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30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30화
030
동굴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10분 정도 걸었을까, 성인 남자 세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크기의 동굴이 나타났다.
“…확실히 스리라챠의 보금자리이긴 한 모양이군. 안으로 이어지는 발자국도 있고, 여기저기 스리라챠의 붉은 털도 보이니까.”
“에엑, 류리크 씨. 그런 게 눈에 보여?”
“…너는 제발 바닥을 확인하면서 걸어라. 그만 좀 넘어지고.”
가볍게 실비아를 타박하자, 메이린이 앞장서며 나아갔다.
“자, 그러면 들어가서 빨리 처리하죠!”
이제 곧 끝날 거라 생각하는 건지, 의욕이 넘치는 모습. 하지만 나는 그녀를 제지하면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들어가기 전에 계획을 세우도록 하지.”
“계획… 이요?”
“무턱대고 들어갔다간, 이전처럼 스리라챠들이 도망칠 가능성이 있다. 지금 상황으로는 동굴이 일방형인지, 양방형인지 알 수 없으니까.”
실비아의 꽁무니만 봐도 도망치던 녀석들이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리고 동굴의 안은 어두워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사각에서 기습을 당할 경우,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실비아도 나도, 항시 보호막 따위를 두르고 있는 게 아니다. 잠깐의 방심으로 급소를 물리기라도 하면, 무척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러니,
“동굴 입구에 불을 피운 뒤, 안쪽으로 연기를 흘려보내도록 하지.”
“연기요?”
“애초에 양방형 동굴이라면 진입해 봐야 리스크만 크고, 놈들이 도망칠 가능성도 높다. 심지어 어두운 곳이라 추격은 더더욱 힘들 테고.”
특히 실비아는 계속 넘어지다가 자칫,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일방형 동굴이라면 안쪽으로 연기를 밀어넣기만 해도, 놈들이 알아서 튀어나올 거다.”
“오, 류리크 씨. 똑똑해!”
“이걸 가지고 똑똑하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비꼬는 것처럼 들린다만.”
“무슨 소리야! 나는 진심으로 한… 잠깐, 지금 그거 내가 엄청난 바보라는 말 아냐?”
실비아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을 무렵, 메이린이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거면 위험할 것 없이, 스리라챠를 상대할 수 있겠어요!”
“메이린, 너는 스리라챠들이 나올 경우 덩굴 속박으로 놈들을 묶으면 된다. 실비아는 덩굴 속박을 피한 스리라챠들을 우선적으로 공격하면 된다.”
계획을 들은 실비아가 이마를 찡그렸다.
“윽, 그놈들 되게 빠르던데 괜찮으려나.”
“정면으로밖에 나오지 않을 테니, 이전보다 훨씬 수월할 거다. 그나저나 실비아 남아 있는 마력은 충분한가?”
“흐흐, 물론이지! 잡히기만 한다면 붉은 털 스리라챠 수십 마리도 통구이로 만들 수 있다고!”
역시 루나사는 루나사라는 건가.
헛발로 그렇게 많은 마법을 날려 놓고도 아직 마력이 넘치다니.
‘역시… 잠재력이 상당한 캐릭터였어.’
전부터 느꼈지만, 단순히 루나사를 달성하기 이전에 재능 자체가 뛰어나다. 그저 악역이기에 주목받지 못했을 뿐.
‘실비아처럼… 잠재성 있는 악역들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어차피 이 세계관의 선(善) 성향 NPC들은 제멋대로 주인공을 위해, 또는 이 세계를 위해 싸운다. 그러니 나는 그들이 특정 이벤트에서 사망하지 않게 조절만 해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반대로 보자면 악(惡) 성향 NPC들을 끌어들이는 건, 리스크 감소와 더불어 내 전력이 증가한다는 두 마리의 토끼를 얻는 셈이 된다.
‘그리고 역시 나는….’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류리크 씨. 그러면 어떻게 땔감부터 모아올까?”
나는 한껏 밝아진 실비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큰 불을 피울 건 아니니, 적당한 크기들로 구해오면 된다.”
“그러면 나는 귀찮으니까 나무 좀 잘라다가….”
“실비아 씨, 마력을 아껴두세요. 제가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워올게요!”
“으응? 하지만 마법으로 하면 금방인데….”
