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78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78화
078
레베카가 삐쳤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직감적으로 그게 느껴졌다.
‘분명 내가 아는 레베카는 무표정이 디폴트값이고, 감정이라는 게 거의 드러나지 않는 캐릭터일 터인데….’
오페라를 본 직후에는 무언가 싱글거리면서, 썩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내가 손잡는 걸 피했더니, 그때부터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습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그저 저희 프라레 구이스토를 방문해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님. 레베카 바타체스 폰 레온하르트 이실리엔 님.”
종업원이 음식을 놓고 갔지만, 레베카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안 먹을 텐가?”
“………….”
그리고 머릿속에 가설이 하나 떠오른다. 만일 여기서 내가,
―일단 말하자면 음식이 나왔음에도 먹지 않는 것은 이상한 행동이고, 주변에서 보았을 때 우리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괜한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 우리가 연인 행세를 하는 것 아닌가. 이 정도는 협조해주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난 대로 말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손잡는 것도 협조하지 않으면서, 뻔뻔하군그래.
왠지 그런 대답이 돌아올 것 같다.
그렇다면,
“카르사 콘트라테의 로비에서 있던 일은 내 사죄하겠네. 부디 음식을 들어주게.”
“………….”
“내 사죄의 의미로, 북부에서 슈펜과 있던 일을 얘기해주겠네. 자네가 보고서로 받지 못했을, 흥미로운 내용으로 말이지.”
“사과를 받아들이지.”
사(私)에 공(公)을 끌어들이니 태세전환이 빠르구만.
“다만 그 대화는 조심할 필요가 있으니, 이걸 사용토록 하지.”
—한낮의 밀회.
이전에 레베카가 사용했던 밤하늘의 커튼처럼, 주변에 대화 내용을 들리지 않게 만드는 아티팩트였다.
다만 밤하늘의 커튼과 달리 이쪽은 한번 쓰면 사라지는 소모성이고, 말소리만 나가지 않도록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별걸 다 가지고 있구만.”
“자네와 나 같은 이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고, 툭 내뱉은 말에 언급해선 안 될 기밀이 담겨 있을 수 있다.”
—서걱.
레베카가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
“그래서… 슈펜, 아니 2황자의 무엇을 말해줄 것인가.”
2황자의 정보를 말해준다고 하진 않았는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실비아가 말했다.
“물려.”
그녀는 프라레 구이스토의 대표 메뉴를 보자마자 넌덜머리가 난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러자 요루아가 동정하듯 대꾸했다.
“어제 10인분을 해치웠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너 지금 나 보고 돼지라고 한 거냐?”
“무슨 소리를! 저는 오히려 누님의 식탐에도 그 체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아마 다른 여귀족들이 알았으면 칼을 들고 일어섰을지도 모릅니다, 요루아가 덧붙인다.
한편 스테이크를 썰던 메이린이 입을 열었다.
“실비아 씨, 아무래도 향신료가 비슷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다른 메뉴를 시킬까요?”
“아니,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고… 먹기야 먹을 건데….”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저 멀리 있는 류리크&레베카를 바라보았다.
“후우, 류리크 씨는 왜 하필 프라레 구이스토로 와 가지고.”
“소스라도 다른 걸 뿌리면 좀 나을 거예요.”
—딸랑.
메이린은 가볍게 종을 흔들어 점원을 부른다. 그러자 빳빳하게 유니폼을 다려 입은 점원이 다가왔다.
“음식은 입에 맞으신지요. 메이린 아이율라 님.”
“네, 무척 맛있네요. 그나저나 메뉴 중에 환장의 핫치킨 소스라고 있던 거 같은데.”
“예. 색다른 맛을 추구하시는 고객님들께 추천드리는 당점의 대표 소스입니다. 스테이크, 리소토, 파스타 어디에 넣어도 어울리는 매운맛을….”
“그거 하나 주문할게요.”
점원은 5% 정도 더 짙어진 미소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환장의 핫치킨 소스는 상당히 매운맛이라, 원하시는 고객분께는 우유를 서비스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함께 준비하도록 할까요?”
“네, 부탁할게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저녁이 되시기를.”
점원이 사라지자, 실비아가 조금 놀란 눈으로 물었다.
