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44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44화
044
개교 기념 파티는 거기서 끝났다.
나는 페리사에게 들러 빚을 갚은 뒤, 실비아와 합류했다. 다행히 그녀는 별 탈 없이 파티를 즐긴 듯, 썩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는 조금 다른 일상이 시작되었다.
“…류리크, 이걸 보고 뭘 어떻게 따라 하라는 거냐?”
수업이 끝나면 꼭 베샤스트의 기숙사, 젠틀맨 클럽에 들러 그에게 기술을 가르쳐 줘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예상외의 변수가 있었다.
“눈앞에서 뻔히 보여주고 있다만, 따라 하지 못하는 게 문제 아닌가.”
베샤스트는 바보였다.
아니, 바보까지는 아니지만… 이쪽에 썩 재능이 있지는 않았다.
“아니, 보여준다고 그런 게 가능할… 후우. 생각해 보니 너는 신동이었지.”
“신동이라.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너 같은 놈들은 척하면 척, 보기만 해도 따라 할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은 안 그렇다는 거야.”
쯧, 이래서 천재들이란. 베샤스트가 혀를 찼다.
재능 넘치는 신예의 장인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다만. 어쨌거나 나는 계속해서 강의를 했다.
—핵심은 표정 연기다. 기술을 걸면서도 그걸 일절 내색해서는 안 된다.
—기술에 집중한다고 얼굴을 찡그린다든가, 괜히 긴장해서 떤다든가.
—눈속임에 집착하지 마라.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움이 가장 중요한 거니까.
그렇게 30분 정도 지났을까, 베샤스트가 잠시 쉬었다 하자고 말했다.
“류리크, 음료라도 마실래?”
“여긴 술밖에 없지 않나.”
“술이 음료지 뭐야.”
“이 이후에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 음주는 삼가고 싶군.”
시시한 녀석, 베샤스트는 그리 중얼거리며 저 혼자 맥주를 홀짝였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너는 왜 위르겐하이에서 졌던 거야? 이만한 기술이 있으면, 정말로 무적이잖아.”
음.
그 질문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아무렴, 류리크는 200만이 넘는 빚을 질 때까지 털리고 털리고 또 털린 도박꾼이었으니까.
물론 대답은 제대로 준비해 두었다.
“베샤스트, 승패가 정해진 게임은 재미있을까.”
“으음, 그렇게 얘기하니 재미없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이건 도박이잖아? 이기면 돈을 따는 거니까, 재미있지 않을까?”
물론 게임의 본질적인 즐거움은 ‘이긴다.’에서 시작되니, 시시한 승리라도 재미있긴 할 터다. 특히 베샤스트는 오로지 이기기 위해 사기도박을 일삼는 녀석이니 더욱 그러겠지.
하지만,
“돈을 딴다라… 베샤스트, 하면 자네는 돈을 따기 위해 도박을 하는 것인가?”
“으음, 일단은 그렇지?”
“이상하군. 돈이라면 차고 넘치는 자네일 텐데… 왜 굳이 도박을 하지?”
인간이 어찌 그 정도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굳이… 도박을 하는 이유? 글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술은 맛있고, 여자는 사랑스럽고, 도박은 짜릿하다. 이유란 별거 없지. 한데 그것들이 자네가 느꼈던 최고의 쾌락이던가?”
“………….”
당연하지만 보통 음주, 성교로 얻는 쾌락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쾌감은 아니다. 특히나 어느 분야에서 특출난 재능을 발휘한 자라면 더욱.
‘운동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때. 무명으로 시작한 가수가 수만 명의 관중이 보는 무대 위에 섰을 때….’
물론 그것들은 결코 계속해서 얻을 수 있는 감각은 아니다. 환경적으로도 그렇고, 여러 번 겪다 보면 면역이 되어버리기에.
하지만,
“네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언제이던가.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분명하지만 그 순간은 절대 잊지 못한다.
그때 느꼈던 희열, 감동은 색이 바래질지언정 ‘그때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라는 기억만큼은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기에.
“베샤스트. 나는 과거 최연소로 헤루인과 배너렛을 달성했다. 그때의 기억은… 다시 돌이켜 봐도 하루하루가 찬란했지.”
물론 그런 기억은 전혀 없지만. 나는 그럴싸하게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멈췄다. 마법은 늘지 않고, 검술도 지지부진. 그때부터 조바심… 같은 게 생기더군.”