메이린은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실비아 씨가 우리 희망이니까, 지금은 푹 쉬어두세요.”
“우헤헷. 그렇다면야 뭐어~.”
* * *
류리크의 계획은 완벽했다.
‘역시… 망나니라는 소문은 틀린 말이었어. 마법도 생각보다 제대로 쓸 줄 알았고.’
아직도 많은 이들은 류리크가 제대로 마법을 못 쓴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몇몇은 수업 때 선보인 마법들은 그가 데리고 다니는 ‘반즈’가 대신한다고 믿을 정도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확인해 본 결과, 그 추측들은 모두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냥 불꽃.”
동굴 입구에 수북이 쌓인 땔감 위에, 류리크의 마법이 펼쳐진다.
그의 손가락에서 피어난 작은 불꽃이 마른 땔감들을 타고 점점 거대한 불로 번져간다.
“실비아, 바람 마법을 이용해 연기를 동굴 안쪽으로 밀어 넣어라.”
“오케이!”
실비아는 곧장 바람 마법을 일으켜 연기를 움직였다. 쓸데없이 휘몰아치지 않으면서, 딱 연기를 동굴로 밀어넣을 수준의 강도.
마법의 위력도 정교함도 역시 남다른 수준이었다.
‘저 여자도 어지간히 괴물이야. 그렇게나 마법을 써대고도 어떻게 마력이 남아도는 거지?’
역시 헤루인 정도 되면 다르긴 다르다는 건가.
메이린은 조금 감탄하면서 동굴 안쪽을 주시했다. 아직은 잠잠한 편이었다.
“메이린, 언제라도 마법을 쓸 수 있게 준비해라. 동굴의 깊이를 가늠할 순 없다만, 짧다면 금방 나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알겠어요. 류리크 씨.”
그때였다.
―케헹! 켕! 켕!
―켕! 케켕!
동굴 안쪽에서 붉은 털 스리라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금방 튀어나오겠는데?’
류리크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턱을 쓸면서 말했다.
“바람을 거두기엔 이른데… 실비아, 멀티캐스팅은 가능한가?”
“당근 빳다지! 나오는 족족 아주 묵사발을 낼게!”
“…뿔은 남겨둬야 한다. 잡았다는 증거로 가져가야 하니까.”
“에헤이, 그 정도야 조절하지!”
이전처럼 붉은 털 스리라챠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닐 것도 아니고, 정면으로만 달려들 테니 승산은 충분하다.
―케헤헹! 케헤헹!
―켕켕! 켕! 켕!
울음소리가 커지면서, 이제 녀석들의 뜀박질까지 느껴진다.
점점.
점점.
소리가 커져가던 끝에,
“지금이다!”
류리크가 힘껏 외치는 목소리를 시작으로, 두 가지 마법이 동시에 펼쳐졌다.
“덩굴 속박!”
“바람 칼날!”
안쪽에서 튀어나온 것은 세 마리. 그중 둘은 덩굴 속박에 발이 묶였다. 동시에 바람 칼날에 당해 끝장이 났다.
하지만 남은 하나는,
“실비아 씨! 한 마리가 높게 뛰면서 덩굴을 피했…!”
“바람 칼날!”
―스걱.
연기를 밀어넣는 바람 마법을 펼치면서, 여러 개의 바람 칼날을 날렸다. 그리고 놈들이 완전 밖으로 나오자 밀어 넣던 바람 마법을 해제하며, 다시금 바람 칼날을 펼치는 상황.
‘…이거, 헤루인 맞아?’
마력의 양과 마법의 정교함 이전에, 숙련도와 센스부터가 남다르다. 이전에 몇 번 헤루인이 되었다고 깝죽거리던 이들을 봤던 메이린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멋대로 움직였던 표정을 다잡으며 쓰러진 스리라챠들을 확인했다.
‘전부 깔끔하게 처리됐네. 스리라챠도 다 잡았으니, 이제… 무난하게 끝나는 건가.’
메이린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동안 실비아가 환호성을 지르며 묶여있는 스리라챠를 마무리 지었다.
“아자뵤! 드디어 끝이다! 류리크 씨! 이제 과제도 끝났고, 이제 점심시간이지?”
“그래.”
메이린은 슬쩍 시계를 확인한 뒤, 실비아 쪽으로 다가서며 환하게 웃었다.
