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62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62화
062
—북부로 가라.
그 한마디에 메이린은 북부까지 달려왔다. 오면서 실시간으로 그녀의 수족들에게 상황을 보고 받았고, 오덴아일름 영주성에 영주들이 모였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다만,
“슈펜이라는 자가 안에 있다고?”
“예.”
“………….”
기가 막혔다.
슈펜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도.
눈앞의 이 시종이 슈펜의 이름을 듣고도 못 알아본다는 것도.
메이린은 고민했다.
‘슈펜… 슈펜… 슈펜… 이란 말이죠.’
제국에 살면서, 특히 상업(商業)에 종사하는 자로서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름을 알기에 걱정이 앞섰다.
슈펜이 누구이고, 지금까지 무엇을 이룩해냈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그렇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메이린은 일단 움직였다.
그녀는 한달음에 회의실까지 달려왔고, 그 문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자리에 모여주신 북부 동맹의 여러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이미 슈펜의 ‘말’은 시작되고 있었다.
—여러분 모두 한 통의 편지를 받으셨을 겁니다. 그 안에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있었죠. 다름 아닌 류리크 아스트레이의 토지 투기.
그리고 거기서부터 슈펜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와 류리크 씨의 투자를 단순한 땅 투기로 왜곡시키려는 거군요….’
여기까진 그러려니 했다.
쉽지 않겠지만, 오해를 풀고 대화하면 어떻게든 가능할 수도 있겠지, 싶었다.
하지만,
—약속드리겠습니다. 레펜하이르 백작님. 3년. 3년 안에 백작님의 영지를 농토로 바꿔, 일 년 내내 비지 않는 곡창(穀倉)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저는 북부에 학교와 도서관을 세우겠습니다. 우리의 후손이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단순히 오해를 풀어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슈펜은 애초에 자신과 류리크가 만들려는 상회보다, 월등히 뛰어난 조건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하나하나, 영주들의 가장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길 수 없어.’
메이린은 돌아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무리 골몰해 봐도. 저 분위기를 뒤집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그러고 보니, 류리크 씨가 주머니에 뭔가를 써줬었는데….”
위기라고 생각했을 때, 도저히 방도 떠오르지 않을 때. 하나씩 열어 보라고 했던 주머니.
메이린은 ‘1’이라 쓰인 주머니를 열었다.
그즈음 슈펜의 연설은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북부의 내일을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부를 위하여!
그의 피날레에 맞춰, 영주들이 한 목소리로 호응한다.
—북부를 위하여!
—북부를 위하여!
—북부를 위하여!
그리고 메이린은 결심했다.
“…………….”
앞으로 나아가기로.
“아스트레이 대공작가의 차남.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의 대리자, 메이린 벨테인 폰 얀츠크네 아이율라 영애께서 들어오십니다.”
* * *
회의장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것은 터지려는 분노 직전의, 아주 짧은 소강(小康)이라는 것을.
“여기가 어딘…!”
“어딜 감…!”
예상대로 터져 나오는 영주들의 격노.
메이린은 그 즉시, 품 안의 확성 마법 아티팩트를 가동했다.
“2년 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잔잔한 목소리.
목소리가 고저가 없는 차분한 목소리.
그럼에도 이 회의장 구석구석까지 퍼지는 음량. 작은 소녀의 몸에서 나왔다고 보기 어려운, 그 소리에 아주 잠깐, 영주들의 말문을 잃는다.
그리고 메이린은 말한다.
—저들이 ‘경청’할 수밖에 없는 이름을.
“당주 대리에 취임한 류미엘 아스트레이 님은 직접 제도에 있는 상련을 방문하였습니다.”
류미엘 아스트레이.
그리고 상련.
류리크 아스트레이라는 이름에 정신이 팔려 분노하던 영주들이 멈칫한다.
“그때 류미엘 님이 말한 것은, 그렇지요. 저자가 말한 것과 같았습니다. 북부에 대한 투자. 함께 나아가는 공생.”
그런 일이 있었던가, 영주들 사이로 파문이 인다.
당장에 수군거리거나,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는 않지만. 분노로 점철되어 있던 저들의 마음에 혼란이 아로새겨진다.
“그때 저들이 무어라 답했는지 아시나요.”
그 혼란 사이로 메이린은, 독을 풀기 시작한다.
“아시겠죠. 그 결과가 지금의 북부이니까요. 농토도 없고, 신전도 없고, 길도 나 있지 않고, 학교도, 극장도 없는… 그런 북부 말입니다.”
탕, 듣고 있던 영주 중 하나가 탁상을 치며 소리친다.
“이봐, 애송이! 그래서 너는…!”
—쾅!
메이린은 전력으로 탁상을 내리쳤다. 그리고 감히 북방의 귀족들을 앞에 두고, 일갈(一喝)한다.
