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11)
“시험은 여기까지다.”
우리 사이에 끼어든 것은 아이리스였다.
힘 조절은 완벽하게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던 리제의 말처럼, 리제가 든 쌍단검은 아이리스에게 닿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춰 있었다.
반대로 내 손에 들린 피 묻은 검은, 아이리스에게 검신을 붙잡힌 채로 파들파들 떨려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손에서 힘을 빼자 검신의 진동이 뚝 멎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나와 리제 사이에 끼어들어 대련을 중단시킨 아이리스는, 둘 모두가 손에서 힘을 뺀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검을 놓아주었다.
칼 끝이 힘없이 바닥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사용한다는 기술이 서리 폭풍 난격이었나?”
“당연하지. 딱 하나만 쓴다고 했잖아. 그러면 최고로 화끈하게 가야지. 달리 뭐가 있겠어?”
아, 얼음 쓰면서 화끈하다는 표현은 좀 그런가? 라는 한 마디가 덧붙여졌다.
“이건 어디까지나 입단 시험에 불과하다고 분명 말했을텐데. 이번에야 네가 적당히 봐줬으니 아무런 상처 없이 넘어갔다만ㅡ”
“적당히 봐준 거 아닌데?”
리제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할 말이 무척 많다는 듯한 미소였다. 나는 슬쩍 그 눈을 피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리제?”
“말 그대로야. 난 봐주는 거라곤 조금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진심이었어. 그걸 신입이 자기 능력껏 전부 다 받아친거라고. 그렇지, 신입?”
그 폭탄 선언이나 다름없는 말에 아이리스는 물론이고 에리카마저도 나를 쳐다보았다. 각양각색의 눈동자가 셋이나 내쪽을 향하자, 얼굴에 구멍이 뚫릴 것 같은 부담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힘 조절을 안 한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잊은 건가?”
“못 막는다 싶으면 언제든지 멈출 수 있었어. 아이리스 네가 갑자기 끼어든거에도 반응해서 멈췄는데, 신입이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구분 못했을까봐?”
아이리스의 걱정을 간단하게 일축한 리제가 예의 그 싱글싱글한 미소를 띄우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팔을 척 얹더니 힘을 주어 아래로 끌어내렸다.
우리 사이에는 키 차이가 제법 있었기에, 까치발을 들고서도 내가 허리를 조금 숙여야 눈높이가 맞아떨어지는 탓이었다. 리제는 반대쪽 손가락을 세워 검지로 내 뺨을 콕콕 찔러댔다.
“이야, 진짜 진심으로 놀랐어, 신입. 설마 그 상황에서 반격까지 시도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거든. 시합 전에 다 받아치면 어쩔거냐고 말했던 게 빈말이 아니었네?”
“기사단장으로서의 위엄과 체면은요?”
“이젠 딱히 안 중요해졌어. 우리 신입이 이렇게 잠재력 넘치는 복덩이라는게 확인됐는데, 그깟 대련 한 번 못이긴게 중요할까봐?”
몸이 더욱 밀착했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거의 머리 크기에 가까운 가슴이 내 팔에 마구 문질러졌다. 정작 그걸 밀어붙이는 본인은 스스로의 자세에 대한 자각이 하나도 없어보였지만.
“그리고 한가지 더. 우리 신입이 꼭 알아야 할 아주아주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어. 이건 무조건 들어야 되는거야.”
리제의 목소리가 확 가라앉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자 나까지 덩달아 진지해졌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말이길래 이렇게까지 무게를 잡는거지?
“너, 나한테 말 놔라.”
“……네?”
순간 내가 잘못 들은줄로만 알았다.
갑자기 목소리랑 표정이 진지하게 변하길래 뭐 얼마나 중요한 걸 말하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말을 놓으라니, 정말로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나한테 존댓말 쓸 필요 없으니까 말 놓으라고. 하는 너도 불편하고 듣는 나도 불편하니까, 그냥 격식 같은거 다 때려치고 편하게 말하라는 얘기야. 우리 신입이 무진장 마음에 들어서 해주는 특별 서비스인데, 어때? 마음에 들어?”
“어…….”
이건 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게임에서 나오던 원본 NPC랑은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이리스와 에리카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내 눈빛에 담긴 의도를 읽었는지, 에리카는 달관한 것 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냥 받아들이세요. 어차피 지금 거절해봤자 알았다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 달라붙을겁니다. 언니가 저렇게 보여도 고집이 은근 세거든요.”
“저렇게 보여도? 야, 그건 또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겠나요, 언니. 본인이 더 잘 아실텐데요.”
리제는 에리카를 향해 잠시 으르렁대더니, 다시 목소리를 착 내리깔면서 은근하게 나와 눈을 마주쳤다.
“쟤는 무시하고. 아무튼, 방금 들었지, 신입? 이제 나한테 말 놔도 되고, 에리카한테도 말 놔도 돼. 어차피 아이리스랑은 평범하게 대화하잖아? 그거랑 똑같은거야. 쟤랑 아이리스랑 동갑이니까 딱히 문제 될 것도 없거든. 자자, 빨리 리제라고 말해봐. 응?”
