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90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90화
090
극야(極夜).
북반구, 남반구에서도 극지 쪽으로 가면 볼 수 있는 기상 현상으로… 이 기간에는 낮에도 해가 뜨지 않고 오롯이 밤만이 계속된다.
본래에는 백야와 함께 지구에서도 매년 벌어지는 현상이다만….
‘이 세계관에서는 일정한 주기 없이 특정한 시기에 벌어지지.’
과학적 근거가 사라지고, 판타지스러운 설정이 가미된 것이다. 본래에는 극야와 백야는 북반구, 남반구에서 번갈아 발생하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극야는 북부에서만, 백야는 남부에서만 발생한다.
남부에서는 백야를 태양신의 축복 기간이라 하여,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를 기념한 축제가 벌인다.
반대로 같은 시기, 극야가 발생하는 북부에서는….
‘…영원의 벽으로, 죽은 자들이 몰려오지.’
다행히 이번의 극야는 그다지 대단할 게 없다.
저번과 비교해 주기도 짧거니와, 이 시기는 ‘플레이어가 개입하기 어려운 초반부’이니만큼. 방치해도 NPC들이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난도가 주어지니까.
다만,
“그게… 정말입니까?”
이런 ‘설정’에 대해 알 리 없는 가엾은 NPC에게는 재앙의 예고로밖에 들리지 않을 터.
“이전의 극야가 10여 년 전이었던 걸 감안하자면, 꽤 빠른 시기이네만… 여튼 그러하네. 빠르면 올해, 늦어도 3년 안으로 극야가 찾아온다.”
트리스탄.
그 이름과 함께 주어진 백은무공 대훈장, 알테온(Altheon)이 있는 한, 그는 이 사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랜슬롯이 칼라모르 기사 대학의 총장으로 기사(騎士) 계급의 명예를 지키듯.
베디비어가 로마노프 제국의 황실기사단장으로 제국을 수호하듯.
트리스탄은 한 명의 파수꾼으로서, 영원의 벽을 사수해야만 한다… 는 것인데.
“극야… 당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차지하더라도.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는 겁니까.”
예상보다 트리스탄의 반응은 싸늘했다.
“영원의 벽을 수호하는 것은, 고래부터 ‘트리스탄’에게 주어진 사명. 극야를 무사히 넘기는 것 역시, 새로울 것 없는 일입니다.”
과연.
그렇게 나온다는 것인가.
“죄수들은 다시 데려가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오른팔 역시 받아 가겠어요.”
“………….”
“류오넬의 아들이라고 해서, 제가 봐줄 거라 여겼다면 오산입니다.”
트리스탄의 눈빛은 이미 많은 것을 각오했다는 결심이 드러나 있다.
그는 정말로, 내 팔을 벨 셈이리라.
“당신 같은 제2의, 제3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도록… 영원의 벽을 지키기 위해, 본보기로서라도 당신의 팔을 베겠습니다.”
“………….”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하다.
외팔은 미관상 좋지 않을뿐더러, 상당한 전력 손실로 이어지니까.
—탁.
나는 가볍게 테이블을 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의 뼈아픈 치부를 찔렀다.
“10년 전의 극야 때, 400년 만에 장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지.”
오르덴 힐 공방전.
기나긴 장벽에 위치한 20여 개의 요새 중 하나, 오르덴 힐. 이전의 극야 때, 사자(死者)화된 거인족 무리가 쳐들어와 함락된 바 있다.
“당시 본인의 아버지 류오넬 각하와 자네가 분전하여 오르덴 힐을 수복하고, 극야를 이겨냈다지만… 그때 분명, 장벽은 함락되었다.”
줄곧 평정을 유지하던 트리스탄의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감히 아스트레이의 망나니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분해 미칠 노릇이겠지.
“그런 마당에 파수꾼의 수는 계속 줄고 있지. 10년 전만 해도 전쟁 노예와 이단자가 꽤 있었다만… 그것도 끝나버렸으니 말이야.”
