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82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82화
082
도서관에서는 특별히 성과는 없었다.
정보가 있기는 했지만,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히든 피스에 대한 것들.
얻어낸다면 분명 레베카의 마성에는 충분한 저항을 갖출 수 있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
‘루시아사가의 히든 피스는 하나같이 까다로운 조건과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으니까.’
치트 플레이 방지라고는 하나, 정말 귀찮은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억지로 구하자면 못할 건 없지만… 기회비용도, 리스크도 너무 크다. 이런 것들보다는, 당장 내 주변에서 쉽게 얻을 만한 것이 필요한데….’
도서관 입구를 막 나서자니,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류리크 씨!”
실비아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곁에는 메이린과 요루아도 딸려 있었다. 다만 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류리크 씨! 성적 공개됐대!”
“아, 그런가.”
원래는 월요일에 공개되어야 했는데, 기초 신성 마법의 시험이 미뤄지면서 석차 공시도 지금 이뤄지는 것일 터다.
“반응 보니까, 아직 확인 안 했나 보네?”
“너는 확인했나?”
“아직! 지금 같이 확인하러 가자!”
성적에 자신이 있는 건가, 실비아는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긴 실습 평가에서는 대부분 만점이거나, 그에 준하는 성적을 받았을 터. 이론도 내가 때려 박듯 가르쳤으니… 꽤 상위권이겠어.’
나는 그길로 학내 게시판을 향해 걸어갔다.
—마, 말도 안 돼. 내가 200등도 못 하다니…!
—큰일 났다. 이 성적이면, 가문에서 학교 때려치우고 결혼이나 하라고 할 텐데!
—107등… 그럭저럭이네….
—레베카는 알겠는데 쟤는 뭐야? 뭔데 성적이….
수석부터 말석까지.
그야말로 게시판 전체를 메운 종이에는 샤프란의 모든 학생의 이름과 함께 그 순위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나는 그에 다가서, 좌측 상단을 확인한다.
—수석,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차석, 레베카 바타체스 폰 레온하르트 이실리엔.
—3위, 크로니아 헤루인 폰 오로 카운슬로.
…
실비아가 팍, 얼굴을 구겼다.
“아니… 뭐, 예상하긴 했는데… 류리크 씨가 진짜로 수석을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당연한 결과다.”
본래 주인공과 함께할 메인 캐릭터들은 내년에 대거 입학한다. 아마 내가 평범하게 내년에 입학했더라면, 수석은 어림도 없었겠지.
‘그러고 보니… 크로니아도 있었군.’
그 밖에도 본래 ‘한 학년 선배’라는 포지션에서 주인공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끼쳤을 네임드 NPC들의 이름이 보였다.
당장은 다른 분반이라, 얼굴 마주칠 일도 없어 보진 못했다만… 이후 이런저런 이벤트에서 마주치게 될 이들.
그 이름들을 천천히 곱씹자니, 실비아가 말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잘난 척하던 류리크 씨가, 사실은 시험 망치길 바랐는데!”
“심보가 아주 글러 먹었구나.”
“낙심했으면서, 괜히 괜찮은 척하는 류리크 씨를 놀리고 싶었는데!”
철 좀 들어라, 나는 쓴소리를 내뱉으며 시선을 죽 옮긴다.
“그리 말하는 자네의 성적은… 어디 볼까.”
—178위, 실비아 헤루인 옥스턴 반즈.
—341위, 메이린 벨테인 폰 얀크츠네 아이율라.
“………….”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178위? 341위?
그러고 보니, 묘하게 조용하던 메이린과 요루아가 안 보인다. 한편 실비아는 여전히 제 이름을 못 찾았는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게시판을 바라보고 있다.
“흐왓?! 178… 흡.”
“네가 말하기 전에, 이미 확인했다.”
실비아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메이린이야 그렇다 쳐도, 실비아 너는 왜 그 모양이지.”
“내, 내가 뭐?!”
“메이린은 실습 평가에서 평균, 그리고 이론에서 선방해 저 순위일 터. 그런데 너는 실습 평가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을 터다.”
나는 일그러질 것 같은 안면근육을 애써,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대체 이론 시험을 얼마나 말아먹은 것이더냐.”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소중한 수련 시간까지 버려가면서 그리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는데….
“아, 뭐! 어쨌든 178위도 잘한 거잖아!”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나.”
“세계 최고의 명문 대학에서 어?! 이 순위면 어?! 그럭저럭 괜찮은 거지!”
순간적으로 실비아를 염동으로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내 마력이 시원찮아 간신히 참았다.
“남들은 너를 헤루인으로 알고 있지만, 네 실력은 루나사 등위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
“루나사면 이미 졸업 요건을 넘기고, 이 대학에서 조교수… 타 대학에서는 정교수를 할 수도 있는 실력이다.”
심지어 실비아는 논 게 아니다.
차라리 이론을 쳐다보지 않고 놀았다면 모를까, 수업도 듣고 나와 함께 공부도 했다. 그리고 이 시험은 1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다.