여기서 제일 연장자였나. 전혀 그렇게 안보였는데.
날 바라보는 시선에 잔뜩 묻어나는 초롱초롱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리…… 제?”
“그래, 그래. 잘하네. 앞으로 존댓말 같은거 쓰지 말고, 그냥 편하게 불러. 리제 기사단장님이건, 리제 기사단장이건, 리제 누님이건, 리제 누나건 다 필요없어. 그냥 리제 하나면 충분해. 알았지?”
리제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활짝 웃으며 내게 매달렸다.
겉모습만 보면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것처럼 차갑게 생긴 사람이 제일 활기차고 친화력 넘치는 성격이니, 그 차이에서 오는 위화감에 도저히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입단 시험은 합격입니…… 합격이야?”
별 생각없이 존댓말을 쓰려다가, 내게 대롱대롱 매달린 리제가 도끼눈을 뜬 채로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자 급히 호칭을 바꿨다. 리제는 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엉겨붙었다.
“난 당연히 합격! 여기서 우리 신입을 불합격시키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에리카 너는? 아니다, 너도 어차피 합격이라고 말할거지? 그럼 상관없겠네? 은빛 여명 기사단에 온 걸 환영해, 신입!”
“……언니 멋대로 제 생각을 단정짓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이번만큼은 사실이니 부정하진 못 하겠네요. 저도 리제 언니랑 같은 생각입니다. 은빛 여명 기사단에 들어온 걸 환영해요, 신입 씨.”
리제와 에리카에게서 각각 합격 통지가 떨어지자, 아이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보여준 것들이 있어서 그런지 믿음이 제법 깊어보이는 얼굴이었다.
“입단을 환영한다, 신입. 편제는 차차 생각해보도록 하고, 일단은 푹 쉬어둬라. 소개는 클라우디아가 돌아온 뒤에 정식으로 하도록 하지.”
스태미너가 고갈되지 않는 이상에야 딱히 피로감을 느낄 일이 없었으니 이대로 쉬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지만, 저런 배려를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었던지라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카, 신입에게 숙소를 안내해주도록. 위치는…… 기사단장들의 숙소 바로 아래층이면 되겠지. 어느 방에 배정할지는 네 자율에 맡기겠다.”
“알겠습니다, 아이리스. 그러면 가시죠, 신입 씨. 숙소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신입과 에리카의 모습이 성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리제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리스, 저런 엄청난 애를 어디서 찾은거야? 너도 봤지? 내 공격 다 튕겨내는거? 도저히 신입이라고는 못 믿을 솜씨던데?”
“나도 모른다.”
“에이, 거짓말하지 말고.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어디 몰래 숨겨놨던 애인이라거나ㅡ 잠깐, 잠깐! 난 농담도 못해?!”
차가운 눈으로 주먹을 움켜쥐는 아이리스를 본 리제가 방금은 농담이었다며 급히 말을 주워삼켰다. 아이리스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주먹에서 힘을 뺐다.
“알았으면 진작 말해줬겠지. 정말로 모른다. 그 놈의 명령으로 감옥을 시찰하러 갔더니 거기 있던 사람들은 마물에게 거의 다 죽어버린 뒤였고, 저 신입 하나만 살아남아 있었으니까. 게다가 정작 살아남은 본인은 마녀의 저주에 걸려서 기억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대체 뭘 알수 있겠나?”
“마물 한 마리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그거 토벌했어야 되는거 아니야?”
“그럴 필요 없다. 저 녀석이 죽였으니.”
“죽여? 저 신입이? 그 마물을?”
“그래.”
“……어떻게?”
아이리스는 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해주었다.
감옥 전체를 돌아보며 생존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오다가 정문 근처에서 그 마물과 혼자 싸우고 있는 신입을 발견한 일. 결국 그 신입이 혼자 토벌에 성공한 일.
마치 그 마물이 어떻게 공격할지 모조리 꿰고 있다는 듯, 모든 공격을 조잡하기 짝이 없는 강철 검으로 가뿐하게 받아치던 일까지도 모두.
처음에는 도와주려고 했는데,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가 마지막 공격에 갑옷을 날려먹었다는 사담도 덧붙였다.
입을 꾹 다물고 아이리스의 설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한 리제가 약간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입 걔, 버려진 자라고 했었지?”
“자기 입으로 그러더군. 아마 맞을거다. 정 믿지 못하겠다면 능력 확인 구슬을 사용해도 되는거고.”
“아니, 신입을 못 믿는 건 아니야. 못 믿는 건 아닌데…… 저주를 받았다며. 그것도 어중이 떠중이가 건 게 아니라 마녀의 저주. 그러면 신체 능력도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을거고, 마법도 못 쓸거고, 마나도 못 다룬다는 소리잖아. 근데 대체 어떻게 그런 짓이 가능한거야?”
