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55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55화
055
검은 돌 과제도 끝나고, 카르시아가 휴학을 한 뒤로, 꽤 시간이 지났다.
이 시점에서 느낀 것이다만, 카르시아의 휴학의 파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라이노스가 워낙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기도 했고, 건강 문제라고 하니 크게 왈가불가하는 녀석들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레베카에게 차였다는 소문 직후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듣자 하니 카르시아는 그 이후, 수업도 듣지 않고 기숙사에 틀어박혔었다고 한다. 대중은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학교를 쉰다고 생각할 터.
그 어디에서도 카르시아의 괴물화(怪物化)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라이노스가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긴 하지만….’
내가 카르시아의 몸을 진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급하게 파악해야 할 정보도 아니다. 어쨌거나 카르시아라는 위협 자체는 내 주위에서 배제되었으니까.
그리고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 중간고사.
“…중간고사가 곧이라는 건 알겠는데, 왜 류리크 씨가 저한테 공부를 가르치겠다는 거죠?”
“메이린. 가르쳐준다, 라고 표현하면 좋겠군.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니 말이지.”
“당신 공부나 제대로 하지 그래요?!”
“내 학습 수준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만?”
샤프란의 시험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이론 시험과 실기 시험. 물론 좀 대체 과제라는 이름으로 별의별 것들을 시키기도 한다만.
대체로 저 두 가지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중간고사를 앞둔 나는… 특별히 더 공부할 것이 없었다.
‘이론이야 걱정할 것 없고, 실기 시험도 할 만해졌다.’
플레이어로 게임할 때부터 아드리아의 논문을 독파해왔다. 그리고 기초 마법 정도는 독학으로 마도서 읽고 거의 다 구현할 수 있는 수준. 1학년의 시험 정도에 발목 잡힐 리가 없다.
이는 실기 시험도 마찬가지.
‘이번에 혈석을 깨트린 게 큰 도움이 되었지.’
이제 벨테인은 뛰어넘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 되었다. 사실 마력만 받쳐준다면 헤루인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다만.
아직 혈석을 모두 부수진 못해, 그 수준까진 아니다.
‘그래도 1학년 수준의 실기 시험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완벽한 이론과 평균을 상회하는 마법 실력.
그렇기에 1학년 중간고사는 적당히 시간 날 때 복습해주는 것 빼고는, 딱히 신경 쓸 게 없었다.
“이 내가 직접 시간을 내서 너를 도와주겠다는 거다.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저, 저 혼자 공부할 수 있다니까요!”
말은 저리하지만, 사실 메이린은 마법에 재능이 없다.
애초에 그녀는 아이율라 당주의 명령에 따라 ‘괜찮은 남자와 혼인하기 위해’ 이 학교에 들어왔고, 마법적 재능은 헤루인이 한계다.
다시 말하지만 ‘한계’가 헤루인이라는 말이다.
“이런이런. 맥컬런의 과제에서 E를 받은 바보가 뭐라고 하는듯한데, 실비아. 어떻게 생각하지?”
“메이린 씨. 성적 말아먹으면 학점과 별개로 방학에 보충수업 듣는 거 알죠?”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마법 대학인 샤프란.
명문(名門)이라는 이름값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샤프란은 꽤나 엄격한 빡빡하고 엄격한 커리큘럼과 여러 교칙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평균 학점 D 이하는 방학에 보충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헤루인 등위를 못 얻으면 졸업도 못 하지만.’
여하튼 메이린은 꽤나 위험한 편이었다.
“류리크 씨, 애초에 아직 중간고사 결과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제가 왜 공부를 못할 거라고 단정부터 짓는 거죠? 전 정말로 혼자서도 잘 할 수 있거든요?!”
판에 박은 듯한, 머리 나쁜 녀석들의 흔한 변명이군.
나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조화 계통의 마법에 속성을 입혔을 때, 해당 속성이 무작위임에도 비가역적 현상이 발생한다, 라는 명제에 대해 그를 논증, 혹은 역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가. 덧붙이자면, 해당 명제에서 계통 이하의 하위 계열은 자연으로 한정한다.”
메이린이 인상을 찌푸린다.
“…외계어에요?”
“이미 들었던 수업의 내용이다만.”
“오, 오래돼서 기억이 잘….”
“오늘 수업에서 나온 내용이다만.”
“………….”
실로 유감스러운 두뇌로군.
“애, 애초에 류리크 씨가 저한테 북부 일을 시키지 않았으면 공부할 시간이 충분했을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도와주는 것 아니더냐.”
“…그냥 방학에 보충수업 들으면 안 돼요?”
“시간은 금이다, 모든 상인이 업계에 뛰어들기 전 배우는 말이라 들었는데. 본인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으윽.”