“메이린 씨네 가문, 상당히 유명한가 봐. 점원이 바로 알아보네?”
“그런 거 아녜요. 제가 알기로 이곳 점원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한 번 온 귀족들의 신상을 무조건 파악하고 있을 거예요.”
“에? 그런 거야? 왜?”
“두 번째 왔는데, 내가 누군지 모르냐며 난동을 부리는 귀족답지 못한 인간들이 있거든요.”
실비아가 혀를 찬다.
“못돼먹은 인간들이네.”
“그러니까요.”
한편 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다시 류리크, 레베카에게로 향한다. 그녀들 말고도 이미 주변의 수많은 손님들이 저 둘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아닌지, 둘은 생각보다 평범하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도 저 둘, 걱정했던 것보단 꽤 무난하게 데이트를 하고 있네요.”
“그러게. 처음에 도서관 갔을 때는 뭔가 싶었는데.”
“…실비아 누님, 이건 내 생각이다만 일단 저 둘은 입을 열지 않으면… 아니, 말소리만 들리지 않으면 선남선녀 커플로 보이는 것 같다.”
실비아와 메이린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여기서 만약 도서관에서처럼 미친 소리를 하고, 그게 여기저기 다 들렸으면….”
“으으, 끔찍해. 끔찍해. 아마 당장 내일부터 학교에 괴짜 커플이라고 소문이 파다하게 날 거야!”
다행히도 저쪽에서 마법을 쓴 건지, 아티팩트를 쓴 건지. 일체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염탐용 망원경을 써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정말 바로 옆에 있지 않은 이상 주변에서는 말소리를 듣지 못할 터.
“그런데 저 둘은,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 * *
“잘 먹었네.”
“고귀한 두 바타체스의 혈통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레베카 바타체스 폰 레온하르트 이실리엔 님.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님.”
레베카를 달고 다녀서인가.
식사를 마치니 주방장부터 종업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고개를 숙였다.
“황실과 바타체스에 영광을!”
“영광을! 이실리엔과 아스트레이에 영광을!”
무슨 전쟁터에서 귀환한 장병도 아니고, 식당에서 밥을 먹었을 뿐인데 영광 타령이라니. 내버려뒀다간 만세삼창이라도 할 기세군.
내가 눈짓하자, 레베카가 손을 휘적이며 사람들을 물렸다.
종업원들이 물러가자 나는 앞쪽으로 걸으며 입을 열었다.
“늘 이런가?”
“아니, 프라레 구이스토가 좀 유별난 거다. 귀족들을 주로 상대하다 보니, 과하게 저러는 것이지.”
하기사 저런 식의 예우를 안 하면, 괜히 트집을 잡는 귀족이 꼭 한둘은 있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자네가 말했던 그 정석에 따르면, 이제 카페를 가야 할 터인데… 염두에 둔 곳이 있나?”
“글쎄. 특별히 생각한 곳은 없네만.”
“………….”
생각해보면 아까부터 레베카가 ‘내가 원하는 곳’을 묻고 있다. 본래 데이트 코스는 그녀가 짜기로 했을 터인데, 계속해서 나의 취향을 묻고 있단 말이다.
물론 내가 언급했던 일반적인 형태의 데이트 코스의 틀을 지키고 싶어 저러는 것일 테지만.
‘기분이 묘하군. 사실 식당이나 카페는 그녀가 얼마든지 선정해도 상관없는 것들인데.’
아까 이상하리만치 내 손에 집착하던 것도 그렇지만.
지금의 레베카는 무언가 내가 알던 모습과 조금 다르다.
‘연인이라는 포지션이라, 나를 대하는 것이 달라진 건가.’
‘아니다. 게임 속에서 레베카를 공략했을 땐,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군.’
혹시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 계략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상대가 레베카이기에 들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의심들.
하지만,
‘겨우 장소 선정에 모략의 여지가 있을 수 있나. 하다못해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것이라면, 본인이 장소를 선택해야 할 터인데.’
무엇일까.
대체 무엇일까.
‘그저 내가 과민한 것일까.’
나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을 가슴 깊이 밀어 넣으며, 표면상으로 웃었다.
“일단 조금 걷지. 원래 걷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는 것이, 또 묘미 아니겠나.”
