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36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36화
036
기절한 뒤로 푹 잠을 잤던 탓일까, 이른 새벽에 눈이 뜨였다.
소름 돋는 건 물 한 잔 마시기 위해 방을 나오자, 리아가 어둠 속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랄까.
“그대는 잠이 없는가.”
“류리크 님이 기침하셨으니, 소인도 일어난 것뿐입니다만.”
“…오늘 몇 시간 잤지?”
“영업 비밀입니다.”
별게 다 영업 비밀이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복도를 지나려는데, 갑자기 리아가 쟁반과 함께 얼음물 담긴 컵을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더냐.”
“목을 축이고자 하실 듯싶어 준비했습니다만.”
이 순간 깨달았다.
리아는 내 영혼의 반려다.
“…결혼하자.”
“싫습니다.”
“그나저나 개교 기념 파티는 정오부터이던가.”
“예. 일찍 일어나신 김에 의상실에 들러보시겠습니까?”
“괜찮다. 말끔한 정장이면 된다. 그보다 혹시 원한다면 함께 사교 파티에 가도 좋다.”
“학생마다 3명 이하의 친족이나 지인을 동행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으나,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나는 물을 들이켜며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한다.
‘개교 기념 파티라… 별일 없겠지.’
현재 내가 입학한 시점은, 원작의 게임이 시작되기 이전이다. 그 때문에 이번 년의 개교 기념 파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큰 사건이 있었다면 소문으로라도 퍼졌을 터. 그렇지 않다는 건… 소동이 될 만한 사건이 없었다는 소리.’
그나마 신경을 써야 한다면, 드라카르 사교회에 의한 변수 정도일까.
나는 비어버린 물 잔을 내려놓으며 움직였다.
“슬슬 준비하면 되겠군.”
“이르시군요. 봉사 활동이라도 하십니까?”
“그렇다.”
파티 자체는 정오에 시작하지만, 그 전에 학내 봉사 활동이 있다.
외부인이 찾아올 수 있는 행사이니만큼, 샤프란 입학을 희망하는 이들 역시 꽤 많이 온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상담을 해주는 거다.
‘재학생이 느끼는 샤프란의 장점, 감상 따위를 어필하라는 거지.’
별거 아닌 듯하지만 놓쳐선 안 될 중요한 이벤트이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거니와 봉사 활동 시간도 부여되고, 화이트윙 선별에 가산점까지 더해주니까.
“소인이 알기에 봉사 활동은 인맥을 통해야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만….”
확실히.
워낙 쉽고 봉사시간 얻기 좋은 활동이라, 담당자와 일부 인간을 사이에 이권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봉사 활동을 신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뭐, 류리크 님이시라면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자네의 믿음이 무겁구나.”
“모쪼록 특별히 준비할 것이 없다면, 마지막으로 나가시기 전에 실비아 양의 드레스를 체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드레스를? 그녀의 취향을 존중하도록 하지.”
실비아는 내 동료이지, 소유물이 아니다. 옷 입는 것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진심이십니까?”
…라고 생각했는데 리아의 눈빛이 이상하다.
나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며 리아에게 말했다.
“혹시 실비아의 드레스라는 걸… 확인해 볼 수 있겠는가.”
“…미리 말씀드리지만, 충격받지 마십시오.”
10분 뒤, 나는 정원에서 드레스 하나를 태웠다.
* * *
“갸아아아악! 류리크 씨!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아아!”
신문과 함께 아침 티타임을 즐기고 있자니, 실비아가 시끄럽게 발광했다.
불타버린 드레스 잔해를 발견한 모양이다.
나는 실비아를 흘겼다.
―분명 흔적도 지우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하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만.
―…잠깐만. 설마 쓰레기통을 뒤져서 찾아냈다고?
돌아버리겠군.
지끈거리는 두통을 억누르자니, 울상이 된 실비아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류리크 씨이이…!”
“나야말로 그게 대체 무슨 짓인지 묻고 싶었다. 자네의 패션 센스는 어떻게 돼먹은 거지?”
“내, 내가 뭐 어때서!”
“평소에는 평범하게 잘 입더만, 왜 파티에 저런… ‘해괴망측’한 복장을 하려는 것이더냐.”
