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35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35화
035
“류리크 님은 왜 살아 계신 겁니까?”
눈을 뜨니 리아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서, 무미건조한 눈으로.
“…오늘따라 독설이 가혹하구나.”
발음(發音)을 하는데 입이 아프지 않다. 찢어졌던 입안이 회복된 걸까.
나는 천천히 주변의 상황을 파악한다.
익숙한 천장.
편안한 침대.
따사로운 햇살.
‘리아가 나를 데려온 것인가.’
아직은 판단 재료가 부족하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천천히 알아가야 할 듯싶었다.
“독설이 아니라, 제 솔직한 진심을 말씀드린 것입니다만.”
“그렇다면 최소한 ‘왜’가 아닌 ‘어떻게’라고 말하는 편이 좋지 않았겠느냐.”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 아니던가.
왠지 ‘너는 대체 왜 살아 있냐,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래?’ 같은 독설처럼 들려서 말이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류리크 님의 몸 상태는 죽어 마땅한 수준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걸레짝이라고도 하지요, 리아가 덧붙인다.
나는 능숙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버젓이 살아 있으니, 여신의 축복이 함께 하심이라.”
“오른 다리의 뼈는 가루처럼 부서졌고, 입안부터 식도까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헤집어 놓았습니다. 체력도, 마력도 한계치 이상을 소모했지요.”
보통 사람은 마력을 과도하게 쓰기만 해도 죽습니다, 리아가 찌릿 매서운 눈으로 노려본다.
“그런 와중에 비명 한번 없었으니….”
“말하지 않았더냐. 본인의 정신은 뭇 강철과 같이 단단하다고.”
“류리크 님은 혹, 통각이라는 걸 느끼지 못하시는지요.”
“놀랍게도 본인의 감각은 멀쩡하다. 그러니 건방지게 본인의 팔뚝을 꼬집지 말라.”
꽤나 아프다. 욘석아.
“…소녀의 심장을 놀라게 하였으니, 이 정도 벌은 응당 받아 마땅하다 사료되옵니다만.”
“허어, 네 입에서 소녀라는 말이 나오니 말세라는 것이 무엇인지 체감이 되는구나.”
“소인은 류리크 님보다 2살이나 어린 18세이옵니다만.”
“………….”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 있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내 몸에는 이상이 없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리아.
―18살.
이 짧은 문구가 내 머릿속을 점령해버렸다.
“…잠깐만. 뭐라고?”
* * *
결론만 말하자면 그건 농담이었다.
리아는 내가 당황한 모습을 처음 봤다면서 무척 즐거워했고, 그 대가라면서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죽 설명해주었다.
―아르민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가 모든 것은 ‘장난’이었다고 둘러댔다는 것.
―레베카가 나서 카르시아의 입을 다물게 했으니, 문제는 없을 거라는 점.
―민머리 보이즈는 반쯤 넋이 나가 내 얼굴만 봐도 오줌을 지릴 듯하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그 뒤에 어떻게 된 것이더냐.”
“소인이 류리크 님을 여기까지 모셔왔습니다. 실비아 양에게는 도서관 문이 일찍 닫혀 류리크 님 먼저 돌아왔다고 말해두었지요.”
“잠깐, 지금 시간이 이미 정오에 가까운 듯한데, 학교는 늦은 것인가.”
“오늘은 임시 휴교일입니다. 내일 개교 기념 파티가 있지 않습니까.”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던가.
“이런 걸 깜빡하시는 걸 보니, 류리크 님께도 ‘인간미’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군요.”
“그것이 내가 너를 가까이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보다도 내가 정신을 잃은 뒤, 어떻게 여기까지 옮긴 것이더냐.”
샤프란에서 기절했던 내가 멀쩡하게 저택 침실에서 일어났다.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단 말이다.
나는 그 부분을 물었지만, 리아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그건 영업 비밀이라는 것이옵니다.”
“…그 영업 비밀이라는 걸로 카르시아를 원천 차단했다면 퍽 좋았을 터이다만.”
“류리크 님이 소인을 어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세상엔 소인이 모르는 것도 있사옵니다.”
“내가 계약 소환을 할 수 있는지 어떤지, 지켜보려던 것은 아니고?”
“소인이 어찌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할 수 있겠나이까.”
대충 반반이려나.
레베카의 밑에는 아르민이 있으니, 리아라고 해도 모든 걸 꿰뚫어 보기는 어려웠을 터다. 그리고 내심 내가 어디까지 싸울 수 있는지도 알아보고 싶었을 테고.
“그보다도 애당초 류리크 님의 곁은 실비아 양이 지켜야 했을 터입니다만… 아무래도 실비아 양의 교육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교육을 할 만한 것이 있던가.”
“호위로서의 본분을 잊은 모양입니다.”
까칠하기는.
