할 말! 할 말 있거든요오!”
나는 대답도 귀찮다는 태도로 그녀를 흘겼다. 그러자 샤르미넨이 눈살을 찌푸리며, 은근한 ‘기세’를 흘려 넣었다.
“류리크 학생은 기세가 좋아요오. 말할 때 사람을 쏠랑쏠랑 넘어가게 하는 뭔가가 있죠오. 으음… 뭐랄까, 위엄? 기백?”
그러고 보면 왠지 NPC들을 상대할 때 말이 잘 먹힌다 했더니, 위엄의 부가적인 효과로 그런 게 작용했던 건가.
의외의 가능성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하고 있자니, 샤르미넨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서 류리크 씨가 말했던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저번에 말했던 거! 그거 정말 불공평한 얘기더라고요오!”
중학생에 불과한 외견의 보정 때문일까, 목소리랑 얼굴을 찌푸려져 있는데 조금도 화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로서는 그 점이 조금 거슬렸다.
‘저 표정 그대로 갑자기 날 죽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양반이니까.’
일단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샤르미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류리크 학생의 뭘 믿고, 그런 조건을 받아들였을까요오?”
“실비아의 재능은 네가 본 것만으로도 알 터다. 그녀는 분명 금단의 숲의 망령들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될 거다.”
“그건 알아요오. 제 말은… 실비아 학생이 쓸모 있는 거지, 딱히 류리크 학생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오?”
오호라. 이제 그렇게 나온다는 건가.
나는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답변을 날렸다.
“그녀는 내 호위다. 호위 대상인 내가 있기에 그녀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거지.”
곧바로 논파 당할 말이었다.
총장의 직권을 이용한다면야, 한 명 정도 특례 입학시키는 거야 일도 아닐 테니. 그렇지만 당장의 상황에서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에헤이, 류리크 학새앵~ 왜 그렇게 표정이 굳었어요? 누가 보면 류리크 학생을 어떻게 하려는 건 줄 알겠어요오~.”
“방금의 대화는 누가 들어도 본인을 퇴학시키겠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만?”
“에이, 그건 농담이에요. 괜히 퇴학시켰다가 류오넬 오빠가 뭐라 그럴 게 뻔하잖아요오?”
…나중에 내가 이테아 등위를 달성하면, 하루 종일 샤르미넨 옆에 달라붙어서 놀려먹어야겠다.
“아무튼, 그거예요. 류리크 학생은 참 쓸모가 없지만, 실비아 학생은 무척 전도유망하다는 점!”
“갑자기 총장실로 불러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인가? 무척 한가한 모양이군.”
“으극, 아무튼 그래서! 쓸모없는 류리크 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봤어요오! 그리고 결론을 내렸죠오오오!”
무슨 대단한 결론이 나왔는지, 평소보다 어미의 길이가 3배 정도 길어졌다.
나는 여전히 안쓰러운 무언가를 보는 눈으로 샤르미넨을 흘겼다.
“으이익! 그런 눈으로 절 쳐다보는 것도 이제 끝이에요오! 지금! 이 자리에서! 저한테 사과하세요오! 그러면 퇴학 사유 3,000개 만들기 프로젝트는 일단 중단하죠오!”
“내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사과하라는 거지?”
“…어, 어음. 사기 친 죄?”
문득, 애초부터 샤르미넨에게 ‘가면’ 같은 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조건을 속이지도 않았고, 약속을 어기지도 않았다. 그걸 사기라고 느낀다면 거래를 할 때 네 지능이 부족했던 탓이겠지.”
“이, 이익! 저한테 건방진 말을 하는 것도요!”
“황제 폐하의 존엄 앞에 모든 바타체스는 평등하다, 이미 한 번 했던 말 같은데. 뭐, 정 그래도 불만이라면 너도 내게 건방진 말을 하도록.”
“이, 이이이익! 저, 저놈의 말빨! 열 받아! 열 받아! 열 받는다고요오!”
“필요하다면 웅변 학원이라도 소개해주도록 하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지고 들자 샤르미넨의 얼굴이 좀 무서울 정도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러더니 아예 바닥에 드러눕고는 떼쓰는 6살배기 아이처럼 팔다리를 흔들었다.
“이, 아으아아앙! 아무튼, 사과하라고요오! 사과해! 사과해! 사과하라고오오!”
이걸 녹화 수정구로 촬영했다간 정말로 ‘살해’ 당하겠지.
나는 잠시 발칙한 생각을 한 뒤, 지금까지 이어진 이 대화에 결론을 내렸다.
“그런 거군.”
“그렇긴 뭐가 그래요오! 사과해! 사죄해! 미안하다고 하라고요오!”
“느닷없는 호출에 실비아를 칭찬하는 모양새. 그리고 내가 필요 없는 거라면… 실비아를 오컬트 동아리에 입부시키려는 것이렷다?”
대화를 하다 보니 대충 퍼즐이 맞춰졌다.
한편 내 말을 들은 샤르미넨은, 어린애 같던 발광을 멈추고 외계인 보듯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류리크 학생, 그게 갑자기 무슨 미친 소리예요?”
역시 리아 정도가 아니면 이 정도 수준의 대화는 따라오지 못하는 건가.
나는 깨달음이 부족한 우민(愚民)들을 위해 친절하게 해설을 덧붙이기로 했다.
“특별한 행사도 없는 신학기, 굳이 뭐가 있다고 하자면 동아리 모집 정도뿐이지. 그리고 오컬트 동아리는… 지금 존속 위기에 처했을 만큼 인원이 없을 테고.”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현재 3명이 있을 터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이름만 올려놓고 아무런 활동을 안 하는 양반이다.
그런 마당에 오컬트 동아리는 ‘흑마술’과 연관되어 있다고 공공연하게 소문이 난 상황이다 보니, 거기에 들어가려는 얼간이는 그야말로 멸종했다.
“카네라가 부원 모집으로 온 사방을 들쑤시던 와중, 실비아의 얘기를 들었겠지. 그리고 완전 눈이 돌아갔을 테야. 실비아는 ‘반즈’ 가문의 출신이니까.”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반즈는 나름 괜찮은 마도 가문이다.
당시의 당주였던 실비아의 아버지가 준남작으로 계급도 낮고, 고귀의 13가문에는 들지 못했지만, 이론 마도학에 대해서는 손에 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큰 성과를 보였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이단이 된 반즈’를 알고 있는 것이다.
“자기 딴에는 어떻게든 실비아를 오컬트 동아리에 데려가려고 노력을 했겠지만 어려웠겠지. 내가 항상 실비아와 붙어 있었으니까.”
오컬트 동아리의 부장, 카네라 벨테인 폰 마하 아벤테일.
그녀는 남성공포증, 이라는 특정 장르의 게임에 꼭 하나씩은 있는 캐릭터성을 보유한 NPC다.
“그래서 카네라는 자신의 은사인 너에게 실비아가 필요하다고 부탁을 하고, 너는 사랑하는 애제자를 위해서 친히 나와 실비아를 총장실로 불러 오컬트 동아리에 가입시킨다… 라는 것이지.”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는가, 나는 의기양양한 눈으로 샤르미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느샌가 샤르미넨의 옆에 붙어 있던 실비아가 이계의 외계인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류리크 씨, 진짜 미친놈이야? 대체 방금 그 대화에서 어떻게 추리가 그딴 식으로….”
“넌 조용히 해라.”
“악! 악! 끄아악! 발! 발! 발 밟지 말라고!”
나는 펄쩍 뛰는 실비아에게서 고개를 돌려, 샤르미넨을 직시했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