‘1학년은 전공을 선택하지 않고, 대부분 영역의 기초만 다루는 만큼 심화 과정은 배우지 않는다. 거기에 딱히 킬러 문항도 없었는데….’
이쯤 되면 불가해의 영역이 아닐까.
“이해할 수가 없군. 애초에 이론 시험이라는 건, 교재에 정답이 다 나와 있거늘. 정답을 보고도 답을 못 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나도 누누이 말했지만, 그건 류리크 씨 대가리가 슈퍼 대가리라 그런 거거든?!”
얘는 뭐가 잘났다고, 도리어 성을 내는가.
내가 조금 가만히 있었더니, 건방짐이 아주 정수리까지 기어오른다.
“흥! 재수 없… 악! 아악! 악! 애들 보잖아!”
“내 알 빠냐.”
나는 아주 지긋이 발등과 실비아의 정수리를 고루 짓이겼다.
“악! 으갸악! 꺄악! 미, 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 악!”
* * *
맥컬런은 기분이 좋았다.
“베르테 학과장님, 들으셨습니까?”
“오, 맥컬런 교수. 무슨 일인가요?”
“방금 성적 공시를 보고 왔는데… 류리크 아스트레이. 무려 학년 수석입니다!”
맥컬런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들떠서 목소리를 낸다. 다만 말을 듣고 있는 베르테 학과장은 꽤나 담담하게 반응한다.
“그거라면 나도 확인하긴 했어요. 홀홀홀.”
“역시 그의 재능은 특출납니다. 비바람의 구슬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조를 파악한 뒤, 파훼했을 때부터 느꼈지만… 그의 재능은 역사에 다시없을 재능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류리크에 관심을 갖고, 열광하는 이유.
—세상에 공개된 적 없는 마법으로 초견(初見)으로 파악하고, 마력 간섭으로 파훼했다.
물론 당시 선보였던 비바람의 구슬이 아주 난해한 수준의 마법은 아니지만,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그의 실력은 단순히 운이 아니었던 겁니다. 마법의 구조, 마력의 운용… 모든 측면에서 아주 훌륭합니다.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았으니, 그야말로 이론도 완벽하다는 말이지요.”
“뭐… 초견으로 마법의 구조를 파악한다는 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그렇지요. 성적만 보아도 류리크 아스트레이의 탁월함은 알 수 있겠어요.”
“그라면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마법계의 난제를 풀고,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맥컬런의 눈동자가 흥분에 젖고, 목소리에 열기가 감돈다. 그에 대해 베르테 학과장은 온화한 웃음으로 답한다.
“홀홀홀. 맥컬런 교수, 마치 로스월드 같아요.”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그의 재능보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달리 있지 않을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베르테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온화하나, 그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류리크 아스트레이. 그는 과연… 마법에 관심이 있는 걸까요?”
“그야 마법 학교를 왔으니, 마법에 대한 관심이라면….”
“홀홀홀. 맥컬런 교수. 우리가 말하는 관심은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
“그가 과연 아드리아에 갈 만큼, 마법에 관심이 있을까요?”
마법사들의 이상향(理想鄕), 세계수 아드리아.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 마법사로서 이 속세에 머무는 이상, 이 세 가지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본인이 바라건 바라지 않건, 주변의 환경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런 것에 염증을 느낀 이들은 아드리아로 떠난다. 속세를 등지고, 그저 순수하게 마학의 탐구를 위하여.
“뭐, 아드리아는 좀 먼 얘기라 쳐도… 그가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 있을까요?”
“………….”
그에 순간 맥컬런의 머릿속에, 류리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탁인데, 나중에 자네의 조교수로 뽑겠다는 말만은 안 했으면 좋겠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대학원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결국 본인이 대학원으로 진학하고, 이후에도 아드리아를 목표로 마법 연구를 할지는… 모르는 것이지요.”
그건 우리가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도 하고요. 홀홀홀. 베르테가 덧붙인다.
“일단은 그가 연구자… 아니, 대학원에 진학할 의향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 * *
—1등이라니, 류리크 아스트레이가 누구야?
—레베카 님이랑 사귄다던 그 인간 아냐?
—폐인이 돼서 마법은 못 쓴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레베카와 사귄 것보다, 학년 수석을 한 게 파급력이 큰 듯했다. 아직 내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 많아, 적잖은 학생들이 내 옆에서도 저런 소리를 했다.
물론 그쪽으로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내 머릿속엔 온통 정신방벽뿐이 없었으니까.
‘학생 중에, 정신방벽에 대해 뭔가를 얻어낼 수 있는 이가 없을까.’
그때였다.
“류리크 아스트레이.”
“맥컬런 교수.”
언제 지척까지 다가왔는지, 맥컬런이 흠흠 헛기침을 한다.
“들었네. 학년 수석을 달성했다면서?”
순간 겸양의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네.”
“축하하네. 이로써 화이트윙에 한 걸음 더 다가섰군그래.”
“고맙네.”
나는 그걸로 얘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맥컬런이 그대로 우물쭈물 앞에서 버텨 선다.
“…………?”
“………….”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음흠흠, 맥컬런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시간 괜찮다면, 차라도 한잔하겠나.”