나는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하며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시 실비아는 오컬트 연구회의 일 때문에 나를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요컨대 불가항력이라는 게지.”
“그것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류리크 님도 호위라는 직종의 의미는 알고 계실 텐데요.”
그야 모르지 않는다.
사실 호위가 호위대상을 두고 자리를 비운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긴 하다.
“역시 오컬트 연구회를 관두게 하고, 류리크 님을 호위하게 할 필요가….”
“리아.”
허나 그렇다고 실비아를 내 곁에만 둘 순 없었다.
“실비아는 오컬트 연구회에 있어야 한다.”
“하오나….”
“나는 고작해야 루나사인 실비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비단 샤르미넨과의 약조 때문이 아니었다.
고작 금화 몇 장 얻자고 실비아를 오컬트 동아리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실비아의 재능이 거기서 빛을 발할 수 있을 터이기에, 투자를 한 것이다.
“지고의 위치에 올라설 임볼릭 등위의 실비아가 필요한 것이다.”
실비아의 재능이 범상찮다는 것은 리아도 당연히 알고 있을 사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한다는 건,
‘겉으로는 나를 위하는 체하나, 결국 실비아를 견제하겠다는 속셈이겠지.’
역시 얕볼 수 없는 여자다.
“류리크 님의 의지가 그러하시다면, 소인은 더 이상 드릴 말이 없군요.”
“그래. 신관을 부른 대금은… 어차피 멋대로 내 주머니에서 빼 갔을 테니 상관없겠군.”
“제 노고에 따른 수고비 조금 더 가져간 것뿐이니, 염려치 않으셔도 좋습니다.”
순간 들어 넘길 수 없는 단어가 귀에 박혔다.
“…잠깐만. 그 수고비라는 거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었으면 하네만.”
* * *
리아에게 받은 기가 막힌 청구서를 확인한 뒤, 나는 샤르미넨에게 뜯었던 돈이 거의 다 소진되었다는 처참한 현실을 맞이해야 했다.
―이제 돈을 어디서 뜯어야 할꼬….
―평범하게 노동을 통해 벌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본인은 노동을 혐오한다. 그리고 본인의 몸은 노동에 적합하지 않다.
―류리크 님께서 자랑하시는 그 두뇌를 쓰는 노동도, 엄연히 노동의 범위에 들어갑니다만.
― …하루빨리 메이린이 성공하길 기도해야겠군.
그런 대화를 마치고, 나는 서재로 향했다. 숙면은 취했으나, 아직 몸 상태가 멀쩡하지 않았다.
나는 후유증으로 욱신거리는 심장을 꾸욱 누르며 『 몸으로 구르면서 기록한 카르키 정글지대 탐험일지』의 페이지를 폈다.
머리 아픈 마도서보다 훨씬 읽기 쉬운 책, 이거라도 읽으면서 쉴 요량이었다.
“………….”
사락.
조용하게 책 페이지를 넘길 뿐인 시간이 흐르고, 8번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무렵이었다.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메이린이 투자계획서를 들고 온 것이었다.
“왔는가.”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인간이, 하루 만에 폭삭 늙은 양 초췌한 몰골이다.
제 나름 고심을 거듭한 모양이다.
“…류리크 씨가 말한 대로, 어떻게 해야 북부에 상업을 부흥시킬 수 있는지 분석해 봤어요.”
“표정이 어두운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으큭, 메이린이 마치 악몽 같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양 그런 소리를 냈다. 그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문제… 그렇죠. 문제… 문제라면 엄청나게 많죠!”
갑자기 폭발했다.
“기반 시설이 없는 건 이해해요!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사치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그 이전에 해도 해도 너무! 너무! 짠돌이잖아요!”
“북부 사람들 말이더냐.”
“네! 그! 북부! 사람들이요! 아니, 그 사람들은 머릿속에 어떻게 극야 생각밖에 없대요?!”
“어릴 적부터 그리 교육을 받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마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테니까, 부귀영화는 무의미하다.’ 이러는 거 같다니까요!”
가슴을 퍽퍽 치는 것이, 어지간히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후우… 정보원들의 말에 따르면 그래도 맛없는 돌빵보단 조리된 음식을 좋아한다니까, 식당 위주로 상세(商勢)를 넓힐 계획이에요.”
“나쁘지 않군.”
“다행인 건 상권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특별한 마찰이나, 삥 뜯는 건달도 없다는 거네요.”
북부 사람들은 워낙 억세고, 강해서 마을 주민 한명 한명이 전사와 같다. 그래서 건달이 있기는커녕, 타지역의 어쭙잖은 용병들이 도적이 되어 왔다가 역으로 당하는 일이 곧잘 일어난다.
“병구류는?”
“지금 아이언포지 쪽과 접촉하려고 준비 중인데… 저기 류리크 씨. 역시 최종목표는 생산 공방을 소유하는 거죠?”
역시.