전쟁 노예뿐 아니라, 노예제도 자체가 폐지되었다. 거기에 이단자의 수가 극도로 줄었으며, 마녀들 역시 조용히 숨어 사는 시대다.
당연 북부로 보내지는 중범죄자들의 수가 전체적으로 줄 수밖에 없다.
“류리크 아스트레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다가올 극야에 장벽이 함락될 거란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설마. 본인은 다만 영원의 벽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네.”
“그렇다면 노예를 빼돌리는 방해나 그만두는 게 어떤가요. 류리크, 당신이 이런 짓만 하지 않는다면 영원의 벽은 충분히 지킬 수 있습니다!”
약간의 분노.
미세하게 흐트러진 호흡.
‘걸렸군.’
정확히 원하는 말을 들은 나는, 이전과 다르게 위엄의 기세를 흩뿌린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트리스탄을 노려보며 물었다.
“과연. 정말. 진정으로… 한 치의 거짓 없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나?”
내 몸에서 발하는 위엄A의 기세가, 순간적으로나마 트리스탄의 동요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베디비어가 은퇴를 앞두고 있다. 황제 폐하께선 재상에게 국정의 대부분을 일임한 채 칩거하셨지.”
“그건….”
나는 천천히 트리스탄에게 다가섰다.
주도권은 이미 넘어왔다. 남은 것은 섬세하게 공을 들여, 마치 예술작품을 조각하듯… 트리스탄이라는 얼음 조각을 써먹기 좋게 깎아내는 것뿐.
다시금 떨리는 손끝을 보며, 나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아무리 정치에 둔한 자네라도, 황위계승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알 터다.”
“그게 영원의 벽과 무슨 상관이…!”
“그리고 이미 말했듯, 다음번의 극야는 빠르면 올해, 늦어도 3년 안에 벌어진다.”
“…………!”
이게 재미있는 포인트다.
본래에는 저들끼리 치고받으며 끝날 황위계승전이고, 방치해도 알아서 이겨내는 극야이다.
하지만,
재앙(災殃)이라는 것은, 다가오기 직전이 가장 두려운 법이기에.
“아주 우연하게 황위계승전이 벌어졌을 때, 두 황자들이 군수품과 식량, 인력을 모조리 징발하고, 북부에 대한 지원을 멈췄을 때. 극야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
“두 황자가 화해라도 하고, 북부로 원군을 보내줄까? 아니면 무기 정도는 보내야 한다며, 저들의 군수품을 내놓을까?”
“………….”
트리스탄은 바보가 아니다.
정치를 혐오하며, 정쟁에 약간 둔할 뿐이지… 대략적인 판세 정도는 읽을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흔들릴 수밖에 없으리라.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되었나.’
나는 이미 최악의 사태를 떠올린 듯, 떨리는 트리스탄의 손끝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황위계승전이다. 아버지는, 영원의 벽으로 군을 보낼 수 없다.”
샤르미넨은 사프란의 총장직을 맡고 있다 뿐이지, 이렇다 할 세력이 없으니 논외.
하지만 류오넬은 입장이 다르다.
그는 제국의 3황자이면서 제국의 대장군이자, 북부의 심장이라 불리는 할카데르를 주도로 둔 대영주이다.
심지어 북부의 유력 가문들은 모두 류오넬에게 굳건한 충성을 보내고 있다.
‘물론 아스트레이가 무너지면 영원의 벽도 흔들리니만큼, 황태자도, 2황자도 류오넬을 건드리지 않는다만….’
트리스탄은 물론, 류오넬의 입장에서도 ‘설마 북부를 건드릴까.’ 하며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없는 얘기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불안감. 나는 그 감정을 이용해 상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진다.
실로 아름다운 거래의 방정식이라 볼 수 있겠다.