리제는 입단 시험을 치를 때 그 신입이 자신의 모든 공격을 정확히 간파하고 튕겨냈던 것을 떠올렸다. 그건 단순한 요행이 아니라, 정말로 본인의 실력이 출중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힘에서 밀리는 기색은 있었어도 기술에서 밀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몇 연격을 퍼붓든, 얼마나 빠르게 공격하든 그걸 미리 파악하고 읽어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었다.
“…….”
서로가 생각에 잠기느라 잠시 대화가 중단되자, 아이리스는 신입의 검을 막아세웠던 쪽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상처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아주 옅은 상흔이었지만, 이런 흔적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
둘 사이에 있는 힘과 기술의 격차를 고려하면 이런 상처 따위는 생겨선 안 됐다. 그냥 간단하게 검을 잡아채고, 거기서 끝나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거…… 신입 쪽이지?”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이었으나, 뜻은 충분히 통했다. 아이리스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리제의 노림수였던 카운터 패링을 신입이 순간적으로 반응하고선 공격의 궤적을 비틀어버린 것이다. 손바닥이 살짝 베인 이유도 그래서였다.
공격이 들어오는, 1초도 채 되지 않을 그 짧은 순간에 신입의 공격 자세가 휘청인 것을 보고 카운터 패링을 준비한 리제.
리제의 공격을 모조리 튕겨내고 역으로 반격을 하려던 와중에 들어오는 카운터 패링에 반응해 검의 궤적을 비틀어버린 신입.
그 사이에 끼어들고선 검의 궤적이 뒤틀린 것을 확인하자마자 본인도 자세를 바꾼 아이리스. 셋 모두 기량은 엇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 셋 모두 기량이 엇비슷한게 문제였다.
두 명은 검을 잡아온 시간만 10년이 넘어가는 베테랑 기사단장들이고, 다른 한 명은 마녀의 저주에 걸린 인간이다. 기량이 엇비슷해선 안 되는게 당연했다.
“그 전까지는 감탄 정도였는데, 마지막은 정말 진심으로 놀랐어. 너도 당연히 신입이 반응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끼어든거잖아?”
“……부정은 하지 않겠다.”
만약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나였다면, 신입이랑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아이리스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몇 번을 생각해도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 무지막지한 연격을 모조리 튕겨내고, 그런 와중에도 빈틈을 찾아 공격을 시도하고, 공격이 들어가기 직전에 예상치 못하게 들어오는 적의 반격 태세를 읽어 궤도를 바꾸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마녀의 저주를 받아 신체 능력이 대폭 하락한 몸뚱아리로, 리제와의 첫 대면에서 이루어내야 한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그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신입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술집 무용담으로 털어놔도 안 믿을 얘기였다.
대체 원래 뭐하던 인간인지, 그 안에 내제된 재능이 어느정도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이리스.”
“왜 그러나?”
“너, 신입이랑 뭐 특별한 관계라거나 그런건 아니지?”
“그 특별한 관계라는 게 이성적인 끌림을 얘기하는거라면 아니다. 감옥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에 불과하니까. 그런 걸 묻는 이유라도 있나?”
“이유? 있지. 네가 먼저 찜해놓은 거 아니면 내가 차지하려고.”
리제가 입술을 할짝였다.
그 신입은 여러가지 의미로 마음에 들었다. 외모도 상당히 준수하고, 몸도 좋고, 무엇보다 리제의 성적 취향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조건까지 갖추고 있었다.
실력과 재능이 출중한 남자를 새싹 무렵에 발견하고, 그걸 무럭무럭 키워서 나중에 리제 본인이 역으로 잡아먹히는 것. 그게 바로 리제의 성적 취향이었다.
본인도 스스로의 성벽이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취향이라는 아주 걸 잘 알았고, 현실로 이루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언제나 마음속 이상향으로 그려놓기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 본인의 이상향을 그대로 빼다 박은듯한 남자가 바로 눈앞까지 성큼 다가와 있는 것이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게다가 그 신입이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는 점도 플러스 요소였다. 리제가 원하는 건 듬직하고 재능있지만 그걸 개화하지 못한 남자였지, 땅딸막한 꼬맹이나 애새끼가 아니었으므로.
“마음대로 해라. 신경 쓰지 않을테니.”
“진짜지? 나중에 딴말 하기 없기다? 내가 낼름 먹어버린 다음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아이리스 네가 제일 처음 만났다면서 숟가락 얹으려고 하고 그런 짓은 안 하는거지?”
“나를 대체 뭘로 보는건가?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아이리스에게서 허가 비스무리한 걸 받아낸 리제가 신이 나서 뛰쳐나가기 직전에, 무뚝뚝한 목소리가 리제를 멈춰세웠다.
“아, 질문할 사항은 한 가지 있군.”
“엉? 그게 뭔데?”
그 아이리스가 먼저 개인적인 질문을 한다? 이건 무척이나 희귀한 상황이었다. 다리가 저절로 멈췄다. 리제가 귀를 쫑긋 세웠다.
“너는 지금껏 남자 손도 잡아본 적 없는 주제에,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은 알고 있나?”
“뭐 이년아?”
리제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 저 ‘남자 손도 잡아본 적 없는’ 여자에는 자기도 해당되는 주제에 저런 말을 한다고?
오