“왜!”
메이린의 작은 몸에서 흘러나오는 패기에, 반발하던 영주가 움찔한다. 그리고 그 찰나의 틈 사이로, 메이린의 말이 이어진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아니, 여러분은 진정 모르시는 건가요?”
갑작스레 왜 저런 말들을 늘어놓는지,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영주들은 맥락을 짚지 못한다. 그저 혼란스러워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게 메이린이 바라던 바였다.
—저들의 침묵은, 곧 자신이 말할 기회인 셈이니까.
“세르베스 자작님. 북부는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빌어먹을 곳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왜 북부에 길이 없는지, 그 이유를 아시나요?”
“그건 잘….”
“만일 설원의 사자들이 영원의 벽을 넘었을 때, 그 진군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
“…………!”
그건 사실 모두 알고 있던 것이었다.
북부에 왜 도로가 나 있지 않은지. 북부가 왜 이민도 받지 않고, 대대적인 개척을 하지 않는지.
모두가 알고 잊되, 모두가 잊어버렸던 사실이. 그 뼈아픈 무언가가…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덴아일름 후작님. 북부에 학교를 세우려 하셨을 때, 왜 실패하셨습니까?”
“중앙의 교육국에서 북부로는 교원을 파견할 수가 없다더군. 그래서 개인적으로라도 선생을 모아 보려 했지만….”
“중앙의 교육국에서 막아섰죠. 정식 허가를 받지 않은 교원은 학생을 가르칠 수 없다고.”
메이린은 이어 다른 영주의 이름을 말한다.
“샤크미나 자작님. 자작님께서는 평소 즐겨보시던 극단에 내방(來訪)해 달라 요청하셨습니다. 간이 무대도 만들고, 충분한 사례도 지급한다 했는데… 그럼에도 거절당하셨지요. 왜입니까?”
“…북부는 길이 나 있지 않아 내방이 어렵다고….”
그리고 그 길은 앞서 말했듯, 중앙의 정책 때문에 막힌 것이었다.
“레펜하이르 백작님. 설원으로 농토로 바꾸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 아실 겁니다.”
“그, 그렇지?”
“그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 농토는… 누구의 것입니까? 설마 상련이 경작권도 받지 않고, 순수한 호의로 그 비용을 내놓겠습니까?”
“………….”
레펜하이르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전에는 영지민이 굶주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약간의 이성을 되찾아 생각해 보니… 상련은 마음씨 좋은 자선사업가가 아니었다.
“여러분 모두 아실 겁니다. 북부가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건 아주 오래된 역린(逆鱗)을 건드리고 있었다.
기사파와 마도파가 대립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영원의 벽이 존재할 때부터 이어지던.
해묵은 증오를.
“이건 모두 중앙 때문입니다.”
북부의 인간이 불같은 성미를 지니게 된 원초적인 이유.
중앙이 북부의 인간을 야만스럽다고 여기게 된 이유.
그리고 메이린은 한발 더 나아간다.
“북부를 차별하고, 보다 나아지려는 것을 막고, 류미엘 아스트레이 당주 대리의 제안조차 거절했던 저들입니다.”
저들이 류리크와 자신의 개척을 땅 투기로 매도했으니.
“그런 저들이, 왜. 대체 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자신은 그 곱절로 되갚으리라.
“그건… 황위 계승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 * *
황위 계승전.
북부의 군장들이 눈과 귀가 어둡다지만, 그것까지 모르지는 않았다. 현황의 노쇠, 그리고 중앙에서 벌어지는 무언가 불온한 기색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메이린의 말이 낯설지가 않았다.
“북부는 오래도록 정체되어 왔습니다. 도로도 만들지 않고, 고립을 자처했지요. 그 이유는 모두 아실 겁니다.”
영원의 벽.
고래부터 지켜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지켜야 할 이 세계의 끝.
“우리는 영원의 벽을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제국,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지키는 최전선의 첨병입니다.”
“………….”
“정쟁에 휘말려, 사사로이 군을 움직여선 아니 되고,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바 최선을 다해야하기에!”
메이린이 어딘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 말에 여러 군장들이 짧게 시름을 흘린다.
—으음….
—크흠….
그 반응을 면밀히 살피며 메이린이 말을 잇는다.
“류오넬 각하는 그런 북부의 기조를 유지하고자 하셨습니다.”
애초에 그 자신부터 황위 계승전을 포기하고 북부의 군문에 투신한 것이다.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그저 북부를 지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류미엘 아스트레이 님은 달랐습니다. 류미엘 님은 북부의 가난에 슬퍼했고, 굶주리는 민초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상련을 직접 찾았고, 저들은… 늘 그래왔듯 거절했던 것이지요.”
본래 북부의 영주들은 류미엘을 지지하거나, 그에 반대하는 세력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북부를 거절한 중앙’이라는 명제 아래 뭉친다.
