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75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75화
075
7월의 별관.
오롯이 학생 한 명을 위해 존재하는 샤프란의 기숙사 별관. 그 테라스에 아르민과 레베카가 있었다.
아르민은 테라스 안의 그림자 진 곳에 몸을 감추듯 숨어 있고, 레베카는 보고서와 함께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요새 북부가… 꽤 떠들썩한 모양이더군.”
시럽이 잔뜩 들어간 커피를 홀짝이며 레베카가 말한다.
“신기한 일이지 않나. 자기들만의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 그렇게 바뀔 줄이야.”
“류오넬은 굉장히 보수적이었지만, 류미엘은 성향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녀가 당주 대리를 맡게 되었을 때부터, 북부의 변화는 예견된 것이었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전의 정보국 보고서에도 그런 부분이 분명 적시되긴 했으니까. 하지만,
“예상대로였다면 그 변화라는 건, 생각보다 별거 아닌 채로 끝나거나… 굉장히 오래 걸렸을 터였다. 류미엘이 당주를 맡은 지 수년이 지났건만, 그동안 바뀐 게 없지 않은가.”
류미엘이 조심스럽고 추진력이 약하다는 정보국의 분석은 타당했던 게지, 레베카가 덧붙인다.
“다만 류리크 아스트레이가 들어서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지.”
“………….”
“영원의 벽을 지키는 방패, 영원한 중립 지대… 그렇게만 여기던 북부가 본격적인 세력화가 시작되고 있으니 말일세.”
그동안 북부는 그다지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다. 군사력은 강하지만 그 대부분이 영원의 벽을 벗어날 수 없고, 중앙의 지원이 끊기면 아무런 힘을 못 쓰니까.
황위에 앉은 것이 아닌, ‘황위를 다투는 입장’에서는 어떤 쪽으로든 신경 쓸 만한 곳이 아니었다.
‘중앙이 미쳐서 황태자나 2황자의 편을 들라고 압박하지 않는 이상, 북부가 움직일 리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북부가 중앙에 예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내면, 영원의 벽을 지키는 병력 일부를…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운용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마셰우스의 장녀가 세상을 읽는 눈은 깨어 있는 듯하군요. 실패하긴 했지만, 일찌감치 북부에 눈독을 들였으니까요.”
레베카가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그건 어중간하게 앞날을 보아 생긴 착오다.”
“그렇… 습니까?”
“일단 그녀가 황위 계승전을 예상했는지도 의문이고, 만일 북부가 ‘투자처’로 매력이 있었다면, 왜 상련의 다른 이들이 움직이지 않았겠나.”
그녀의 지적에 아르민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러고 보니… 상련의 중진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군요.”
“북부는 제국 내에서 황실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합법적인 ‘징발’을 할 수 있다. 상련이 거금을 들여 할카데르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지었다가, 그대로 빼앗긴 건 꽤 유명한 일화였지.”
그것도 벌써 20년 전의 일인가, 레베카가 중얼거린다.
“투자를 해도 그걸 그대로 빼앗길 위험이 있고, 심지어 예측불허의 변수인 류오넬이 아직 건재하다. 투자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큰 것이지.”
곰곰이 생각을 하던 아르민이 무언가 깨달은 듯, 불쑥 질문을 던졌다.
“레베카 님, 그러면 류리크는 로하나 마셰우스가 토지를 매입하고 난 뒤, 징발로 빼앗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것도 가능하겠지만… 징발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극야와 같은 전시 상황에만 가능하지.”
그리고 류리크는 한시라도 빨리 북부를 바꾸고 싶었을 테니 그걸 기다릴 수 없었던 거고. 레베카가 덧붙인다.
“여하간 류리크 아스트레이가 두각을 드러내면서, 북부의 중요성은 높아지고 있다는 게지.”
“정보국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로하나와 함께 2황자 측의 슈펜이 나섰던 만큼… 2황자 측도 북부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레베카가 은근한 눈치로 슬쩍 묻는다.
“걱정되나?”
“그렇지 않다고는… 말씀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자네 얼굴이 어두운 건 오랜만에 보는 듯하군, 레베카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한다.
“걱정할 거 없네. 본녀의 마성은, 문자 그대로의 마성. 가만히 있기만 해도 남자라는 것들은 알아서 넘어오지.”
“류리크 아스트레이는 조금 다른 듯합니다만.”
“다르기야 하지. 위르겐하이에서 놀았던 과거의 정보로 판단해 보자면 자제력 따윈 눈곱만큼도 없을 텐데… 의외로 잘 버티고 있으니까.”