내 패션 센스가 뛰어나다 자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비아의 선택은 누가 봐도 문제가 있었다. 아니, 애당초 저걸 드레스라고 규정짓는 것부터가 세상 모든 드레스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것이었으니까.
“카네라 선배가 추천해준 의상실에서 산 거란 말이야!”
“그 빌어먹을 년이 원흉이었는가.”
이 순간 나는 실비아를 오컬트 연구회에 집어넣은 것을 진지하게 후회했다.
“카네라 선배를 나쁘게 말하지 마!”
“아무튼, 그 드레스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히잉, 카네라 선배랑 커플룩이었는데….”
그래도 제 유일한 친구라고 두둔하는 건가.
쯧, 나는 혀를 차며 리아가 준비해 온 드레스를 내밀었다.
“됐고, 파티에 갈 땐 이 드레스를 입도록.”
“…완전 안 예쁜데.”
“실용성을 챙긴 거다.”
“아니, 파티에 무슨 실용성이 필요하다고!”
만일을 대비하는 거다.
민머리 보이즈에 카르시아까지, 드라카르 사교회는 노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개교 기념 파티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아무튼, 이걸로 갈아입도록.”
“으윽. 류리크 씨가 남의 패션 센스를 나무랄 정도는 아닌 거 같아.”
“너는 패션 센스를 논하기 전에 노출증부터 의심을 해야 할 것 같다만.”
“뭐, 뭔 소리야! 저건 그냥 이벤트성 의상이잖아! 내가 평소에 헐벗고 다니는 거 봤… 히끅!”
순간 실비아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파르르 몸을 떤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에서 뿌리 깊은 공포감이 느껴진다.
“실비아?”
나는 의아해하며 뒤를 돌았고, 거기엔….
“실비아 양, 늦기 전에 어서 갈아입으세요.”
리아가 있었다.
* * *
아침의 소란을 뒤로, 실비아와 나는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등교했다. 그리고 느긋하게 봉사 활동 신청을 위해 행정실로 향했다.
사실 마감까지는 고작 30여 분 남은 상태였고, 당일 등록을 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이전에 리아가 말했듯 이 봉사 활동은 보통의 방법으로는 접수할 수 없으니까.
“이미 마감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행정실 직원이 ‘얘는 뭐지?’라는 눈빛을 노골적으로 보내며 말했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가? 본인은 접수가 마감되었다는 공고를 어디서도 보지 못했네만.”
“이미 마감되었습니다. 마감되었다는 공고는 따로 붙이지 않지요.”
“하면 봉사 활동할 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는 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건 차차….”
행정실 직원이 판에 박은 듯한 변명거리를 내뱉으려 했다만,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아서 말이지.
나는 직원의 데스크 앞에 팔을 걸치며 속삭이듯 말한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주지.”
“아, 그런 건 모르겠고 아무튼 접수는 마감….”
“호그. 자네와 나는 초면이 아니라네.”
순간 직원의 표정이 흔들린다.
당연 일면식 없는 인간이 느닷없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니, 퍽이나 당황스러울 테지. 아주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화술이다.
“저기, 당신… 학생 아닌가요?”
“그렇다만.”
“그런데 저를. 아니, 나를… 안다고요? 아니, 안다고?”
“그래.”
아니다.
사실은 초면이다.
하지만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뻔뻔하게 혀를 굴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내 게시판에 ‘입학희망자 상담 봉사 공고’가 게시되고 5분 뒤에 본인과 만났었지.”
“아니, 잠깐만. 그보다도 내 이름을 어떻게….”
“그때도 자네는 이렇게 말했다네. 마감되었다고.”
당연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찾아와 호그에게 봉사 활동을 신청하고, 그가 ‘마감되었습니다.’라고 답하는 과정은 분명히 있었을 터이기에.
나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간다.
“이상한 일이었지. 본인은 공고문이 붙자마자 찾아온 것인데, 그렇다고 행정실에 봉사 활동을 신청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거나 줄을 선 것도 아닌데.”
“………….”
“어찌하여 봉사 활동이 마감되었을꼬.”
호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뭐, 그래서 치안국 지인의 도움을 받아 간단하게 조사를 했지.”
“치, 치안국?!”
당연히 구라다.