방학이 되면, 시간적 여유와 운신의 폭이 자유로워지는 만큼 해야 할 게 훨씬 많아진다. 그 중요한 시기에 메이린이 샤프란에 발목을 잡힌다?
재앙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물론 자네가 개인적인 휴식과 휴양을 모두 포기하고, 방학 중 본인이 바라는 스케줄을 소화해 낸다면 보충수업을 들어도 상관없네만.”
그건 꽤나 혹독할 테지, 나는 사악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 알았어요! 하면 되잖아요! 하면! 그런데… 마법 실습은 실비아 씨한테 배우고 싶어요.”
“왜지? 마법의 정밀도는 내가 훨씬….”
“류리크 씨는 설명을 더럽게 못 하잖아요!”
“………….”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인가. 순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 직후, 나는 그를 논박하기 위해 말을 고르는데, 옆에 있던 실비아가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맞아. 류리크 씨가 설명을 더~럽게 못하긴 하지. 자기 대가리가 슈퍼 대가리인 줄도 모르고, 제멋대로 설명하니까.”
“그러니까요! 무슨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안다니까요?”
“진짜, 이론을 설명하면 무슨 응용까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거기에 한 번 말해 놓고, 왜 기억을 못 하냐고 그러잖아요!”
둘이 저렇게 짝짝쿵이 잘 맞으니 할 말이 없어진다.
말거리가 궁색해진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메이린. 자네의 마법 실력은 글러 먹었지만, 이론만 잘 봐도 D는 면할 수 있다. 특히 이론이 전부인 과목도 있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된다.”
“윽. 결국은 류리크 씨한테 벗어날 수 없다는 거네요.”
“그리고 실비아, 너도 이론은 못 하던데. 함께 공부한다.”
갑작스런 폭탄선언에 실비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다.
“에에엑?! 왜, 왜?! 나는 마법 잘 쓰니까, 실기 시험에서 D는 넘을 수 있다고!”
“이미 헤루인 등위인 녀석이 D 넘긴 걸로 만족할 거냐? 헛소리 말고, 너도 함께한다.”
“시, 싫어어어엇!”
* * *
스터디가 끝난 건,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하루 일과 같던 도서관이 생략되었지만, 어차피 필요한 책들은 대부분 읽은 터라,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아마 당분간은 안 가지 않을까 싶었다.
‘고르디 여사가 아쉬워하겠군.’
그래도 괜찮은 교양서적들도 많으니, 시험이 끝나면 종종 들러야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프라레 구이스토로 향했다.
“류리크 씨, 우리가 고생하긴 했는데… 여기서 밥을 사줄 정도인가요?”
“왜? 사줄 때 맛나게 먹어라.”
“그게 아니라… 사실 우리를 가르치느라 고생한 건, 당신이잖아요.”
“그걸 알고 있다니 마음이 따뜻해지는군그래.”
그리 말하며 발걸음을 계속하자니, 메이린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자기가 고생해 놓고 밥을 사준다니… 제가 알던 류리크 씨가 아닌데….”
“에이~ 메이린 씨!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류리크 씨는 기본적으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지만, 가끔은 좋은 점도 있다고!”
순간 저 둘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만 힘겹게 참아냈다.
그렇게 실비아가 메이린에게 어깨동무까지 하며, 어찌저찌 프라레 구이스토까지 도착했다.
—으헝헝! 이 맛이야! 이 맛!
—시, 실비아 씨. 목소리 좀 낮춰요. 주변에서 다 쳐다보잖아요.
—히끅. 하지만… 하지만 너무 맛있는걸?!
—하우우. 시, 실비아… 씨이…!
1시간 전부터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던 실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스테이크를 썰었고, 메이린은 그 옆에서 퍽이나 곤혹스러워했다.
동시에 그녀는 스테이크를 써는 내내,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양은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맛으로 만족했다! 류리크 씨,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래.
순식간에 6인분을 해치운 실비아가 배를 두드리며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내내 이쪽을 신경 쓰던 메이린이 입을 열었다.
“맛있게 먹었으니까, 이제 말해요.”
“뭘 말인가?”
“모른 척하지 마요. 당신이 이유 없는 선의를 베풀 리가 없잖아요.”
“나는 종종 고아원과 신전에 기부도 하는 사람이다만?”
“적어도 당신이 고생해 놓고서, 도리어 밥 사줄 만큼 마음이 넓은 사람은 아니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의 그 눈! 꿍꿍이가 숨어 있다고 말하는 거 같은, 그 의미심장한 눈! 그걸 보면 알 수 있다고요!”
무슨 해외 드라마에서 나오는 형사의 직감도 아니고, 눈을 보면 알 수 있다니.