“멘토링의 얘기인가?”
“그건 아니지만… 자네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뭐지.
갑자기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싶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찾는 맥컬런의 교수실은 여전했다.
내가 추천했던 향초의 냄새가 방안에 가득해, 묘하게 익숙했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약초를 달인 차라네. 자네가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내 뒷조사라도 하고 있나?”
“아니. 그건 아니고, 향초를 샀던 가게에서 그러더군. 자네가 향초와 함께 약초를 사서 차로 달여 마신다고.”
내가 거기 단골이긴 하고, 맥컬런도 내가 데려갔었으니… 뭐 말은 된다만.
‘음, 뭔가 찝찝하단 말이지.’
맥컬런은 내 맞은편에 앉으며 얘기를 꺼냈다.
“류리크. 네 주전 마법은 소환과 보조 맞지?”
“그렇다만.”
“2학년 때는 전공을 골라야 할 텐데, 그쪽을 살릴 생각인가?”
진로에 관한 얘기였나.
나는 차를 홀짝이며 답한다.
“글쎄. 지금 결정하기엔 이르다고 생각이 되어서 말이지.”
이 학교에서 최우선순위는 마법을 배우는 거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외부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수들과 어떤 형태의 관계를 맺느냐 또한 상당히 중요한 요소.
그러니 연말에 어떤 가문이 득세하고, 교내에선 어떤 교수가 정치적 우위에 서는지… 그것까지 면밀히 고려한 뒤에 선택할 생각이다.
‘내 행보가, 이후 어떤 변수를 만들어낼지 모르니까… 선택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뤄야겠지.’
맥컬런은 가볍게 턱을 쓸며 말한다.
“흐음… 그러면 뭐 관심이 있는 분야는 없나? 좀 더 배우고 싶다든가.”
“혹시 대학원생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인가.”
“저, 전혀 그렇지 않네. 그저 우수한 학생의 성취를 돕는 것이 교육자로서 올바른 도리가 아니겠나… 하는 것이지.”
혹시나 하며 던져봤는데, 말 더듬는 걸 보니 정곡을 찌른 듯하다.
‘과연… 묘하게 내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벌써부터 나를 대학원생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이었던 건가.’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맥컬런. 본인은 대학원생이 될 생각이 없다네.”
“………….”
“학교에 다니는 동안, 열심히 마법을 배우기는 하겠다만…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아드리아에 가서 연구(硏究)까지 할 생각은 없다네.”
이런 상황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후에 어떻게 일이 벌어질지도 알았다.
‘괜한 기대감을 남겼다간, 나중에 저 혼자 지독한 배신감을 느낄 터… 이런 건 시작부터 기대감의 싹을 잘라야지.’
한편, 여지를 주지 않는 내 거절에 맥컬런은 조금 당황한 눈으로 말한다.
“너무 정곡을 찔러서 겸연쩍긴 한데… 류리크. 나는 억지로 자네를 대학원생으로 만들려는 게 아냐. 다만 자네의 성취가 뛰어나니 만큼, 조금 더 도와주고 싶은 것이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에게, 뭐라도 더 도움을 주고 싶은 스승의 마음이랄까. 맥컬런이 덧붙인다.
“그리고 내가 뭐 대단한 걸 해주겠다는 건 아닐세. 다만 전공 선택에 앞서, 약간의 체험을 하게 해주겠다는 거지.”
“체험?”
“이미 길을 정한 학생들도 있지만, 지금 자네처럼 아직 전공을 고르지 않은 학생들도 적지 않아.”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마법은 워낙 계통, 계열이 방대하니 주전 마법을 고르는 게 쉽지 않다. 그렇기에 다양한 마법을 체험하듯 가르치는 맥컬런의 ‘기초 마법학’이 있는 것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오웰름의 마석이 추천했던 대로 따르지만… 사실 적성과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마법은 또 다른 법이지.”
“………….”
“특별히 관심 있는 분야가 있다면, 그쪽 학과의 교수들을 소개해줌세. 커리큘럼에 관해 설명을 듣거나, 상담을 해보거나… 그런 거지.”
뭐, 딱히 나쁜 소리는 아니다.
다만. 이것이 아무리 호의로 포장되었다 한들, 덥석 물면 저쪽은 또 멋대로 ‘은’이라 여기며 차후 배신감을 느끼기 마련.
인간의 감정이란 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작동하니, 나는 적당히 얼버무린다.
“고맙네, 내 깊게 생각해보고 필요하면 자네에게 부탁을….”
“…………?”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다.
“류리크, 갑자기 왜 그러나?”
내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책감이 밀려들 만큼 가까운 곳에 정답이 있었다.
교수.
샤프란의 교수 중엔, 정신방벽과 아주 밀접한, 아니 애초에 그것에 특화된 교수가 있었다.
“류리크? 자네 괜찮나?”
“괜찮네. 잠시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전(前) 이단심문관이자, 그 안에서도 유령사냥꾼이라 불리던 존재.
‘오스트람….’
—오스트람 엘베드 폰 블랙 하트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