“모두 고생들 하셨어요. 점심은 학식을 먹고, 저녁에는 다 같이 외출해서 맛있는 걸 먹어요! 아까 약속했던 대로 제가 살게요!”
“진짜로?!”
“네. 로팅엘구에서도 손꼽히는 맛집으로 갈 거니까, 분명 맛있을 거예요.”
그 말에 힘이 났는지, 실비아가 힘차게 붉은 털 스리라챠의 뿔을 뽑아 들었다.
“와자뵤오!”
“이제 슬슬 출발하죠. 아직 30분 남았으니까, 조금 서두르면 괜찮을 거예요. 류리크 씨, 축복 마법은 쓸 수 있나요?”
“그래.”
“그러면 축복 마법을 받고, 바로 이동하죠.”
메이린은 축복을 받기 위해 실비아와 함께 류리크의 근처로 다가섰다. 그런데 류리크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방금 자신이 이동하자고 말했건만, 그는 여전히 나무에 기대앉은 채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저기… 류리크 씨? 이제 슬슬 가야 할 거 같은데요.”
“글쎄.”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메이린은 묘한 불길함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류리크… 씨? 시간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라서 조금 서둘러야….”
“이제 와 축복 마법을 걸고, 이동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과제로 주어진 스리라챠를 다 잡아놓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메이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황망한 눈으로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모른 척하지 마라. 메이린. 여기까지 광대놀음을 하며 네 계획대로 놀아주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즐겼을 텐데.”
“그게 무슨….”
류리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어딘가 피폐하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어둠을 품은 눈동자가. 메이린을 옭아매듯 들러붙는다.
“남은 시간은 15분 남짓. 여기서 뛰어가 봐야 늦는다.”
“15분이라뇨. 분명 아직 30분이나….”
“쓸데없는 변명거리는 그만두고, 어찌 되었건 네가 바라던 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축복을 걸고 뛰어봐야 제시간 내에 과제를 제출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의 시선에 어둠이 깃들었다.
“자, 메이린. 이제 어쩔 셈이냐?”
* * *
―류리크와 같은 조가 되어서… 그를 방해하라고요?
―네. 메이린 양. 당신의 입장은 대충 이해하고 있어요. 가문의 정식 후계자가 아니니까, 쫓겨나듯 이곳으로 보내진 거죠.
― ………….
―어차피 이 학교에 그런 사람들은 차고 넘치니까 신경 쓸 거 없어요. 하지만… 그거 억울하지 않아요?
― ………….
―우리의 사소한 부탁만 들어준다면… 당신의 인생이 달라질지도 몰라요.
메이린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겁먹은 표정을 연기하며 말했다.
“류리크 씨. 저는…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모든 것이 순조로운 척 유도하고, 마지막에 도착해 보니 시간이 지난… 그런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겠지. 변명거리는 시계의 고장이겠고.”
“아니, 그러니까….”
“사주한 것은 드라카르 사교회일 테고. 대가로는 글쎄,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운운하면서 사교회에 가입시켜주겠다고 했겠지. 그러면서 상련에 입김을 좀 넣어주겠다고 했으려나.”
순간 메이린은 자신의 심장이 주저앉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다년간 익혀온 처세술 덕분에 티를 내진 않았지만,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류리크는 자신의 속내를 꿰뚫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마치 그 현장에서 자신을 보았던 것처럼 말을 했다.
‘그런 건… 불가능할 텐데….’
말 그대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 결론이 내려진 순간, 메이린은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건’ 류리크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고, 그가 하는 말에는 근거가 없다.
그리고 근거가 수반되지 않는 주장은, 결국 ‘주장’에 불과하니까.
‘어쩌면 내가 반응을 보일 때까지 계속 찔러보는 수작일 수도 있는 거고!’
그렇다면.
여기서는 오히려,
“류리크 씨!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저는 류리크 씨가,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왜, 마치 제가 나쁜 짓을 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씀하시는 거죠?!”
격양된 목소리로.
정말로 억울한 것처럼.
이 가슴의 답답함을 풀지 못해 한이 맺힌 것처럼.
메이린은 울부짖듯 외쳤다. 하지만 류리크는,
“…의심의 시작은 멜리시아의 조편성에서부터였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고. 전과 같은 목소리로 묵묵하게 말을 이어갔다.