“나는 진심으로 영원의 벽을 걱정하고 있네. 아마 일전에 류미엘도 이 얘기로 자네와 상담을 했을 테야.”
“………….”
“아마 그때 이런 대화를 나눴을 걸세. 황위계승전의 여파로, 북부로 보내지는 군수품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그러니 아스트레이의 주도 아래 직접 광산을 운용하고, 대장간을 설립해 만일에 대비하자고 말일세.”
“………….”
“공방처럼 대단한 규모는 아닐 테야. 보유한 광산도, 이곳 화이트밴 남작령의 철광산 하나뿐이고, 장인을 모으기도 쉽지 않으니까.”
아마 지금 할데카르에 있는 것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대장장이 몇 있는 자그마한 대장간일 테지. 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뭐죠? 파수꾼으로 보내진 이들이 광산에서 일하면, 더 좋은 철광석이 나오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설마, 그럴 리가.”
“그러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참 먼 길을 돌아왔구나, 나는 겨우내 목구멍에 맴돌던 본제를 꺼내 들 수 있었다.
‘고작해야 파업 하나 다스리자고 북부까지 발걸음한 게 아니다. 겨우 광산에 공짜 인력을 부려먹자고 꾸민 설계가 아니다.’
더 큰 그림을.
더 원대한 계획을.
“나는 아이언포지 공방을 북부에 유치시킬 생각이네.”
* * *
반쯤 홀린 듯하던, 트리스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아이언… 포지를 말입니까?”
“북부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호륜 산맥의 잠룡이 준동을 시작한 지 꽤 오래되었지. 그 때문에 지속적인 지반 침식이 일어나면서 아이언포지 공방의 용광로가 상당히 손상되었고 말일세.”
제국 최대의 군수공방 아이언포지.
특히 이들이 제작하는 무구의 스펙트럼이 꽤나 넓은 편이다. 평범한 군졸들이 써먹는 양산품은 물론 근위대와 장교들에게 지급되는 최고급품까지 만들어내니까.
그런 아이언포지 공방의 완전 철수까지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조만간 본격적으로 이전 장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터다.
“당연 아이언포지는 이전을 해야만 할 테고, 나는 그를 북부에 유치시키고자 하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더 들을 것도 없는 허황된 소리군요.”
이제껏 유지했던 주도권이 사라지듯, 트리스탄이 고개를 내젓는다. 하지만 이 정도에 굴할 내가 아니다.
“글쎄, 미래의 일은 모르는 법이라 하지 않던가.”
“아이언 포지 같은 거대 공방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광물 공급처가 있어야 합니다. 수입에 의존하지 않는, 자체 광산을 몇 개나 소유해야 할 테죠.”
맞다.
안정적인 광물 공급처가, 그것도 멀지 않은 지역에 있어야 한다. 아이언포지 같은 대형 공방을 굴리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광물이 필요한데, 그걸 매번 텔레포트 같은 값비싼 수단으로 운송할 수는 없으니까.
“아스트레이가 소유한 광산은 이곳, 화이트밴 남작령의 것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북부 전체를 통틀어도 개발된 광산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
아직 북부인들은, 아니 상련의 인간들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터다.
—북부에 상당한 규모의 광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러면 혹시 이런 소문을 들어보았는가. 최근 아이율라의 어느 애송이가 북부에서 상회를 연다는 것 말일세.”
“그런 얘기를 들어보긴 했습니다만, 그게 지금 이것과 무슨 상관이죠?”
“재미난 사실을 하나 알려주지. 최근 그 애송이는 교역거점 세우기 위해 북부 전역에 걸쳐 수많은 땅을 매입했네. 그리고 그 땅에서, 아주 우연찮게 광맥들이 발견될 예정이지.”
트리스탄이 얼굴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누가 그런 헛소리를 믿을….”
“내가 면피를 위해, 그런 거짓을 입에 담겠는가.”