* * *
30분 정도 걸었을까, 둘은 「 로팅엘의 봄」이라는 카페에 들어섰다.
—에스프레소로 주게.
—같은 걸 주문하겠네.
배부르게 식사를 한 터라, 디저트는 없이 간단하게 커피만을 주문했다. 그리곤 밖이 잘 보이는 테라스에 앉았다.
“기이하다. 별로 한 게 없었던 듯한데, 벌써 날이 저물고 있구나.”
“그러게 말일세.”
“………….”
레베카는 어딘가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밥을 먹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들떠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건 단순히 저녁놀이 보이면서 감상에 젖어서가 아니었다.
‘…결국,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첫 번째 데이트에 손잡기. 두 번째 데이트에 키스. 그녀가 계획했던 플랜이 어그러졌다. 그렇다고 이제 와, 또다시 손을 잡자고 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더 강요하면, 본녀에게 빠지기는커녕 경계심만 생길 터… 실로 곤란하다.’
심지어 문제의 본질은 결국 해소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주 난처했다.
‘이번 데이트야 그렇다 쳐도, 이후에도 계속해서 진도 나가는 것을 거부하면… 그때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레베카에게 있어 괜한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 연인 행세를 한다,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목표.
그녀의 가장 큰 목표는 데이트(연애)를 하면서 류리크를 그녀의 마성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세운 원대한 계획의 첫 단추와도 같았다.
‘류리크가 내 것이 되었다는 확신이 있어야, 그를 쓸만한 당주로 키우고 내 장기말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인데….’
그때 커피를 홀짝이던 류리크가 말한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조금, 생각할 것이 있어서.”
레베카는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넘어서, 류리크가 자신에게 매달리게끔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이… 무언가… 없을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무엇을 좋아하나.”
“뜬금없군.”
“연인이니 상대방의 호불호에 대해 파악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터다.”
틀린 말은 아니지, 류리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본인은 책을 좋아한다네. 훌륭한 마음의 양식이지.”
“………….”
그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레베카는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다른 것은 없나. 조금… 추상적이어도 좋네. 무언가 지식의 함양 같은 자기계발이 아닌, 순수하게 자네를 위한 무언가는 없나?”
“…난해한 질문이로고.”
“없다면 답하지 않아도 좋네.”
질문이 꽤 흥미로웠던 것일까, 류리크는 의외로 대답할 기색이 가득했다.
“순수하게, 순수하게라….”
“………….”
“생각해보면 본인은… 축제를 꽤 좋아했네.”
“…과거형인가?”
“그런 건 아니고, 애매해서 그렇다네.”
류리크는 어딘가 씁쓸한 듯, 해탈한 듯, 복잡한 미소를 짓는다.
“본래 조용하고, 혼자 책 읽는 것을 즐기지만… 오랜 시간 홀로 있다 보면 외로움이라는 걸 느끼기도 하지.”
“………….”
“그럴 때면 종종, 축제를 구경하러 다녔다네. 가끔은… 사람들이 많고, 모두가 즐겁고, 왁자지껄한 게 썩 나쁘지 않았거든.”
“………….”
“뭐,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 하지 않던가.”
축제인가.
평소 행실, 이미지와 상당히 다르다만. 아무렴 본인이 좋다는데 뭐라 할 수 있을까.
‘도서관도 도서관이지만, 축제에 데려가면 꽤 좋아할 법하군.’
생각해보면 이건 보고서에 없던 정보였고, 꽤 큰 수확이었다.
‘아쉽다면 지금 당장 써먹기는 어렵다는 점인가….’
레베카는 잠시 도시의 풍광을 보듯, 테라스 밖의 길거리를 바라본다.
해는 어느덧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듯 저물었고, 보랏빛 하늘 아래 하나둘 상점가의 불빛이 들어온다.
그리고 여전히 수많은 인파가 길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오빠! 우리 저거 해보자!
—와, 이 핫도그 엄청 맛있어! 정말로 마약을 집어넣은 건 아니겠지?!
—야시장 꼭 와보고 싶었는데! 우리 재미있게 놀다 가자!
—다른 애들도 꼭 남자 친구 생기면, 야시장 가볼 거라 그랬는데….
레베카의 귀에 상당히 흥미로운 단어가 들렸다.
‘야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