—기억이 나는군. 그때 중앙을 쓸어버리고 싶었는데 말이야.
—상련, 이 자식들… 감히 북부를 무시해?
“그리고 얘기는 돌아와 류리크 아스트레이입니다.”
무르익던 분위기가 한차례 가라앉는다.
북부 영주들의 시선에서 류리크 아스트레이는 여전히 망나니였고, 돼먹지 못한 놈이었다. 상회를 만든다고 했을 땐, ‘어차피 미개척지대’이고 ‘좋은 의도’이기에 말에 수긍했을 뿐.
여전히 그들 머릿속의 류리크는 ‘망나니’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길 뛰어넘지 않고서는… 다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메이린은 말한다.
“여러분은 류리크 아스트레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
탐탁지 않은 반응.
메이린은 시간을 오래 주지 않았다. 기다려봐야 저들이 류리크에 대한 나쁜 기억만 떠오를 테니.
곧장 말을 이었다.
“예, 여색을 밝히고, 술과 도박에 빠진 망나니를 생각하시겠죠. 그를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시작은 긍정으로 저들의 생각에 동조하듯 다가선다. 그리고 이어지는 반론.
“하지만 그것도 알고 계십니까. 류리크 아스트레이는 세계 최고의 명문인 샤프란에 입학했고, 북부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크흠.”
“…으, 음….”
영주들의 차가운 반응에 메이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그래도 처음부터 류리크 씨의 얘기를 했으면, 욕만 먹다가 끝났을 게 뻔해요. 이 정도 반응이면… 아직 뒤집을 수 있어요!’
메이린은 말한다.
“류리크 아스트레이는 수백만 리브라를 벌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는 왜 그 수백만 리브라를 유흥에 탕진하지 않은 걸까요?”
“이보게, 그건 땅 투기로 한탕 하려고….”
“그가 진정 땅을 투기하려 했다면, 적자가 나는 상회 같은 건 만들지도, 유지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슈펜이 공격했던 ‘방치된 상회’가 이제는 ‘적자에도 포기하지 않는 상회’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떠올려주세요. 자그마치 수백만 리브라입니다. 여색에 미친 자가, 술과 도박에 미친 자가. 그것을 흥청망청 낭비하기는커녕, 손해까지 봐가면서 어딘가에 투자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사실, 땅을 투기한다는 소리가 좀 이상하긴 했어.
—이 넓은 북부에 미개척지대가 얼마나 많은데.
—상련이라면 류리크가 산 곳 말고, 다른 땅을 사도 되는 거잖아?
영주들이 동조하기 시작한다.
메이린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를 준비한다.
“여러분 모두 아실 겁니다. 류미엘 당주 대리가 화이트밴 남작령의 광산을 매입했다는 걸요.”
그건 꽤 오래된 일이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소문이 늦은 북부의 영주들도, 북부에서 벌어지는 일 정도는 대강 듣고 살기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광산을 매입한 이유 역시, 모두 아실 겁니다. 식량도, 군수품도 모두 중앙에 예속되어 있는 북부를 개혁하기 위해서입니다.”
—북부는 자체적인 식량 생산 능력이 미약해, 매해 군량미를 지원받는다.
—북부는 자체적인 대형 공방이 없어, 군수품을 중앙에 의존하고 있다.
본래 중앙은 황실에서 황위 계승전을 벌이든 말든, 북부를 지원해왔었다.
하지만 언제나 정쟁에 뛰어들 준비가 된 상련의 북부 개입이 가시화된 이상, 더 이상 그것에만 기댈 수는 없게 되었다.
“제가, 그리고 류리크 아스트레이가 상회를 발족하려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모두 중앙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지요.”
다만 영주들은 아직도 류리크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기에.
메이린은 곧바로 이어 말한다.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저와 류리크 아스트레이는 결코 토지를 투기할 목적이 없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계약서에 새로이 기재될 것이며, 프레이야 여신께 맹세코 이를 지키겠습니다.”
계약서에 기재하겠다는 데서 오는 작은 신용. 그리고 북부의 신앙인 중 대부분이 프레이야 여신을 섬긴다는 사실.
이 사소한 디테일이 몇몇 영주의 마음을 건드린다.
그리고 메이린의 말은 멈추지 않는다.
“북부의 동맹 여러분. 우리는 중앙의 뜻에 따라 고립을 강요받아왔고, 끝없는 차별을 겪어야 했습니다.”
“………….”
“우리가 영원의 벽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는 동안, 저들은 돈을 위해, 권력을 위해 싸워왔습니다. 거기까진 이해하겠습니다. 저들끼리 싸우고, 저들끼리 흘리는 피니까요.”
“………….”
“하지만 저들은 지금, 우리 북부의 피를 바라고 있습니다.”