“………….”
“실력은 늘지 않고, 성취감도 없는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의 시선은 차가워지지. 그러다 나는 술, 도박, 여자에 빠지게 되었다.”
사실 이 얘기는 베샤스트에게 하는 말이다. 도리어 이런 경험을 한 것은 베샤스트, 그 자신을 테니까.
‘천재적인 아티팩트 장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면서 강박감이 생겼다지. 새로 만드는 것은 전보다 뛰어나야만 한다는 강박.’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결국 아티팩트 제작은 뒷전으로 가고, 술, 여자, 도박에 빠졌다는 얘기다.
신기할 것 없는 흔하디흔한 천재의 비애(悲哀).
“다만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
그리고 나는 말한다.
언젠가는 이 베샤스트가 이 슬럼프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재기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언제까지 이러고 살 것인가.”
베샤스트는 게임 내에서도 실의에 빠진 천재로 묘사된다.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좋은 아티팩트를 만들어준다는, 그런 느낌의 NPC.
“남은 평생을 그 정도의 미적지근한 쾌락만으로 살아갈 것인가.”
허나 베샤스트를 설득하는 그 한 번으로, 그가 극적으로 바뀌거나 하진 않는다. 단 한 번, 아티팩트를 만들어주고 다시 폐인으로 돌아가니까.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그 영광의 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다만 지금이라면. 게임상으로는 주인공이 나타나지도 않았을 과거 시점인 지금이라면. 베샤스트가 훨씬 더 망가지기 전인 지금이라면.
그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작은 기대를 걸고 말한다.
“내가 지기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테지. 이유는 글쎄, 별거 아니지.”
* * *
인간은 그저 말뿐인 얘기로 쉽게 감화되지 않는다.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거나, 아니면 오랜 시간을 걸쳐 다듬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베샤스트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테고, 서두른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하면 이제 남은 문제는 무엇인가.
—쟤가 걔야?
—아, 소문의 그?
—진짜 뻔뻔하네.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나 몰라.
—샤프란의 수치.
—저런 놈들, 진짜 다 죽어야 돼.
—학생회가 움직여야 되는 거 아냐?
레베카와의 일이, 꽤 골치 아프게 돌아가는 듯했다.
대충 예상은 했다. 이런 식의 정치를 처음 당하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경험상 이런 식의 ‘쓰레기 낙인’은 발버둥 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더군다나 나라는 인간은 이 정도 비난에 멘탈이 깨지거나 하지 않는다. 인터넷 방송 짬밥이 몇 년이고, 받아온 악플과 협박이 몇 개인데.
다만,
“저기 류리크 씨. 무슨 일 있었어?”
실비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내 옆에 붙어 있는 내내, 어딘가 불안한 태도였다. 나는 못 들은 척,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지만… 결국 실비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괜히 내 옷자락을 잡는다.
“예전에는 저런 놈 상종하지 말자, 근처에 있으면 바보가 옮아!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쓰레기를 보는 시선이야!”
“…기본적으로 바보는 옮는 전염병이 아니네만.”
“나 때문인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흑마술 관련해서 사고라도 났나?!”
되도록 침묵을 지키고 싶었지만, 실비아의 사고회로가 그 이상 선을 넘어가면 곤란하다.
‘예전처럼 풀 죽어서, 자책하다가 무기력증에 빠지면 골치 아파진다.’
뭐만 하면 자기 잘못이라고 의심하면서 쭈그러들던 시절. 그때로 돌아갈 순 없다. 아무렴 내 성장만큼이나 실비아의 성장 역시 중요하니까.
나는 옷자락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실비아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실비아, 그건 아닐 터다.”
“으음, 근데 다른 사람들 시선이 좀… 무서워진 건 맞는 거 같은데. 혹시 류리크 씨, 무슨 짓 했어?”
“…글쎄.”
실비아에게 카네라, 오컬트 동아리 빼고 친구가 없는 게 다행인지 아닌지. 그녀는 아직 사건의 진상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아슬아슬한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이 상황은… 꽤 곤란하군.’
레베카는 협조할 생각 자체가 없고, 실비아의 멘탈은 조금씩 균열이 가는 듯하다. 어떤 형태로든 손을 봐야 할 듯싶은데.
그때였다.