치안국에 아는 사람이라니. 류리크에게 그런 지인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호그, 거기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다른 곳에 앉아있던 직원이 호그에게 슬쩍 묻는다. 호그는 손을 덜덜 떨면서, 힘겹게 부정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 예….”
나는 새파랗게 질린 호그에게 상큼한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직원들 앞에서 끌려나가는 꼴 보이기 싫다면, 나가서 얘기하지.”
그 직후, 호그는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잠시 쉬겠다고 나섰다. 나는 얼굴 구겨진 그를 데리고 인적 없는 쉼터로 향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자, 호그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당신, 아니 학생.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치안국이니 뭐니….”
“알아보니 이 봉사 활동은 공고문이 붙기 이전에 접수가 끝났더군.”
“그러니까 그건 학생이 늦어서…!”
“공고가 붙기 전에, 행정실의 누군가가 학생들에게 금전을 받고 미리 접수를 해버려서이지.”
금전이라는 맥을 찔러버리자 호그의 눈에 당혹감이 서린다.
“아, 아닌데… 요?”
“애당초 이 봉사 활동은 3학년 이상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바뀌어서 ‘재학생’으로 바뀌었지.”
눈을 감아도 보일 것 같은, 뻔한 얘기다. 봉사 활동 자체가 워낙 ‘꿀’이라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일부 학생이 호그에게 접근해, 부정 거래를 요구한다.
이때 호그는 생각했을 터다. 어차피 경쟁이 치열한 봉사 활동이라, 금방 마감된다고 해도 다들 그러려니 넘길 것이라고.
실제 그 생각은 맞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냥 자기가 늦었구나, 하면서 넘어갔다. 꿀 같은 봉사 활동이지만, 결국 ‘봉사 활동’에 불과하니까.
그 뒤로는 이 봉사 활동 자체가 인지도가 떨어지면서, 아는 사람들에게만 전해지고 아는 사람들만 신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봉사 활동 신청 자체가 음지화되자, 호그는 더 욕심을 내서 ‘3학년생 이상’이라는 항목도 ‘재학생’으로 슬쩍 바꾸었다.
“신입생이 이 학교의 무엇을 안다고, 입학에 관해, 학업에 관해 입학희망자에게 상담을 해준다는 거지?”
“그, 그건….”
“호그, 시간이 없으니 간결히 말하겠네. 지금 즉시, 봉사 활동 자리를 하나 만들게.”
내 말이 끝나자 호그가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에… 에? 예?”
그 한심한 작태를 보며 나는 가볍게 웃음을 띠었다. 분위기를 녹여주려는 아주 선량한 의도에서였다.
“내가 자네의 부정을 고발할 거라 생각했나?”
“아, 아니. 그… 야?”
“뭐, 그건 자네 하기 나름이라네. 내가 바라는 건, 자네가 리브라 한 장 받지 않고 내게 정상적인 봉사 활동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니까.”
공범이 되자, 나는 그 말을 하는 것이었다.
“하, 하지만 이미 모든 자리가 마감되었는데… 요?”
그건 내 알 바 아니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시간이 없기에, 나는 친절하게 정답지까지 적어주었다.
“어차피 접수 마감 공고를 낸 것도 아니잖나. 가벼운 행정오류가 발생했다고 넘기면 될 테고, 크게 질책받을 일도 아니지. 아무렴 봉사 활동인데 말일세.”
“………….”
“그리고 다른 직원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걸세. 그저 정보를 늦게 들은 고위 귀족 하나가 무리해서 부탁했겠거니, 하며 넘어가겠지.”
“…당신, 학생… 맞죠?”
나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신입생, 류리크 아스트레이다.”
* * *
“류리크 씨, 그걸로 괜찮은 거야?”
실비아가 어딘가 찜찜한 얼굴로 묻는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만, 그녀의 눈을 보자 이해할 수 있었다. 사소하다고는 하나, 학내 비리에 얽히는 게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테니까.
나는 시선을 멀리, 높은 하늘을 보며 말했다.
“부정은 진실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끝장낼 수 있을 때 밝히는 것이다.”
어설픈 의혹 제기만큼 멍청한 짓도 없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실비아, 네가 보기에 어떤 이들이 이 봉사 활동을 할 거라 생각하나.”
“어, 글쎄… 학생들?”