참으로 신박한 헛소리… 처럼 들리긴 했지만, 놀랍게도 그건 정답이었다.
“자네가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어 애석하다만, 뭐… 자네가 그토록 바라니 어쩔 수 없지.”
나는 퇴근 직전에, 야근시키는 상사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사람들을 좀 불러줘야겠어.”
* * *
보통 상인은 대학을 다니지 않는다.
대체로 아카데미와 같은 시설에서 고등교육까진 이수하지만, 그마저도 인맥을 만들기 위해 다닌다고 봐야 한다.
상인 가문의 인간은, 어려서부터 상재를 깨우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에 눈을 뜨지 못하면… 그대로 낙오자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메이린이 대학에 간다고 했을 때는, 끝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지? 걔가 거기서 마법을 배울 것도 아니고, 뭘 한다고 해 봐야 괜찮은 남자애한테 붙어먹는 거밖에 없을 테니까.”
말하는 여자의 얼굴은 꽤나 붉은 기색을 띠고 있다.
나름 감정을 꾹꾹 눌러 참는듯하지만, 얼굴은 물론 목소리에도 노기가 서려 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북부에 손을 댄 걸까? 왜 북부에서 상회를 만든답시고 설치는 건데? 차린 음식점은 파리만 날리고, 제대로 하는 사업도 없는데, 왜 상회라는 간판을 단 건물은 계속 갖고 있는 거냐고? 응? 응응?”
남자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답한다.
“궁금은 하지만,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아. 애초에 너 그거… 병이라고.”
“병? 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병이라니? 이건 병 같은 거 아니야. 당연한 인간의 마음이라고. 너도 알잖아? 그년이 뭐라고 했는지.”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여자의 얼굴이 팍 일그러진다.
“야, 기억 날조하지 마. 걔 그렇게 심한 말 안 했어. 그냥 니가 질투하는 거지.”
“뭐? 질투? 질투? 질투우우? 내가 걔를? 걔를? 질투? 한다고?”
“소름 끼치니까 그만 대화하자. 후우.”
슈펜은 괜히 왔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여자는 그의 손목을 덥석 붙잡으며 말한다.
“기다려 슈펜. 같이 생각하자고. 너 이러고 가면, 나 오늘 잠 못 자. 못 잔다고.”
“…돈 받는다?”
“줄 테니까 앉아. 그리고 생각해 봐. 걔가 왜 북부에 관심을 둔 걸까? 왜 포기하지 않는 걸까?”
후우, 슈펜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생각나는 대로 대충 말했다.
“자브레 영지에서 꽤 성공했었잖아. 북부에서도 뭔가 해 보려는 거 아니겠어?”
“상회 만드는 거는 이미 대차게 말아먹었다고 말을…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그 돈은 어디서 났대? 말아먹는 것도 말아먹을 돈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메이린이? 돈을? 어디서?”
“로하나, 일단 진정….”
“이상! 하잖아! 걔가 돈이 어디서 나? 아이율라가 걔한테 돈을 쥐여 줬을 리도 없잖아? 응? 응응?”
정신병 걸릴 거 같군, 슈펜은 중얼거리면서 여자의 눈치를 본다.
“뭘까. 뭘까. 뭘까? 돈은 어디서 났고, 왜 북부에 투자하는 걸까? 왜 북부를 포기하지 않는 걸까? 성과도 없는데? 왜? 왜? 미련을 갖는 거냐고!”
“에휴, 왜 어렵게 생각해? 개인적으로 아는 돈줄이 있거나, 어디서 ‘대박 터질 거다.’라고 주워들은 정보가 있거나. 그런 거겠지.”
“돈줄… 정보? 걔 학교에서 어울리는 애들, 별거 없잖아?”
알아본 바에 의하면, 메이린은 그냥저냥 괜찮은 마도 가문 인간들이랑 어울린다고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봐도 그들이 돈줄이기엔 무리가 있다.
메이린이 말아먹은 사업은 귀족의 용돈 정도로 될 수준이 아니니까.
“돈줄도 이상하지만, 북부에 미련 갖는 이유가 뭔데? 정보랄 게 있어? 너도, 나도 모르는 정보가 어디서 나서? 샤프란에 북부의 인간이 있나? 메이린한테만 슬쩍 정보를 주거나, 뭔가. 뭔가. 뭔가… 아무튼 그런 거 있을 만한 인간!”
“그 뭔가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그 넓은 샤프란에 북부의 인간이 한둘이겠어?”
그때 슈펜은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친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꽤 소문을 몰고 다니는 녀석이 하나 있지.”
“누구? 누구? 누군데? 누구냐고!”
진정해 봐, 미친 고릴라. 슈펜은 여자를 살살 달래며 말했다.
“너도 들어는 봤을걸? 류리크 아스트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