레베카의 마성은 동성과 이성의 구분 없이 사람을 홀리게 만든다. 그것을 버텨내는 것은 오로지 자제력과 인내심의 영역.
그런 의미에서 류리크는 꽤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점이 있을 테지.”
실제 류리크는 레베카와 가까이에서 눈 마주치는 것을 꺼리며, 단둘이 있을 때는 향초 없이 견디기 어려워한다.
레베카나 아르민이 그것까지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다.
—류리크의 정신력이 결코 무적이 아님을.
“본녀가 진지하게 그 남자를 공략하고자 한다면, 그가 며칠이나 버틸 수 있겠나?”
“………….”
“애초에 과거에 비슷한 문답을 주고받지 않았던가.”
이번 데이트의 시발점.
류리크와 레베카가 계약 연애라는 관계를 맺은 직후에, 그녀는 아르민에게 말했었다.
—내기하겠나. 아르민?
—무엇을… 말입니까.
—이 계약 연애라는 것이 끝나기 전에, 류리크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
그리고 분명 아르민은 이렇게 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이미 결말이 보이는 이야기에는 흥미가 없는지라.
아르민도 그렇게 대답했던 기억은 갖고 있다.
다만,
“………….”
어딘가 묘한 불안감이 잔향처럼 남아, 그 주위를 맴돌았다.
* * *
—류리크 아스트레이, 데이트를 하도록 하지.
— ………….
—내일, 입학처 앞에서 보도록 하지.
— ………….
—이의, 반론, 일정 및 장소 변경 등은 일체 용납하지 않는다.
리아가 경고하기 무섭게, 레베카에게서 연락… 아니, 일방적인 통보가 날아들었다.
덕분에 내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기말고사도 끝났겠다, 내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하던 와중에 폭탄이 떨어진 셈이었으니까.
‘심경의 기사, 야를을 제대로 소환할 수 있게 된 것은 좋다만… 그 지속시간이 극단적으로 짧다.’
‘당장은 새로운 마법을 배우고, 마도 랭크를 상승시키는 것보다 마력량의 증가가 중요하다.’
‘모모란의 특제 단약 같은 게 없는 이상, 혈석을 무리하게 부술 순 없으니 다른 방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데이트라, 정말 귀찮군.”
가감 없이 우울감을 드러내며 그리 말하자니, 내 몸에 옷을 가져다 대던 리아가 말한다.
“그 발언, 연인을 둔 남자로서 최저군요.”
“레베카와 본인은 연인이라는 형태의 계약을 맺은 것에 불과하다만?”
“그래도 그 형태가 연인이라는 것은 변함없지 않습니까.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 아니, 절망적으로 없으시군요.”
이거 참.
나뿐만 아니라 레베카도 데이트를 귀찮아할 게 뻔한데,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든다.
“아, 참고로 자네와의 데이트는 무척이나 즐겁다네.”
리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데이트가 아니라, 의복점에서 류리크 님의 데이트 의상을 골라주는 것뿐입니다만?”
“남녀가 둘이 밖으로 나와 의복점에서 이성의 옷을 골라준다니, 이게 데이트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후우, 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류리크 님의 패션센스가 절망적이지만 않았다면, 아니… 하다못해 소저택에 그럴싸한 옷만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패션센스가 절망적이라니, 리아. 비약이 심하구나.”
리아가 휘어진 눈썹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절망을 운운하려면 저번 개교 기념 파티 때, 실비아가 입으려 했던 드레스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에 반해 본인은 멀끔한 정장을 좋아하니, 과히 나쁘지 않다. 나는 그리 덧붙였다.
“후우, 애석한 일이군요. 소인이 류리크 님을 모신 지가 3년이 넘어가는데, 깨닫는 것이 늦었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류리크 님의 패션이 멀끔한 정장 원 패턴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지요.”
“누차 말하지만, 본인의 패션센스는….”
“심지어 그 정장조차 제가 고른 것이었습니다. 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할 말이 궁해져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리아는 하던 대로 계속 다른 옷을 가져와 내 몸에 가져다 댄다.
“그래도 류리크 님의 신장, 체형은 꽤나 이상적이라, 무슨 옷이든 대체로 잘 어울리는군요.”
“훗, 이래 봬도 나는….”
“이것과 이것, 그리고 저기에 놔둔 것 전부. 피팅룸에서 한 번씩 입고 나와 보시면 됩니다.”
어라.
대충 눈대중으로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게 아니었나?
“리아, 한 번씩 시착을 해보기엔 옷이 너무 많….”