최소한의 눈치는 있다.
“물론. 단순히 거래를 트는 것은 의미 없다. 언제라도 뒤통수를 맞을 수 있으니, 공방 자체를 소유해 독과점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계에 딱히 독과점을 제한하는 법률이 없긴 하나, 상련과는 되도록 마찰을 피해야 한다. 그쪽에서 견제를 시작하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자금은 충분하겠는가.”
“당연히 부족하죠. 공방을 인수하는데 돈이 얼마나 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그제야 투자계획서의 자금 조달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류리크 씨가 대충 3,000만 리브라쯤 주지 않을까?
* * *
샤프란 마법 대학의 외곽에 위치한 어느 공터.
이 근처는 금단의 숲과 가까워 오가는 이가 없는 지역이다. 그런 곳에 두 명의 남녀가 쓰러진 나무 밑동과 바위를 의자 삼아 앉아 있다.
“그래. 그래서 류리크, 그자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 같던가?”
한쪽은 이번 류리크 습격을 획책한 여인, 레베카.
“…하나, 제 눈을 의심하게 할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그 자리에서 모든 걸 지켜봤던, 아르민.
둘은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내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가 눈을 의심할 정도면, 퍽 신기한 광경이었겠구나.”
“분명 류리크의 마력은 보잘것없었습니다. 기초 마법 위주로 몇 번 쓰고, 마력이 달려 포션을 사용했으니까요.”
흐음, 예상 밖이군.
레베카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훑는다.
아르민은 어딘가 찜찜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다만 그 마력 포션을 사용한 뒤, 기이한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기이한 마법?”
“전신에 갑옷을 두르고, 장검으로 무장하는… 그런 마법이었습니다.”
확실히 들어본 적 없는 마법이다. 간혹 손에서 떨어진 검이나 지팡이를 가져오는 염동 계열 마법들은 있지만, 갑자기 갑옷을 두르는 것은 없다.
갑옷이라는 것은 애당초 혼자서 입을 수 없는 종류의 장비니까.
“그 말인즉, 어디서 날아든 갑옷을 입었다는 말이더냐.”
“그게… 마치 의복이 갑옷으로 변하듯 돌연 생겨났습니다.”
괴이하다.
그러면 염동이 아니라, 연금술과 관련된 무엇일까.
“장비의 품질은?”
“…최소한 상등품, 황실에 납품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력으로 주조한 것이 아니라, 아공간에 있는 것을 소환한 것일 가능성이 크겠군.”
마력으로 간이 갑옷이나 무기를 만드는 마법은 여럿 있다.
다만 성능은 그저 그런 수준이고, 장비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마력이 소모되어 실전성은 무척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게… 그 부분이 이상합니다.”
여기에 이상할 것이 있나?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으음. 어디가 말인가?”
“속하가 본 것이 맞는다면… 그때 류리크가 펼쳤던 마법은 분명 ‘계약 소환’ 마법이었습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계약 소환은 환신계의 소환수를 부르는 것이다. 장비를 불러서 착용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얘기다.”
아르민도 그 사실을 아는지 무척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어렵사리 입술을 떼며 말했다.
“속하의 판단으로는 ‘소환수’의 일부만을 요령 좋게 소환한 것이 아닌가….”
레베카의 표정이 기묘하게 뒤틀린다.
믿을 만한 부하의 말인데, 믿기 어려운 정보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괴리에 레베카는 곤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들었습니다. 재작년 아드리아의 학술지에서 그런 논문이 발표되긴 했었습니다.”
“실제로 행한 자는?”
“제가 아는 한에서는 없습니다. 지정된 마법, 그것도 계약 소환 같은 까다로운 마법을 일부만 발현하는 건, 거의 마법을 조각 단위로 해체하고 분석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이니까요.”
그 말대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현상을 그려내는 마법은 어느 정도 공식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계약 소환은, 전혀 다른 분야이다.
계약 소환은 계약을 맺은 소환수만을 소환할 수 있고, 무언가의 변형을 가한다고 마법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마력을 더 많이 쏟을 경우 소환수의 능력치가 조금 더 상승한다는 정도.
‘그렇기에 부분 소환은,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텐데….’
레베카의 생각이 깊어진다.
‘이전에 헤루인 등위를 달성했다 듣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평범한 천재(天才)의 반열에 드는 수준이었다. 한데 이건….’
만일 그게 정말이라면, 그를 단순히 천재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예상외로군. 그 남자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필요가….’
그리고 그때 왠지 모르게 우물쭈물하던 아르민이 재차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래. 그자가 어디 다른 재주도 갖고 있던가?”
“그것이…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자는 제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정체를 안다.
레베카는 너무도 당연하게 아르민의 위장 신분이 들통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외국의 조그마한 귀족 가문을 내세웠지만, 사실 그런 가문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아르민의 말은,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제가 황실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그자가 알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