“그 학생들 중에서도 정보와 눈치가 빠른 이들이 이 봉사 활동에 참여한다. 그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기에, 일개 행정실 직원 따위가 이딴 부정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
아이러니하게도 여긴 행정실 직원 한 명보다, 학생 한 명의 권위가 더 높은 학교니까.
아마 행정실의 다른 직원들도 눈치는 챘겠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그들이 감당해야 할 건, 한 직원의 탈선이 아니라, 그 부정으로 이득을 보는 더 거대한 세력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정답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녀가 배워야 할 과목은 아니기에, 나는 곧장 정답을 알려주었다.
“실리를 취하고, 부정을 이용하는 거다.”
“…봉사 활동으로 꿀 빨겠다는 건 알겠는데, 부정을 이용한다는 건 뭔 소리야?”
이게 묘미다.
“이 부정의 전제는 학생과 행정실 직원 사이에 금전이 오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호그와 그 어떤 금전 관계도 없지. 치안국이 심문을 통해 진실을 밝힌다 한들, 본인의 결백이 증명될 뿐.”
물론 내가 행정실 직원을 협박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아주 유쾌하게도, 나는 바타체스다.
―나는 별말 안 했는데, 상대방이 황족의 권위에 겁먹어 ‘알아서’ 한 거 같다.
협박죄에 대해선, 이런 정신 나간 변명이 실제 법정에서 통용되는 인간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여차할 때, 내가 오히려 이걸 폭탄처럼 던질 수 있다는 말이지. 나는 합법적으로 봉사 활동을 접수했는데, 알아보니 일부 학생들이 부정을 저지른 듯하다면서.”
당연하지만 전혀 관계없는 외부인의 의혹 제기보단, 직접 발을 담갔던 내부의 폭로가 반향이 더 크다.
치안국이 사건을 뭉갤 가능성도 작아지고.
“…그러니까 류리크 씨는, 이거 봉사 활동 하나 하면서 행정실 직원의 이름과 비리에, 이후 이걸 공론화해서 다른 놈들 엿 먹일 계획에, 치안국이 어떻게 움직일지까지… 전부 다 생각한 거라고?”
“그렇다만.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니, 뭐… 평소대로의 류리크 씨구나 싶어서.”
싱겁기는.
나는 정장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교정을 거닐었다. 그러자 뒤에서 실비아가 중얼거렸다.
“재수 없어… 악! 아악! 악!”
* * *
샤프란의 기숙사는 기본적으로 4개 건물이 존재한다. 그 안에서 수많은 귀족들이 함께 지내는 것이다.
다만 부대껴 사는 것을 싫어하는 고위 귀족들을 위해, 후작급 이상의 자제에 한해 사택에서의 통학을 허용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예외의 경우도 있다.
―기숙사가 싫지만, 사택에서의 통학도 귀찮은 경우.
이 소수의 경우를 위해, 샤프란에는 기숙사 ‘별관’이 존재한다. 괜찮은 별장 수준의 건물을 학생 혼자 이용하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그 개수가 한정되어 있는 만큼,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주 고귀한 신분이거나 막대한 기부금을 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고귀한 신분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타체스.
레베카 바타체스 폰 레온하르트 이실리엔은 7월의 별관 테라스에서 어떤 서류를 읽고 있었다.
“잿빛 수정을 극복했다는 건… 사실인 듯하군.”
대략 소책자 하나 분량으로 준비된 서류들에는, 류리크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이 기재되어 있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아르민.”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대는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하지 않았는가. 그가 ‘부분 소환’ 마법을 쓰는 모습을.”
“그 역시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두워지는 아르민의 목소리에 레베카가 설풋 웃었다.
“평가가 박하구나. 혹시 그자의 혀에 농락당한 것이 분해서 그러한가?”
“아닙니다.”
“아니기는. 분해하는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구먼.”
아르민이 고개를 숙였다.
레베카는 그를 그만 놀리기로 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흥미로운 사내임에는 틀림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거든.”
가문에서 버려진 망나니가 개과천선하는 일이야 있을 수 있다. 극복할 수 없다던 잿빛 수정의 중독을 이겨낸 것도 믿기는 어렵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가에서도 버려진 망나니가, 자네의 정체를 간파한다는 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그건 분명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어떤 가정을 세워 봐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
레베카는 으음, 턱을 괴며 고심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내 직접 그를 살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