“아, 류리크 아스트레이.”
“맥컬런 교수.”
“아하하. 자네의 평대는 역시 쉽게 익숙해지지 않아.”
갑자기 마주친 맥컬런 교수는 어딘가 어색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나는 그 미묘한 표정의 안쪽을 헤아리며 물었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맥컬런이 실비아를 흘긋 보며 말한다.
“으음, 뭐… 시간 괜찮다면, 교수실에서 얘기하지.”
실비아가 들으면 곤란한 얘기인 걸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 * *
실비아에게는 교수실 밖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뒤, 안쪽으로 들어왔다. 맥컬런의 교수실은 다른 교수들의 방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접객용 의자, 사무를 보는 테이블. 그리고 벽면에 위치한 서가. 두툼한 책들.
“향초를 들였군.”
“아, 지난번에 자네가 추천해준 걸 샀네. 들은 대로 집중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듯해. 하하.”
맥컬런 엘베드 폰 라노 베스키르.
기초 마법학을 담당하고 있으며, 베스키르 가문의 젊은 실력자이자 유력한 차기 당주 후보. 그리고 나를 상당히 좋게 봐주는 몇 안 되는 교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인에게 할 말이… 아, 혹시 저번에 부탁했던 멘토링 말인가?”
대학생 멘토를 선발하는 교내 멘토링 프로그램. 멘티의 대상은 아카데미에서 대학으로 진학을 준비 중인 학생들이다.
이 프로그램은 저번의 상담과 마찬가지로 봉사 활동 시간이 부여되고, 화이트윙에 대한 가점이 추가된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무척 중요한 이유도 하나 붙어 있다.
‘내년에 입학할 주요 NPC들을 미리 만날 수 있다.’
본래의 역사에서 주인공과 함께 활약하는 메인급 NPC들. 물론 딱 그런 인간들을 만나는 것은 힘들겠지만, 행정실을 잘 구워삶으면 안 될 것도 없기에.
‘가능하다면 꼭 해야만 하는 이벤트인데….’
맥컬런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류리크 학생. 아카데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멘토링 말이네만… 약간의 문제가 생겼어.”
“무슨 일이지?”
“자네 등위도 헤루인이고 실력도 출중하니, 자격에 대한 문제는 없는데… 그 윤리위원회에서 제동을 걸었네.”
그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였다.
“윤리위원회… 라고?”
샤프란 마법대학의 윤리위원회.
상설 기관은 아니고, 특정 사안에 대해서 일시적으로 소집되는 기관이다. 샤프란의 교수, 직원 중 몇 명이 위원을 겸직해 운영되며… 어지간해선 등장하지 않는 기관인데.
“그쪽 얘기를 들어보니, 집단으로 투서가 들어왔다고 하더군. 잘못된 인격을 지닌 인물이 멘토링을 하면 안 된다고.”
“………….”
“자네가 기사 가문의 인물이라고 차별하는 것이라면, 내 윤리위원회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네만… 그게 아닌 거 같더… 군?”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그도 대충 소문을 듣기는 한 모양이다. 나는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는 맥컬런부터 손보기로 했다.
“맥컬런 교수. 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오해다.”
“그래. 나는 그 말을 믿네.”
“생각보다 쉽게 믿는군.”
후우, 맥컬런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면… 자네가 지금 이렇게 나와 대화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까.”
“………….”
내 기억이 맞는다면, 기껏해야 레베카를 배신했다는 정도의 소문이 퍼졌을 터인데. 맥컬런의 저 말을 들어보니 소문이 기괴한 형태로 뒤틀린 것 같다.
“다만, 집단 투서에 이어 윤리위원회가 움직인 이상, 자네를 계속 추천할 수만은 없네.”
이제 보니 그의 안색이 어딘가 초췌한 느낌이 묻어난다.
하기야 교내에서 입지도 다져지지 않은 젊은 교수인데, 퍽 마음고생이 있었겠지.
“미안하네. 맥컬런 교수. 괜히 마음을 쓰게 해서.”
“아니야, 정말로 심란한 건 자네일 텐데. 뭐.”
그는 어딘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어쨌든 아직 추천을 철회하진 않았고, 멘토링의 마감도 끝나지는 않았긴 한데….”
“이대로는 곤란하겠지.”
맥컬런이 무거운 얼굴로 묻는다.
“이 일, 해결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