“류리크 님. 소인의 휴일이 실시간으로 희생되고 있다는 점을, 부디 유념해주셨으면 합니다.”
순간 집사한테 휴일이 어디 있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만.
“후우.”
나는 한숨을 쉬며 피팅룸으로 향했다.
1시간 뒤, 리아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나섰다. 나보다 작은 소녀가 짐을 한가득 들고 있으니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들어주랴.”
“어차피 모두 의복이라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그리고 류리크 님은 제가 ‘모시는’ 분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하여간 빈틈없기는.
“잔소리는 이제 끝이더냐.”
“아직 하나 남았습니다.”
리아는 표정이 어딘가 차가워졌다. 원체 무표정이 디폴트인 녀석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한층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레베카 이실리엔을 사랑하셔도 좋습니다. 두 분 다 성인이시니 잠자리를 가지셔도 좋고, 법에 저촉되지 않는 이상 무엇을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
“다만 바라 건데, 부디 레베카 이실리엔을 ‘추종’만은 하지 마십시오.”
추종이라.
아마 리아도 레베카의 마성(魔性)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터. 그 부분을 우려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아스트레이의 당주에 가까워진 내가 레베카에게 홀려 추종하게 된다면 썩 골치 아플 테니까.
“그 점, 유념토록 하지.”
* * *
데이트 당일, 레베카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고 평소처럼 일찍부터 수련을 시작했다.
가볍게 달리고,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사용한다. 그렇게 적당히 땀을 뺀 뒤에는,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빵과 샐러드로 조식을 먹는다.
그 뒤에는 차와 함께 조간신문을 읽으며 일과를 시작했고… 데이트 약속 시각 15분 전,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을 듯하군,”
레베카는 몸에 무엇을 걸치든 얼굴로 패션을 완성해버리는 부조리한 외형을 갖고 있었기에, 사실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고는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아르민의 시선은 어딘가 딱딱하게 굳어 있다.
“………….”
그를 파악한 레베카가 넌지시 묻는다.
“아르민, 본녀의 옷차림이 이상한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완벽하십니다.”
“헌데 자네의 표정이 어둡군그래.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아르민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진다. 그의 눈에는 지금 아주 격식 있는 정장 차림의 레베카가 보였다.
정장.
연회에나 입을 법한 정장.
보기만 해도 딱딱해 죽을 것 같은 정장.
심지어 남성용.
“정장이 이상한가? 하지만 류리크는 정장을 좋아한다네.”
“………….”
“요컨대 그의 취향에 맞춘 것이지. 정보국의 보고서를 통해 분석한 것이니 틀림없다네.”
아르민은 위화감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레베카인데, 어째서인지 레베카가 아닌 거 같다.
뭐랄까. 똑똑한 바보 같은 느낌이랄까.
‘설마….’
아르민은 불안한 속내를 감추며 입을 열었다.
“레베카 님, 데이트 코스를 직접 짜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걱정할 거 없다네. 아르민. 이 역시 정보국의 분석을 토대로, 류리크가 가장 좋아하는 곳을 선정했으니.”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류리크가 가장 좋아하는 도서관이네.”
말이 이상했다.
데이트 코스를 물었는데, 장소가 ‘하나’ 나왔다.
아르민의 고개가 15도 더 옆으로 기울어졌다.
“코스인데… 도서관 한 군데가 전부입니까?”
“뭐, 도서관 근처를 걷는 과정도 있을 테니… 걷기 데이트? 그런 것도 있는 셈이지.”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 레베카는 정말 순수한 얼굴로 물었다.
그걸 보며 아르민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았다.
레베카는 어려서부터 제왕학을 익히고, 경제, 군사, 외교 등에 대한 서적들을 섭렵하다시피 읽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군주가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배운 셈이다.
—하지만 그 안에 연애는 없었다.
레베카는 자신의 마성을 바탕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일방적인 호의와 사랑을 받아왔다.
개중에는 분명 지독한 형태의 무언가도 존재했지만, 결국.
—레베카는 사랑을 받기만 했을 뿐, 누군가에게 줘본 적이 없다.
이제껏 의미 있는 이성 관계를 맺지 못했고, 데이트라고 부를 만한 것도 해본 적이 없다. 가만히 있어도 상대방이 모든 걸 다 바쳤으니까.
그 결과가 바로 눈앞의 레베카였다.
“류리크 아스트레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놈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데이트를 한다. 지금까지는 본녀의 마성에 대해 꽤나 잘 버틴 듯하지만….”
아르민은 참담한 마음에 눈을 감았고, 레베카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 데이트를 기점으로, 류리크 아스트레이는 본녀를 추종(追從)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