“임의 배정을 하는 순간, 멜리시아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게 대체 왜 의심할 거리가…!”
“그리고 너는 나와 같은 조가 되었음에도,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더군.”
“…………!”
“무려 ‘아스트레이’인 나와 ‘반즈’인 실비아와 같은 조가 되었는데 말이야.”
그 말대로.
생각해 보면 그랬다. 모두에게 배척받는 아스트레이, 반즈와 같은 조가 되었는데. 그녀는 오히려 웃으면서 다가섰다.
‘그야 당연히 친한 척하면서 다가서야 쉽게 속일 수 있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당시만 해도 류리크는 전혀 자신을 의심하는 기색이 아니었는데.
“제 표정과 태도로 의심을 한다는 건가요? 아니, 실비아 씨! 실비아 씨도 뭐라고 말 좀…!”
“에엑? 나? 나는 갑자기 왜….”
“누가 봐도 류리크 씨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으음, 하지만… 메이린 씨가 우릴 속인 건 맞잖아?”
얘는 갑자기 또 왜 이러는 건가.
맛있는 밥 사준다는 말에 헤벌레하던 바보가. 갑자기 왜.
“실비아… 씨? 무슨 말이에요? 누가 봐도 증거가….”
“류리크 씨가 속였다고 하면 속인 거야. 증거고 나발이고 필요 없어. 류리크 씨가 그렇다고 말하면, 그런 거라고.”
“증거가… 필요 없다니… 그게….”
“겉보기는 상관없어. 정황 증거고 상황 증거고 그딴 것도 다 상관없어. 설령 류리크 씨가 흰색을 보고 검다고 해도 그건 검은 거야. 왜냐면 그 흰색을 까 보면 분명 검은 게 나올 거거든.”
그게 대체 무슨 논리인가.
애당초 여기에 논리라는 개념이 통용되긴 하는 것인가.
‘미쳤어….’
메이린은 몸에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아니, 나는 뭐어~ 류리크 씨의 편이니까. 그리고 내가 류리크 씨랑 다닌 짬밥이 있어서 아는데, 이럴 땐 조~용히 있어야 하거든. 그러니까 나는 더 할 말 없달까?”
그렇게 실비아가 둘이서 얘기하라는 양 물러서고, 류리크의 시선이 다시 메이린에게로 향한다.
“자, 얘기를 끝내지. 너는 잘했다. 붉은 털 스리라챠를 사냥할 때 어설프게 놓치는 시늉 같은 건 하지 않았고, 동굴로 안내하는 것도 빙빙 돌지 않고 직행했지. 동굴은 진짜 붉은 털 스리라챠의 보금자리이기도 했고.”
“맞아요! 저는 류리크 씨나 실비아 씨를 속이거나 방해하려는 생각이 전혀…!”
“하지만 시간을 다르게 알려주었지.”
시간?
그러고 보니 그는 15분이라는 시간을 들먹였다. 자신이 30분이라고 말해줬는데도.
“시간을… 다르게 알려주다니, 애초에 15분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예요?”
“내가 정확한 시간을 말해주었으니, 당황하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만.”
이 남자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그의 몸 어디를 보아도 시계는 없다. 실비아도 마찬가지다.
이 자리에서 시계를 갖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류리크 씨. 나한텐 ‘시계’가 있고, 당신한테는 없었어요. 그런데 무슨 시간을 운운하는 거예요!”
그리고 류리크는 처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시계가 왜 필요하지?”
“…예?”
“아침에 일어나 시계를 확인한 순간부터, 그 이후에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계속 파악하고 있는데… 왜 귀찮게 시계를 들고 다닐 필요가 있는가.”
이건 또 무슨 상큼하게 미친 소리인가.
메이린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영문모를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힘겹게 입술을 뗐다.
“당신…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죠?”
“아, 물론. 잠깐 어긋남은 있었네. 처음에 30분간 고생할 때는, 체력의 소모가 커서 그런지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거든. 하지만 조금 쉬고 나니 명확해졌지. 자네가 시간을 틀리게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읽는다니… 무슨 그딴 말도 안 되는…!”