“………….”
“저들의 전쟁에, 황위를 노리는 중앙의 전쟁에 대신 흘려줄 피를.”
“………….”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굳세게 뭉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메이린의 말은 끝이 난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개척할 겁니다.”
“………….”
“………….”
환호는 없었다.
박수도 없었다.
메이린의 언변은 분명 슈펜에 비해 힘이 약했다. 말의 논리는 어찌어찌 납득은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동조하기도 어려웠다.
여전히 류리크 아스트레이는 믿기 어려운 사내이고, 결국 상련만큼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하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대의(大意)는 북부 동맹의 가슴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탕.
류오넬의 오랜 전우, 오덴아일름 영주가 일어섰다.
“상련의 상인이여, 유감스럽지만 그대의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네.”
“…………!”
“…………!”
그것을 시작으로 앉아 있던 영주와 영주 대리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류리크 아스트레이와의 계약은 그대로 진행하겠네.”
“북부는 북부 스스로 미래를 개척할 힘이 있어.”
“자네들이 상회를 만든다면 말리지는 않겠네만, 다른 땅을 알아보는 게 좋겠어.”
* * *
모든 영주가 빠져나가고, 회의실에는 단둘이 남았다.
슈펜.
그리고 메이린.
—꿀꺽.
메이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바, 방금 영주들 빠져나갈 때 같이 나갔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타이밍을 놓쳤잖아!’
자신의 어수룩함을 책망하자니, 슈펜이 이쪽을 보며 싱긋 웃는다. 메이린은 깊은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날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짝.
짝짝.
짝짝짝.
느닷없이 슈펜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저 인간이 왜 저러는 거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면서 동시에 다른 생각들이 켜켜이 쌓인다.
“훌륭했어. 메이린 아이율라. 정말… 인상적인 스피치였어.”
“가, 감사해요. 그런데….”
“그런데?”
이걸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메이린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왜… 제 말을 끊지 않은 거죠? 당신이라면 중간에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었을 텐데.”
상대는 슈펜이었다.
물건의 품질이고, 가격이고 상관없이 화술 하나로 말도 안 되는 기적의 거래를 이끌어낸다는, 그야말로 상계(商界)의 천재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메이린의 말에 얼마든지 태클을 걸고, 판도를 뒤집을 수 있었을 텐데.
“네가 좋아졌거든.”
“네, 네에엣?!”
사람으로서 좋다는 말이야, 슈펜이 넉살 좋게 웃으면서 말한다.
“메이린 아이율라. 네게 제안을 하고 싶어.”
“제안… 이요?”
“혹시 독립해 볼 생각 없어?”
슈펜의 얼굴엔 자애로운 미소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표정의 어딘가가 섬뜩하다고, 메이린은 생각했다.
“너도 알 거야. 네가 엽을 받아 상련의 일원이 되고, 아이율라를 상련에 소속시킨다고 해도… 당주 자리를 이을 수 없다는 거.”
“………….”
이전에 류리크와 얘기했을 때도 이런 얘기가 나왔었다. 결국 아이율라의 당주는,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자리라고.
“아이율라에서 벗어나 나와 함께 일하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내 곁에 있게 되면, 운용할 수 있는 자금, 접촉할 수 있는 사람, 유통할 수 있는 물자… 이 모든 게 달라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결국은 당신의 수하가 되라는 거네요?”
“아니, 나를 이용하라는 거야. 내가 가진 자금, 배경, 인맥… 그것들을 이용해서 너 자신을 성장시키라는 거야.”
메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게 무슨 소리죠?”
“나와 함께 일하다가, 언제든 네가 바랄 때 독립해도 좋아. 네가 준비되었다면, 그 즉시 독립해서… 아이율라를 네 것으로 만들어.”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그건 너무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좋은 소리였으니까.
“당신이 얻는 이득은 뭐죠?”
“메이린 아이율라, 너라는 사람을 알게 되고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된다는 거.”
“………….”
“상인의 가장 큰 자산은, 결국 사람이다. 너도 이 말은 알잖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를 믿기 어렵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
“내 이름에 걸고 맹세할게.”
흠흠.
한 차례 헛기침을 한 슈펜이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은 어딘가 어수룩하고,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 같은 모습이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내 이름은 슈펜 바타체스 폰 오레이드 이실리엔. 로마노프 제국의 심장을 품고, 바타체스의 피를 흘리는 자.”
부드러우면서도 강함을 잃지 않은 어조.
그 안에 담긴 단단한 의지가 드러나는 목소리.
“그리고 언젠가 권좌(權座)에 앉을 이실리엔의 이름을 잇는 자.”
로마노프 제국 제 2황자의 아들, 슈펜 이실리엔이 말한다.
“내가 너를 아이율라의 당주로 만들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