“당신은 충분히 그럴 종류의 인간입니다만.”
“허면 이렇게 하지. 만일 본인이 매입한 토지에서 광맥이 나오지 않는다면, 결국 본인의 말이 거짓이라고 밝혀진다면… 언제라도 내 목을 베어도 좋네.”
자네라면 내가 어디에 있든, 어디에 숨든, 나를 죽일 수 있을 테니 말일세. 내가 죽음마저 각오한 것마냥 단호하게 나가자, 트리스탄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을 잇는다.
“그런고로 아스트레이는 수많은 광산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고, 아이언포지를 유치하기 위한 기본조건은 달성한 셈이 되지.”
“………….”
“다만 거기서 일할 광부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지. 그래서 자네의 죄수들이 꼭 필요한 것이네.”
“………….”
트리스탄의 반응은 다소 미적지근하다.
광맥의 존재부터 그는 반신반의하고 있을 테고, 거기에 내가 ‘죄수’라는 난제를 던진 셈이니까.
그는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류리크, 저는 광업에 대해서 그리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무작정 밀어 넣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죠.”
역시 그 부분을 지적하는가.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지금은 잠시 다른 곳에 있다만, 이곳 광산촌의 인간들은 모두 다년간의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이다. 나는 이들을 저마다의 광산에 보내 관리 감독으로 일하게 할 요량이다.”
그 때문에 일부러 사기꾼 플렉스의 일을 해결하면서, 그들의 면전에 대고 사정을 죽 읊는 연기를 하면서 호감도를 얻었다.
‘거기에 마을 사람들의 장부가 내게 있으니, 제안을 거절할 수조차 없지.’
광산촌의 사기의 피해자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은 내 목적을 위해서 조금 더 고생해주어야 한다.
“…그런가요.”
“믿음이 가질 않는가.”
“네.”
“솔직하군.”
하기사 나라도 쉽게 믿지 못할 거다. 목숨을 내놓겠다 말은 했다지만, 목만 건다고 그게 확실한 보증수표가 되어주는 것은 아니니까.
“허면, 내 자네의 불신에 작은 믿음을 붙여 보지.”
나는 수정 구슬을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재생시켰다.
—류리크, 너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가?
—대체 일이 틀어졌을 경우, 어떻게 될지… 으으 상상조차 싫군.
—걱정하지 마라. 내 계획은 완벽하니까.
그 안에는 카엘과 기사들을 데리고, 죄인을 몰고 온 류미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
트리스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류리크 아스트레이, 설마…!”
“그래. 이건 결코 나의 독단이거나, 나 혼자 벌인 멍청한 짓거리가 아니다.”
류미엘. 미안.
나는 짧은 사죄를 마음속에 새기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아스트레이의 결정이다.”
“………….”
이건 결코 류리크라는 망나니 혼자 벌이는 사고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아스트레이라는 가문의 주도 아래 차근차근 진행 중인 계획이다.
반쯤은 진실인 그것을, 넌지시 트리스탄에게 밝혔다.
트리스탄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 침묵에 잠긴다. 그러다 천천히, 어딘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그가 말한다.
“그렇군요… 류오넬이 부탁했었지요. 류미엘을 잘 부탁한다고. 이제 그 아이의 결정이, 아스트레이의 결정이 될 것이라고.”
사실은 서류 업무가 지독히도 싫어, 일찌감치 류미엘에게 대리를 맡긴 뒤 일선에서 물러선 것이고.
괜히 자기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에서 ‘류미엘의 결정’ 같은 소리를 운운한 것이다만….
“당신이 류미엘 당주 대리와 함께라는 건, 의외였지만… 그렇네요. 영상으로까지 확인한 이상, 믿을 수밖에 없군요.”
어쨌거나, 우리의 순진한 트리스탄은 그 이면에 잠들어 있는 말을 간파하지 못한다.
그리고,
“좋습니다. 당신의 말을… 믿어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