“나야말로 이해할 수가 없다. 방향감각이 멀쩡한 인간은 제대로 걸을 수 있듯, 인지능력이 멀쩡한 인간은 시간을 읽을 수 있을 터다.”
혹시 자네는 10분과 1시간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나? 류리크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메이린은 깨달았다.
‘이 미친 자식… 진짜로…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초 단위로 시간을 세고 있었던 거야?!’
류리크가 마침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메이린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의 키가 물론 장신이기는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치 거목이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너는 아마 그럴 요량이었겠지. 시계가 고장 났었다. 미안하다. 우리 맛있는 밥이나 먹자. 그리고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본인을 방해했겠지. 실수인 척. 우연인 척. 사고인 척.”
“저는 그런….”
“더 이상의 변명은 그만두게나. 이대로 가른 숲을 빠져나가 시간을 확인해도 괜찮다. 나는 자네가 거짓을 고했다는 것에 내 생명을 걸 수도 있으니.”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메이린은 그 순간 확신했다.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꺼내든 류리크는 자신을 의심할 것이고, 그건 절대 변하지 않는다.
“후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어쩔 거죠?”
“………….”
“류리크 씨 말이 맞아요. 저는 처음부터 시간을 속였고, 남은 시간에 대해 거짓말을 했어요. 아마 지금부터 뛰어가도 과제는 지각으로 인해 0점 처리되겠죠.”
“………….”
“더 재미있는 건 뭔 줄 아세요? 이번 학기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같은 조고, 저는 전력을 다해서 당신을 방해할 거라는 거죠!”
조별과제는 자기 혼자 잘났고, 자기 혼자 실수를 안 한다고 만점이 나오지 않는다. 팀의 분열을 컨트롤 하는 것까지가 팀워크의 일환.
이건 멜리시아 교수뿐 아니라, 샤프란의 방침이기도 하다.
‘이제 와서 조를 바꾼다는 건 있을 수 없어. 아무리 당신이 바타체스고 아스트레이라도, 그런 억지는 통하지 않아!’
물론 앞으로 저들과의 관계는 살얼음을 걷는 듯 나쁠 터다. 그리고 저들이 알아차린 만큼 일을 계획하는데 조금 더 까다로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저들을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메이린, 나도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말해 줄까.”
“하, 뭐든지 말해 보세요. 제 생각은 절대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시작부터 자네를 의심했고, 일찍이 자네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그런데 왜 순순히 당해주었을까.”
…그러고 보면, 그건 꽤 이상한 일이었다.
이쪽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면, 왜 가만히 있었던 것일까.
이미 손을 쓰기 늦었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아니면….
“사실 자네를 끝장낼 기회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조금 억지스럽지만 붉은 털 스리라챠에게 기습을 당했다고 할 수도 있고, 자네를 동굴에 밀어 넣은 뒤, 천장을 무너뜨려 사고사로 위장할 수도 있었지.”
메이린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인적 없는 외딴 숲.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과제를 보고하러 떠났을 상황. 그리고 눈앞의 남자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헤루인 등위의 마법사.
보이는 요소들 하나하나가 갑자기 공포스런 무언가로 뒤바뀐다.
“그, 그게… 무슨… 말… 이에요? 귀, 귀족을 죽인… 다니… 저는! 귀족… 이라고요!”
“아이율라가 남부에서는 제법 한가락 한다면, 결국 지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이다. 그리고 그런 가문에서 자네는 적통 후계자도 아닌, 첩의 딸.”
류리크가 처음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옅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조사를 한다면 샤프란이 아닌 치안국에서 사람이 나올 테고, 현재 치안국은 기사파가 꽉 휘어잡고 있지.”
“그, 그런….”
“자, 생각해 보게. 고작해야 아이율라의, 그것도 첩의 딸을 위해. 기사파가 휘어잡은 치안국이. 아스트레이며 바타체스인 이 몸을 조사할까?”
그럴 리가 없다.
아스트레이는 북방의 맹주이며, 대장군가다. 치안국장이 목을 걸지 않고서야 건드릴 엄두도 못 낼 터다.
“하물며 내가 살인을 저지른 정황도 없을 테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불운한 사고사일 텐데?”
혹시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메이린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러니 한번 잘 생각해 보게.”
마침내 류리크는 활짝, 잔인한 웃음을 피우며 말했다.
“나는 왜 자네를 살려두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